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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불패의 해전기록
난중일기
다음은 5월 4일 여수항을 떠나면서 올려 보낸 장계이다. 만약 이순신이 첫 출동에서 전사했었다면 마지막이 될 뻔했던 장계다.
※ 충무공의 장계 ※
삼가 구원병 나가는 일로 아뢰나이다.
그러나 겸관찰사 이광도 그 병력이 외롭고 약한 것을 염려하여 본도 우수사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 오도록 하였다 하며, 우수사 이억기의 공문 내용에는 ‘이 달 30일에 배가 출발한다’ 고 하므로, 그 도착을 기다려서 군대의 위세를 장하게 갖추어 일제히 떠나겠다는 사유로 이미 장계하였습니다. 내륙으로 향한 적이 장차 서울을 침범하려 하므로 신과 여러 장수들도 분발하지 않는 이가 없사오며, 칼날을 무릎쓰고 사생 결단코 돌아갈 길을 막아 끊고서 적선을 쳐부순다면, 혹시 뒤가 염려스러워 바로 돌아올 수도 있겠기에 오늘 5월 초 4일 첫 닭이 울 때 출발하여 바로 경상도로 향하오며, 한편으로 우수사 이억기에게 속히 달려오라는 일로 급히 공문을 띄웠습니다. 이억기 함대가 4월 30일 출발한다고 했기 때문에 5월 3일까지 기다렸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에 좌수영 함대는 단독으로 출항했다(선조가 한성을 비운 것은 4월 30일, 이순신은 그 소식을 5월 8일 적진포해전이 끝난 후 들었다. 한편 이억기 함대는 6월 3일 당포에서 이순신 함대와 합류했다). 4월 27일과 4월 30일, 그리고 5월 3일의 장계는 중도에서 실종되었고, 그 결과 원균을 두둔했던 김응남과 이덕열은 선조의 어전회의에서 아래와 같은 모함성의 주장을 하게 된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6일 ※ ※ 《선조실록》 1596년 11월 7일 ※ 이 같은 모함이 계속되는 가운데 후에 드디어 원균이 통제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이 어전회의 내용은 《원균행장록》에 인용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위와 같은 《선조실록》의 기록을 학자들과 작가들이 인용해서 원균을 두둔하고 있다. 아래는 2004년에 간행된 이순신을 모함하는 어느 소설에서 인용한 것이다. 율포 만호 이영남이 부드득 이를 갈며 좌수영에 도착한 것은 군중회의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이영남은 경상우수영 깃발을 앞세우고 들어와서 원균이 보낸 서찰을 전한 다음 뜰 가운데 옴나위없이 서 있었다. 닷새 전, 이영남은 무릎을 꿇고 읍소하면서 구원병을 청했다. 이순신은 바쁜 일을 핑계로 하여 한나절이나 버려두었다가 냉정하게 거절했다. 벌써 네 번째였다. “아직 어명이 내리지 않았느니라.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일 수 없으니 돌아가라.” 그때 이영남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시는 좌수영에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차라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왜군과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지.’ 그러나 전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엇고, 이영남은 결국 다섯 번째로 좌수영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위 소설에서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조실록》에 기록된 어전회의를 참조하기 전에 우선 실종된 세 통의 충무공 장계를 추가해서 재조명해야 한다. 이번에는 임진왜란 발발 전후의 《난중일기》 쪽을 보자. 옥포해전에서부터 부산포해전까지 정독을 하고 나면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제 1차 출동이 있기 전까지의 난중일기와 장계를 보다 깊이 해독할 수 있다. ※ 《난중일기》 1592년 1월 1일 ※ ‘여필’ 은 우신(넷째)의 자(字)다. 당시 아산 이순신의 집에는 노모와 부인이 있었는데, 이순신은 2년 동안 집에 가지 못했던 것 같다. 4형제 중 살아있는 순신과 우신, 이순신의 장남 회, 봉(둘째 형 요신의 장남)이 정초에 자리를 함께 했다. 조정은 왜란을 우려해서 3도의 감사와 수사, 병마사를 교체했는데 전라감사 이광과 병마사 최원, 그리고 이순신이 함께 발령을 받았다. 