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계도 소개
나의 9대생조부되는 휘 원화 (元和, 1684-1726) 할아버지는 휘 석관 (碩觀, 1649-1689) 통덕공의 3남중 세째아들로, 위로는 맏형인 대산선생의 생부인 휘 태화 (泰和, 1676-1748) 할아버지가 있었으며 중형인 휘 정화 (鼎和, 1678-1711) 가 또한 있었다. 휘 원화 할아버지는 승정원좌승지 (承政院左承旨) 를 지낸 창주 (滄洲) 나학천 (羅學川, 1658-1731) 선생의 여섯사위중 둘째사위가 되셨는데, 이 글에 소개하는 사건이 일어난 1723년에 아직 생존해 계셨고 (3년뒤인 1726년에 43살의 나이로 돌아가심), 당시 부인되시는 수성나씨 (壽城羅氏, ?-1751) 할머니와의 사이에 두 아드님을 두셨으니, 첫째 아드님이 휘 재정 (再靖), 1704-?) 이었고, 둘째 아드님이 나의 8대생조부님이 되는 휘 경정 (景靖, 1709-?) 할아버지셨다. 대산 선생의 두살연상 사촌형님인 휘 경정 할아버지는 이 사건이 일어난 1723년에 15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창주 나학천 선생은 조선후기에 영주지역을 대표한 유학자였는데, 갈암 이현일의 제자였다. 비록 영남남인이란 정치적 콤플렉스를 갖고 문과를 거쳐 사연많은 관료생활을 하였지만, 오랜 벼슬살이하는 동안에 당색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성품이 강직하고 자신을 지키는 태도가 확고하여, 당시의 당론에 휩쓸리지 않고 독보적인 존재로 정명의리론 (正明義理論) 을 주장하였던 인물"로 역사속에 기억되고 있다.
영남사림학파를 두 동강 낸 병호시비는 2009년도에 안동시에서 호계서원을 복원하면서 퇴계 선생 좌측에 서애 류성룡을, 우측에 학봉 김성일과 대산 선생의 위패를 배치하기로 하면서 389년만에 드디어 "아름답게" 종료되었다. ^^ 호파인 의성김문과 한산이문등이 병파가문들에 상석인 좌측을 서애선생에게 내주는 대신에 학봉선생과 대산선생의 위패를 원래 원했던대로 같이 봉헌하게 된 수확을 거두며 결말을 맺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영남의 3대시비'라 불리며 조선말기에 흥선 대원군까지도 중재역활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다가 결국 포기한 이 어머어마하고 한 편으론 현대적 시각으로 볼때에 그냥 어이가 없을수도 있는 시비중심에 한산이문이 버젓이 있었고, 그를 둘러싼 배경인물에 나와 대원씨의 소호문중 (내외) 선조님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면서, 다음의 테마 이야기를 올려본다.
***이하 아래 자료들은 [한국국학진흥원] 웹사이트에서 발췌함***
2. 자료 소개
『도연일기 (陶淵日記)』 는 효종·현종 때의 유학자인 도연 (陶淵) 김시온 (1598∼1669) 의 추향 (追享) 과 관련한 전말을 적은 일기이다. 그의 추향을 위한 비각의 건립이라든가, 와룡초당(臥龍草堂)의 퇴락으로 인한 보수, 호계서원(虎溪書院)의 통문(通文) 등에 대해 일기체 방식으로 자세히 적은 것이다.
김시온의 부친은 진사 철(澈)이며, 어머니는 찰방 김종무(金宗武)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극일(克一)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려서부터 재행이 경상좌도에 이름이 났다. 일찍부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는데, 병자호란 이후에는 더욱 학문에만 힘썼다. 문장보다 경학의 연마에 정진하였으며,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하여 예서의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인근 수령과 관찰사가 문학기덕(文學耆德)으로 조정에 천거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참봉직과 같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칭하였다.
흉년으로 흩어졌던 결의, 다시 모아 서원을 세우다
1723년
5월 18일, 10여 년 전에 서로 상의하여
도연위에 사당을 세우기로 정하고, 임원을 선출하고 사당과 서원을 건립하기로 하였으나, 흉년을 만나 중지하였다. 금년(1723) 5월
18일 나학천(羅學川:당시 서천군수)·김간(金侃:당시 황산도 찰방)·안연석(安鍊石:당시 연일현감) 및 향교와 서원의 원장들이 호계서원에 모여서 서원을 세우는 일이 시일을 끌어가는 것을 개탄하고, 각 서원 및 향교에 표은 김시온선생을 제향하는 사당을 건립하자는 향론이 결정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오늘날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실로 결함이 있다.
