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세기경부터 30년 동안 퉁구스계(系)의 부여족이 세운 나라이다. 부여는 토지가 광활하고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지금의 북만주 눙안[農安] ·창춘[長春] 일대에서 농업을 주로 하면서 궁실(宮室) ·성책(城柵)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이다. 정치는 완전한 귀족정치로서 지배계급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었으며, 또 전국을 사출도(四出道) 혹은 사가도(四街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산업은 농경을 주로 하였고, 명마(名馬) ·적옥(赤玉) ·미주(美珠) ·돈피(皮) 등이 산출되었고, 풍속 중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대회(祭天大會)가 있었고, 법률이 매우 엄정하여 도둑질 ·간음(姦淫) 등에 대하여는 특히 엄벌하였다. 부여의 주위에는 서쪽으로 선비(鮮卑) ·오환(烏桓), 동쪽에는 읍루(婁),남쪽으로는 고구려와 한(漢)나라의 현도군(玄郡)이 인접해 있었다. 해부루왕(解夫婁王) 때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로 가섭원(迦葉原)으로 서울을 옮긴 후부터는 동부여라고 칭하였다. 가섭원은 지금의 강원 강릉시 일대이다. 후에 동부여의 땅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2.공주
3.부여 박물관
4.공주 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은 일제시기인 1935년 공주사람들이 이 지역의 백제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공주고적보존회(公州古蹟保存會)를 모태로 생겨났다. 이후 1940년의 공주사적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公州分館)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일제시기부터 1972년까지는 공주의 옛 관아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공주박물관 정원에 옮겨 박물관으로 사용하였는데, 1971년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조사된 무령왕릉 출토품을 전시하기 위하여 현재의 박물관을 신축하였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을 전시하고 있다.공주박물관에서 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일이 공주를 비롯한 충남북부지역에서 출토된 많은 발견 발굴매장문화재를 안전하게 보존 관리하는 것이다. 각지에서 발견되고 발굴조사된 유물은 우리 국민 모두의 재산이므로 이를 국립박물관에서 안전하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 관리하고 있으며, 그 중 학술적 가치가 높은 중요유물은 관람객과 전문 연구자들이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이외에도 유적발굴조사와 사회교육활동도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그동안 공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주요 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방어취락인 부여 송국리(松菊里)유적, 원삼국(原三國) 초기백제의 무덤인 공주 하봉리(下鳳里)와 천안 화성리(花城里)유적, 백제시기의 산성인 대전 월평동(月坪洞)유적, 백제시기의 제사 취락지인 공주 정지산(艇止山)유적이 있다.그리고 매년 5월에는 공주시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어린이문화재 미술실기대회’를 열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고 우리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으며, 7월에는 교사와 시민을 대상으로 ‘문화학교-전통공예교실’을 개최하여 전 시민이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심과 자긍심을 가지도록 홍보와 교육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5.무녕왕릉
1971년 송산리 제5.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되어 약 1,500년만에 처녀분이 발굴되었다. 특히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 부부라는 사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흥분시켰다. 조사된 무령왕릉은 봉토가 마치 작은 봉우리 같은 외형을 한 원형으로봉토의 직경은 약 20m이며, 높이는 현실 바닥에서 7.7m에이르고 있으나 오랜 시일이 경과하면서 유실이 심하였던 것으로 보여 원래는 현재의 상태보다 훨씬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축의 단실묘로 평면이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형태를 지닌 묘실은 중앙에 연도가 부설되어 있다. 벽면은 남쪽과 북쪽인 아래에서 천장부까지 수직으로, 동쪽과 서쪽은 상부에 이르러 차츰 곡률을 주어 아치형 천장을 구성하였다.
묘실 내부 규모는 남북길이 4.2m, 동서 너비 2.72m이며, 천장중앙까지의 높이는3.14m이다. 왕부부가 함께 모셔진 합장무덤으로서는 낭비공간이 별로 없는 기본적인 규모이다.
벽체의 전축은 길이모 쌓기와 작은모 쌓기를 되풀이 한 방식으로 길이모 쌓기는 전 4개를 눕혀서 포개고 작은모 쌓기는 11개를 세워서 배열한 4평1수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벽돌은 모두가 아름다운 연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문양은 상용된 위치에 따라 몇종으로 구별되는데 길이모 쌓기에 사용된 벽돌문양은 중간에 사격자의 망상문을 두고 그 양단은 네모나게 구획하여 대각 십자선의 중심에 6판의 소형 연화문을 하나씩 배열하였다. 작은모 쌓기 벽돌에서는 세 종류의 문양이 사용되었다.
