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사암로의 주인공, 사암 박순 [도로명 속 남도역사인물]
노성태2025. 5. 1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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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 박순
광주 사암로는 14년간 재상을 지낸 나주 출신 사암 박순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호동의 송정 고가도로를 기점으로, 흑석사거리에서 비아동의 북문로와 연결되는 광산나들목을 종점으로 잇는 왕복 4차선 도로로, 총길이는 3천980m이다.
도로 위 주요 건물 및 시설로는 공항역, 광주광산우체국, 어등초등학교, 월곡중학교, 목련초등학교, 영천중학교, 장덕중학교, 하남동우체국, 성덕고등학교, 성덕초등학교, 비아 소방서 등이 있다.
# 나주에서 태어나다
사암로의 주인공 박순(朴淳, 1523~1589)은 명종대에 장원급제한 수재로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지낸 호남의 큰 정치가였다. 본관은 충주, 호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전주 부윤과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박우(朴祐)의 아들이며, 남도 정신인 '정의로움'의 출발로 일컬어지는 '신비복위소'의 주인공 눌재 박상(朴祥)의 조카다.
박순은 명종의 외삼촌이던 윤원형과 왕비 심씨의 외삼촌인 이량을 축출시켜 조선 역사에 사림의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했다.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장원 급제자는 영의정에 오르지 못한다는 징크스를 깬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1523년(중종 18년) 나주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할아버지 박지흥이 광주에 낙향했음과 관련이 있다. 개성을 거쳐 충청도 회덕에 기반을 두었던 조부 박지흥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염증을 느껴 처가(하동정씨, 정지 장군 손녀)가 있는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로 낙향한다.
박지흥은 하동정씨와 소생 없이 사별한 뒤 56세 되던 1467년(세조 13) 계성서씨와 재혼, 늦은 나이에 박정, 박상, 박우 등 세 아들을 둔다. 세 아들은 다 문장이 뛰어나 송나라의 삼소(三蘇)에 빗대어 조선의 삼박(三朴)으로 불렸다.
송의 삼소는 대문장가였던 동파 소식(蘇軾)과 아우 소철(蘇轍), 동파의 부친인 소순(蘇洵)을 일컫는다. 이에 맞선 조선의 삼박은 박지흥의 세 아들인 박정과 박상, 박우를 가리킨다. 박순의 부친 박우가 광주에서 태어난 연유다. 그런데 부친 박우는 나주로 장가들었고,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 분가한다. 사암 박순이 1523년 나주에서 태어난 연유다.
#장원급제하다.
어린 시절 박순은 총명했다. 8세 때 서당 훈장이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국조인물고'의 사암 박순 편에 남아 전한다. 부친 박우 역시 아들 박순이 지은 글을 보고 "이 늙은이가 무릎을 꿇어야 하겠다"라는 기록 역시 '국조인물고'에 보인다. 두 일화는 박순이 어린 시절 보통 아이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18세 되던 1540년(중종 35), 소과에 응시하여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한다. 그는 다소 늦은 1553년(명종 8), 31살의 나이에 명종이 친히 주관한 대과에서 장원급제한다. 그가 31살의 나이에 대과를 보았던 것은 25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등 공부에만 열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원급제한 그에게 내려진 첫 번째 관직은 정6품직인 이조좌랑의 요직이었다.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각 부서의 당하관 관원 천거 및 재야 인사 추천 권한을 가진 요직이었다. 이후 홍문관 수찬(정6품), 홍문관 교리(정5품) 등 핵심 요직을 거친 후 당시 젊은 신진 관료들에게 주어졌던 안식년에 궁궐도서관인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다.
1556년(명종 11) 의정부 검상(정5품), 사인(정4품)으로 승진한 후 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돌았고, 홍문관 응교(정4품)과 되어 부마(왕의 사위)가 밀수한 품목을 압수하는 등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다.
#윤원형·이량 탄핵, 사림의 종주가 되다
승승장구하던 박순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561년(명종 16), 명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훈구대신 임백령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오는 도중 사망했는데, 임백령의 시호를 정해 올리라는 명이 박순에게 떨어진다. 임백령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다. 대비인 문정왕후의 친동생이었던 윤원형이 영의정이었고, 명종을 추대했던 훈구공신들이 요직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죽은 임백령에게 큰 명예가 주어질 것은 자명했다.
시호는 임금이 내리는 이름으로 신하의 공을 따져 붙이기 때문에 명종 즉위에 공이 있던 임백령에게 '충(忠)'자가 내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박순이 사림에게 누명을 씌어 죽음으로 몰았던 임백령의 잘못을 지적하며 '충(忠)'자가 들어간 시호를 반대하였고, 대신 '소이(昭夷)'로 폄하시켜 관철시킨다.
보고를 받은 영의정 윤원형 등 훈구 공신들은 흥분하여 박순을 죽이자고 달려들었고, 지켜보는 자들마다 염려했지만, 박순 자신은 태연했다. 송시열의 글에 의하면, 박순이 너무도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사단이 난 날 어린 딸이 반갑게 마중 나오자, 박순은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하마터면 너를 다시 못 볼 뻔했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튿날 파직당한 박순은 아버지의 고장 광주로 내려간다.