이에 향중의 장로들이 모여서 다시 예전의 논의를 실행하기 위하여 6월
22일 향교에서 회합하여 논의 처리하자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6월 22일 오후에 청아루(菁莪樓)에서 회의를
열고 김한위(金漢緯)·이정신(李廷藎)이 공사원이
되어 산장과 도감·재임후보를 선출하였다. 산장에 찰방 김간(金侃),
도감에 안연일(安延日) 및 김세갑(金世鉀), 재임에 류항재(柳恒載)·이인환(李寅煥)으로 정하고, 산장·재임의 망기를 본교에서 각 댁으로 보냈다. 이날 임원을 선출한 후에 마땅히 본소에 한번 모여야 하지만,
산장이 연일 병고가 있고, 또 장마 비를 만나 제때에 회합을 가지지 못하였다.
7월 20일에 산장과 회원들이 주변의 지형과 서원의 기초를 두루 살펴보고,
먼저 와룡암 뒤편 을좌(乙坐)의 곳에 사당의 위치를 먼저 정하고 저녁에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다음 날 아침에 송정에서 회의를 열어 회원들의 임무를 나누어 정하였다. 도청 도감에
권운태(權運泰)·권이신(權以信),
번와 도감에 우창회(禹昌會)·옥진호,
벌목 도감에 이정설(李廷卨)·이윤혐(李允馦), 벌판(伐板) 도감에 유화시·조성징, 일기 유사에 권관현(柳觀鉉)·조형(趙珩)을 선출하고, 간단한 주안상을 마련하였다.
출전 : 도연일기(陶淵日記)
저자 : 미상
주제 : 마을과 서원, 공동 의논
시기 : 1723-05-18 ~ 1723-07-21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분쟁일기
인물 : 나학천, 김간, 안연석
◆ 조선시대 서원 건립논의
표은(瓢隱) 김시온(金是?)을 위한 서원을 세우려는 노력은 계속하여 이루어진다.1703년(숙종 29)에 건립을 결의하고 공사를 진행하다가 서원금령(書院禁令)이 내려지자 공사를 중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연서원은 건립되지 못하게 되었다. 서원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그의 유허지에 1717년 유허비를 세워 그의 뜻을 드러내었으나, 오래도록 받들어 봉향할 장소가 없다하여 다시 서원을 세울 것을 논의하였으나 흉년을 만나 중지하였다.
그러다가 이때 다시(1723년) 서원건립을 도모하고 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서원건립을 여러지역의 고을 수령및 향교와 서원의 원장들이 호계서원에 모여서 논의하고 사당을 짓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하게된다. 끝내 공사는 완공을 보지 못하지만 김시온의 서원및 사당건립은 계속하여
도모되었다. 이때의 결의도 사림만이 아닌 여러 고을의 수령들의 발의로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는 사림들만의 결의 보다는 대외적으로 표명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속하여 서원및 사당건립이 추진되는데 이때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이현일-이계로 이어지는 학파인물들과 학봉 김성일의 의성 김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병호시비 (屛虎是非)이후 세를 불리기 위한 방법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병호시비의 발단은 1620년 퇴계를 모신 여강서원에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합향하는데 배향을 함에 있어 어느 분을 왼쪽에 모시느냐로 시비가 일어난 것이다. 조선조 유교사상(儒敎思想)에서는 좌(左)와 우(右)의 문제, 즉 오른쪽보다는 왼쪽이 높은 자리로 여겨졌기 때문에, 양쪽 제자들은 서로 자기의 선생을 왼쪽에 모시려고 애를 썼다. 이와 같은 위차논쟁은 단순히 예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학통 내지는 도통의 전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양 가문의 가격(家格)을 건 자존심 싸움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양 학파(學派)간의 알력다툼 이였던 것이다. 첫 공방전은 우복 정경세가 〈연치(年齒) 차는 견수(絹隋)에 미치지 않고 작위(爵位)의 차는 절석(絶席)에 있다〉고 하여 서애?학봉 순으로 위차가 결정되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이 나면서 양측은 계속하여 반목하였고 세를 늘릴려고 하였다. 김시온의 서원건립논의는 이현일-이재의 학통 계승한 사람들과 장소는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원문 번역
계묘일기(1723년):
표은 김선생의 행적은 유허비에 모두 갖추어 실려 있다. 부내府內의 많은 선비들이 제향할 서원을 오래도록 거행하지 못한 것으로써 한스럽게 여겼다. 10여 년 전에 서로 상의하여 도연위에 사당을 세우기로 정하고, 임원을 선출하고 사당과 서원을 건립하기로 하였으나, 흉년을 만나 중지하였다. 금년(1723) 5월 18일 한 고을의 장로인 나서천(羅舒川:당시 서천군수인 나학천)·김황산(金黃山:당시 황산도 찰방인 김간)·안연일(安延日:당시 연일현감인 안연석) 및 향교와 서원의 원장들이 호계서원에 모여서 큰일(서원을 세우는 일)이 시일을 끌어가는 것을 개탄하고, 6월 22일 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고 각 서원 및 향교에 통문을 발송하였다. 통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표은 김선생을 제향하는 사당을 건립하자는 향론이 결정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오늘날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실로 결함이 있습니다. 이에 향중의 장로들이 모여서 다시 예전의 논의를 실행하기 위하여 6월 22일 향교에서 회합하여 논의 처리하는 소지로 삼습니다….
