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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교 단 사(敎 團 史)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순복음, 침례교)
Ⅰ. 서 론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 이래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가는 과정 중에 교파(敎派)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교파의 분열을 통해서 인간 이성의 어쩔 수 없는 한계와 또 자신만이 최고이며 옳다는 생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죄성(罪性)들을 밝혀내셔서 서로 견제하며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미숙함으로 파벌(派閥)을 짓고 분열을 드러낸 것처럼, 아직 우리도 미숙함으로 교파와 교단을 분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주님이 한 분이시고, 믿음이 하나이고, 진리가 하나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파들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요인(要因)을 성경적으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에 본 소고(小考)는 교회사 속에서의 대표적인 교단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아직은 미숙하여 흐릿하게 밖에는 주님의 진리를 볼 수 없음을 인정하며, 그 날에는 밝히 볼 수 있을 것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교단사를 진술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장로교회(長老敎會 - Presbyterian Church)
1) 장로교회의 역사적 기원(起源)
장로교회는 신앙과 신학적으로는 칼빈의 개혁주의 체계(體系)를 믿으며, 행정에 있어서는 장로 중심의 민주적 정치 체제(體制)를 따르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는 기독교회의 교리 체계를 말하는 명칭이 아니고, 교회 행정에서 기원(起源)된 기독교회의 명칭이다. 이는 이미 성경에서 나타난 장로들에 의한 정치 형태로서 칼빈이 성경의 원리를 체계화 한 것에 불과하며, 그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장로교회가 없다는 항간(巷間)의 주장은 성립되지 못한다.「신학사전」, 개혁주의신행협회, 신학사전 편집위원회, 1988. p. 591
① 구약시대 - 초대교회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회의 제도는 처음부터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장로회 제도였다. 스데반은 모세 시대에 존재했던 “광야 교회”(행 7:38)를 말했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광야 교회의 지도자로서 장로들을 세워 다스리도록 하였다.(출 3:16) 장로들의 하는 일은 모세가 받은 성령을 그들도 함께 받아 모세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민 11:17)하며 백성을 지도하는 일이다.「복음과 역사」, 김의환, 기독교문서선교회(C.L.C), 1975. p. 209
그리고 초대교회에 있어서도 교회의 지도자를 장로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장로와 감독 “지역교회를 공적으로 맡아 목회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신약적인 명칭, 에베소 교회(행 20:28)와 빌립보 교회에서(빌 1:1) 감독은 교회를 다스리는 자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 일차 투옥 후에 바울도 감독의 직분을 인정하였다.(딤전 3:2, 딛 1:7) 신약에서 감독과 장로는 거의 유사한 직분이었다. 그러나 A.D.2세기경부터는 그 직분이 서로 분류되었다. 감독의 임무는 설교를 포함하여 양떼를 보살피는 일이었다.(행 20:28) 흥미롭게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감독“이라 불렀다.(벧전 2:25) 장로들도 감독과 함께 목회에 참여했다.(5:1)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목회자와 후원자는 그리스도이시다.(2:4-8)
-「아가페 성경사전」, 아가페서원, 성경사전편찬위원회, 1998. pp. 46-47
은 같은 뜻으로서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② 초대교회 이후 - 종교개혁(1517)
중세기 로마 카톨릭 시대에 들어서는 감독과 교황정치의 체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을 통해 장로회 체제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 근대적 의미에서 장로교회의 출발을 칼빈(J.Calvin 1509-1561)과 녹스(J.Knox 1514-1572)에게서 보는 것이며, 장로회의 체제를 갖추는 일에 주역(主役)이 된 사람은 칼빈으로 평가된다.
칼빈은 사도시대의 교회체제를 근거로 하여 성경적 장로교회 체제를 갖추기 위해 1542년 교회헌법을 작성하였다. 이 교회헌법은 구미(歐美)의 모든 장로교회에서 채택되었다. 한국장로교회에서도 이 교회헌법을 교회의 모범(模範)으로 채택하고 있다.
