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우는 소리
이재부
달이 허물을 벗 듯 구름자락을 빠져 나온다. 수 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우주 만물의 운명인 듯 달과 구름은 하늘 길에서 끝없이 만나면서도 아픔 없이 헤어지는가보다. 계절과 곤충의 만남도 그러한가? 매미 소리가 작아지더니 귀뚜라미 우는소리가 힘을 얻는다.
귀뚜라미는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삶의 터전을 확대하는지 도시의 가을밤도 그의 소리로 깊어간다. 어디서 몇 마리가 우는지 끊이지 않고 울어댄다. 고독의 시를 쓰는 듯, 가을을 재촉하는 듯 밤을 지새며 울고 있다. 귀뚜라미가 우는 이유는 짝을 찾거나, 영역을 지키거나, 사랑을 나누는 소리일 테지만 내 귀에는 그리움의 노래로 들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떨고 있는 생명 줄이라고나 할까. 귀뚜라미 우는소리는 그리움의 하소연 같아 귀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에 쌓인다.
항상 내 곁에서 즐거움을 주던 그는 그리움을 남겨 두고 떠났다. 만남이 약속 된 기다림은 큰 행복이라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귀뚜라미 우는 밤에 창가에 서면 그는 벌써 내 마음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데……
"군대 다녀오겠습니다." 절하고 떠나 간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휴가 오면 연락 드리겠다는 말을 믿고 때가 된 듯 싶어 전화 오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전화는 오지 않았다. 긴 기다림 끝에 1년이 훨씬 넘어서야 전화가 온 것이다.
"선생님! 저 민이예요. 그간 전화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저 몸을 다쳐서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면회도 오지 말라고 한다. 그 전화를 받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귀뚜라미 우는소리가 통곡의 소리로 들린다. 왜 더 크게 우는지 찌르륵 찌르륵 가슴을 파고든다. 문병 갈 생각을 하며 온갖 상상을 끌어 모으는 긴 밤을 보냈다.
그는 친절하고 사교적이며 정이 많아 늘 나를 기쁘게 하는 학생이었다. 자식 같이 사랑하며 즐거움을 나누지만 자식과는 또 다른 사랑의 영역이 있다.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서는 엉뚱한 생각에 오히려 늙은 내가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손잡고 마음을 열며 세상이야기 담아 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갖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내 마음을 곁에서 들여다 보고 있는 듯 생활에 그늘이 질 때 용케도 찾아와 행복한 웃음을 안겨 준다. 학교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선생님! 선생님보고 싶은데요" " 나는 안보고 싶어..... 잡된 생각 하지 말고 공부해" "잠깐이면 되는데, 나 초밥 먹고 싶은데....."
퇴근 시간을 서둘러 약속 장소에 나갔다. 꼭 먼저 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사춘기도 아니고, 어색한 몸짓으로 멍-하니 건물 그늘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있는데 뒤에서 선생님! 외치며 환한 웃음을 안겨 준다. 생각치 않은 꽃바구니를 들려주면서.
내일이 스승의 날이니 시간을 아끼려고 저녁식사 시간에 짬을 낸 듯하다. 가락국수와 생선초밥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술술 풀어내는 어리광이 얼마나 기발한지 표정 하나 하나가 장미꽃 속의 아침 이슬보다 영롱하고 향기롭다. 만날 때마다 분위기를 이끈다. 꽃대보다 더 미끈하면서도 섬세한 재치에 동화되어 나는 소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소녀 같이 웃어야 한다.
식사를 급히 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학교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슬픔을 보이지 않는 천부적인 그의 미소가 오히려 나를 울린 때도 있었다.
5학년 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함께 조문을 받는 그는 나를 보더니 빙긋이 웃음을 띤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그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는데. 철모르는 웃음 속에 숨어있는 슬픔 때문에 목이 메인다. 허공에 뜬 그의 미소를 보면서 차라리 울었으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아 눈물을 감추지 못 했었다.
병원에 찾아갔다. 병상 옆에는 목발 두 개가 놓여있고, 석고 붕대로 무릎을 싸맨 민이는 잠들어 있었다. 말없이 되돌아 나와 병원 정원을 서성이며 잠 깨기를 기다린다. 정이란 무엇이기에 그의 곁에서 주춤거리게 하는가. 정은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니리. 가슴에서 솟아나는 진홍색 피가 걸러내는 측은지심이 아닐까. 가슴이 아프다. 귀뚜라미는 내 마음을 아는지 여기까지 따라와 상심(傷心)의 비가(悲歌)를 부른다. 텅- 빈 가슴에 눈물을 감추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듯.
(2006. 9. 23)
첫댓글 일곡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찡 하게 아려옵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함께 남다른 제자 사랑을 느끼고 갑니다.
선생님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제자를 많이 아끼시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이 또 뭉쿨 합니다.
선생님은 아버님을 잃고 다리를 다치고 하는 민이를 참으로 안쓰러워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 민이는 세상 누구보다 행운아라 생각됩니다.
매정한 귀뚜라미 소리가.......제자의 측은함을....갑절로 무겁게 했네요.......제자의 쾌유를 빕니다....
많이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선생님의 제자 사랑은 참으로 지극하십니다.빠른 쾌유를 빌며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심신의 아픔이 실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금년 봄 조금지나 장마가 시작되전 남다른 제자이야기를 감명있게 들어었는데.그 제자가 다쳤다니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루 빨리 쾌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선생님 마음도 편안하시죠.
일곡 선생님의 사랑의 깊이가 바다를 닮은 것 같습니다. 온화한 미소 속에 맑은 샘 같은 선생님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갑니다. 사랑 속에서 해가 지고 또 사랑이 머무는 그 숨결이 삶인 것 같네요. 제자의 빠른 쾌유를 빌며 만나는 그날 까지 건강하소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결국 또로륵 흘러내리고 맙니다..귀뚜라미의 울음이 그리움의 노래로 들리시는 마음에 뭉클하며 저녁에 뵙고온 엄마가 생각나며 선생님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같아 아립니다...
감동 먹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