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라 비 앙 로즈>.. 장밋빛 인생.. 몇 년 전 개봉한 영화였나 본데, 전 이제사 봤네요.
네이버 영화 리뷰에 어느 분이 올린 글 담아 왔습니다..
<< 비정한 감독의 못된 긍정론, 라비앙 로즈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6.naver.net%2Fdata29%2F2007%2F12%2F28%2F197%2F%25B6%25F3%25BA%25F1%25BE%25D31_timestwo.jpg)
라비앙로즈는 실화에 충실한 영화이다. 에디트 삐아프의 불우한 유년기, 갑작스러운 성공과 좌절, 단 한 번의 진정한 사랑과 그를 잃은 후의 절망, 약물과 알콜에 찌든 삶, 40대에 노인의 모습으로 죽어간 인생의 끝...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두고 '일대기'라고 할 수는 없을 듯 하다. 그 유명한 이브 몽땅을 필두로 화려했던 그녀의 연애사, 가수로서 성공을 부여 받았던 그녀의 애인들, 나치 시절의 일화들, 죽음까지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던 장 콕도와의 관계... 이러한 그녀의 일생 중 일부분이 영화 속에는 없다. 그녀는 너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에 차곡차곡 따라가기만 해도 두 시간의 러닝타임은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녀 일생의 가지를 치는 수고를 감내하며 굳이 교차 진행을 택했다. 이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뒤죽박죽인 시간 순서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보통 한 인물의 일대기에 관한 영화는 유년기에서부터 노년기까지 흘러가는 시간 순을 따르기 마련이다. 라비앙 로즈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큰 틀을 따라간다. 다만 그녀의 유년기가 끝난 뒤, 즉 관객들의 몰입도가 어느 정도 보장된 뒤부터 영화의 구성이 달라진다. 씨퀀스의 틀이 두 개가 되는 것이다. 하나는 일대기의 시퀀스고, 또 하나는 인생 말기의 시퀀스다. 세월의 흐르는 순서대로 그녀의 삶이 전개되는 시퀀스 뒤에는 곧바로 그녀의 말년을 조망한 시퀀스가 나온다. 젊은 그녀가 르프레를 만나고, 늙은 그녀가 시체처럼 앉아있고, 젊은 그녀가 카바레의 가수로 데뷔하고, 늙은 그녀가 뜨개질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식이다. 소설로 치면 서사(일대기)와 묘사(노년의 모습)가 극단적으로 배열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 감독은 이러한 구성을 택한 걸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10.naver.net%2Fdata29%2F2007%2F12%2F28%2F137%2F%25B6%25F3%25BA%25F1%25BE%25D32_timestwo.jpg)
나는 이 영화 감독이 퍽이나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러한 구성이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그녀의 삶이 흘러가는 방향성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그녀의 비참한 말년을 목도하게 된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절정의 성공을 맛보고 행복한 사랑에 빠질 때에도, 관객들은 곧바로 미라처럼 늙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녀를 봐야 한다. 허무감이 밀려온다. 이렇게까지 극치에 가까운 허무감을 영화를 보며 느낀 적이 없다. 관객들은 반복적으로 교차되는 시퀀스 앞에서 뼈저리게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다. 에디트 삐아프라는 한 여인을 넘어, 모든 인간들에게 숙명적으로 지워진 삶, 그 한계에 대한 원초적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유한성과 허무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을 내포한 속성 또한 전기영화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인물의 삶이라는 소재 자체가 얼마나 허무한가.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체감의 강도, 충격의 정도가 모두 다르다.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것과 '일부러 드러내는' 것 또한 다르다. 이러한 면에서 감독이 못됐다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아'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으로 쓰인 것도 그렇다. 숨 넘어가는 할머니와 후회하지 않아라니! 적어도 그 장면을 보고 있을 때, 내 가슴을 찌르던 건 다음의 초반부 가사였다. (연의 마지막 소절마다 뒤에 '죽을 거니까요'를 붙여 보면 내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아니예요,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간에
그건 이제 모두 나와 상관 없어요.
아니예요,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건 대가를 치뤘고, 쓸려 가버렸고, 잊혀졌어요.
나는 과거에 신경쓰지 않아요.
나의 추억들로
난 불을 밝혔었죠.