2) 종교개혁과 구미(歐美) 장로교회
칼빈의 영향력에 의해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s) "이들은 칼빈주의자들로서 대부분 중간계급이었으며 상업과 은행과 공장과 작업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광대한 사회 속에서 소수당(Minority)이었으나, 가장 영향력 있는 요인(要因)들이었다. 그리하여 “위그노는 부(富)하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세계기독교회사」, B.K카이퍼 著, 김해연 譯, 성광문화사, 1993. pp. 366-377
들은 핍박 속에서도 1559년 파리에서 첫 총회(general synod)를 개최할 만큼 강해졌다. 여기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으며, 칼빈의 교회론에 근거한 장로교 헌법을 채택했다. 이로써 프랑스 장로교회는 근대적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장로교회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녹스의 종교개혁운동에 의해서 장로교회가 탄생했다. 녹스는 1560년 스코틀랜드 총회를 열었고, 다음 해 1월 “제일 권징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녹스에 의해 당회(session), 노회(presbyteries), 대회(synods), 총회(General Assembly)가 생기고 발전되었다.
1643년 영국에서는 공동기도서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데 대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야말로 장로교회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예배의식서, 교회제도, 교리문답서 등이 작성되어 세계 장로교회의 기본적인 신앙문서가 되었다.「교파의 유래」, 심재원, 대한기독교서회, 1984. pp. 28-29
미국에서는 1611년에 버지니아 장로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다. 1706년에 필라델피아에서는 연합의 성격을 띤 최초의 장로교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후 요나단 에드워드에 의하여 일어난 대 각성 운동으로 장로교회의 신앙부흥운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19세기에 켄터키에서 컴벌란드(Cumberland Revival) "한 집회가 붉은 강(Red River) 위에서 흥분을 동반하여 열렸는데, 많은 사람이 회심하였다. 그 소문은 퍼져서 군중들은 점점 더 많아졌으며, 그들은 준비하고서 수일씩 마당에서 기다렸다. 이것은 아메리카 복음주의의 보편적 관습이 된 천막집회의 시작이었다. 어떤 집회는 밤낮 나흘 동안 계속 되어서 일백명의 회심자를 보았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세계기독교회사」, B.K카이퍼 著, 김해연 譯, 성광문화사, 1993. p. 434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1863년에는 미국으로 이민한 독일 개혁교회 신자들이 피츠버그에서 대회를 조직했다. 1847-1857년에는 화란에서 이민한 사람들의 미시간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남북전쟁으로 인해 남 장로교회와 북 장로교회로 분리되었다.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지에는 영국계 장로교회가 생겼다.
3) 한국 장로교회
①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곧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다름이 없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인 서상륜 등은 비록 국외에서이긴 하지만 선교사가 입국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쪽 복음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그로 말미암아 최초의 장로교인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개신교회인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1884년)에 세워지게 되었다.
1884년 북 장로회의 알렌(H.N.Allen)이 의료선교 활동을 한 이후,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H.G.Underwood)가 들어왔다. 그는 부임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압록강에서 32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는데, 이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장로교인이 많이 존재했었음을 말해준다. 초기에 설립된 장로교회들을 보면 소래교회, 서울의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이다.
1889년에는 호주 장로회 선교사들이 경남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폈으며, 1892년에는 남 장로회 선교사들이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함경남북도와 간도(間道)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폈다. 그리고 4개의 장로교선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창설을 신학교육, 문서사업에서 연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로교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를 조직하여 마침내 1901년에는 4개의 장로교회가 협동으로 연합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신앙의 뿌리」, 총회역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홈페이지
②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과 분열「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594
해방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神祠參拜)를 거부했던 옥중(獄中)성도들의 문제와 고려신학교의 총회 인준 문제로 1949년 4월 제35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결의를 함으로 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고려파가 분리되었다. 또한 조선신학 교수였던 김재준 목사의 신학적 자유주의는 한국신학교에서 총회를 열어 1954년 6월 10일 “대한 기독교장로회”로 개칭(改稱)하여 신앙의 자유주의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자유주의 경향에 대한 탈퇴의 문제로 1959년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에서는 탈퇴를 주장하는 칼빈주의의 합동장로교회, 1960년 2월 27일 서울 연동교회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신학적 자유주의의 통합장로교회로 분리되었다. 한국장로교회는 한 세기도 채 못 되어 크게 발전하였으나, 신앙과 신학적 정립의 결여(缺如)초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었다. 현재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 칼빈주의 계통의 “합동”, “고려”측과 급진적 자유주의 계통의 “통합”, “기장”측으로 나누어져 있다.
4) 장로교회의 교리(칼빈주의 5대교리 - 5 Points of Calvinism)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1643-1647)은 장로교회의 기본 교리이다. 장로교회의 12신조는 뚜렷하고 분명한 장로교의 신앙고백인데, 이를 더 요약하면 칼빈주의 5대교리「차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102.
