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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동이의 역사는 공식적인건
중국은 황제헌원으로부터...한국(동이)은 단군조선부터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그 역사가 애매하고 오히려 중국문헌상으로도 그 윗대인 배달국 구리의 치우가 나옴은...
단군조선이란...중국 역사의 시작인 요임금의 후대로 조선역사를 시작시키기 위한 후대의 인위적 시기비정같다.
조선의 시작을 요임금 이후의 단군으로 부터 산정한 수작질이란 예상이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모두 위작임을 남북한 주류학계가 인정하는 이유는...
후대의 지명과 용어가...상당수는 구한말기의 용어가 사용됐단 점이다.
또하난...환단고기는
우리땅이 아닌...일본땅에서...그것도 원본이 아닌 필사본으로 1970년대에 출연한단 것이다.
그러나 난...
환단고기가 우리땅이 아닌...우리역사를 왜곡했단 주범인 왜놈들 땅에서 나왔다는게...
오히려 조작됀 위서가 아닐 가능성 많단 반증이라 본다.
왜놈들이 우리역사를 어떻게든 감췄어야 할텐데...
뭐하러 궂이 찬란했던 한민족의 역사를 조작해 선물해 줄 이유가 있었냔 것이다.
고로,한단고기류는...
일제가 그리도 태워 없애야했던 주요 사서들 중 하나가...
어느 일본인에 의해 보관돼다가...그 후손이 이거 쑈킹해서 돈 좀 돼겠지 싶어 내 놓은 사서라 보인다.
이 환단고기가 공개됐을 당시...
당연 개구라라고... 일축했어야할 일본의 어느 저명 학자는...
아시아와 세계사를 다시쓰게 해야할 발견이라 평가했단 점에서...
단지 후대의 ...시대별 여러 사가들의 첨삭을 거친 필사와 일제시대 계연수선생의 필사등으로...
각 시대별 용어들이 혼재하고...특히 구한말기 용어도 섞여있단 점이...이 환단고기의 위서임을 증거하지 못한다 본다.
중국사서나 세계의 어느 역사서든...
원래 집필당대의 원본이 고대로 보관됀건 거의 없다.
모두가 후대의 필사를 거친 첨삭과 검증을 거친 사서로 누누히 이어지는게 역사서들의 기본이다.
또한,
1만년전의 환국의 역사서가 한자로 표기됐을 일도 없고...
한자로 표기됐을 시대라하여도...몇천년의 유구한 세월에 그 사서들은 먼지가 돼어 버렸을 것이다.
몇천년전의 역사서는 절대 원본이 있을수 없단 것이다.
아무리 허접하더라도...필사본이 있단 자체에 감지덕지해야할 일이지...
원본이 아니느니...후대의 용어들이 섞였다느니...이런건 등신육갑에 가까운 주장들이란 것이다.
어짜피 세계사던..중국사던...
환국시대와 신시 배달국시대의 사서는 없다.
일단 영어와 한자글이 없었고...오로지 한민족의 신시 배달국의 녹도문류밖엔 없었다.
있었다 처도...이집트같은 건조기후가 아닌 지역에선 ..썩어서 먼지가 돼어 날라갔을 일이다.
그러니 오로지 상고대의 역사는...신들린 무당등이 줄줄 읊어대는 노래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건 몽골인들이 허미란 기법으로 줄줄히 역사를 읊어대며...역사를 전수하던 식이다.
거의 초능력에 가깝게 엄청난 분량을 고대로 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런 사람들이 특별히 선발돼어...기록물같이 노래를 전수하며 역사를 전수했을 것이다.
그래 지들 맘대로...신앙대로 가감이 섞여...
상고대의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신화같이 돼어 버렸을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그걸 정확한 문자의 표기가 아니니...역사가 전혀 못됀다 하는건...
글씨도 없던 시대..있어도 썩어 날라갔을 시대를 ...현재에 물질적로 증거해야 한단 억지인 것이다.
어짜피 세계 어디에도...무당이나 제사장들이 전수한 역사는...
환국시대나 배달국 시대보단 앞서지 못한다.
고로, 가장 먼 상고대를 증거한 한단고기류나 규원사화류는...
아무리 후대의 필사로 용어가 섞이고..시대가 좀 짬뽕돼고 오기가 있다 처도...
세계 유일한 신생인류의 태초를 증거한 역사서다.
이런 전제하에...
고조선과 신시배달국...그 중 중국역사에 나오는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에 대한 구절로...
고조선의 근본을 대충 더듬어 본다.
곰과 환웅의 튀기로 시작돼는 단군신화의 단군...
이건 아무래도...요임금보다 후대로 조선의 개국시기를 만들기
위한 짱께족들과 그에 동의한 후대 조선인들의 주장같다.
곰과 환웅의 튀기란...오히려 웅족인 황제족의 건국신화일 수 있다.
세계 유일의... 최고대 역사를 기술한 환단고기는...
중국의 삼황오제니 양키들의 아담이브 시대 아브라함시대 훨 이전에...
세계 전인구가 돌도끼나 쓰던 시대에...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환국 12연방국이 있었으며...
이는 금세기의 조선인들같은 황인종 몽골로이들만의 나라도 아니고...
