고사성어
졸업 후 37년 만에 만나는 중학교 친구들과 등산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학창시절 얘기를 하게 되었다.
“고사성어를 쓰라고 했던 국어시험 생각나?”
“그래. 수업시간에 열 개를 알려주고 시험 볼 때 세 개를 쓰는 거였잖아.”
“그런데 O반의 OOO이가 「낙장불입」이라고 썼다가 선생님께 혼났었는데.”
“말도 마. 우리 반의 OOO이는 「일사후퇴」라고 썼다가 장난쳤다고 얼마나 많이 맞았는데.”
세대 간의 소통이 심하게 어려운 요즘 그보다 더 재미나는 사자성어가 얼마든지 있다. 「만사형통」은 ‘모든 일은 형을 통해서 해야 된다’,「유비무환」은 ‘비오는 날은 환자도 없다’, 「삼고초려」는 ‘쓰리고를 한 다음에는 초단을 조심하라’,「남존여비」는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여자는 비참하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군부독재의 정점이었던 6공화국 시절에 주걱턱이 일품이었던 영부인이 심심치 않게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무렵에는「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이순자가 심심하면 전두환도 심심하다’ 혹은 ‘이순자가 심통나면 전두환도 심통난다’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나중에 백담사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었다. 언젠가 강원도 여행 중 백담사 입구에서 커다란 입간판을 보게 되었는데 ‘백담사 순두부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순두부가 무엇을 줄인 말인지 알아?”
“‘순수한 두부’다 뭐 그런 거 아닐까?”
“순진하기는. 두부가 순수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그게 아니라, ‘순자와 두환이는 부부다’의 준말이야. 왜 기억 안나? 두 사람이 전에 여기 잠깐 살았잖아.”
몇 년 전, 두 사람의 아들이 결혼을 하여 당시 30억 원 한다는 강남의 신축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는 보도가 있자, 다시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아버지가 전씨면 아들도 전씨다’라는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그럴 귀가 없는 사람도 다 알아듣는다.
수원의 어느 성당에 강의를 갔다가, 근처에 내 대자가 살고 있는데 대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 제대 후 안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을 했었는데, 지난여름 호주에서 있었던 세계청년대회에 한국 참가자대표로 참여하려다 공항에 나가서야 자신이 출국금지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검찰에 기소되어 요즘 어려움 중에 있다. 25년 만에 만난 대자가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고무시켰다. 대부대자간에도 「부전자전」이 되는가 보다.
25년 만에 단식장에서 만난 아들
25년 전, 나는 성당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신자수가 많은 큰 성당이었기에 신영세자도 많아서, 세례식이 있을 때면 정신이 없었다. 서류준비도 만만치 않은데 경우에 따라서 대부모를 맺어주는 일까지 해야 했다. 대개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맺거나 인도해 준 사람이 대부모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세례식 직전까지 대부모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런 경우 교리를 맡은 분께서 도와주기도 한다. 그날도 그랬다.
유아세례를 받는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전교수녀가 맺어준 대부는 일흔두 살 노인이었다. 영적인 아버지이기에 나이가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어쩌면 평생 인연을 맺고 신앙생활 전반에 관한 교류를 해야 할 대부로서 나이가 너무 많다고 여겨졌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상대적으로 젊은 내가 대부를 자청했다. 살아오면서 스스로의 삶도 부끄러운데 다른 사람의 영적인 아버지가 된다는 일이 무겁게 여겨져서, 대부를 거의 서지 않았다. 몇 차례 섰던 것도 대부분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스스로 자청한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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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정식 |
그렇게 만난 대자가 이정기 루치오인데, 25년 만에 우리가 다시 만난 곳이 그의 단식장이었다. 사법부의 1심판결 내용이 말도 안 되는 것인데도 언론에서는 무관심으로 대응하기에, 그런 사실을 몸으로 알리기 위해 계획된 릴레이단식의 두 번째를 그가 맡아 일주일간의 단식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단식에 대한 그의 소견이다.