로 말할 수 있다.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죄 가운데 빠져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인간의 전(全) 존재와 성품은 죄로 물들었다.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은 영원 전에 어떤 자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셨다. 선택과 예정은 무조건적이다. 인간의 노력이나 응답은 필요 없다.
③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택자들을 위해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가 죽으신 그들만 구원 받는다.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택함을 받아 제한속죄 속에 들어온 그들을 항거할 수 없는 은혜로 이끄신다. 주님이 부르시면 인간은 응답하게 된다.
⑤ 성도의 견인(Perseverence of the saints)
선택된 자들은 아무도 구원을 잃지 않으며 신앙 안에서 견인(堅忍)되며 그들은 영원히 안전하다.
2. 감리교회(監理敎會 - Methodist Church)
1) 감리교회의 역사적 기원「존 웨슬리의 생애」, 박춘희, 감리교자료, 기독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2005. 11. 14. pp. 3-4
① 신성클럽(holy club)의 지도자 웨슬리 (John Wesely, 1729 - 1735)
웨슬리는 1729년에 동생 챨스를 중심으로 소수의 학생들이 학문과 경건의 훈련을 위하여 신성클럽을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였는데, 초대교회의 신학을 연구하며 성만찬 예배와 금식기도 등의 경건 훈련에 전념하였다. 또한 이들은 자선사업, 감옥방문, 병자위문 등의 선한 일에 힘쓰는 생활에 전념했다. 이러한 규칙적이고 엄격한 생활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규칙주의자들(Methodists) 당시에 이 별명은 지독한 형식주의자들이란 뜻으로서 비아냥거리는 의미였다.
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감리교회의 명칭이 되었다.
② 선교사 웨슬리 (1735 - 1737)
웨슬리는 신대륙의 조지아(Georgia) 주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하여 1735년 10월에 런던을 떠났다. 도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는데, 자신과는 다르게 평안한 가운데 기도와 찬송을 하는 모라비안(Moravian) 당시 독일의 루터파의 한 종파로서 경건주의 생활을 주장하는 교파였다.
교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또한 연애설에 휘말리는 등 선교에 실패를 하고 1737년에 귀국을 하게 되었다.
③ 웨슬리의 회심(1738)
귀국한 그는 링컨 대학에서 가르치며 신성클럽 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으나 깊은 좌절에 빠진 그에게는 믿음과 구원의 문제가 절박하였다. 그러던 중 1738년 5월 24일 오후 8시 45분쯤 런던 시내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거리에 있는 교회에서 한 예배 사회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도중 웨슬리는 구원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그 길로 동생을 찾아가 “나는 믿는다.”라고 외쳤다.
④ 감리교회의 설립「신학사전」, 개혁주의신행협회, 신학사전 편집위원회, 1988. p. 20
웨슬리는 체험 이후로 국교회와 단절하고 야외집회, 공회당 등 대중 집회에 힘쓰며, 속회를 만들어 기도 및 성경 공부를 시키고 또 경제적 도움이 되게 했다. 1739년에는 동조자들과 함께 감리교 신도회(Methodist United Society)를 설립하였다. 1744년에는 연회(Conference)를 조직하여 감리교회가 정식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감리교의 원리를 실천하는 새로운 기틀이 세워졌다.
2) 발전 과정「감리교회와 속회(요약본)」, 감리교자료, 통합자료실, 기독교대한감리회, 2005. 11. 14. pp. 4-5
① 영국 감리교회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정적주의(Quietism)”, “영적자만(自慢)의 경향”, 진젠드로프 백작위주로 성장해 가는 개인숭배적 경향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모라비안 교도들과 웨슬레의 신도들 간의 주도권 문제까지 겹쳐 감리교도들만이 분리되었다. 결국 영국 감리교회는 웨슬리가 국교회, 신성클럽, 모라비안의 회원과 지도자로 있으면서 그들의 신앙단체에서 점차 벗어나 감리교회 운동으로 발전 되었던 것이다.