설날이 되자 최원 병마사는 설 선물과 함께 장편전(장전과 편전)의 견본과 기타 무기류 견본들을 보내왔다. 수사와 병마사가 서로 견본을 주고받으면서 격물 · 치지적 이치 탐구를 했다. ※ 《난중일기》 1월 3일 ※ 이순신은 이렇게 공문을 보낸 후 회신을 받았고, 추후 현지를 순방했을 때 지시의 이행 여부를 면밀히 확인했다. ※ 《난중일기》 1월 7일 ※ 조카 봉은 이날 아산으로 떠났다. 전문은 나라에 길흉이 있을 때 임금에게 올리는 표문이다. 새해를 맞아 하례의 글을 올린 것이다. 전문과 함께 신년하례 선물 등을 보내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 《난중일기》 1월 8일 ※ 객사동헌은 오늘날의 진남관이고, 진남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었다. 이곳에서 망궐례(초하루와 보름에 진남관에서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행사)도 올렸다. ※ 《난중일기》 1월 9일 ※ 진남관 동헌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에 절한 후 남원 유생이 전문을 가지고 올라갔다. ※ 《난중일기》 1월 10일 ※ 방답첨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신임 인사차 왔다. ※ 《난중일기》 1월 11일 ※ ※ 《난중일기》 1월 12일 ※ 새해를 맞아 본영과 각 기지의 진무(오늘날 선임하사 격)들을 모아 진남관 전패에 새해인사를 올리고 서로 상견례도 했다. 또 오후에는 활쏘기 시합을 한 후 저녁에 잔치를 연 듯하다. ※ 《난중일기》 1월 15일 ※ ※ 《난중일기》 1월 16일 ※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가 석수로 선생원 채석장에 있으며 돌을 뜰 때 이웃 사방의 개들에게 피해가 미쳤기로 곤장 80대를 때리다. 각 고을의 관리와 아전들의 신년인사를 받았다. 방답진의 병선 담당자들은 이순신 첨사가 부임하기 전 나태했다고 해서 곤장을 맞았다. 이순신은 관기와 군기를 바로 세우고자 군영 관리를 엄격히 했고 민폐 끼치는 것을 크게 경계했다. ※ 《난중일기》 1월 17일 ※ ※ 《난중일기》 1월 17일 ※ 1월 12일에 있은 활쏘기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이들의 명단을 감영에 상신한 내용이다. 이러한 관리자적인 모습은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어졌다. ※ 《난중일기》 1월 19일 ※ 본영 소속의 각 부대들은 물론 관내 다섯 고을과 다섯 포구기지의 병력을 서면으로 점고했다. ※ 《난중일기》 1월 23일 ※ 사복시는 대궐에서 말을 관리하는 곳인데, 1월 21일에 온 감목관이 말을 몰고 갔다. 좌수영 관내 섬에는 사복시에서 받아와 기르던 말이 많았다. ※ 《난중일기》 1월 24일 ※ ※ 《난중일기》 2월 1일 ※ 쓸 만한 판자를 고르려 했던 것은 한 두 명의 목수를 데리고 무엇인가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다른 장수들 같았으면 사람을 시켰을 것이고, 또 분부를 받은 사람은 “사또께서 구해 오랍신다!” 하며 다니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지도와 진법을 잘 그린다는 사실을 당시 조정에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이순신은 평소 무엇인가를 만들고 설계도면 같은 것을 많이 그려왔던 것 같다.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선창으로 나간 것을 보면 역시 격물 · 치지의 삶이 생활화된 현장 중시의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피라미를 잡는 것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잡은 것을 헤아려 보기까지 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창에서 일하고 있던 이들에게 술안주감으로 몇 마리씩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려고 따져본 것은 아닐까? 이몽구도 술상을 받았고 모두들 피라미 안주와 술상을 받고서는 즐거워했다. 이 때가 이순신이 부임한 지 1년이 되던 때였다. 그동안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는데, 피라미 덕분에 모두들 잡시 한숨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 《난중일기》 2월 2일 ※ ※ 《난중일기》 2월 3일 ※ 순시선 제도가 있었고, 제주도 사람들이 순시선에 붙잡혔다. 