“1심선고가 있은 뒤, 언론을 통해 판결내용을 접한 분들 중 재판부에서 선처를 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혹, 재판부에서 이런 것들을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판결내용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형량 때문인지 많은 분들이 이번 판결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 인지를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알려야겠다고 판단하고 단식을 결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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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정식(자동셔터) |
25년 만에 만난 우리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또 25년이었다. 그런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왔던 사람들처럼 친근했던 것은 사회의식과 복음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었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고 싶고, 우리 삶의 모범이신 스승 예수께서도 그 길을 갔다고 하는 기쁜소식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열망이 우리를 친 부자처럼 묶어주었다.
이 길은 때로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는 고난의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분이신 스승 예수를 따라가는 길은 고난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세요. 내가 편히 쉬게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쉼을 얻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장 28절-30절)’ 라고 하신 그분의 위로 때문에.
조중동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왜 보지 말아야 하며, 그것과 연대하여 광고를 싣지 말아야하는지는 이제는 널리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지난 해 촛불시위장에서 어느 중학생이 써온 피켓 하나로 모두가 열광했다. ‘동아일보가 신문이라면 빨래판은 팔만대장경이다’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미 공익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버린 그들에게 어쩌면 광고 불매운동조차 과분한 대접이 될 수도 있다. 이제 그만 관심을 끊고 차라리 빨래판을 들고나가 팔만대장경이라고 우기는 것이 속이 편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번 재판을 통해 모두에게 실형과 벌금형을 선고한 사법부의 편들기 식 재판을 바라보면서 그들 또한 사법기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판결이란 양쪽의 입장을 고루 살펴서 이루어져야 함에도 그들은 일방적으로 검찰의 입장만 고려가 아닌 배려를 하는 편향적인 판결을 하고 말았다. 물론 항소를 했기에 계속되는 재판에서 시비가 가려지겠지만 모두가 제 기능을 상실해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만났고 대부 대자 사이지만 서로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가 살고 있는 안산에서 초청 일정이 있었기에 그의 집을 방문하여 친부모와 대부가 인사를 나누었고, 옛 얘기도 나누었다. 대자의 아버지는 자동차정비 사업을 하고 계셨는데, 마침 내 차가 검사 기간이었기에 공장으로 찾아갔다가 「부전자전」이라는 또 하나의 기쁜소식을 만나게 되었다.
불의에 당당한 대자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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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만원이라는 벌금통지서 |
성실과 정직을 삶의 좌표로 삼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아버지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사고차량을 수리하여 주고 보험회사에서 수리비를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부품상과 짜고 수리에 사용하지도 않은 부품을 청구서에 올려 부당이익을 챙겼다고 보험회사가 고발을 했고, 약식재판에 의해 벌금으로 칠백만 원이 나왔다. 수리를 하다보면 사업주로서 어떤 부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일일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때때로 착오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부당한 이득을 위해 사용하지도 않은 부품 값을 청구한 사실도 없고 더구나 부품상과 담합을 한 사실은 꿈에서도 없었기에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보험사의 말만 듣고 사기죄로 기소한 검찰에서는 벌금을 오백만원으로 낮춰줄 테니까 취하하라고 협상을 해 왔지만, 신념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는 꿈쩍도 안한 채, 검찰과 사법부를 상대로 한 2년간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훈을 ‘자기 할 일을 다 하면서 당당하게 살자’라고 정한 아버지의 삶이 걸린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웬만하면 벌금을 내고 끝내는 게 사업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이익이라고 했고, 가까운 친구들조차 사업을 하다보면 그런 일쯤은 빤한 것 아니냐며 괜한 객기 부리지 말라고 놀리기도 했다. 재판은 여러 차례 지루하게 진행되었는데, 다음 재판 날짜를 알려주는 판사에게 아버지는 날짜를 연기해 달라고 태클을 걸었다. 그 때는 유럽으로 성지순례를 가도록 계획되어 있기에 재판을 받을 수가 없다고 말했을 때, 참석한 모두가 멸시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사기를 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범죄자가 무슨 성지순례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당당하게 알릴 필요가 있었기에 과감하게 연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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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판결문 |