현재는 없는 청색인과 홍색인도 있던 5방색의 인종이 있는 세계제국이라 한다.
위의 부분이 한단고기류가...그저 민족주의에 의해 급조해서 구한말에 막 만들어진 사서가 아닌 반증이다.
위조하려면...그럴듯 하게 3색인종만 얘기했어야 했고...
황인종이 가장 우수했고...개중 조선민족이 가장 우수했느니... 뭐 이런 자기민족 피알이 있어야 한다.
그런게 없으니 민족주의적 위작이 아닌 반증이다.
그런데...규원사화등을 보면...이상한게 있다.
신시배달국...꼭히 조선(朝鮮)이란 국명이 없다.
조선의 조(朝)는..명실상부한 한자문화권 천자의 조정...그에 분봉받은 제후나라들의 조정을 뜻하는 조(朝)자인데...
신시배달국에 그 국명이나 호칭이 마땅이 없단 것이다.
고로 신시 배달국은...조선과는 엄연히 다른 국명을 쓰던 조선 이전의 나라였다 봐야 한다.
단지 조선이 신시 배달국을 계승했단것 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배달국 환웅은...서자부의 수장으로...환국영토가 아닌곳에 신 개국지를 만들단 것이다.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府印)..즉, 천자의 조정이 하사한 제후의 옥새를 가지고 갔단 얘기다.
그럼, 고지도상 물이 많았을 시기의 천해(알알해&발하쉬호&신장성 보해)의 동쪽...
파내류(파미르)의 기슭..동서 이만리면...파미르에서 현 중원 황해까지다.
남북은 5만리라니...북극에서 인도까지다.
즉, 파미르 동부엔 환웅의 신시 배달국이 개국할 새 땅은 없었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배달국 환웅이 신시를 연 지역은...알타이 서쪽 알알해(아리수)일대라 생각한다.
현 아스타나(아사달)가 유력하다.
이게 서구역사의 앗시리아(아시아)의 원조같다.
신시의 신(神)과 선비의 선(鮮)은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
문무님등의 고서분석상...카자흐스탄 동부는 선비족(쎈삐)의 영토다.
신(神)이던 선(鮮)이던...그 한자는 후대의 글자적용이고...
음가상으로 새것을 얘기하는 신(新)이자...몽고어 "신에(新)"와도 관계있고...
영어 의 썬(해)와도...영어의 썬(아들=새해)...와도 관련있다 보인다.
선비(鮮卑)...선비(鮮婢)...선비(鮮碑)..선비(鮮鼻)..다 가져다 붙여도 그럴싸한 국명은 안 나온다.
그러하므로 선비(센삐)란...선비족의 민족명칭을...한자문명이 음차한 명칭일 뿐이란 것이다.
선비산(알타이)에 살아서 선비족이라는데...
그럼 알타이가 선비의 뜻인 것이다.
금(金,알튼)을 뜻하고 해(日,알파)를 뜻한다.
선비의 선(鮮)은...태양을 뜻하는 것이다.
문무님등의 새로운 역사강역 고증상...
신시배달국의 주 구성원인 선비족은...역사에도 중국 서북에서 침투해서...
중국의 북쪽 황가를 이룬 민족이다.
주나라(周)는 좀 애매하다 하지만...진나라(秦)와 수,당(隋,唐)나라...
오호 십육국의 실제적 천자국들인 오호(五胡)들이 다 선비족류들이라 분류됀다.
오로지 한(漢)으로 대표돼는 전통 짱께족들은 이 북방의 선비족들 통치만 받은 격이다.
역사강역 분석상...
신시배달국의 중심인 아스타나(아사달)근처 선비족들은...
그 남동쪽의 천산유역 오환족(烏桓族)을 치는데...그럼 신시배달국은...환국의 중심부를 쳤단 것이다.
제후국인 신시 배달국의 반란인 것이다.
주나라도...진나라도 그랬다.
배달국(倍達國)...곱배기로 배달하는 나라...? ...두배로 통하는 나라...?
한자론 말도 않됀다.
그래, 순수 한반도어로..
밝은 달..즉, 해(日)이다...흰색의 광명을 뜻한다...각종 그럴뜻한 미사여구가 다 동원됀다.
얼핏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선비의 본토인 몽골어론...배달은 바탈(영웅)이란 뜻이라 봐야 한다.
신시 배달국은 새 태양의 영웅국...최대한 오바한 국명였던 것이다.
이들이 환국 중심부에 처들어오면서...
환국 황실은 막을 내리고...중국이 말하는 삼황오제의 시기가 됀다...이게 원조의 태백산 단군조선 개국이다.
이중 염제 신농이 치우의 조상이자...동이(東夷)의 조상이라 한다.
그럼 동이족이 중원의 핵심자리인 중국(中國)의 주인들인데...
중국사서들은 자꾸 동이(東夷)를 동방의 오랑케라 한다.
크고 착허고 이런 것만 다르지...동방의 이민족으로 표현하긴 마찬가지다.
신농씨가 치우의 조상이던...동이의 조상이던...후대의 동이(東夷)는...천자의 중심지인 중국(中國) 중심에서...