민간인 죄인을 순천부에 올려 보낸 것은 일반 행정은 순천부에서 관할했기 때문이다. 또 군사와 행정이 2원화 되어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는데, 군사체계는 좌수영이 총괄했고 일반행정은 순천부가 돌산도의 방답 지역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 《난중일기》 2월 4일 ※ 전쟁에 대비한 격물 · 치지적 현장주의 군영에 임하고 있다. ※ 《난중일기》 2월 5일 ※ ※ 《난중일기》 2월 6일 ※ ※ 《난중일기》 2월 7일 ※ 그동안 발포 만호 자리는 공석이었는데, 부임해온 신임자가 누구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 《난중일기》 2월 8일 ※ 돛 29필을 전라감영으로부터 지원받은 것 같다. 당시의 법은 각 고을과 기지의 군대, 병참, 병선 등은 소속 고을의 백성들이 책임지고 조달했고, 그것으로 자신드르이 해안지역을 지키고 있다가 수사의 명령이 있으면 한 곳에 집결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논공행상은 소속 후방고을로 돌아가는 체제였다. 이순신은 당초에 3척의 거북선을 만들게 했는데 ‘본영 소속 거북선’, ‘방답 소속 거북선’, ‘순천 소속 거북선’ 이라는 글귀가 장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거북선을 건조한 장수는 여수 조선소에서 하되 경비, 자재, 조선공의 동원은 세 지역에서 공동으로 부담한 것으로 보인다. 전라감영에도 거북선의 건조계획을 보고했을 것이고, 이에 지원을 받은 듯하다. ※ 《난중일기》 2월 9일 ※ ※ 《난중일기》 2월 10일 ※ 역관들이 ‘조선과 일본이 힘을 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 고 명나라에 무고했던 것 같다. ※ 《난중일기》 2월 11일 ※ ※ 《난중일기》 2월 12일 ※ 노산 이은상에 의하면, 해운대는 여수시 동북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반도로 해안 절벽에 ‘해운대’ 라고 새긴 충무공의 필적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수 외항을 매축할 때 이 해운대 전체를 헐어서는 축항에 사용하여 지금은 그 형적조차 없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 《난중일기》 2월 13일 ※ 견본용 화살대와 대포 제작용 쇠를 보낸 것 같다. 이순신과 이억기가 격물 · 치지적인 공동연구에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난중일기》 2월 14일 ※ ※ 《난중일기》 2월 15일 ※ ※ 《난중일기》 2월 16일 ※ ※ 《난중일기》 2월 19일 ※ 비가 온 뒤여서 산꽃이 활짝 피어 뛰어난 경치는 이루 형언키 어렵다. 저물어서야 이목구비(여천군 화양면 이목리)로 와서 배를 탔다. 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 이르니 흥양 현감과 여도 권관이 나와 맞는다. 방비를 검열하다. 흥양 현감은 내일 제사가 있다고 먼저 갔다. 봄이 되자 순천부사와 이순신은 봄바람도 쐴 겸 관내 순시에 나섰다 ---------------------------------------------------------------------------- 무능한 조정 평양성이 왜군에게 넘어간 것은 1592년 6월 15일이다. 조선 조정은 그 이전에 화약무기를 갖추고 관군과 평양성 백성들을 동원해서 평양성을 지켰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명나라 조승훈 군이 평양성에 들어와 함께 싸웠다면 평양성은 3만의 왜군에게는 난공불락이었을 것이고, 임진왜란은 대반전을 맞았을 것이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4일 ※
선조는 중전과 함께 명나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선조는 조선을 포기했다는 것인가?
※ 《선조실록》 1592년 6월 14일 ※
임금이 문 밖으로 나와 말을 타고 박천으로 떠날 무렵에, 상례(相禮) 유조인이 말 앞에서 울면서 말하기를 “세자로 하여금 대가를 따르도록 하여 환란을 함께 하소서.” 라고 하니, 임금이 가여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서서 위로하고 타이르자 세자가 이별을 나누는 장소에 서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였다.
