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주지역은 원래는 서역의 강족(羌族)의 땅이었는데, 기원전 6세기경 진나라 땅의 일부가 되었다. 한나라 통치기에는 서안의 한 현인 진성현(金城县)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한때는 황금도시라고 불렸는데, 기원전 1세기 때부터는 천산북로를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통로이자, 중요한 황하가 흐르는 통로였다. 난주를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이 옥문관까지 확대되었다.
한나라가 멸망후 난주는 여러 다른민족 국가들(전량,북위.수,당,티벳. 다시 당.서하,송,금,몽골,명,청)의 중요 관리지역이 되었기에 다른 문화 유산들이 혼합되어 현재의 감숙성 지역은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불교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난주(란저우)는 기다랗게 생긴 감숙성의 성도로 중국대륙의 거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육도의 심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난주부터는 자연환경이나 사람들의 분위기가 현저히 바뀐다. 여기서부터는 사막이다. 오아시스마다 도시가 발달해 있다. 사람들도 이슬람교도인 회족이 많이 살고, 위구르인 등 소수민족이 많이 보인다. 한족들을 전략적으로 많이 이주시켜서인지 도심에서는 한족이 많이 보인다.
또한 이곳은 유가협댐의 건설로 풍부해진 수력발전, 난주에서 옥문유전까지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의 건설로 풍부한 석유, 교통의 요지라는 점에서 서북지역 최대의 공업도시로 발전했다.
누런 황하가 도심의 중심을 흐르고 있으며 강가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었고 도심도 깨끗하고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소적석산으로 둘러 쌓여있는 병령사는 중국 석굴 중 기록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석굴, 그러나 실제 연대는 건홍원년인 420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보고있다.
당나라 때 불상을 중심으로 북위 시대 불상부터 여러 시기 불상 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병령(炳靈)은 티베트어로 '십만불'이라는 뜻인데, 천불동, 만불동 등과 같이 많다는 의미이다. 병령사 석굴은 5호 16국 시대인 420년 서진시대부터 시작해서 명대까지 조성되었으나 룡흥사(龍興寺)로 불리던 당나라 때 가장 활발하게 석굴이 지어졌다. 송대에 이르러서도 토번과 서하의 침입에 대처하는 의미로 불심을 모으기 위해서 많은 참배자가 찾았다.
이에 따라 불상에 대한 공양이나 동굴의 수리가 계속 이어졌고 원나라 이후에는 라마불교가 유행해서 라마불교 양식의 석각이 조각되었다. 약 1500년간 183개의 석굴과 776구의 불상이 조성되었다.
크고 작은 석굴은 상하로 나뉘어져 산기슭을 따라 2km에 걸쳐 이어진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조각과 지금도 색채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보살, 비천 등의 벽화가 남아 있다.
병령사 석굴군의 대표격인 현암좌불은 당대에 조성되었으며 높이가 27m인데, 상반신은 천연의 석주를 이용하여 조성했고 하반신은 찰흙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바위자체가 입자가 작고 점착력이 좋은 사암으로 되어 있어 뚫거나 조각하기에 좋았다.
석불이 어찌나 큰지 강의 반대편에 서서야 한눈에 들어온다. 불상의 자태는 풍만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거대한 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석굴들이 서로 잘 조화되어 장관을 이룬다. 원래 대불 앞에는 다층누각이 있었지만 청대 말 화재로 소실되었다.
석굴의 아랫부분에 있던 와불상은 댐건설로 물이 차오르면서 보존의 어려움이 있자 석굴 맞은편에 따로 절을 지어 실내에서 보관하고 있다. 예술적으로는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169번과 172번 석굴은 사다리를 타고 석벽을 올라가야 하는데 입구가 막혀 있다.(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안내를 받아야 한다)
병령사는 아직 수도승이 남아있는 절이고 대부분 티베트 불교 승려라고 한다.
원나라이후에는 라마불교가 유행해서 라마불교 양식의 석각이 조각 되어있다 한때 이곳이 티베트의 고대왕국인 토번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쾌속정위에서 보는 병령사
티벳 양식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선착장에서 석굴쪽으로 가며 보이는 풍경들
현암대불 앞에서
대불앞 다리위에서
다리건너 와불보존을 위해 새로이 조성된 건물
다리건너 입구쪽으로 걸어가며 보는 풍경들
물위에 비친 두 자매봉
입구쪽 다리위에서 다시보는 현암대불
매표소와 선착장이 보인다.
떠나는 배위에서 다시보는 병령석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