1년 후 다시 명종의 부름을 받은 박순은 성균관 사성(정3품), 홍문관 직제학(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정3품)으로 발령을 받는다. 대사간 시절 그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윤원형과 한판 세게 붙게 되는데, 그게 윤원형의 탄핵이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뜨자 어린 명종이 즉위했고, 권력은 문정왕후와 외척의 차지가 되었다. 명종의 외삼촌이던 윤원형이 권력을 좌지우지하였다. 명종은 윤원형의 횡포를 막기 위해 왕비 심씨의 외숙인 이량(李樑)을 등용하였지만, 이량 또한 윤원형보다 더 포악하였다.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에 오른 박순은 사헌부 대사헌이던 이탁을 설득,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박순의 나이 43세였다. 당시 하늘을 찌르던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의 친동생 윤원형과 맞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순은 "세도가를 바로잡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죽음으로 직책을 수행할 뿐이다(挽回世道者 吾責也 死職耳)"라는 각오로 맞선다.
첫 번째 상소는 을축년(1565) 음력 8월 3일이었었고, 두 번째 상소는 첫 번째 상소를 올린 지 11일 만인 8월 14일이었다. 두 번에 걸쳐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낱낱이 밝히니 윤원형의 조카였던 명종도 어쩔 수 없이 윤원형의 퇴출을 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량도 같은 방법으로 퇴출되자, 전국의 선비들이 환호하였다.
외척 윤원형과 이량이 퇴출된 후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에게 다시 벼슬이 내려지고,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이 발탁되면서 착한 선비들이 조정으로 들어온다. 박순의 졸기를 남긴 사관은 "명종 말년에 다시 발탁 기용되어 두 권신(윤원형과 이량)을 탄핵하여 내치니, 사론(士論)이 비로소 신장되고 조정이 엄숙하여져 선류(善類, 사림)의 종주(宗主)가 되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순을 모신 사당 월정사(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광곡마을)
#당대인들의 평가
영의정 7년을 포함하여 14년 정승을 지낸 사암 박순, 그가 14년 정승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품 때문에 가능했다.
'선조수정실록' 원년(1568) 음력 8월 기록을 보면 "이황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이 기사에 이어 "이때에 박순이 대제학(정2품)이 되자, 이황은 제학(提學, 대제학의 바로 밑 직급, 종2품)으로 있었는데 박순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높은 나이의 대석학이 다음 자리의 벼슬에 있고 제가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한 사람으로 감히 윗자리에 있음은 합당하지 않으니,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런 임명이 있었다. 이황도 다시 힘껏 사양하여 다시 교체되어 박순이 대제학이 되었다." 당시 이황의 나이 67세였고, 박순은 45세였다.
당시 대제학은 지위가 정승의 아래였지만 만인이 선호하는 자리였다. 그런 벼슬을 박순은 선배 학자에게 양보하였던 것이다. 퇴계 이황은 이런 박순에 대해 "박순과 상대하면 마치 한 덩이 맑은 얼음과도 같아 정신과 넋(神魂)이 아주 상쾌하다"라면서, 칭찬하였다고 한다.
명종의 외숙이던 윤원형과 명종의 왕비 심씨의 외숙인 이량을 축축했던 박순은 선조에게는 가장 믿음직스런 대신이었다. 선조는 박순을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고 평했다. 즉 박순은 소나무나 대나무와 같은 절개와 지조를 지녔으며 맑은 물이나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일게다. 임금이 신하에게 했던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백사 이항복도 박순의 시호를 올릴 때 글인 시장(諡狀)에서 "옛말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공(박순)을 두고 한 말이다"라고 박순의 용기를 찬양하고 있다.
선조와 퇴계 이황, 백사 이항복의 박순에 대한 칭찬은 박순이 보여준 정의로움의 삶과 선배 학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였다. 선조를 포함, 두 분의 평가는 사암로의 주인공 사암 박순이 어떤 분인지, 왜 14년간 정승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암 박순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나주였고, 주로 활동했던 공간은 한양(서울)이었으며, 그가 말년을 보내고 묻힌 곳은 경기도 포천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는 집터만이 남아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가까이에 부친인 육봉 박우의 무덤이 있을 뿐이다.
그의 부친 박우와 큰아버지 박상이 태어나고 자란 서창 절골에는 박상의 무덤이, 광산구 소촌동에는 그와 큰아버지 박상을 기리는 사당인 송호영당이 있다. 그리고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광곡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월정서원도 있다.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은 세상을 뜨기 4년 전인 63세 때 찾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백운계곡이다. 이곳 창수면 주원리는 예부터 산수가 아름답기로 세상에 이름난 곳인데, 이곳을 찾았던 것은 경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외동딸과 사위가 살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포천시 창수면에는 그의 묘소와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 그를 기리는 옥병서원이 남아 있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