동쪽에 위치하던 문명집단이란 얘기다.
한자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황제시대의 동이의 군장에 관한 기록으론...치우씨가 거의 유일하고 대표적이다.
동이의 천자(天子)라 한다.
오로지 중국(中國)의 통치자가 천자인데...
그 상대적 동쪽 오랑케문명의 왕을 천자라 고...애써 기록하는 선심을 썼다.
왜일까...?
그 뻥이 심한 한족들이 왜 동쪽 오랑케인 동이의 군장이란 치우씨를 천자(天子)라 표기해 줬을까...?
치우씨가 중국을 쳐서 세계 유일의 중국(中國) 천자(天子)에 올랐단 얘기로 난 들린다.
규원사화대로...
신시배달국이자 중국 천자인 유망씨가 덕을 잃고 폭정을 행하자...
이를 빌미로 동이족을 다스리던 제후인 치우가 반란을 하여...천자위를 찬탈한 것이라 본다.
이 과정에서 소전씨가 치우에게 참패하고...모든 제후들이 참패해서 온 대륙에 시체가 나뒹굴었단다.
이리 되자... 탁록 근처의 황제헌원이 반기를 든다.
천자의 황도는... 역시, 천산유역으로 보이고...반기를 든 탁록의 황제헌원은..
아무래도 타클라마칸 남부 청해성 서부인근의 제후로...원래 환인제국의 적통가문에 근접한 가문같다.
그래, 모든 중국의 제후들이 개박살 나면서도...계속 황제헌원의 졸개들이 모이고...
73번 깨지면서도...그 병력이 계속 보충됐던 것이며...
특히 지형지물상...타클라마칸과 청해성 사천성이란 천해의 장막이 티벳고원을 막아주고...
티벳고원은 온 천지가 산이고 내륙호고....골자기니...
어디로 숨었느지 찾기도 어려운 지형으로...완전 소탕이 어렵단 이유에서 황제헌원은 조용히 숨었다가...
치우씨가 늙어 죽은 연후에나 겨 나왔던 것이다.
치우씨가 죽은때가 제위 109년 째 해란다...
150에 가까운 늙은천자가 죽은 것을...그의 부장중 하나인 또다른 치우가 죽은걸...
헌원이 치우씨를 죽인거라고...한족들이 자위적 설을 조작해 낸 것이다.
글자로라도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제후들이 한방에 박살나 중원이 시체더미로 변하고...
헌원이는...73번을 깨지면서 도망다녔는데...
딱, 한번의 반격으로 치우씨를 죽였다니...개소리인 이치고...
치우씨가 재수좋게도 기적적으로 헌원에게 패해 죽었다 한들...치우씨의 막강한 동이족 군사들이...
첨단 무기도 없던 헌원이의 짱돌군대를 바로 박살냈을 것은 자명하다.
티벳 오지에 쥐죽은듯 숨어 살다가...
치우씨가 늙어 돌아자자...슬슬... 내가 환국의 적통이다~하며 다시 겨 나온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한게...
이 황제헌원이 곰을 뜻하는 유웅씨라 한다.
배달국환웅이 단군을 낳던 그 신화와 일치한다.
고로 황제 헌원은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아사달)에서 천산(중국)을 점령한...선비족의 신시 배달국 환웅이...
환국자손과 결혼해 낳은 튀기일 가능성이 많단 얘기다.
신시배달국과 환국의 정통을 다 가진 자일수도...그에 근접한 자였을 수도 있다.
신시배달국의 중국(中國)인... 천산의 유망씨란 천자가 폭정을 하자...
상대적 동쪽인 동이의 땅에서 치우씨가 반란을 일으켜...순식간에 중원(천산유역)을 휩쓸어 천자위를 찬탈하고...
이에 헌원을 지지하는 환국과 신시배달국 제후들과 백성들이 동이족의 치우씨에 꾸준히 게릴라전을 감행한게...
치우와 헌원의 10년 전쟁사같다.
현재 티벳과 그 동남부의 중국인들 중 묘족이 치우의 자손이라 함은...
청해성과 사천성으로 침투한 치우의 자손들이 또 있단 것이다.
그럼, 조선(朝鮮)은 뭔가...?
말 그대로 해뜨는 아침방향의 선비(썬,태양)국이란 얘기다.
아마도 기자가 선비족격인 주나라에 동이지역으로 분봉받았단 때에...시작됀 명칭이...
그 상고대까지도 후대에 일괄대입시킨 국명이 기자조선과 단군조선같다.
엄밀히 말하자면...탱그리(천자)를 이르는 단군인데...
요임금보다 후대의 동이국가를 창출하려니...단군왕검부터 시작을 만들고...
그 개국신화는 신시배달국의 예를 그대로 적용했다 보인다.
고로, 동이족과 그 수장이던 치우씨는.,,
정확히 신시 배달국의 중심(중국) 적통이 아닌...그 상대적 동쪽 문명의 수장이며...
그 이가 원조의 단군조선격인 신시배달국의 환국지역... 중국(천산)에 있던 천자인 유망을 치고...
중국(환국의 중심인 천산)을 차지했단 얘기로 들린다.
환국과 배달국의 적통인 황제는...