세자의 분조가 산골 벽촌 강계로 가서 신주단지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면 조선왕국의 국가 군영은 누가 맡아서 하겠는가. 아무튼 조선의 장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하고 어두워져 갔다.
● 명나라 참전
이때에 해평군 윤근수가 급보를 올렸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4일 ※
명나라 요동군 조승훈 부대가 곧 압록강을 건넌다는 소식이 왔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4일 ※
당시 명나라 병사의 기본급이 월 3.6냥이었기에 2만 냥은 5천명 병사의 1개월 치 기본급에 해당한다. 조선은 이를 군사원조로 받아 요긴하게 사용했다. 유성룡은 평양에서 정주로 가는 도중에 선조의 명령을 받았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4일 ※
선조는 윤두수(이 무렵 윤두수는 이미 평양성을 왜적에게 내어주고 행재소로 오고 있었다)에게도 조승훈 군과 군자금 2만냥 관계 희소식을 알리면서 ‘이것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이니’ 하면서 명나라 군사가 올 때까지 평양성을 잘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평양성은 이미 6월 15일에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이 같은 희소식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 되고 말았다.
한편 6월 14일은 이순신이 《당포파왜병장》을 올려 보낸 날이다. 이날 주야를 달려서 올라간 장계가 6월 24일 전후하여 평양성에 도착했다면 조선군의 사기는 충전했을 것이고, 그 소식을 동대원의 왜군들이 알았다면 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장계가 도착하기도 전에 평양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5일 ※
유성룡 : 신이 안주에 도착하여 명나라 군사를 기다려야 되는데 가던 길에 행재소를 지나게 되었으므로 뵙고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뵙기를 청한 것입니다.
선조 : 무슨 일을 말하고 싶은가?
유성룡 :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어제 새벽에 우리 군사가 부벽루 얕은 여울에서 적장을 죽이고 말 1백여 필을 빼앗았다.’ 고 하였습니다.
선조 : 윤두수의 장계를 보니 인심이 흉흉하다고 한다.
유성룡 : 얕은 여울을 방어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인심이 놀라 동요했다고 합니다.
선조 : 그곳에 병사를 증강하지 않을 것인가?
유성룡 : 김명원은 장수의 그릇은 되지만 장재(작전력)에는 부족하고, 허숙 · 김억추는 물러나 움츠린다고 합니다. 지금 마땅히 군령을 엄히 하여 한 걸음이라도 퇴각하는 자는 바로 참수한다면 모든 장수들이 반드시 명령을 따라서, 명나라 병사가 오면 반드시 성공할 기세가 있을 것입니다.
선조 : 나도 역시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임금과 유성룡이 왕성탄 패전 소식(평양성을 내어준 것은 아직 모르고)과 강동 지역 조선군의 후퇴소식을 들었다. 그 대책으로 ‘한 걸음이라도 퇴각하는 사람은 참수해야 한다’ 고 했는데, 왕성탄과 평양성이 왜군들의 수중에 넘어갔고, 강동 지역 조선 장수들은 대동강 상류의 산 속(낭림산맥)으로 숨은 후였기 때문에 이 같은 대책도 사후 약방문이 되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5일 ※
선조 : 지금 들으니 왜적이 강여울을 건넜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이호민 : 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왔습니다.
선조 : 우리가 이미 승전했는데 왜적이 어떻게 건너왔는가?
이호민 : 왜적이 패전한 것을 분하게 여겨 일시에 병사를 출동시켜 여울을 건넜습니다.
‘우리가 이미 승전했는데’ 라고 했는데, 6월 14일 동대원을 야습한 전투를 두고 선조는 그동안 승전해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선조는 이렇듯 ‘임금이 듣기 좋아하는 방식의 보고’ 만을 받아오다가 이 시점에 와서야 동대원 전투가 패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5일 ※
이호민 : 신이 모란봉에서 바라보니 다섯 항렬로 건너오는데 칼날이 번쩍거렸습니다. 그 여울이 매우 험하여 건너기가 어려운데 요즘 마침 몹시 가물어 강여울이 매우 얕아졌기 때문에 건널 수 있었습니다.