벽체 하부를 구축한 전에는 주위를 네모나게 구획하고 그 내부에 팔팔연화문을 반절한 것과 그 양현의 인동문을 하나씩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좌.우로 맞대고 구축하였으므로 벽면에는 만개된 팔엽연화문의 전형이 이루어지게 되어 아름답게 배열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연꽃이라는 불교적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고인의 명복과 내생을 기리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무덤의 구조는 크게, 들어가는 입구와 왕.왕비를 모신 현실의 방과 배수구로 나누어진다. 현실의 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모두 5개소의 작은 벽으로 청자 등잔을 배치하였다. 등 밑에는 각각 창을 상징하는 모양을 시설함으로써 방안에 조명과 함께 영원으로 향한 창문들이 갖추어진 건축물임을 알수 있다.
바닥구조는 먼저 암반을 평탄하게 깍아낸 후 그 상면에 벽돌을 삿자리 모양으로 배열하고, 벽돌 사이에는 석회를 발라 암반에 고정시켜 깔았다. 묘실 남벽의 중앙에서 시작된 연도는 길이 2.9m, 너비 1.04m, 높이 1.45m의 규모이며, 천장은 완전한 아치를 이루고 있다.
돌의 문양과 구축방법은 묘실 내부와 흡사하나 팔팔연화문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바닥의 높이는 묘실의 바닥보다 높아 관대와 동일하게 하였다. 발굴당시 명문전이 발견되었는데 "...士 壬辰年作(...임진년작)(512년)이라고 기록이 있는바 무령왕이 승하(523)하기 11년전인 512년에 축조 또는 준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능에서 출토된 유물은 사용된 재질로만 분류해도 석조물, 목제품, 금은제품, 청동기류, 도기류등 다양하며, 모두 108종 2,906점으로 이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17점에 달한다. 이 무령왕릉은 전축분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송산리 6호분과 함께 유일한 벽돌 무덤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하겠으며 백제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매우 소중한 릉이다.
6.공주 송산리 고분
사적 제13호. 해발고도 130m의 송산을 북쪽의 주산으로 한 송산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벽돌무덤과 할석 ·괴석으로 만든 돌방무덤 10여 기가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7기의 분포를 보면 계곡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 동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5호분은 궁륭으로 된 천장식 돌방무덤인데, 1~4호분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직후부터 6세기 초반에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터널형 천장의 벽돌무덤으로서 백제시대의 벽돌무덤으로는 이 두 개만이 남아 있다. 6호분은 벽 네 면의 일부에 사신도를 그려넣은 벽화고분으로서 긴 배수구가 널길을 향해 밖으로 뻗고 있으며, 벽돌의 무늬와 축조방법상 무령왕릉보다 조금 앞선 6세기 초의 무덤으로 보인다. 6호분의 배수로가 5호분의 널방[玄室] 아랫부분을 지나고, 무령왕릉의 배수로 상면에 5호분의 봉토 일부가 걸리는 점으로 보아 무령왕릉 역시 5호분보다 일찍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7.부소산성
부소산성 -사비도성 방어의 중심 거점 -
부소산성은 사비시대 백제산성의 중심 거점을 이룬 산성으로 부여읍의 북쪽에 있는 표고 106m의 부소산에 축조되어 있다. 산성은 산의 정상부에 테를 두른 것처럼 쌓은 포곡식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식 산성이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 쌓는 토석혼축과 판축공법으로 쌓았으며, 성벽 바깥쪽의 아래 부분은 잘 다듬은 돌을 3 - 5단씩 쌓았다. 산성에는 동서남북에 문자리가 남아있으며 성안에는 절터. 와적기단건물터. 움집터. 군장터 등 여러 유적이 있다. 이 유적들에서는 금동제새머리장식구, 철제무기류, 중국도자기, 각종 토기류, 연꽃무늬수막새 등이 발견되었다(사진 42).
8.낙화암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백마강(白馬江)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다시 그곳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9.계룡산
계룡산은 1968년 국내에서 두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으로 해발 845.1m의 독립된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며"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같다 하여 계룡산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공주시에 주로 위치하면서 일부가 대전광역시와 논산시에 걸쳐있다.
계룡산은 나라에서도 주목한 명산으로서 나라에서 큰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백제때 이미 계룡 또는 계림산등의이름으로 바다건너 당나라까지 알려 졌던계룡산은,차령과 노령 두 산맥사이에 이룩된 잔구성 산지로서 석영반암이 융기한 군봉이 장관이다.주봉인 상봉(천황봉 845.1m)을 비롯하여 연천봉(738.7m), 삼불봉(775.1m), 문필봉(796m) 그리고 관음봉·황적봉·도덕봉·신선봉 등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봉우리 사이에는 7개의 계곡과 3개의 폭포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며, 골짜기에는 동학사· 갑사·신원사 같은 유서깊은 사찰들이 위치한다. 역사적으로도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큰 절이 창건되었는가 하면, 신라 5악의 하나인 서악이었으며, 조선시대초에는 주요한 왕도 후보지로서 건설되다가 중단 되었고, 「정감록」에는 도읍지뿐 아니라 피난지로도 적혀 있어 도참설의 주요 근거지로 여겨졌다.