티벳고원을 요리조리 숨어 댕기며 게릴라전을 하다...묘족까지 동쪽에서 포위해 들어오니..조용히 주죽은듯 숨어 있다가...
치우천자가 늙어 돌아가시자...다시 등장했다 봐야 한다.
고로, 선비족을 뜻하는 신시배달국...거기서 동이지역으로 파견됀 기자의 조선...위만조선...
이 모두는...그 상대적 동쪽 문명인 동이문명의 군장 치우와는...
근본은 똑같이 사백력(시베리아 바이칼)에서 내려온 환인의 자손이겠으나...
황제가 있던 환국은 ...천산을 중심으로 타클라마칸에 중심을 뒀고...
신시배달국은 선비족의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아사달)에 있다가 천산(중국)의 환인제국 천자위를 찬탈했고...
현 중원 중동부에 있던 동이의 구리국은...
오환족(烏桓)의 땅인 천산의 중국을 치우씨 때에 쳐서 천자위를 찬탈했던 역사같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신시배달국은 카자흐스탄 중심 선비족...
황제헌원은 환국의 중심(천산&타클라마칸)에 있던 어느 족속...
치우씨는 그 상대적 동쪽인 현 청해성 동부 중원중동부에 있던 동이족의 구리국...
구리국명을 계승한 고구려(고려)도...크겐 치우의 동이족...북부여는 외몽골 바이칼에서 신장성으로 이동한 색족(스키타이)...
고구려는 이를 접수한 나라...다시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한 기자조선&위만조선지역을 동이족의 고구려가 흡수...
이러니...동이와 조선은 시원은 같으나...후대엔 근본이 좀 다르다 하겠습니다.
숙신도 조선과 좀 다르고...동이와 좀 다르다...
근본만 같을 뿐이다.
이 글가지고 또...
여...여~ 봐라... 얘가 드디어 조선과 동이를 분리시켜 왜곡한다...
이럴려고 여즉 인터넷에 또아리틀고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메이슨들에게 월급받을지도 모른다...
라고... 날리치실 분들이 있을까 걱정인데...ㅡ. .ㅡ
뭐 괜 찮습니다.
역사연구는 내 족보라도 남의집 족보 따지듯 철저히 냉정해야하니여.
근래 주장돼는 치우천왕에 대한,,, 규원사화내용...짱께족들과 우리 강단사학계의 주장내용 ...
마지막은 위키백과의 환단고기의 중립적으로 적은 내용...
네 가지를 밑에 참고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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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且中國者, 天下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族之分遷西南者, 垂涎而轉進, 中土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焉, 黨同수異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初炎帝之世, 中土之漸民至盛阜, 穀.麻.藥.石之術, 亦已稍備. 及累傳至於楡罔之世, 而爲政束急, 諸侯携貳, 民心離散, 世道多艱. 我蚩尤氏與其民衆, 虎踞河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觀楡罔之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名之金, 大制劒.鎧.矛.戟.大弓.고矢, 一幷齊整, 乃發탁鹿而登九渾, 連戰連捷, 勢若風雨, 습(仗)[伏]萬民,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發水金而制芮.戈及雍狐之[戟, 再整兵而出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20)陳留, 楡罔所都也. 一歲之中, 更兼十二諸侯之國, 殺得(仗)[대]伏尸滿野, 中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 楡罔使少顥拒戰, 蚩尤氏揮雍狐之戟, 大戰少顥, 又作大霧, 使敵兵昏迷自亂, 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탁鹿.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 回兵圍攻於탁鹿之野, 又大破之.《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戟一怒, (仗)[대]伏尸滿野」者, 是也.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게다가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고 화창한 바람 기운은 널리 퍼져 있으니, 우리 민족 가운데 서남쪽으로 나누어 옮겨간 자들은 대단히 탐을 내어 더욱더 나아갔으며, 중토의 백성들 역시 꾸역꾸역 모여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편끼리는 도와서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원수로 삼아 창과 방패로 서로 충동질을 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에 있어서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을 일구고 삼베를 자으며 약과 침을 쓰는 기술 또한 점차 갖추어져 갔다. 이로서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에 있어서는 단속하기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21)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탁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이 소호(少顥)22)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時有軒轅者, 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 欲代以爲君, 乃大興兵, 與蚩尤氏拒戰. 蚩尤氏, 大戰軒轅於탁鹿, 縱兵四蹙, 斬殺無算, 復作大霧, 令敵軍心慌手亂, 奔竄逃生. 於是, 淮岱.冀연之地, 盡爲所據, 乃城於탁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23)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又値, 蚩尤氏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雲급軒轅記》之所謂「蚩尤始作鎧甲.兜무,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 其狼狽之甚矣. 蚩尤氏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與軒轅戰七十餘回, 將無疲色, 兵不退. 後軒轅, 旣屢敗, 乃復大興士馬, 效蚩尤氏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期日會戰. 時蚩尤氏, 仰觀(天)[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勝誅, 황各事其主, 不可漫殺無(事)[辜]. 乃決意退還,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敵不敢生意追襲, 復與軒轅大戰, 混殺一(陳)[陣], 然後方退. 此時, 部將, 不幸, 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 盖謂是也. 蚩尤氏, 乃東據淮岱之地, 以當軒轅東進之路, 及至其沒, 漸至退영矣. 今據《漢·地理誌》, 其墓在東平郡.壽張縣.감鄕城中, 高五丈. 秦.漢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氏)旗, 豈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千歲而猶不泯者歟.