마침내 재판은 마무리에 접어들었고, 최후진술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고사성어를 빌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양두구육」을 아시나요?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라고 팔면 처음에는 팔리겠지만 나중에는 팔리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그토록 어리석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한 사업체의 사장으로써 최선을 다해 할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살고 있는 사람을, 수익에 눈이 먼 보험회사들의 말만 듣고 부당하게 사기꾼으로 몰면 되겠습니까?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기꾼 아빠가 되거나 사기꾼 사장이 된 채 억울하게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내 억울함이 여기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대법원이 아니라 청와대에 까지 가서라도, 내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싸울 것입니다. 설령 그 싸움으로 인해 사업을 말아먹고 나앉더라도 불의를 상대로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이렇게 법정에서 쐐기를 박듯 자신의 신념을 말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젊은 판검사들을 상대로 훈계하고 가르치는 심정으로 최후진술을 했다는 사실이 재판여부와는 또 다른 만족감을 주었다. 방청석을 둘러보고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훑어보면서 스스로 참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진 판결에서 무죄가 되었을 때는 고시에 패스한 것 같은 기분이었고,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지난 일을 얘기하면서 평소에 내성적이고 과묵한 아버지는 달변가가 되어 열정적이었다. 어둡게 느껴질 정도였던 점잖은 표정도 놀랄 만큼 환해졌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진행을 담은 서류들을 복사해 오면서, 사업장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늘 준비해 두었다가 고객들에게 선물로 드린다는 좋은 글 몇 편이 맘에 들었고, 여러 곳에 준비되어 있는 메모지는 전부 이면지를 오려놓은 것이었다.
부전자전의 참된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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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태환 |
생태보전과 인권회복이라는 사회운동에 오래 투신해 오다가 오십 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쓰러졌다. 늘 지기만 하는 싸움에 지친 것이라고 스스로 진단하였다. 그래서 세 아이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애들아. 아빠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투신하다가 이렇게 쓰러졌다. 아빠가 참여하는 일은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통일과 민주화운동이 그렇고, 국가보안법과 사형제도 폐지가 그랬으며, 그토록 온 힘을 다했는데도 새만금갯벌 살리기는 실패해 가고 있다. 그래서 아빠는 슬프고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다."
중학생이었던 이삭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그런 일들이 모두 성공할거라고 생각하고 한 것은 아니잖아요. 옳은 일이라고 여겨져서 했다면 실패를 했더라도 여전히 옳은 일 아닌가요? 그 일이 이루어졌느냐 실패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쪽에 서 있었느냐가 아닐까요? 실패는 한 순간의 아픔이 되겠지만,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서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충격이었다. 아빠가 하는 일을 바라만 볼 뿐 한 번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주지 않은 아이에게서 이런 식별이 가능하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이 식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두 말할 것 없이 부모의 삶의 모습에서 온 것이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귀하고 참된 가치를 유산처럼 물려주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사회운동가들과 활성가들에게 나눔 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꼭 빼지 않고 들려주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해도 결코 실망치 말자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가 우리 자녀들의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해 줄 수 있다고.
그러므로 이정기가 지금 벌이고 있는 운동 또한 그의 아버지의 삶의 모습에서 온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아무리 그가 부인해도 이 점은 틀림이 없다. 「부전자전」이라는 고사성어의 참된 뜻은 이런 것이다. 그것이 대부 대자 간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삶의 참된 가치를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두고 있으며, 그 영적인 것을 주관해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글은 격월간 <공동선> 5~6월호에도 실려있으며, 이정기 루치오의 첫번째 항소심 공판은 5월 11일에 있을 예정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김정식 사/곡/노래 「세상을 향해 눈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