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4월 방송을 제외하고는 대마초가수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규제완화조치가 발표됐다. 비온후 먹구름 사이로 작은 빛이 보이는 듯한 희소식이었다.
「옳지, 이제 길이 트이기 시작하는구나」며 부리나케 여기저기서 팀을 모아 명동 「마이하우스」, 북악호텔나이트클럽 등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부산 「동양클럽」에서 함께 일하다 나 때문에 팀이 깨져버린 유재학씨는 이때부터 매니저로 발벗고 나서 일을 도와주었다.
「별볼일 없는 대마초가수」의 매니저를 자청한 그에게 나는 실로 깊은 고마움을 느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가요계에서는 「전설적인 매니저」로 통하는 그의 예리한 눈이 나의 가능성을 점쳤는지 내가 하도 측은해보여 정을 베풀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여하튼 나보다 7살이 더 많고 형보다 더 따르는 그는 기타맨 출신이며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다가 군입대를 했고 제대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다시 입학한 괴짜이다. 그 역시 학생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연주생활을 했고 음악을 안해보려고 별짓을 다해보았지만 결국 음악에 얽매인 몸이다.
나를 키우며 일부 가요매니저들로부터 받은 질시와 못마땅한 가요계 풍토, 건강악화 등을 이유로 84년 한때 내 일에서 손을 뗀적이 있지만 지금은 또다시 나의 귀중한 음악 벗이 돼 주고 있다.
잔뜩 당겼다가 놓은 활시위처럼 나는 미친듯이 음악에 몰두했다. 당시 내 주장으로 우리팀은 합숙을 하며 연습을 했는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새벽 4시에 밤무대가 끝나면 새벽 5시부터 아침식사때까지 연습, 점심식사때까지 취침하고 일어나면 무대에 설때까지 또 연습하는등 남들이 보면 「미친놈」들 같이 스파르타식 강훈을 했다. 이때 연습에 지쳐 멤버가 자꾸나가 구성은 자꾸 바뀌었다.
당시 우리팀은 이름도 정하지않고 무대에 섰는데 우리 가요는 절대 연주하거나 노래하지않는 것이 특색이었다. 내 얼굴을 알아보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신청하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가요를 히트시키는 바람에 내 이름이 알려져 대마초를 피웠다는 사실까지 들춰졌고 음악을 중단해야 했었다는 생각에 이상한 오기가 돋았던 때문이었다.
외국곡만 연주, 노래하는 밴드였지만 스파르타식 훈련 덕분에 「완전한 그룹」으로 뮤지션들 사이에는 잘알려졌었다.
그러나 그 팀은 79년 10.26사태가 터지면서 당분간 활동을 못하게됐고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또다시 혼자가 된 나는 방구석에서 통기타를 두드리며 노래를 연습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노래를 부르다 지쳐 방에 드러누워있는데 여동생 종순이가 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며 「빨리 나와보라」고 소리쳤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연예인에 대한 전면해금조치가 내려진 날이었다. 저녁 7시뉴스 방송에서는 해금되는 연예인 명단이 계속 흘러나왔고 「조용필」 내 이름도 분명 들어있었다. 평소 나를 잘 돌봐주던 부산 MBC의 김양화씨, 광주 MBC의 소수옥씨, KBS의 진필홍씨등 방송관계자들의 축하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대구에 내려가있던 유재학씨도 「내 당장 올라갈께」한마디를 하고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방에 다시 돌아와 불을 끄고 드러누운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시는 아픈 눈물을 흘리지않으리라.
그 소식이 있은후 사흘동안은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 과거를 정리했고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는 의욕에 가슴이 부풀어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머리에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동아방송PD 안평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아방송이 80년 정초부터 새로낼 연속극 「창밖의 여자」주제가를 작곡, 노래해 달라는 느닷없는 요청이었다. 재기의 다시없을 발판으로 생각한 나는 배명숙씨가 작사한 가사를 전화로 받아적고는 방안에 틀어 박혔다.
조용히 기타줄을 퉁기며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나를 잠들게하라」며 중얼거려 보았다. 가슴이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좀처럼 악상이 오선지에 옮겨지질 않았다. 가슴이 뭉클한 순간 음표로 그리려고하면 금세 생각이 흩어지곤 했다. 하루에 식사한끼도 제대로 먹지않으며 계속 기타, 오선지와 씨름한지 닷새가 되던날 밤을 꼬박 새우고 깜빡잠이 들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이어지지 않던 멜로디가 귀에 들어왔다.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후다닥 잠을깬 나는 미친듯이 악상을 옮겨 적었다.
그 다음날 당장 동아방송으로 달려가 녹음에 들어갔는데 PD 안평선씨와 작사를 한 배명숙씨는 녹음실 밖에서 곡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의 감정이 그들 가슴 가슴에 진하게 가 닿았던 것이리라.
「창밖의 여자」를 들어본 당시 내 전속사인 지구레코드측도 놀라운 곡이라고 흥분하면서 출반을 서둘렀다.
「창밖의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단발머리」「한오백년」「대전블루스」「고추잠자리」「미워 미워 미워」등이 수록됐던 이 앨범은 각각 방송국 인기차트 정상을 정복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