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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어릴 때 노래도 있었지 아마...최영장군에 대한...
이건 최영장군의 말이 아니고 아버지인 최원직이 가훈(?)으로 내려준 말이라고 합니다.
벽제 필리핀군 참전비 뒤쪽에 최영장군 묘가 있다. 들머리에 아직도 전통(?)을 잇고 있는 유명한 보신탕집인 통일옥이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어 더욱 놀라기도 하였는데...근래에 보신탕을 먹지는 않지만 25년전에 갔던 집이 아직도 변함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어쨌든 너무나 바뀌고 없어지는 것에 익숙한 현대사회를 살고있는 나에게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왕릉이든, 궁이나 성등 국내나 국제적으로나 문화재를 볼라치면 그 당시 소수의 특정세력을 위해 만들어진 강제성,
참혹한 평민들의 고통과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쨌든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오랜세월 동안 보존이
됨으로 인해 문화재가 된 것이 아닌가. 그 덕분(?)에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역사와 교훈을 전해주는...
최영장군 묘를 가는 길에 가을의 정취를 흠뻑 전달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반긴다.
참고 글.
(최영은 역사적 공적이 두드러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자료는 의외로 허술하다. 가장 중요한 본관도 엇갈려
묘역 입구 안내판에는 동주(철원의 옛 지명) 최씨로 철원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다른 자료에는 창녕 최씨로
경기도 고양이 출생지라고 기술한 곳이 있다.
역사적 평가도 구구하다.
팔도도통사 최영의 주장대로 조민수·이성계 좌·우도통사가 위화도 회군을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더라면 의당히 그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 영토를 넓혔을 것처럼 비분강개하는 시각들도 있다. 하지만 사학계는 그 당시 국제정세를 그토록 녹록하
게 보고 있지 않다. 고려가 종주국으로 섬기던 원나라(1271∼1368)는 이미 중원을 석권한 주원장에게 패해 북원(北元)으
로 쫓겨간 뒤였고, 그 후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1368∼1644)는 300년 가까이 대륙을 지배했다. 일부에서는 최영 측의
구파 군벌과 조민수·이성계의 신파 군벌 간 대립으로 보며 당시 고려 군사력으로는 요동정벌 자체가 무리였다고 분석하
고 있다.)
생각보다 초라한 봉분인데 앞의 묘가 최영장군과 부인을 합장한 묘이고, 뒤쪽은 아버지 최원직의 묘라 한다.
초라한 봉분이라함은 통상의 문화재로 보존되는 묘를 보면 주로 왕족들의 능, 특히 조선시대 왕들의...그 규모가 웅장하므로
그것과 비교하면 규모가 턱없이 작다는 말이다. 하긴 왕족들이 만들은 것이 아니니...
무덤 좌우로 문신상이 하나씩 있는데, 무신상은 왕릉에만 세울 수 있다고 한다. 그 옛날의 왕권주의....무시무시하지...ㅎㅎ
아버지 최원직의 묘비
최영의 묘는 부인과 합장이라는데 묘비에 새겨진 삼한국대부인 문화유씨....에서 삼한국대부인은 남편의 관직에 따라
부인에게 내리는 작호 란다. 자세한 것은 역사를 깊이있게 공부해 보시도록...정1품, 종1품 어쩌고 무지하게 복잡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이란 이른바 무슨 타이틀에 열광하나보다. 그래서 훈장을, 작호를 하사하고...그 명예와 권세에...
묘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들이 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잎들이 많이 죽어있다. 저번 태풍에 뽑힌 것도 있는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덩굴나무의 잎이 발갛게 단풍이 들어 보기는 좋다만...
아이러니하게 최영장군묘 가까이에 성령대군 사당과 묘가 있다. 성령대군이라 했으니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의 능인데
조선 3대 태종의 아들이다. 즉 양녕, 효령, 충령(세종대왕), 다음에 성령이다.
14 세에 홍역으로 사망했다는데 왕릉 만큼은 아니라도 그 규모가 제법된다.