이때에 헌원(軒轅)24)이란 자가 있었는데,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침에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25)와 기연(冀연)26)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한 것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참패하였다.《운급헌원기(雲급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 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27)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28)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29)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감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30)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다르기에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蚩尤氏, 雖然退歸, 中土以是蕭然, 楡罔亦不得復位, 炎帝之業, 以是永墜矣. 自是, 軒轅代爲中土之主, 是爲黃帝. 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감, 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未嘗安枕高臥.《史記》所(云)[謂]「披山通道, 未嘗寧居, 邑于탁鹿之(河)[河]阿31), 遷(徒)[徙]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者, 盖其戰競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古有訓, 蚩尤惟始作亂」 彼之畏威, 而世傳其訓, 亦甚明矣.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32)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其後, 三百餘年無事, 只與少昊氏戰, 破之,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與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 爲闕百歲,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수闊]遠, 不可得而詳矣.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천년'이라 말한다. '궐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며, 게다가 단군이 다시 나라를 일으킨 것이라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역시 이치에 가까울 것이다.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글 : 규원사화 / 사진 : 구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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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중국어 간체: 蚩尤, 정체: 蚩尤, 병음: Chīyóu 치요[*])는 중국의 여러 기록과 전설에서 헌원과 함께 탁록의 전투에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전쟁의 신 또는 옛 부족(구려)의 지도자로, 현재의 묘족의 조상신이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오제본기〉를 비롯한 중국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치우는 신농의 후예로 황제 헌원과 탁록지전 등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다. 신농의 치세 말기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세상을 안정시켰는데, 이때 치우가 가장 포악하여 염제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제후들을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였을 때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헌원은 군대를 일으켜 치우를 탁록(涿鹿)에서 잡아 죽였다고 한다.[1] 중국의 일부 신화에는 치우에게 81명(또는 72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이 있고 머리는 구리와 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창과 방패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치우의 부족은 일부가 헌원에 협조했고, 일부는 여족(黎族), 일부는 요족(瑤族)이 되었다고 한다.
치우와 헌원이 전쟁을 벌였던 사실은 흔히 '황제 신화'라고 부르며 이러한 신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의견이 존재하였다. 치우가 이끌었던 구려족(九黎族)은 먀오족의 조상이라고 하며 양쯔 강 유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치우로 상징되는 양쯔 강 유역의 남방 부족과 황제로 상징되는 황하 유역의 한족이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2]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2]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3]
중국, 베트남, 태국 등에 흩어져 사는 묘족, 흐몽족 등은 구려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한다.[4] 한국의 일부 야사에서는 치우씨(蚩尤氏), 치우천왕(蚩尤天王) 등으로 부르며 치우 또는 그 부족이 한민족에 속했다고 주장한다. [5]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위서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 《국어》, 《산해경》, 《상서》 등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여러 서적을 통하여 전하여지지만, 모든 기록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산해경》〈해경〉에 치우와 황제(黃帝)가 서로 힘을 겨룬 내용이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모셔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유방이 항우와의 마지막 전투 전에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고, 그 전투에서 이겼다고 한다. 동양 천문에는 특이한 형태의 혜성이 '치우기(蚩尤旗)'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의 무덤인 마왕퇴에서 치우기를 묘사한 백서가 발굴되었다. 한국의 옛 기록에는 치우와 관련된 제례나 풍습이 전해지는데, 이는 모두 중국의 예법에 정해진 제례를 받아들여 제사한 것으로 중국이 전쟁의 신으로 치우를 숭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풍습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조선 후기 이후로 저술된 일부 기록에서는 치우를 한민족의 일부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위서로 판단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들은 인정되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있는데, 전자에서는 '치우씨(蚩尤氏)'라 불리며, 환웅의 부하로 일족을 이끌고 환웅 및 단군에 협력하였던 부족 및 부족장으로 설명된다. 치우씨는 환웅의 명령에 따라 집을 만들고 방어와 병기 제작을 담당하였고, 신농의 말기에는 중국 본토에서 천왕이 되었으며, 단군조선 시대에는 고조선의 서남쪽인 남국에 봉(封)하여졌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제후들과 함께 중국 본토로 진출, 여러 나라를 세워 그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고 서술되었다. 후자에서 치우는 배달국의 제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으로 등장한다. 중국의 역사서 및 신화의 내용과 반대로 《환단고기》의 치우는 헌원(軒轅)에게 승리하였다고 한다. 또한 2002년 FIFA 월드컵 때 유명해진 붉은악마의 트레이드 마크 도안이 치우라는 주장되었는데,[8] 해당 도안은 신라 귀면와를 토대로 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귀면와의 형상은 치우와 관련짓지 않는다.[9][10] 그러나 붉은악마 측에서는 이 그림이 치우의 형상이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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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는 1979년에 출간된 책으로, 한국의 고대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옛부터 전해져 왔다는 4권의 고서(古書)를 엮은 형식이며 한민족 또는 동이족의 고대 역사가 길고 넓은 영토를 가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처음 소개된 이후로 기존의 역사의 틀과 구별되는 내용으로 한국과 일본의 주목을 받아 국사청문회가 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과 북조선의 사학계에서는 20세기 이후에 조작된 위서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나[1], 일부에서는 《환단고기》의 옛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한단고기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2]
《환단고기》〈범례〉에는 1911년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자금지원으로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하고 이기(李沂)가 교열(校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이유립이 보관하다가 1949년에 오형기에게 정서시켰고[3], 한 차례 관련 자료와 함께 분실하였다가 그 후 기억을 되살려 복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이유립이 복원한 1979년 영인본(광오이해사 발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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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각기 다른 시대에 쓰여졌다는 5권(4종류)의 책을 엮은 것이다.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은 다음과 같다.[9]
《환단고기》는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두 나라는 환인과 환웅이 통치하였으며, 각각 7대와 18대를 전하였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은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고 이 환인과 함께 하늘로부터 어린 남녀 800명이 천해의 동쪽 땅인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한다. 사백력을 시베리아로, 천해는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2]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며 각각의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 또는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 이다. 그 영토가 매우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는 수밀이국이 수메르라고 주장하고 있다.[2]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의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 동안 왕이 7대라고 한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인은 다음과 같다.