근대 이후에도 신도안을 중심으로 이른바 「신흥종교」들의 본산이 되었다. 계룡산이 이처럼 민간신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계룡산 자락이 신기가 넘칠 만큼 깊고도 품이 넓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또한 맑다. 또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터가 되어야 큰힘이 있다."하고는 나라안에 이런 곳이 네 군데 있으니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문화의 구월산과 함께 계룡산을 꼽고 있다. 그는 계룡산의 웅장함에는 오관산만 못하고 수려함에는 삼각산보다 못하나, 그 맥이 멀고 깊어 정기를 함축하였다고 했다. 계룡산의 아름다움, 그리고 거기에 담겨있는 신령스런 분위기를 묘사한 글들이 많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빼어난 것으로 위에서 명기한 조선왕조 성종때 문장가인 서거정의 한시「공주십경시」중 「계룡산의 한가로운 구름」을 들지 않을수 없다.
계룡산을 읊은 시로 이만하면 가히 절묘의 극치를 다한 시라고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계룡산과 맥을 같이하는 공주시의 주변 산들도 수려하기가 이를데 없다. 공주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월성산(313m)을 최고봉으로 하여 대체로 200m미만의 작은 산들인 공산성·주미산·봉황산·연미산·취리산 등이 있다. 금강은 이들 산지를 뚫고 공주시가지 북쪽에서 마치 띠를 두른 듯 동쪽에서 서남을 관류하고 있는데, 금강에 아지랑이가 덮이고 동녘 산이 밝아오는 즈음에 봉황산에라도 올라보면 공주의 산수 풍경은 조물주가 아니면 가히 만들수 없는 한폭의 산수화가 바로 그것이다.
10.동학사
동 학 사
동학사는 공주에서 약 25km, 대전에서 8km정도 떨어진 반포면 학봉리에 자리잡고 있다. 계룡산 동쪽 골짜기에 싸여 있는 천년고찰 동학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 비구니 강원(일명:승가대학)으로서, 15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부처님의 일대시교 및 수행과 포교에 필요한 제반 교육을 받으며 청진하고 있는 유서깊은 도량이다.
또한 동학사는 문필봉(文筆峰)이 있어서 대 강백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도 유명하며, 비구니 스님들의 간경소리는 맑은 계곡 속에 흐르는 물소리와 하나로 어우러져 고즈넉한 산사에 그 청아함을 더하여 심신을 맑혀준다. 주변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고 교통이 편리해 계룡산의 관광지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박정자삼거리에서 동학사에 이르는 약 3km 거리의 가로수는 벚나무로 이루어져 봄이면 벚꽃터널이 장관을 이룬다.'93년부터 매년 동학사 봄꽃축제가 개최된다.
▶ 역 사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상원조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던 곳에 회의화상이 창건하였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하여 절이름을 청량사라 했었다. 고려 태조3년(920)에 도선국사가 왕명을 받아 중창하였는데, 국사가 원당을 건립하고 국운을 기원했다해서 원당이라고도 불리우다가, 그 후 영조 4년(1728) 신천영의 병화로 사원이 전소되어 80여년 동안 빈 절터인 채로 내려오다가, 이조 순조 14년(1814)에 금봉화상이 옛 원당터에 실상암을 짓고 절을 중건하여 절 이름을 개칭하되 '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이라 하여 "동"자를 따고 '사판국청학귀소형(寺版局靑鶴歸巢形)'이라 하여 "학"자를 따서 동학사라 명명했다는 설도 있고 또 계룡산 동쪽 사찰 입구에 청학이 깃들었다는 학암(鶴岩)을 위주로 하여 동학이라는 절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 뒤 고종 원년(1864)에 만화화상이 개창하였고, 그의 제자인 경허성우스님이 고종8년(1871)에 강의를 열었으며 1879년에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날렸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으며, 지금도 일주문 불사 및 상원암(옛 계명장사로 남매탑이 있는 곳)복원불사가 진행 중이다.현재 전각으로는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하여 조사전,육화당, 강설전, 화경헌, 엽화실, 실상료, 숙모전 등이 있다. 신내암자로는 미타암, 길상암, 관음암, 문수암, 심우정사, 상원암 등이 있다.