② 미국 감리교회
1766년 영국의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사람들(P.Embury, R. Strawbridge)로부터 시작되었다. 감리교회 운동이 평신도들에 의하여 미국에서 시작되자 웨슬리는 1769년 리드연회(Methodist Conference of Leeds)에서 젊은 교역자 리차드 보드맨(R. Boardman)과 죠셉 필모어(J. Pilmoor)를 미국에 파송하였다. 이들은 미국에 온 최초의 정규 감리교 선교사들로서 필라델피아와 뉴욕 등지(等地)에서 열심히 설교하고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감리회 회원들과 선교사들은 남부와 북부, 그리고 신개척지 서부 등으로 찾아 가면서 “복음을 설교하고 신도회와 속회를 조직하고 설교 장소를 마련하고 순회전도구역(Circuits)들을 확보해 나갔다. 미국의 감리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훌륭한 감독과 또한 순회 전도자(The circuit Rider)의 중요한 역할 덕분 이었다. 그리하여 감리교 신도 수는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3) 한국 감리교회
미 감리교는 스크랜톤(W.B.Scranton)과 아펜젤러(H.G. Appenzller)를 의료와 교육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했다. 이들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 하였다. 아펜젤러는 8월 3일에 학생 2명으로 “배재학당”을 시작 하였고, 스크랜톤의 부인은 1886년 5월 31일, 학생 1명으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1908년 3월 11일에는 정동교회에서 제 1회 한국 연회(The First Session Korea Annual Conference)가 조직 되었다.
한편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인 윤치호의 요청으로 남감리교회의 선교가 시작이 되어 1895년 10월 13일에 동양 선교 책임자 핸드릭스 감독(E.Hendrix)과 리이드(C.F. Ried)가 내한하였다. 1898년 1월 16일에는 고양읍에서 제 1회 서울 구역회가 개최되고, 1918년 10월 31일에는 개성에서 남감리교회 제 1회 한국 연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서울 감리교 협성 신학교에서 역사적인 기독교 조선감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게 되어 남북 감리교회는 하나의 감리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감리교 대부분의 신학교가 전통적 자유주의 신학 및 신정통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사회 복음주의를 강조하며 에큐메니칼(ecumenical - 교회일치) 운동에 힘쓰고 있다.
3) 감리교회의 교리「기독교 연감」,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1976. p. 279.
신학은 알미니안(Arminian)주의로서 교리적 표준문서는 웨슬리가 1784년 미국감리교회를 위해 마련한 신앙의 25개조 및 웨슬리가 쓴 신약에 대한 설교와 노트 등이다.
① 보편적 구원
구원은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② 자유 구원
인간은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③ 완전한 구원
완전한 교인은 죄를 짓지 않는다. 또한 규칙적인 생활은 교인의 완전에 이르는 필수적인 방법이다.(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
④ 확실한 구원
구원의 확실성은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 있다. 객관적이요 먼저 오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와 성령의 직접적 증거의 결과인 인간 자신의 영의 증거로 구성한다.
3. 성결교회(聖潔敎會- Holiness Church)
1) 역사적 기원
① 19세기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성결교회 신학의 역사와 특징」, 이신건 엮음, 성결신학연구소, 2000. pp. 215-217
19세기말 미국에서 일어난 성결운동은 웨슬리의 성결의 복음을 다시 한 번 일으키고자 하는 강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1867년의 전국성결연합회는 수많은 성결교파들의 모체가 되었다. 이때 미국에는 신유(神癒)운동과 전(前)천년설적인 재림사상이 매우 강하게 퍼져 있었다. 성결운동 가운데는 중생과 성결의 전통적인 웨슬리안(Wesleyan)의 복음만을 주장하는 단체와 이것과 더불어 신유와 재림의 복음을 받아들이자는 그룹이 있었다.
전자(前者)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주류(主流)라면, 후자(後者)는 급진파 성결그룹이라고 불리운다. 전자가 에즈베리와 나사렛 교회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성서학원과 만국성결교회이다. 만국성결연맹은 1920년대에 여러 성결그룹들과 연합하여 필그림성결교회가 되었고, 1960년대 말에는 웨슬리안 감리교회와 합하여 웨슬리안 교회가 되었다. 한국성결교회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단체가 바로 이 단체이다.