선조 : 왜적이 비록 강여울을 건넜지만 평양은 지킬 수 있겠는가?
이호민 : 오는 도중에 보니 지방 병사들이 나아가서 강여울을 지키려고 이미 성(城)을 나갔는데 강여울의 방어가 무너졌으므로 대다수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소신이 목격한 바로써 말씀드리자면 강을 건넌 왜적은 2백여 기(騎)쯤 되며, 이천과 이원익이 순산으로 와서 흩어진 병졸들을 끌어 모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평양성에 있던 조선군 3~4천 명 중 2천 명이 성을 나와서 대동 강변 50여 리에 있는 얕은 여울 3~4곳을 수비했다고 보자.
우선 왜군 기마대 200기 정도가 강을 건너 올 때의 상황은, 동대원에 있던 2~3만의 왜군 중 일부가 그간 만들어 놓은 뗏목들을 강변으로 옮기고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부대는 강가로 나와서 총포에 화약을 최대한 많이 쑤셔 넣고 강 건너 평양성을 향해 사격했으며, 사무라이들은 강가로 몰려나와 일본도를 흔들며 현란한 칼 빛 시위를 벌였을 때다.
다른 한편, 그 무렵 강 상류를 건넌 왜군은 강동 쪽의 한응인과 김응서 등을 압박해서 강 상류 쪽으로 퇴각시키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이 되자 대동강과 평양성 등의 조선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앞 다퉈 도망을 갔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5일 ※
이호민으로부터 급보를 받고 급히 의주로 가려 했지만 날도 저물었고, 또 막 도착한 중전 일행의 피곤을 생각해서 출발을 다음날로 미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이미 출발한 선발대가 도망칠 우려도 있었기에 곧바로 출발했다. 모두들 공포에 휩싸인 모습이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5일 ※
야간 이동 중에 도적을 맞았다. 조정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실추되고 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6일 ※
궁인은 몇 명 되지 않다. 하지만 말이 없었기 때문에 걸어서 이동한 궁인들도 있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7일 ※ “어제 말한 요동의 자문(공문)을 속히 지어 통역관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게 하라. 이덕형이 이미 요동에 도착하였으니 통역관으로 하여금 요동에 도착하면 이덕형에게 전해 주게 하라. 그리고 이곽을 즉각 의주로 보내어 병마의 군량과 꼴 등 일체 잡물을 미리 준비하여 번거롭고 요란스럽지 않도록 하라.”
이덕형과 이곽 등을 의주로 보내서 명군을 위해 군량과 꼴 등을 준비하게 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7일 ※
“신이 명령을 받은 뒤에 마부와 말이 거의 다 도망쳐 흩어졌기 때문에 어렵게 행진하여 오늘 사시(상오 10시경)에야 비로소 의주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광영유격 사유와 독전참장 대조변이 병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기에, 신이 통역관 홍수언을 통하여 말하기를 ‘왜적이 성(평양성) 밑에 이른 지가 벌써 7~8일이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 천천히 간다면 앞으로 10여 일 뒤에나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니 비단 고립된 성이 매우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왜적은 병사를 움직임에 으레 술일을 이용하여 오는데, 22일이 술일이니 반드시 20일 이전에 도착하여야만 나아가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20일에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이덕형이 왕명을 받아 의주로 출발하려고 했으나 마부가 도망을 치고 말이 흩어진 탓에 의주 도착이 늦어졌다. 이덕형과 명나라 장수는 평양성이 함락된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6월 20일 경이면 명군이 평양에 도착할 것으로 알고 논의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7일 ※
“이달 15일에 명나라 병마가 이른 아침부터 강을 건너 미시(하오 2시경)에 다 건넜습니다. 독전참장 대조변과 선봉 유격 사유가 거느린 군사는 1천 29명이며, 말이 1천 93필, 수하의 집기 · 천총 · 파총 등이 도합 10명이며, 답응 이하도 몇 명 있었습니다. 신들이 예를 행한 뒤에 22일 전까지 속히 구원해야 한다고 요청하니, 대답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20일에 맞추어 평양에 도착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요동군의 주력은 기마병이므로 빨리 달리면 6월 20일까지는 평양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양성은 이미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군량미와 장마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조승훈 군은 한 달이나 늦은 7월 17일에야 평양성에 도착한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
● 군졸 없는 도원수
※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 “명나라 병사 1천 명이 이미 강을 건넜으나 전면의 각 고을들이 다 비었고 창고의 곡식도 흩어져 없어졌으며 군졸도 도망하여 숨어버렸기 때문에 결코 맞아 싸울 길이 없습니다. 지금 이윤덕 등에게 공문을 보내어 통지하려고 합니다만 심부름할 사람도 없습니다. 신은 본래 용렬하니 만 번 죽어도 스스로 달게 여길 뿐입니다. 그리고 이일 · 이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므로 격문을 전하여 서둘러 명나라 병사의 향도(안내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 사관은 말한다.