▶ 건 축 물
동학사에는 다른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이 있는 건축물이 있다. 동학사 경내에 들어서려면 두 기둥이 우뚝한 홍삼문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궁궐,관아,능,묘,원 앞에 세우는 문으로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30자 이상의 홍살문이다. 이것은 동학사가 사원이면서도 경내에 유신의 사당인 동계사, 그리고 삼은각과 숙모전이 있는 점들과 상호 연관된 인연들이 어우러져 세워진 것이다.
1)동계사 : 신라가 멸망 후 고려 개국공신 유차달이 태조19년(936)에 이곳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박제상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동계사를 짓고 제사를 지내다 병화를 만나 전소되었다가 1956년 다시 중건되었다.
2)삼은각 : 이태조3년(1394)에 야온 길재가 동학사에 와서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 전에 단을 설치하여 포은 정모주를 위해 제사 지내고 5년후(1399) 유방택이 묶은 이색을 모시고, 후에 야은을 모신곳이다.
3)숙모전 : 매월당 김시습의 충절과 애통함이 깃들인 곳이다. 매월당은 당대 걸승으로서 사육신의 한분이다. 세조1년 거지꼴의 한 승려가 삼온각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있었는데 이 거지 승려 매월당은 단종이 숙부(세조)에게 왕위를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 여기에와 그들의 혼백을 붙들고 통곡을 했던 것이다. 그는 세조2년 사육신이 참수를 당하자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매장하고 동학사로 다시 돌와와 초혼각을 짓고 충정를 기렸다. 세조는 그 후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그러한 내력을 전해 듣고 자기로 인하여 죽음을 당한 280명의 이름을 열거해 초혼각에 모시도록 했다. 이 초혼각은 영조 때 전소되어 혼기를 잃어 58위만 봉안하고 고종 때 중건하여 고종으로부터 숙모전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 후 26위를 추가해 현재 89위만 봉안되어 있고 음력 3월 보름과 10월24일에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11.갑사
갑사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 연천봉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 본사 마곡사 말사로 등록되어 있으며 부속 암자로 내원암, 신흥암, 대성암, 대적암, 대자암 등을 거느리고 있는 계룡산 지역의 거찰이다.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 아도가 창건하고 위덕왕 3년(556) 혜명대사가 중건하여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전하며 679년 신라의 의상대사에 의하여 화엄종의 도량이 됨으로서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원년(887)에는 무염대사가 중창한 기록이 보이며, 조선시대 임진 정유 두 병란에 모든 건물이 불에 타 폐사된 것을 선조 37년 (1604)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고 효종5년 (1654)에 사우를 개축하는 등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다. 갑사의 원위치는 지금의 대적전이 있는 곳으로 대형의 초석들이 정연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가 짐작되며, 사명 또한 조선 초기에는 계룡갑사라 하였으나 후기에 갑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역은 부속 암자인 대적전 범위와 본찰인 대웅전 범위로 구분된다. 대웅전이 위치한 본찰은 계곡간의 높은 축대를 마련한 후 그 위에 사찰을 조영하고 있는데 입구인 해탈문은 솟을대문 형식으로 두고 있으며, 이 문들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고 마당의 오른쪽에 범종각이, 앞쪽으로 강당을 배치하고 왼쪽에는 진해당과 요사채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이강당을 지나 안마당에 이르면 정면에 대웅전이 자리하면서 좌우에 진해당과 적묵당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안마당보다 한단 높여 세운 서향건물이며, 남쪽에는 삼성각이 남아 있다. 대웅전의 중심부를 벗어난 동북방에 표충원과 팔상전, 그리고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는데 표충원은 임란시 승병장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또한 사역의 남쪽 계곡에는 석조약사불과 공우탑이 있다. 공우탑 남쪽으로는 대적전이 세워져 있고 전면에 원당형 부도 1기와 이 부도의 남쪽에 대형의 철당간이 남아 있다. 대적전 주변에서는 비교적 고식의 초석이 산포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적전을 중심으로 하나의 사역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속 암자로는 1808년에 청담이 세운 내원암, 수정봉 아래의 신흥암, 대성암, 대적암, 대자암 등이 있다.
갑사 경내의 지정 문화재로는 국보 298호로 지정된 갑사 삼신불 괘불탱, 보물 256호인 갑사철당간 및 지주와 보물 257호인 갑사부도, 보물 478호인 갑사동종, 보물 582호인 선조 2년간 월인석보판목 이 있으며, 도지정문화재로 갑사석조 약사여래입상, 갑사석조여래 입상, 갑사사적비, 강당, 대웅전, 대적전, 표충원, 삼성각, 팔상전, 갑사중사자암지삼층석탑, 영규대사비, 천진보탑등 다수의 귀중한 문화재가 남아있어 천년 고찰의 면모를 더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