② 성결과 완전주의자(Perfectionist)
웨슬리의 전통을 따르는 모임은 흔히 “성결”과 “완전주의”를 말하는데, 성결교의 신앙은 여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겠다. 현대 완전주의자의 역사는 부흥회와 관련이 있는데 특히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에 의한 부흥운동이다. 그는 완전한 성화(entire santification) “개종은 자기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 그리고 강한 감정적 격정 아래서 일어나는 인격적 복종이며, 완전한 성화란 악한 생각들로부터 완전한 해방으로 개종에 따라 일어나는 순간적 행위인데 모든 신자에게 있어야 할 정상적 체험이다” - 「신학사전」, 편찬위원회, 개혁주의 신행협회, p. 278
교리를 형성 보급시킨 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운동은 당시 남북전쟁 후에 종교에 무관심하고 도덕이 땅에 떨어져, 세상 풍조가 교회 안으로 마구 흘러들어오는 때에 감리교 내에서 일어나 많은 개신교도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마침내 따로 독립하여 교회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2) 한국 성결교회
미국의 “만국성결연합”에서 최초의 목사와 선교사로 안수를 받은 카우만(C.E.Cawman)과 길브론(E.A.Kilbourne)은 일본에서 “동양선교회”를 창립하였다. 목적은 새로운 교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모든 나라에 “순복음”을 전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1907년 조선 통신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갔던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이 전도를 받고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면서 동양선교회 산하 성서학원에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3월에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정빈과 김상준은 카우만, 길보른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의 종로 1가(염곡)에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을 세웠다. 이것이 “경성복음전도관”이다. 정빈과 김상준은 “직접전도”로서 노방(路傍)전도를 하며 종로 한복판에서 불을 토하듯 외쳤으며, 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성결교회는 이들의 뜨거운 전도열에 의해 확장되었는데, 이는 다른 교파와는 달리 한국인이 주도(主導)한 전도 사역으로서 성결교회의 자랑으로 꼽고 있다.「성결교회 신학의 역사와 특징」, 이신건 엮음, 성결신학연구소, 2000. pp. 174-177
1945년 이후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1961년 제16회 총회에서 교단이 보수주의를 따르기로 한 예성(예수교 대한성결교회)과 자유주의도 포용하는 기성(기독교 대한성결교회)으로 분립되었다. 예성측은 84년 혁신측 50개 교회를 가입시켰으며, 혁신측은 칼빈의 예정론을 따르게 되었는데 기성은 알미니안의 예지(豫知)예정을 따르고 있다. 기성은 서울신학대학교, 예성은 성결대학교에서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다.
3) 성결교회의 교리 - 사중복음(四重福音)「신학사전」, 편찬위원회, 개혁주의 신행협회, p. 279
① 중생
중생은 영으로 나는 일이며 신비에 속한 영적 변화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사람의 심령과 인격 전체에 근본적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다.(요 3:3)
② 성결
성령의 세례를 가리킨다.(행 1:4) 신생(新生)한 자도 아직 받을 은혜가 있는데 곧 성결의 은혜이다.(히 12:14) 교회를 거룩하게 하며 부흥의 원동력이 되는 복음이다.
③ 신유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 중에 지내는 것과 병들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마 4:23, 16:17-18)
④ 재림
구약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성육탄생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믿으며, 재림신앙은 성결 생애의 요소요, 전도 생애의 소망이요, 신앙의 큰 경성(警省)이 된다.
4. 구세군 (救世軍 - The Salvation Army)
1) 역사적 기원
①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윌리엄 부스의 생애」, 구세군 대한본영 홈페이지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14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당포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전당포업자로서의 일상(日常)은 그가 매일 보는 가난과 고통에 대한 깊은 증오로 마음에 남게 되었다. 윌리엄은 15세에 크리스챤이 되어 노팅험의 웨슬리교 채플에 참석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영국 도시빈민들을 돕고자하는 열정이 생겼고, 이는 그의 삶 내내 그를 이끄는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② 구세군의 태동(胎動)과 초기 활동
윌리엄 부스는 신파(新派) 감리교 목사였으며, 카디프(Cardiff)에서 성공리에 부흥 활동을 마친 후, 1864년 런던에서도 비슷한 일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78년 군인처럼 복종하는 군대 형태의 조직이 발달했고, 1880년 그것에 구세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항상 노방전도와 더불어 실천적 박애(博愛)에 강력히 관여했기 때문에, 1890년 초 부스가 그의 「암흑의 영국과 그 출구」를 출판했을 때, 자선 사업은 대규모로 발전했다. 전제적(專制的) 군대 형태에도 불구하고, 구세군은 많은 점에서 하나의 교회였다. 이따금 독단적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였지만, 구세군은 장애인과 범죄인을 위해 대규모 자선 사업을 벌여왔으며, 모든 영어 사용 국가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동양 등지(等地)로 확장되었다.「기독교회사」, 윌리스턴워커 著, 송인설 譯,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 714
③ 세계를 향한 구세군
구세군이 발전해 감에 따라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하는 분류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기성(旣成) 기독교인들과 구세군으로 인하여 손해 본 사람들로서 술장사, 유흥업자들이었다. 구세군이 들어가면 술꾼이 없어지고 장사가 안 되어 망하는 경우가 빈번하면서 이들의 핍박이 심하게 행해졌다. 그리고 완고한 당국자들, 경찰관, 재판관들은 구세군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 처리를 불리하고 부당한 판결을 내려 곤란케 했다.「역사」, 세계구세군, 구세군 대한본영 홈페이지
그러나 윌리엄 부스에게는 "가라! 영혼에게로, 극악한 자에게로"(막15:15)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최대 소원이요 포부였다. 1883년 구세군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구세군은 영원까지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단체"라고 대답 하였다.
