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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
누가복음 7:1-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벌써 6월이다. 2013년을 시작할 때 우리가 말씀 중심의 생활을 결단하였다. 여러분의 말씀 생활은 안녕하신가? 특히 색동교회가 말씀 읽기로 결심한 네 가지는 잘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새벽기도회 말씀 묵상 ‘굿모닝 큐티’, 가정예배서 ‘하늘양식’, 헤른 후터 공동체의 ‘말씀 그리고 하루’ 그리고 ‘일용할 경건 15분’이다.
경건생활은 반복적,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다. 행여 잠시 중단했거든 지금부터라도 다시 재도전하기를 바란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도전하라! 성경이 바뀌나, 내가 바뀌나 씨름하길 바란다.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포함되어 있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올해 우리 교회 주제성경은 고린도서이다. 우리는 수요일 마다 고린도서를 공부하며 모범교사와 반면교사를 따진다. 고린도서는 그만큼 현실에 도전하는 문제들을 많이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모범교사도 있지만,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도 많이 있다. 문제가 무엇인지,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따지고, 신앙적인 대안을 찾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요즘 우리 사회든, 교회이든, 배우지 말아야할 반면교사가 훨씬 많다. 최근 뉴스만 하더라도 갑을관계니, 성추행이니, 조세회피니 대단히 시끄럽다. 왜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억압하게 되었는지 답답하다. 분석하기를 많은 문제점은 우리 사회가 압축 성장을 해서 그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잘못을 한 당사자들은 별로 수치심이 없어 보인다. 왜 그런가? 남들도 다 그러는데, 나만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는 것이다. 사실 감춰졌을 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그냥 관행으로 치부되지만, 드러나면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참 간사한 사회이다.
건전한 상식인으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달라야 한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다운 경건, 기도와 묵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필요하다. 마음처럼 몸은 하루아침에 그리스도인으로 바뀌지 않는다.
본문은 우리가 모범교사로 소개할 대표적인 사람이다. 한마디로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로마의 백부장이다. 유대 사회에서 로마의 백부장이란 존재는 단연 수퍼 갑이었다. 통치자의 입장에서, 지역을 관리하는 외국군 장교이니 얼마나 위세가 클까?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7장의 백부장 같은 사람은 모범적이다. 오죽하면 복음서에 다 기록되었을까? 예수님은 백부장과 같은 ‘이런 사람’을 최상급으로 칭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
1)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머무실 때 일어난 일이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2).
놀랍지 않은가? 백부장이란 계급과 신분의 사람에게 종이 있었다는 사실, 그가 병들어 죽게되었다는 사실은 별로 뉴스거리가 못된다. 그러나 종을 백부장이 사랑했다면 뉴스초점이 된다. 로마 법률에 종은 재산이나 도구 취급을 하던 시대였는데, 불쌍히 여기고 연민을 품었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가 아닐 수 없다.
백부장은 누구인가? 백부장이란 군대에서 100명의 부하를 둔 지휘관이었다. 그들은 로마 군대의 중추적인 존재였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백부장의 자격에 대해 기술하기를,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구해서는 안 되고, 행동에 있어서는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약 성경은 몇 차례 백부장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때마다 대단히 긍정적이다.
십자가 처형의 집행을 담당하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고백하였다.
사도행전은 백부장 고넬료를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행 10:22)라고 소개한다.
로마로 바울을 호송하던 백부장은 항해 중 풍랑을 만났을 때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행 27:43)였다.
백부장의 존재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전파과정에서 언제나 호의적이었다.
오늘 본문의 가버나움 백부장도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백부장은 자기 종에 대한 태도가 남들과 달랐다. 백부장은 정말 따듯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쓸모가 없어진 병든 종을 학대하기는커녕 살리려고 애쓴다. 종과 상전이라는 신분적 차이, 갑을 관계를 넘어선 행동을 한다. 우리 속담에 ‘양반은 상놈을 잘 혼낼 줄 알아야 양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백부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병든 종에게 인간적 연민을 갖고,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백부장은 종의 병을 고치려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찾았다.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의사를 찾았다. 백부장은 죽어 가는 종을 고치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귀신을 내쫒고, 중풍병자도 일으킨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 분이면 낫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나 이방인으로서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은 가버나움지역 주둔 로마군 장교이지 않은가? 그래서 생각한 끝에 지역 유지인 유대인 장로들에게 중개를 부탁하였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칭찬하신 이유는 그런 전후사정을 손바닥의 손금 보듯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2)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기꺼이 중재에 나섰다. 그가 이방인이었음에도, 텃세가 심하고, 이방인을 우습게 보는 유대인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찾아와 간청해 주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 이방인은 ‘남다른 사람’임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유대 민족과 하나님 신앙에 얼마나 친밀한지 증빙자료를 제시한다. 즉 한마디로 물을 것도, 따질 것도 없이 자비를 베풀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4-5). 그들이 대신 청하는 백부장은 ‘이런 사람’이었다.