우리가 배웠다시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고려말 무신 최영의 부하였고 요동정벌을 명받아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오히려 최영을 치고 결국 그를 유배 및 죽음에 이르도록 한다. 성령대군은 이성계의 자손이고...
역사의 평가에 따라 이성계가 옳으니 그르니...신군부와 구군부의 싸움이 어쩌고....얼마전에도 있었던 우리의 역사다.
민심은 무서운 것이다.
옛날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개성)에서 이성계로 인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성계육 이라는 것이 유행 했다고
한다. 새로 나라를 세우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겠는가. 특히 고려의 왕족인 왕씨들은 씨를 말렸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고려왕조의 버팀목 이자 민간에게 추앙받던 최영장군까지 죽였으니 개성사람들의 반감은 하늘을 찔렀고
노골적으로 표시는 못해도 그 원한이 어떠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개성에 도읍을 정하지 못하고 한양으로 천도
한 것도 개성민심을 잡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하여튼 그 당시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개성 사람들은 덕물산 중턱에 당집을 만들어 최영 장군의 화상을 그려 모시고 신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당제를
지내며 마음을 달랬는데, 사람들은 최영을 모시며 그의 원혼을 달래는 것으로 자신들의 뜻을 나타냈었다고 한다.
당제를 지낼 때에는 통돼지를 제물로 바쳤는데, 이는 어느 당제나 마찬가지였지만, 당제를 끝내고 음복을 할 적에 아주
독특한 행동들을 했는데, 즉 통돼지를 눕혀놓고 아무렇게나 마구 썰어댔으며, 너도나도 나서 칼로 머리를 치기도 하고
배를 가르기도 하며 살점을 뭉텅뭉텅 썰기도 하고 잘게 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썰어낸 고기를 마구 씹어 먹
었다고 한다.
보통의 음복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마치 험한 인상을 지으며 복수하는 듯한 몸짓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성
계의 이름을 따서 '성계육'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돼지고기를 썰어서 국을 끓여 먹었는데, 돼지 고깃국의 살점
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이를 또 '성계탕'이라 불렀다. 아마도 이성계가 돼지띠해에 태어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 또 다른 얘기는 개성여인들이 만두에 넣을 돼지고기를 다질때 시장에서 성계육을 달라고 하여 도마위에 놓고
이성계의 목을 치듯이 난도질을 하면서 분풀이를 했고 그 고기를 성계육이라 불렀다고 한다.
'숙주나물'의 경우도, 사육신이 처참하게 살해되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하사받아 여종으로 삼으며 악행을 벌이던,
여섯 임금을 거치며 갖은 부귀영화를 누린 변절의 대명사 신숙주에 대해 숙주나물이라 이름붙인 나물을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아침 저녁으로 꼭꼭 씹으며 사육신의 한을 풀어주고 있는 것이 민심의 표현이다.
어쨌든 성계육이니 숙주나물 같이 나쁜 의미로 역사에 오래도록 회자되지는 말아야겠다.
*** 다른방향의 역사평가도 있는데...
권문세족이라 불리는 부패가 만연하고 망해가던 고려말의 상황에서 오히려 이성계등 신진세력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의견. 성계육이라는 풍습을 만들어낸 것이 고려시대 권문세족 부류들이 나라가 바뀌면서 조선초기 당연히
민심을 얻기위해 토지개혁이며 여러가지 기득권 세력들이 싫어할 개혁이 이루어지며 최영장군을 모시는 민심에
이성계를 반대하도록 부추기는 행위를 만들었다는...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마치 얼마전에 강남부자들이 서울을
옮기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것과 비슷한...
어디나 쿠데타가 일어나면 그동안 잘먹고 잘살던 기득권 세력들의 불만이 오히려 제일 많은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계속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을테고, 쿠데타 세력은 민심을 수습한다고 그들을 목표로 삼을테고..
하지만 역사가 그렇듯 새로운 시대는 또 새로운 기득권을 형성하고...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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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최영장군에 대한 인터넷 펌글이니 필요하면 역사공부를 하시도록...파란만장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최영(崔瑩)
1316(충숙왕 3)∼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명장·재상. 본관은 창원(昌原).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5세손,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의 아들이다.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뛰어났다.