2) 한국 구세군「역사」, 한국구세군, 구세군 대한본영 홈페이지
한국에 구세군이 전파된 것은 1907년 윌리엄 부스의 일본 순회 집회 때 참석했던 조선 유학생의 요청에 따라, 1908년 10월에 정령 허가두 사관(Colonel Hoggard, 영국)에 의해 시작 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나라를 잃은 민중들에게 제복 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어, 1908년 11월 22일에 한국 구세군의 첫 번째 교회(영문- Corps)인 서울 제일영(현 서대문 영문)이 당주동에 개영(開營)하게 되었다.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초대 한국사령관인 허가두 정령의 8년간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교회) 78개소를 개척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941년 일본에 의해 “구세단”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해외사관들은 모두 귀국 당함으로 일본 구세군에 의해 운영되었다. 1943년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 구세군은 강제 폐쇄되어 지하교회로 그 명맥을 이어오던 중, 해방 이후 1947년 새로운 사령관의 부임과 더불어 사업이 재개되었다. 현재 220여개의 영문(교회)과 100,000여명의 교인, 지역사회복지 시설 220여개, 전문 사회사업시설 47개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등 선교와 사회사업에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3) 교리와 조직
구세군은 11개 교리에서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윤리면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일반적 지식(神認識)은 반드시 성서적 지식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하여 부스가 초대 대장이 되었다. 각 군국(軍國)에는 사령관이 있고 지역사령부에는 지역사령관이 있다. 또한 군국마다 각 지방을 관장하는 지방장관이 있으며, 각 지방에는 소속된 영(營)이 있어 담당 사관이 복음 선교와 예배, 지역사회 봉사사업을 지도한다. 영문(營門)에는 병사가 있는데, 이들은 구세군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의 죄악과 싸울 것을 다짐하고 병사로서 동참하고 있다.「구세군」, 네이버 백과사전
5. 순복음교회 - 하나님의 성회 (Assemblies of God)
1) 역사적 기원
①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
20세기의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보수적 성경해석 방식, 전천년설, 엄격한 도덕성 그리고 믿음을 통한 치유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였지만, 성령강림의 교리와 방언의 교리는 오순절파에만 있는 특징이어서 두 운동은 곧 분리되었다. 수에 있어서는 오순절파가 성결파 교회를 능가하였다.「기독교회사」, 윌리스턴워커 著, 송인설 譯,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731
이 새로운 운동의 효시는 찰스 파아함(Chales F. Parham)에게서 찾는다. 1900년 그는 캔사스주 토페카에 벧엘 성서신학교를 세웠는데, 학생들과 함께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함과 학생들은 삼일동안 밤낮 열심히 기도하던 중 1901년 1월 1일 새벽 오즈만(Agnes Ozman)양이 먼저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파함을 포함한 모든 신학생들이 방언을 시작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세 개의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성회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이후에 파함은 1905년에 휴스톤으로 옮겨가서 “저녁빛 성도”성결교파의 흑인 전도자였던 세이 무어(William J. Semour)에게 영향을 끼쳤다. 1906년 세이무어는 L.A의 아주사(Azusa)거리의 전설적 부흥운동에 불을 붙였다. 오순절 영성과 구별되는 복음주의 영성의 현대적 조명(5), 기독교윤리학, HEALER, 야후 블로그
②하나님의 성회의 탄생
말씀과 증인(Words and Witness)지(誌)의 편집인이었던 벨(E.N.Bell)목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in Christ)들과 오순절적 성도의 총회 소집에 대한 광고를 게재하여 1914년 4월 알칸사스주 핫스프링시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하나님의 성회의 성립, 교단연감신학편, 교단연감,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홈페이지
한국에서는 오순절운동이 “순복음”(Full Gosple)로 알려져 있는데, 이 용어는 파함 목사가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51년에는 평신도 초교파 기구로 설립한 “순복음 실업인선교회”가 세워졌고, 이 모임의 첫 설교자는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목사였다. 해외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목사들은 "순복음교회협의회"를 조직하여 정기 간행물 순복음 소식(Full Gospel News)을 발행했다.