《삼성기》의 〈신시역대기〉와 《태백일사》〈신시본기〉에서는 신시배달국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고대국가라고 한다. 중국 사서에서 이 나라를 ‘구리’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11]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가 배달국의 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늘의 주신(主神)인 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등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며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거하면서 다스렸는데, 이를 신시라 하였다고 한다. 신시의 멸망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으며, 단지 신시를 이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였다. 환웅이 나라를 세운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백성을 보살피는 직책을 다시 만들었는데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즉, 호가(虎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응가(鷹加), 노가(鷺加) 등과 같이 이름하였으나 그 자세한 것은 나와있지 않다. 다만 짐승의 이름으로 관직을 나타내는 것은 후대에 등장하는 여러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환단고기》에는 치우와 헌원·유망 사이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개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치우가 신시국의 임금이 되었을 때에 중국의 임금은 유망(楡罔)이었다. 치우는 신시국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서 군대를 일으켜 유망을 공격하였으며, 승리하였다. 치우가 유망의 나라를 아울러 통치한다는 소리를 헌원이 듣고 공격하여 왔다. 1차 전쟁에서 치우는 헌원과 탁록(涿鹿)에서 싸워 이겼으며 이때 헌원은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兗)의 모든 땅을 신시의 영토로 삼았다고 한다. 치우는 이후에도 70여 차례 헌원과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으며, 치우가 죽은 후에 점차 그 땅에서 물러나왔지만 많은 유민들이 고조선 시대에도 남아 있어 그 영향력을 중국에 미쳤다고 한다. 중국 사서에서는 이들을 회대지방에 있으므로 주로 회이(淮夷)라 기록하고 있으며, 우이(嵎夷), 래이(萊夷), 도이(島夷), 구이(九夷)라고도 기록하였다고 한다.
환웅이 천오백여 년간 배달국을 다스렸다고 하며, 그 역년을 기록하고 있다.
제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의 열두 아들 중 막내가 태호 복희이며, 그의 후손이 현재의 산시 성에 살았다고 한다.
《환단고기》〈단군세기〉는 단군의 치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그 역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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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와 가섭원부여의 역사를 적고 있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창건자이며 첫 단군이었다. 그는 고구려의 근본이었다.
해모수(解慕漱)는 고조선의 44번째 구물 단군에 의해 창건된 진조선의 고조선 왕실의 구성원이었다. 그는 고열가 단군의 지배하에 23세의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고조선의 붕괴시에 충성으로 제국에 봉사하였다.
세 왕국으로 나뉘었던 고조선은 무너지고 있었다. 중심 왕국이었던 진조선은 군대가 더이상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상황으로까지 붕괴하였다. 그는 더이상 제국의 통제내에 있지 않았음을 알고 고열가 황제는 권력을 버리고 제국을 오가의 손에 넘겼다. 다섯 명의 중앙 귀족, 오가 아래에서 군대의 장군과 지도자들은 떠나서 반란을 일어키기 시작하였다. 제국을 마지막으로 떠난이가 해 모수였다. 그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해모수는 제국을 재건하기위해서 떠났다. 해모수와 그의 군대는 장당경 요새로 가서 왕궁을 지었다. 그 곳에서 해모수는 천왕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황제와 동등한 칭호이다. 해모수는 그의 동료 고조선 장군들의 반란을 대부분 격파하고 진조선영토의 대부분을 다시 차지하였다. 이로 인해 천왕랑 해모수는 다섯명의 중앙귀족에게 북부여의 이름 아래에 고조선을 재건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북부여를 창건한 후 해모수는 고열가 황제가 돌아올 것을 6년을 기다렸다. 전 황제가 정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그는 단군의 칭호가 주어졌다.