이일은 누차 패전한 끝에 정신이 혼몽해졌고, 이빈은 더욱 겁쟁이였으며 임진에서 패전한 것은 실로 이 사람이 배를 타고 먼저 도망하였기 때문인데, 그들이 간 곳을 모르는 것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감사 송언신은 한 도의 주인으로서 처음부터 넋을 잃어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조처하지 못했고, 평양성을 빠져나갈 때에는 가족들이 떠난 희천으로 깊숙이 들어가 마침내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김명원의 보고에는 다만 이일 등만을 들어 말하였으니 매우 엉성하다.
김명원이 도원수가 된 것은 1592년 4월 29일이다. 그의 부하 육성 능력이 얼마나 빈약했으면 두 달이 다 되도록 명군 1천 명을 안내할 친위부대조차 구성하지 못했을까.
※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 “경들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정철과 유성룡 :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신들의 죄이므로 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선조 : 명나라 병사는 가까이 오는데 접대할 계책이 없으니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유성룡 : 여러 고을이 텅 비어 곳곳마다 분탕질이니 참으로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
김명원은 명군 1천 명을 인도할 군사력도 없다고 했지만, 유성룡은 청천강 이북의 좁은 지역에서조차 분탕질을 막지 못한다고 탄식했다. 조선왕국의 국가 군영이 말씀이 아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
선조 : 내가 나라를 잘 지키지 못하여 오늘의 환란을 오게 하여 귀국 대신들이 행차하는 수고로움을 끼쳤으니 황공하기 그지 없소이다. 선조 : 나라의 존망이 대인들의 진퇴에 달렸으니, 지휘를 삼가 받겠소이다.
이때에 어떤 사람은 명나라 병사가 전진하여 도원수와 합세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마땅히 저들의 분부를 들어야 한다고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마땅히 저들의 분부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여 의논이 어지러웠다. 그러자 곽몽징이 말했다.
“귀국의 군신은 모여서 송사하는 것과 같으니 지극히 무례하오이다.” 라고 하니, 임금이 손을 저어 논의를 금지시켰다. 사유가 병사를 거느리고 의주로 돌아갔다.
군의 작전에 대해 문신들이 이러쿵저러쿵하다가 망신만 당했다.
● 왜적의 규모조차 모르는 조정
※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
“왜 8도의 관찰사가 왜적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한 마디도 없고, 8도의 군현에서 어찌 한 사람도 대의를 부르짖는 자가 없는가. 어느 날 아무 도(道)가 함락되었고, 아무 주(州)가 함락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왜적에게 죽고, 어떤 사람이 왜적에게 붙었으며, 왜적의 장수는 몇 명이고, 군사는 몇 만 명인가? 우리나라는 본시 개산대포 · 대장군포 등이 있고, 맹장과 정병들이 안개처럼 벌여 구름처럼 달리니, 왜병 백만 명쯤이야 헤아려 볼 것도 없다…” 고 하였다.