2) 한국 순복음 교회
① 배 경
1928년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許弘)과 함께 정동(貞洞)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효시가 된다. 그 후 1932년 일본에서 돌아온 박성산(朴聖山) ·배부근(裵富根)이 서빙고에 오순절교회를 설립하고 교세를 확장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일본에서 오순절계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곽봉조 ·윤성덕 ·김성환(金城煥) 목사 등이 각기 고향에 교회를 세웠다.
오순절 운동이 직접적으로 순복음 교회와 연결된 것은 미국 “하나님 성회”선교사 A.B.체스넛이 내한하여 박성순 목사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신앙동지를 규합, 1953년 서울에서 교단을 창립하고 명칭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고 한 때부터이다. 같은 해, 교역자 양성을 위한 순복음신학교를 설립하였고, 1960년대에 “순복음” 운동을 하면서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총회, 네이버 백과사전
②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 교회
1958년 전도사 조용기(趙鏞基)와 최자실(崔子實)이 5명의 신도와 함께 서울 은평구 대조동(大棗洞)에서 천막교회로 출발하였다. 1961년 서대문로터리에 순복음부흥회관을 설립하여 이전하였는데 이때의 신도수는 100여 명이었다. 1962년 전도사 조용기가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 명칭도 순복음 중앙교회로 바꾸었다. 지금의 명칭은 1984년에 개칭된 것이다. 방언·예언·신유 등 성령의 은사를 핵심으로 하는 교리를 주장, 다른 교파로부터 이단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교세는 급속히 확장되어 1969년 여의도에 교회를 건축하고 2000년에는 신도 수가 70만 명이 되었다. 1981년 말 조용기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문제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하여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측으로 분리되었다. 지도자 양성 기관으로는 한세대학교와 순신대학교, 순복음신학교 등이 있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야후 블로그
3) 순복음 교회의 교리
하나님의 성회 신조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신조 16조를 요약한 것으로서,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을 확신하며, 인간의 타락과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속량이 필요함을 믿는다. 특히 성령 세례와 방언, 신유 등의 은사를 강조하며 내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예수의 재림을 강조하는 면에 있어서 모든 복음주의 교회의 신조와 동일하다. 신학적으로는 열렬한 근본주의자들인 동시에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며, 교회정치는 장로 정치와 회중 정치를 겸한 것을 채택하고 있다.
6. 침례교회(浸禮敎會 - Baptist Church)
1) 역사적 기원「기독교회사」, 윌리스턴워커 著, 송인설 譯,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611-613
① 영국의 분리(分離)주의 운동
침례교는 청교도의 한 종파로서, 창시자는 스미스(J. Smyth, 1570?∼1612)로 알려져 있다. 그는 1608년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여 게인스버러(Gainsborough) 회중교회 회원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는데, 1609년 자신과 다른 지체들에게 몰을 쏟아서 세례를 시행함으로 최초 침례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냐에 대한 질문은 침례교회 교회사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는 문제다. 신약성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침례를 베풀던 시기를 신약교회인 침례교회의 출발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세 가톨릭 교회의 내부 개혁세력인 루터나 칼빈의 개혁교회운동에 비견해 외부 개혁세력의 중심이었던 재침례교파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근거에 의하면, 기독교회사에 침례교회란 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44년쯤 영국침례교회의 발현에서부터다. 물론 유럽대륙 내에서 활동하던 재침례파 중 일원인 네덜란드의 재침례파 성도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침례교도의 영적인 선조는 신약성서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다. 교회사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신약성서적 표준과 모범을 이어온 일단의 무리와 종교개혁 시대 상당한 개혁 세력을 구축하며 역사 속에 등장했던 재침례파에서 그 영적 계승을 볼 수 있지만 침례교도란 공식 이름의 발단은 이때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 침례교회의 시작, 총회안내, 기독교 한국침례회 홈페이지
의 침례교회를 탄생시켰다.