6월 22일
나서천羅舒川·안연일安延日·사빈서원 원장 이우춘李遇春·재임 김윤하金潤河·호계재임 이원기李元紀·병산재임 김기호金起浩·귀계재임 우여천禹汝天 및 사림 20여 명이 의국에 모였다. 도감 김세갑 또한 참석하였다. 큰 비가 온 뒤 길이 험하여 회원들이 많이 참석치 못한 것이 매우 흠이었다.
오후에 청아루菁莪樓에서 회의를 열고 김한위金漢緯·이정신李廷藎이 공사원이 되어 산장과 도감·재임후보를 선출하였다. 산장에 찰방 김간金侃 도감에 안연일安延日 및 김세갑, 재임에 류항재柳恒載·이인환李寅煥으로 정하고, 산장·재임의 망기를 본교에서 각 댁으로 보냈다. 도감 두 사람은 이미 회의에 참석하였으므로 망기를 도연에 직접 보내었으니 번거로움을 줄이기 때문이다. 삼계서원 재임 홍제욱洪霽旭은 길이 험하여 길을 급히 달리 수 없어 기일에 대지 못하고 23일 아침 식사 후에 비로소 도착하여 전하기를, “내성乃城의 여러 부로父老들이 들것에 실려 물을 건너 본원재임을 준비시켜 보냈다.”라고 하니, 그 성의를 알 만하다. 또 여러 장로들의 말을 전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갈암 이 선생이 말하기를, ‘도연의 한 지역은 매우 우연이 아니다. 산명이 와룡이고 지명이 도연이니, 만일 제갈 무후와 도정절(陶靖節: 도잠) 그리고 표은 선생을 나란히 사당을 지어 봉향하면 사뭇 의미가 있다….’라고 하였다.”
전하는 말이 이와 같았으나, 뒤늦게 그 말을 들려 주어서, 사림들은 이미 헤어져 돌아간 뒤였고, 또 문자를 보내지도 않았으므로 회중에 상세하게 알릴 수 없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그러나 갈암의 뜻이 이미 이와 같고, 장로들의 전하는 바가 또 이와 같으므로, 우선 그것을 기록하여 이후의 회의를 기다릴 뿐이다. 6월 22일 임원을 선출한 후에 마땅히 본소에 한번 모여야 하지만, 산장이 연일 병고가 있고, 또 장마 비를 만나 제때에 회합을 가지지 못하였다.
7월 15일
서악西岳의 모임에서 의논하기를, ‘17일 본소에서 회합을 가지기’로 의논하고 근처의 장로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의논하여 처리하는 소지로 삼으려 하였는데, 산장은 오는 도중에 비로 길이 막혀 참석치 못하였다.
7월 20일
산장 및 도감 안연일·김세갑·재임 유항재柳恒載·이인환李寅煥이 비로소 본소에 도착하였다. 진사 류창시·류광시·김시·조창서趙昌瑞·남창한·류원현·유상재·김이반金以盤도 도착하였으며, 오후에 권이신·사빈서원 재임 김윤하·황수규黃壽奎가 오고, 옥진호도 왔다. 진사 이후천李厚天은 진보에서 와서 참석하였다. 김한주金漢柱는 선생의 외손으로 또한 왔다. 산장과 회원들이 주변의 지형과 서원의 기초를 두루 살펴보고, 먼저 와룡암 뒤편 을좌乙坐의 곳에 사당의 위치를 먼저 정하고 저녁에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7월 21일
아침에 송정에서 회의를 열어 회원들의 임무를 나누어 정하였다. 도청 도감에 권운태權運泰·권이신, 번와 도감에 우창회禹昌會·옥진호, 벌목 도감에 이정설李廷卨·이윤혐李允馦, 벌판伐板 도감에 유화시·조성징, 일기 유사에 권관현柳觀鉉·조형趙珩을 선출하고, 간단한 주안상을 마련하였다.
첫댓글 자리의 연을 389년 만에 종식시킴에 고생하셨습니다.
가계도도 잘 보았습니다.
관계되는 문중 대표들이 다소 늦은감이 있지만 뒤늦게라도 합의를 잘 보아 다행입니다. 모두가 다 선조들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에 의한 숭조정신이 투철하다보니 생겨난 '불상사'였겠지요. ^^ (아래 첨부된 사진속에 한산이문 문중 대표로 참석한 대산종손 방수 어르신--제일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이 계심)
창주공 나학천 선조의 이야기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