고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와 만나 결혼하였지만 그들의 아이 주몽을 볼 수 있기 전에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고주몽은 결국 동부여에서 자랐고 동부여 왕자들의 괴롭힘을 당하고 탈출하였다. 경계를 넘어서 그는 북부여로 들어 갔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6번째 단군 고무서의 환영을 받았다. 고무서 단군은 그의 두번째 딸 소서노를 주몽과 결혼시켰다. 고무서가 아들없이 죽자 주몽은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고 결국 이웃 왕국을 정복하고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창건하였다.
모수리(기원전 195년경 ~ 기원전 170년)는 만주에서 시작된 한국 고대 왕국 북부여의 두번째 단군이었다. 모수리 단군은 북부여의 창건자 해모수 단군의 장남으로 고진의 형이기도 하였다. 고진은 고구려의 창건자 고주몽의 증조 할아버지였다.
기원전 195년 해모수의 사후 모수리는 왕좌에 올라 북부여의 제2대 단군이 되었다. 해모수의 계승자로 모수리는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또한 부왕이 창건한 신생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기원전 170년, 모수리 단군은 죽고 그의 왕자 고해사가 계승하였다.
고해사(기원전 약 170년 ~ 기원전 121년)는 만주에 위치한 한국의 고대 왕국 북부여의 세번째 단군이었다. 고해사 단군은 북부여 두번째 단군 모수리의 장남이었고, 그의 부왕의 치세에 북부여의 태자였다. 그는 또한 고우루와 동부여의 창건자 해부루의 아버지였다.
기원전 121년 고해사 단군이 죽자 그의 장남인 태자 고우루가 북부여의 네번째 단군이 되었다.
'고우루' 또는 '해우루'(기원전 약 121년 ~ 기원전 86년)는 만주에 근원한 한국의 고대 왕국 북부여의 네번째 단군이었다.
고우루는 북부여 제3대 단군 고해사의 장남이었다.고우루는 그의 부왕의 치세아래에서 북부여의 태자로 자랐다. 그는 동부여의 창건자 해부루의 형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86년 고우루는 분명히 상속자가 없이 죽고 그의 동생에 의해 계승되었다.
기원전 121년 부왕 고해사의 사후 태자 고우루는 왕좌에 올라 북부여의 네번째 단군이 되었다. 위만 조선이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북부여는 위만조선을 적으로 규정하며 진조선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고우루는 위만 조선을 공격하여 위만조선의 경제가 휘청거렸다.
이즈음 한무제가 북동쪽으로 위만조선을 1년간 끝없이 공격하였다. 이때 고우루 단군은 군대와 고리국왕 고진을 보내어 위만 조선의 경계를 위협하였다. 기원전 108년 결국 위만조선이 함락되었다.
'고두막' 또는 '동명왕' (기원전 108년 ~ 기원전 60년)은 동명국의 창건자이며 북부여의 5번째 단군이었다. 그는 기원전 86년 해부루 단군을 몰아내고 북부여에서 권력을 잡았다. 그해 국호를 졸본부여로 바꾸었다.
고두막은 고열가 단군의 후손으로 그는 진조선의 마지막 단군이었다. 그는 해모수와는 친척이었다.
기원전 108년 위만 조선이 약탈되었을 때 고두막은 군대를 모아 번조선의 영역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위만 조선이 몇 년 있었던 곳이었다. 그해 고두막은 동명국을 창건하였다. 고두막은 동명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동명왕은 서서히 군대를 모아 한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그는 19년의 전투 후에 한나라를 영역밖으로 몰아내었다. 기원전 87년 동명왕은 북부여의 고우루 단군에게 항복하고 참여할 것을 권하는 사신을 보냈다. 그러한 위협적인 전언을 받고 고우루 단군은 근심하다 병들어 수개월 후에 사망하였다.
고우루의 사후 그의 동생 해부루는 왕좌에 올랐다. 이때 동명왕은 대병을 이끌고 북부여를 공격하였고 동쪽의 동해까지 달아나는 해부루를 추격하였다.
기원전 86년 해부루는 동부여를 창건하였다. 그때 동명왕은 북부여의 5번째 단군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졸본부여라 불렸다. 동명왕은 그의 장자였던 고무서 왕자를 북부여의 태자로 삼았다.
고무서(재위 60 BCE - 58 BCE)는 북부여의 6번째 단군이며 졸본부여의 두 번째 단군이었다.그는 고두막 단군의 태자였다. 고무서는 소서노의 아버지였으며 그녀는 후에 고구려 동명왕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비류와 백제왕 온조의 어머니였다.
고무서는 기원전 59년 고두막의 사후 왕좌에 올랐다. 기원전 58년 그의 치세 2년에 해모수의 직계 후손 고주몽이 졸본부여로 왔다. 고무서는 즉시 그를 받아들이고 고주몽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수개월 후 고무서는 그의 딸 소서노와 그를 결혼시켰다. 고무서는 그 해 한참 후에 죽었다.
고무서는 아들이나 혈족의 계승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새 사위 주몽은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북부여 7번째 단군이 되었다. 기원전 37년 그는 고구려를 창건하였다.
고주몽의 생부는 해모수의 4대손에 해당되는 고모수 또는 불리지라고 한다.