나의 슬픔들, 나의 기쁨들
이젠 더이상 그것들이 필요치 않아요.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10.naver.net%2Fdata29%2F2007%2F12%2F28%2F249%2F%25B6%25F3%25BA%25F1%25BE%25D36_timestwo.jpg)
에디트 피아프는 유명인사다. 라비앙 로즈를 찾아볼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녀의 인생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막이 오를 때 이미 관객들은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다. 이러한 영화를 만든다는 게, 감독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까? 이 영화의 원제는 La Mome, '작고 어린 계집아이'다. 에디트의 첫 번째 예명이었다고는 하나 그녀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면 굳이 저 이름을 쓸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감독은 에디트 삐아프에게 오롯이 헌사할 목적으로 이 영화를 찍은 건 아니었다. 온몸으로 생과 싸우다 간 여자, 그녀 삶 속의 구차하고도 위대한 무엇, 스토리를 다 알고 보는 관객들에게도 적용되는 그 '무엇'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울며 나왔을 때 나는 그 '무엇'이 비극성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극을 부각시키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 영화를 다시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그녀가 웃으며 노래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핏빛을 장밋빛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이라던 그녀의 대사가 떠올랐다. 그녀가 초라하게 어깨를 굽히고 비틀거리며 걸어가 앉은 해변보다, 그곳에서 이루어졌던 인터뷰가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머, 나는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았는걸요." 알콜중독 약물중독에, 이젠 늙어버린 그녀의 대답. 삶의 뒤안길에서 비로소 가지게 되는 긍정의 힘.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왔다'고 미소지으며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어떤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아' 중후반부의, 이러한 가사.
사랑들을 쓸어 버렸고
그 사랑들의 모든 전율도 쓸어 버렸어요.
영원히 쓸어 버렸어요.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거예요.
아니예요,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15.naver.net%2Fdata29%2F2007%2F12%2F28%2F126%2F%25B6%25F3%25BA%25F1%25BE%25D33_timestwo.jpg)
어쩌면 이 영화는 삶에 대한 못된 긍정론일지도 모른다. 핏빛도 장미빛으로 바라보게 되는 생의 뒤안길, 노인들의 조용한 유머, 인생의 유한성에 대한 긍정. 그것이 포기에서 왔든 어떤 깨달음에서 왔든 그런 건 중요치 않을 것이다. 열심히 노래 부르고 열렬히 사랑했던 그녀. 그 모든 열정이 가슴 속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발악에 가까운 노력이었다면, 오히려 죽음 직전의 몇 해가 그녀에겐 더없이 평온한 나날이었을지 모른다. 무수했던 비극과 이별에도 "사랑하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와, 보는 이까지 따뜻해지는 푸근한 미소를 그녀는 그 때 찾았기 때문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이 고정되었고 날이 서있던 장난기도 순한 유쾌함으로 다듬어졌다. 교차 진행을 통해 비극성을 부각시킨 게 사실은 그런 의도였을지 모른다. 인생을 살아낸 뒤에야 핏빛을 장미빛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난 뒤에야 비극 안에 숨은 희극을 찾아낼 수 있도록. 내 짐작이 맞다면 감독은 못됐다기 보다, 비정하리만치 긴 안목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5.naver.net%2Fdata29%2F2007%2F12%2F28%2F132%2F%25B6%25F3%25BA%25F1%25BE%25D34_timestwo.jpg)
이러한 감독의 기지는 기법적인 면에서도 자주 돋보이는데, 우선 많은 이들이 호평한 에디트의 정식 첫 무대 묘사가 좋았다.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목소리를 제거한다는 그 파격. 덕분에 관객들의 시선이 그녀의 손짓으로 모일 수 있었다. 그 때 깔린 배경음악도 샹송이 넘치던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낸 무거운 선율이었다. 그러나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은 바로 마르셀을 잃고 절규하던 삐아프를 그대로 무대에 내보낸 장면이었다. 비정하기는 하나 에디트 삶의 뼈대를 보여주는 효과적인 연출이었다. 사랑과 비극, 그 모든 걸 아우르는 '노래'. 그녀 삶을 구성하는 3대 요소를 한 번에 꿰찬, 통찰력 넘치는 장면이었다. 또한 마리온 꼬띨라르의 신들린 연기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흉내를 넘어서 마치 에디트 삐아프가 재림한 듯한 연기였다. 그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겁에 질린 듯한 눈빛, 전혀 어색함이 없었던 립싱크 연기... 특히 마르셀을 잃었을 때의 그, 절규에 손까지 떨며 복도를 헤매던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끝으로, 나는 크리스마스에 이 영화를 보며 극장 안의 누구보다도 많이 울었음을 밝혀둔다. 솔직히 말해 영화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가면서까지 울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몇 편 찾아 읽어보았는데, 다들 '지루한 사랑 이야기' 정도로만 본 듯 해서 아쉬웠다. 나는 이 영화가 '사랑'이라는 소주제 안에 갇히지 말았으면 좋겠다. 보통 1000명이 영화를 보면 적어도 100가지의 다른 관점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 대한 관점들은 너무나 비슷비슷했다. 마케팅 방식에서 온 건지 삐아프에 대한 세간의 인식 때문인 건지 몰라도 너무나 아쉽다. 샹송은 재즈와 더불어 가장 자유로운 음악 장르 중 하나다. 이 영화도 그렇게 받아들여지길 희망해 본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11.naver.net%2Fdata29%2F2007%2F12%2F28%2F170%2F%25B6%25F3%25BA%25F1%25BE%25D35_timestwo.jpg)
이러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노년의 인사.
어쩌면 거기에 가장 오래 묵혀둔 생의 아름다움이 맺혀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