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일기(11) - 역답사(정선의 <민둥산역>)
1. 민둥산에서 양동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탈 때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날리는 역사와 철길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열차의 모습은 겨울의 낭만적인 풍경 중 하나일 것이다. 열차는 겨울에 더 많은 침묵과 이야기를 동시에 담고 있다. 과거 이문열의 <그해겨울>의 이미지처럼, 최인호의 <고래사냥>의 꿈처럼, 겨울과 기차는 이상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도약에 대한 특별한 추억과 연관되어 있는지 모른다.
2. 민둥산역은 과거 정선선의 마지막 역으로 <증산역>으로 불리던 곳이다. 석탄 산업으로 활기를 띠었던 이곳은 산업조정의 결과로 침체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민둥산의 억새로 인해 가을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민둥산’이라는 말은 어쩌면 슬픈 기억을 담은 말일지 모른다. 과거 화전민들이 농사를 지어 산을 태웠고 산에는 어떤 나무도 사라지 않았던 가난한 시절의 아픔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가 없이 억새만 가득한 산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하였고, 민둥산은 이제 억새의 명소로 자리잡은 것이다.
3. 11월의 마지막 날에 찾은 민둥산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내렸던 역에는 나를 비롯해 몇 사람만이 하차했다. 마을도 조용했다. 오늘은 5일장이 열리는 날이건만 장터는 한산했고 찾는 사람들은 적었다. 역 앞에 식당에서 곤드레밥을 먹고 민둥산으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산은 웅장하면서도 여유로웠다. 하늘은 높고 산과 물은 정겹다. 강원도의 특별한 운치가 느껴진다. 깊고 나지막한 자연의 울림이다. 산 입구에 두 개의 길이 안내되어 있다. 급경사와 완경사, 급경사 길은 약 20-30분 시간이 절약된다 한다. 하지만 몸이 무거웠고 숨이 가팔랐다. 완경사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길은 여유롭고 경사도 적었지만 코로나의 후유증때문인지 발은 내딛는 것이 힘들었다. 다행히 거리는 멀지 않았다.
4. 약 1시간 20분 정도 걷자 조금은 퇴색한 억새밭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단풍보다 낙엽을 좋아하는 체질답게 화려함을 잃어버린 억새에 더 정이 간다. 이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지만, 억새의 군락은 여전히 산 전체를 가득히 채우면서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퇴락의 아름다움이다. 사람들이 없는 억새 사이를 걷는다. 바람이 차가워진다.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인 듯하다. 겨울 그리고 억새, 사람들이 없기에 고독의 순간은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유명한 관광지에 시즌을 피해 가는 것도 여행의 하나의 묘미이다. 비록 최상의 풍경을 놓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갖고 있는 특별한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모습을 온전히 여유로운 나만의 시선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넘치면, 우리가 만나는 세계는 인간에 의해 변형된다. 예술이든, 철학이든, 여행이든, 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그것이 그 자체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5. 산에서 내려온 후에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작은 식당에 들어가 부추전과 막걸리를 마셨다. 정선이 고향인 주인 아주머니의 아들 자랑을 들으며 답사의 끝을 즐긴다. 1L 큰 용량의 정선 막걸리를 처음 봤다. 풍성한 막걸리처럼 풍성한 기분이다. 오랜만에 답사에서 좋은 기분을 느낀다. 몸은 힘들고 등산은 어려웠지만, 다행히 산이 험하지 않았고 마을에서 먹는 음식은 풍성했다. 기차를 기다리며 따뜻한 역사 대기실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겨울역은 이제 과거 <사평역>처럼 조개탄을 태우는 난로가 아니다. 최신 시설의 난풍기에서 포근한 바람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따뜻함과 기다림 그리고 떠남이 있는 역사의 풍경은 그대로이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면서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정을 느끼고 싶다면 작은 시골역에 앉아 있을 일이다. 그곳에는 수많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선 지역의 역들도 이제 대부분 방문했다. 남은 것은 <별어곡역>과 <신평역>이다. 정선의 장날과 주말에 운행하는 <정선 아라리 열차>를 타고 이용해야겠다. 그 또한 ‘정선’의 특별한 모습일 것이다.
첫댓글 - 시각의 차이에 따라 보이는 세상도 달라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