마한과 번한의 역사를 적고 있다. 역대 마한, 번한의 군주가 나타난다.
단군 시대의 종교를 설명하고 있다. ‘삼일신고’, ‘천부경’이 나타나며, 교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종교철학적 내용이다.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대진국(발해)의 역사와 함께 역대 황제(왕)의 묘호와 시호, 연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위해'는 황제로 기록하지 않았다.
〈대진국본기〉에서는 ‘대진국’의 명칭만 사용되며, 발해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에 대해 《환단고기》를 주해한 임승국(林承國) 교수는 발해라는 이름은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지, 발해인 스스로가 부른 국호는 대진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계에서 위서라는 의견이 일반적이다.[1]. 범례에는 1911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9년이 되어서야 등장한 이유가 불명확하고, 원본이 제시되지 않으며, 후대에 등장한 용어나 학설이 반영되어 있고, 기존의 역사와도 어긋나며, 내용이 모순된다는 이유로 후대의 위작으로 여기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단기고사》와 함께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한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그 저술시기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반, 1949년, 1979년 부근이라는 등의 이견이 있다. 광대한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기록 등은 근거가 없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하며,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1]. 조인성, 박광용 등은 《환단고기》의 내용에서 친일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12]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상고사의 복원을 위한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는 1993년 10월 북조선 사회과학원이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동남쪽에서 민족의 시조 단군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으며, 연구 서적에서 《규원사화》와 《단기고사》에 등장하는 고조선 47대 임금을 소개하는 등 고조선을 실재했던 왕조로서 인정하고 있다.[13] 하지만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위작이며, 대부분의 역사 기록들은 그 문헌적 근거가 없고 당시의 역사 발전·문화 발전 단계에도 부합되지 않고 객관적인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2006년의 남북한 공동 연구 논문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14]
주류 학계는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 문헌이 불명확하다는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그러나 처음 소개될 당시 일본의 재야학자 아고 기요히코(吾郷清彦)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라 평가하였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기록과 《고시코덴(古史古伝)》등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주장이나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변론은 다음과 같다.
《환단고기》가 후대에 위조된 기록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1]
《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대한제국이나 일제 강점기 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21]
이러한 견해는 변용된 정도를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22]과, 직접적인 인용은 피하면서 대체적인 흐름만은 참조할 수 있다는 주장[23]이 있다. 다만 후자에서 천문학을 이용해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박[24]도 있다.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5] 민족주의, 특히 피식민지 상태의 민족에게서 발달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배타성보다는 제국주의 일본이나 나치 독일 등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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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혀 다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동이에 대해 나옵니다. 실록을 보셨으면 그것은 보셨을 것입니다.
오랫만에 빙고가 하나 나왔습니다....감사합니다.
글의 오타를 수정하고 수정해도 계속 오타가 보입니다.
괸히 올렸나 봅니다.
졸려 죽겠어서...내일 수정해야겠습니다.
불편하더라도 참고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상상고사>에 대한 문헌이 아주 귀하고, 너무 오래된 역사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화 또는 전설정도로 취급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사가 신화나 전설로 치부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신들의 선대 조상(인류)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현 대륙에서도 일부 학자들은 황제로부터 시작되는 삼황오제는 동이족이라고 말합니다. 그 혈통을 따지고 들면 모두 동이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동이의 역사며, 동이는 조선의 역사라고 여깁니다. 삼황오제나 신농씨, 천지인황 모두는 동이인들이며, 이것은 중국 아이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입니다.
"동이"란 총령의 동쪽에 살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며, 단군 역시 마찬가지라고 여깁니다. 단군을 무슨 무당 단체의 제사장이니 하는 말은 그 분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미신적인 요소는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 현대에도 예수니, 석가니 하면서 그들을 받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야 더 하였겠지요. 그러나 무리 집단에서 미신이 전부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또 그들이 신이 아닌 이상 수천 수만리를 마음대로 오고갈 수도 없지요. 사기 오제본기를 보더라도 그들은 모두 혈통으로 내려오며, 이 혈통은 모두 옛 조선왕조의 혈통으로 내려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물론 옛 고전을 백퍼센트 신뢰할 수 없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생생하게 전하는 동이의 혈통은 그 기록외, 어떤 것에서도 현대에 확인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4-5천년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중국아이들은 헌원이 자신들의 한족 선조라도 떠들다가 갑자기 자신들도 동이의 후예라고 말할까요? 고전에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를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이란 동이족의 영토안에 선택받은 동이(황성과 기전지방)들이 살았으며, 이들이 바로 화하인이며, 중국인이며, 고려인입니다. 상호간에 생각의 다름은 있을 수 있으나, 치우가 조선인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선대 아버지, 할아버지등도 당연히 조선인이겠지요.
허구 반도설을 검증과 수정이 있은후 역사를 보는 기준이 허구 반도설에서 벗어나후에 환단고기를 검증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놈이 만들어준 허구 반도설을 기준으로 환단고기를 해석 한다면 왜독에 빠져 많은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대륙이 우리에 역사 강역임을 알면 대륙사를 기준으로 환단고기를 해석해야 좀더 바른 해석이 되면 위작논리는 사라 질것이라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