처음에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우달치〔于達赤 : 司門人〕
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에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護軍)이
되었고, 1354년에 대호군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갔다. 그 때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脫脫) 등을 좇아 중국 가오유〔高郵〕 등지에서 싸웠다. 1355년에는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막았으며 팔리장(八里莊)에서 싸워 용맹을 떨친 뒤 돌아왔다.
이듬해부터 고려가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게 되자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서북면병마사 인당(印槻)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파사부(婆娑府 : 九連城) 등 3참을 쳐부수었다.
1357년 동북면체복사를 거쳐 이듬해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여 척으로 오예포
(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해 격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생양(生陽)·철화(鐵和)·서경·함종(咸從)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듬해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를 거쳐 그 이듬해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좌산기상
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
1361년에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침입해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
을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이어 양광
도진변사(楊廣道鎭邊使)를 겸하였다가 도순문사를 겸하였다.
1363년에는 김용(金鏞)이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던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평정시켰다. 그 공으로 훈 1등에 진충분의
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이 되었고, 이어 판밀직사사 평리(判密直司事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 : 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
너 선주(宣州 : 평안북도 선천)에 웅거하였다. 이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수주
(隨州 : 평안북도 정주)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 : 평안북도 운산)에 침입한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를 장수를 보내 격퇴시켰다. 이듬
해 교동(喬桐)·강화(江華)에 왜구가 출몰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東江)에 나가 지켰다.
이 때 신돈(辛旽)의 참소로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다가 귀양길에 올랐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6년 만에 풀려
나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1373년에는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있으면서 군호(軍戶)를 편적(編籍)하여 전함(戰艦)
을 만들게 하였다. 또,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들로부터 쌀을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1374년 경상·전라·양광도도순문사가 되었을 때, 육도도순찰사 시절에 6도를 혼란스럽게 하였다는 이유로 대사헌 김속명
(金續命) 등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김속명이 파면되고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
의 호가 하사되었다.
그 해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000필을 요구하였는데, 제주도의 호목(胡牧)이 300필만 보내왔다. 이에 제주도를 치기로
하고,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가 되어 도병마사 염흥방(廉興邦)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00명을 지휘, 제주도를 평정하였다. 그리고 1375년(우왕 1)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에게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 때
노구를 이끌고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鴻山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철원부
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에는 도통사가 되어 강화·통진(通津)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한편, 왕으로 하여금 교동·강화의 사전(私田)
을 혁파하여 군자(軍資)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 무렵 왜구가 침입하여 개성을 위협하므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군사로서 굳게 지킬 것을 주장
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 지금의 淵德)에 침입하자, 이성계·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80년에는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동서강(東西江)에 나가 왜구를 막다가 병에 걸렸다. 이 때 왕은 공을 기록한
철권(鐵券)과 공을 치하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듬해 아버지에게는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
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판문하사(判門下事)·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상호군(上護軍)·동원부
원군(東原府院君)이 증직되고, 어머니 지씨(智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그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이
되었다가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냈고, 1384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올랐다.
1388년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密令)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임견미(林堅味)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
다. 그 해 그의 딸이 우왕의 비(寧妃)가 되었다. 이 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
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이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였다.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 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기세가 오른 이성계의 막강한 원정군을 막지 못하여 결국 도성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는 고려 말기의 군벌(軍閥) 대립에서 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이 고려왕조를 부정하려는 신진 군벌에게 패배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강직용맹하고 청렴했던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 : 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충주로 옮겨졌다가 공료죄(攻遼罪 : 요동을 공격한 죄)로 개성에 압송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고, 그 해 12월에 참수(斬首)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
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개풍군(開淵郡) 덕물산(德物
山)에 있는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다 하여 적분(赤墳)으로 불린다. 그 산 위에는 장군당(將軍堂)이 있어 무당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崔瑩(金庠基, 朝鮮名人傳, 朝鮮日報社, 1939), 崔瑩(閔丙河,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65).
<민병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