② 영국 침례교회
스미스의 사후(死後) 헬위스(T. Helwys)와 머튼(J. Murton)은 귀국하여 1612년 영국 땅에 최초의 영속적인 침례교 회중교회를 설립했다. 아르미니우스적 견해를 가진 그들은 “일반침례교”로 알려졌다. 그 후 제이콥(H. Jacob)은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제도화 된 회중교회적 교회들의 범국가적 체제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제이콥은 1616년 사우스워크에서 한 교회를 설립했고, 이것은 최초로 회중교회주의 교회로 존속되었다.
그런데 1630년대에 제이콥의 교회에서 갈라진 일부 그룹은 신자의 세례가 성경적 규범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에서 제 2의 침례교 노선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특수 혹은 칼빈주의적 침례교”라고 불렸다. 그 이유는 피택자에게 국한된 특수 혹은 제한 속죄를 믿었기 때문이다. 1641년 그들은 침례(immersion)를 세례의 정당한 형태로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이것이 영국의 모든 침례교에 퍼져 나갔다.
③ 미국 침례교회
미국의 최초 침례교회는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경~1683)가 1639년 로드 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Providence, Rhode Island)에 세운 침례교회와 잔 클락(John Clarke) 이 1644년에 뉴포트(Newport)에 세운 침례교회이다. 1707년에는 필라델피아 침례교 연합이 조직되었다. 초기 식민지 미국에서 영국과 마찬가지로 침례교회는 박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대표적 박해의 사례로, 하버드대학교 초대 총장인 헨리 둔스터는 유아세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총장직에서 면직되고 그 식민지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정신으로 제퍼슨의 초기 미국 헌법의 기초를 이루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침례교회는 미국의 건국과 더불어 박해에서 벗어나 무한성장 할 수 있었다. 현재 미국 남침례회는 단일교파로는 개신교 중 세계에서 제일 큰 교파이며 가장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 되었다. 침례교회의 시작, 총회안내, 기독교 한국침례회 홈페이지
2) 한국 침례교회「침례교의 특징과 전개」(논문), 네이버 지식 iN
① 펜윅(Mr. Malcolm C. Fenwick)
펜윅은 1889년 캐나다의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1894년에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원산을 중심으로 침례교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펜윅은 재정적으로 선교지원을 받지 못하는 독립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독자적이며 독창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당시에 만주와 간도(間道)까지 선교사업을 확장하였을 정도로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이후 이는 “동아기독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② 해방 이후
동아기독교는 1949년 제9회 총회에서 교명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이 총회를 계기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미국남침례회와 손을 잡고 많은 변모를 겪었다. 1952년 42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다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문제는 미남침례회의 선교 지원을 받으면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은 서서히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내분이 표면화 되어 새로운 교단 기독교한국침례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분열로 인해 특히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선교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러나 1968년 4월 소장파(小壯派) 목사들의 추진에 의해 두 개의 교단이 통합되어 “한국침례회연맹”이라는 교단이 출현하였다. 1976년 교명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에는 이밖에도 대한기독교침례회, 한국성서침례회, 그리고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라는 침례교 교단이 있다. 지도자 양성기관으로는 침례교 신학대학이 있다.
3) 침례교의 교리
① 반(反)신조주의 - 인간이 제정한 어떤 신조에도 매이기를 거절한다.
② 직해(直解)주의와 율법주의 - 칼빈주의적 침례교회는 신약을 해석함에 여자적(如字的)이며, 신자의 생활이란 율법에 매인 생활이라고 본다.
③ 유아세례를 거부한다. 침수(浸水) 세례가 교회의 흥망에 관계되는 중요한 것이다.
④ 인간적인 지도적 지위는 없으며 모든 교제가 완전한 영적 민주주의이다.
⑤ 만인(萬人)제사장주의이다.
Ⅲ. 결 론
이상으로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하게 회자(膾炙)되는 6개의 교단역사와 그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2000여년에 걸친 교회사의 이야기는 어쩌면 양극의 대립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세력과 신진(新進)세력의 의견 차이는 갈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이라는 진리와 비(非)진리의 기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존세력은 항상 신진세력을 억압했고, 투쟁에서 이긴 측은 또 기성세력이 되어서 다른 신진세력을 억압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이런 역사는 인간의 본성이 보일 수 있는 정욕과 약점들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그러나 결국 전파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사에서처럼 이상한 광경과, 복음을 거절하는 이교도(異敎徒)들과, 교회 내에 있는 주도권의 다툼에서 많은 슬픔과 기쁨의 원인을 본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그 정복의 역사를 땅위에서 계속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군대인 때문이다. 인간들의 교회는 계속적인 분열과 다툼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의 살아있는 머리로서의 위대한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