먼저 백부장은 군인 장교였지만 유대 민족에게 지배자로 군림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일반적으로 식민지 백성을 압제하고 재물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사랑하였다. 대단히 예외적인 수퍼 갑인 셈이다.
또한 백부장은 로마인이었지만 유대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고, 또 이방인은 유대인을 멸시하였다. 그럼에도 백부장은 남다른 종교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줄 정도였으니, 그 정도면 완고한 유대인의 마음을 돌려놓고도 남았을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이런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이방 종교와 예배에 환멸을 느꼈다. 그들의 예배가 음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교의 회당예배에 참가하였다. 할례를 하거나,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이런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사도 바울은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가서 회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행 13:16). 하나님은 종교인이 아니라, 주를 경외하는 자를 찾으신다.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벽을 허물었다. 식민지 백성에 대한 편견, 유대 문화에 대한 편견, 이방 종교에 대한 편견..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가 불신과 갈등의 벽을 허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3)
이제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일행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향해 가셨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6).
그런데 집에 다다르기 전에 백부장은 자기 벗들을 보내 예수님의 출입을 사양한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6-7).
백부장은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히 말씀드린다. 어찌 자기가 예수님을 오라 가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그 무례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뜻밖의 한마디를 한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
여기에 백부장의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건강하게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다.
믿음의 기본 원리 중 으뜸은 온유와 겸손이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다.
어거스틴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은혜받기 위한 방법 세 가지를 물었다. 어거스틴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 모두 겸손뿐이라고 한결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겸손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 연약함을 똑 바로 보게 한다. 그리고 텅 빈 자신의 삶을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운다. 여기에 은혜 포인트가 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
결국 그의 믿음대로 종은 죽을병에서 즉시 나았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10).
우리가 본받아야할 모범교사는 ‘이런 사람’이다. 우리가 구하려는 최고의 믿음은 “이만한 믿음”이다. 우리는 “이만한 믿음”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다. 우리가 말씀 중심의 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이러한 말씀의 사람을 본받겠다는 목적을 갖는 일이다. 당시 율법의 권위를 장악한 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조차 땅에 낮추었기에 남다른 영적 안목과 믿음을 지닐 수 있었다. 겉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얼마나 귀한가?
백부장에게는 약자에 대한 존중, 하나님 신앙에 대한 경건, 시골 랍비처럼 보인 예수님 앞에서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있었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문턱은 자기 자신의 눈높이에 달렸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이만한 믿음”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는 완고한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있지 않았다. 백부장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다른 사회와 벽을 허물고, 친밀하고 따스한 인간미를 나누며, 지배욕이란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백부장의 종에 대한 연민, 유대 민족과의 친밀함.. 이 정도만 보아도 백부장은 당시의 가치관, 세계관을 뛰어넘는 차원이 다른 인간형이었다.
후안 아리아스의 ‘내가 믿지 않는 하나님’이란 책이 있다. 거기에는 숱한 반면교사의 모습이 등장한다. 오늘 비뚤어진 교회의 가르침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사람의 이성과 감정을 빈약하게 만드는 하나님. 특정교회, 특정 품목, 특정 문화, 특정 계층이 자신을 독점하도록 하는 하나님. 무릎을 꿇고 바치는 기도만을 원하고, 교회 안에서만 만나 주는 하나님. 당신의 창조세계를 위한 임무를 포기하고, 자기 형제자매들의 역사현장에 무관심한 제자들을 양성하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율법에 갇힌 사람들이 바라보는 신의 모습이다. 신앙을 독선의 근거로 삼고, 신앙마저 도구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성령강림절기이다. 사람들은 성령의 뜨거움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은 그 기세가 거창하고, 성공적이며, 두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은 오래가지 못한다.
오늘 찬양한 ‘따스한 성령님’은 성령의 다른 차원을 느끼게 한다. 존 웨슬리의 회심은 성령의 뜨거움(hot)가 아닌 성령의 따스함(warm)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회심 직후 “가슴이 이상하게 따스함을 느꼈다”고 고백하였다.
평생 웨슬리에게 경건한 삶, 위대한 순종, 거침없는 개혁,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만들어준 것은 ‘따스한 성령’의 은혜였다.
찬양의 가사처럼, 성령의 따스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런 신앙을 지닌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삶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의 올바름을 지켜라. 그런 경건함으로 내 인생의 변화와 기적을 체험하라. 그리고 그런 신실함과 정의로움으로 세상을 따듯하게 만들고 새롭게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을 많이 허락하시길 바란다. 여러분 모두 “이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