‘왜적의 장수가 몇 명이고, 군사는 몇 만 명인가?’ 라고 물었는데, 그간 구원병 요청 차 다녀간 조선 사신들에게도 수차례에 걸쳐 물어 보았지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 쪽의 이 같은 질문을 받고서도 왜군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 결과 조승훈의 군대는 평양성 전투에서 큰 낭패를 겪게 된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 “14일 신시(오후 4시 경)에 왜적이 왕성탄 · 능라도로부터 건너오자 장수와 병졸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왕성탄 조방장 박석명과 수탄장 오응정 등이 패전하여 돌아오는데 마탄의 수탄장 김응서가 퇴각하여 도망치자 박석명 등도 자산으로 달아났습니다. 평양이 이미 포위당했으니 앉아서 강여울을 지키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흩어진 장수들을 소집하기 위해 직로(평양→의주 간의 국도)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한응인과 박석명은 임진강에 있다가 강동으로 와서 왕성탄 상류를 지키고 있었다. 김응서는 6월 11일 먼저 상류 쪽으로 퇴각했고, 6월 14일에는 박석명이 퇴각했다. 한응인은 ‘이들 장수들을 소집한다’ 는 이유로 자산까지 갔다가 다시 의주로 향했다. 한응인이 임진강에서 데려온 130명의 군사들은 얼마나 남았을까?
※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
그때까지 조 · 명 양측은 평양성이 건재한 것으로 알았고, 또 그곳에는 군량과 꼴이 비축되어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평양성이 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면 군량과 꼴도 문제가 될 뿐 아니라 5천의 명군이 3만 명의 왜군이 지키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해야 하는 입장이 됨로 조승훈 군의 패전은 예정된 것이었다.
전일에 경상도우수사 원균과 함께 합력하여 직선을 쳐부수라는 분부를 받았으므로 소속 수군을 지난 4월 29일 본영 앞 바다로 불러 모아서 30일에 출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응남(좌의정) : “원균이 처음에 사람을 보내어 순신을 불러도 순신이 오지 않으므로 균(원균)이 통곡했다고 하옵니다. 균이 순신에게 군사를 청했는데 성공은 도리어 순신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 일로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막혀졌다 하옵니다.”
이덕열(좌승지) : “순신은 열댓 번 부른 연후에 비로소 나가 적선 60척을 깨뜨리고 먼저 자기 공로를 보고했다고 하옵니다.”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하다. 다만 어머님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도에서 과세하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사(전라병마사 최원)의 군관 이경신이 병마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장편전(장전과 편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오다.
동헌에 나가 별방군(상비군이 아닌 특별편성 부대인 듯)을 점고하고, 각 고을(5관: 순천 · 광양 · 보성 · 흥양 · 낙안 관내 다섯 고을)과 각 포구 기지(5진포 : 방답 · 사도 · 발포 · 녹도 · 여도 다섯 해안기지)에 공문을 적어 보내다.
아침에는 맑더니 늦게 쯤 눈비가 종일 내리다. 조카 봉이 아산으로 가다. 전문(箋文)을 받들고 갈 남원 유생이 들어오다.
객사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다.
맑다.
아침을 일찍 먹은 뒤에 객사동헌으로 나가 전문을 봉하여 올려 보내다.
종일 비.
방답첨사가 들어오다.
가랑비가 종일 오다.
늦게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다. 군관 이봉수가 선생원(이천군 율촌면) 채석장에 가보고 와서 보고하기를, 벌써 큰 돌 17개에 구멍을 뚫었다고 한다. 서문 밖 해자가 태반쯤 무너지다.
궂은비가 개지 아니하다.
식후 동헌에 나가다. 본영과 각 포구 기지의 진무(실무책임자)들이 활쏘기를 하다.
흐리다. 비는 오지 아니하다.
망궐례를 행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다. 각 고을 벼슬아치(고을원이나 군관 등)와 색리(6방의 아전)들이 인사차 오다. 방답의 병선 담당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로 곤장을 때리다. 우후와 가수(방답첨사 이순신이 부임해 오기 이전에 책임을 맡았던 임시관리)들이 점고치 않아 이 모양이 되었으니 몹시 해괴하다. 제 한 몸 살찌울 생각만 하고 이런 일은 돌보지 않으니, 다른 날의 일들도 역시 짐작하겠다.
맑다.
춥기가 한겨울 같다. 아침에 순찰사(전라감사)와 남원 고을의 아전에게 편지를 보내다. 저녁에 쇠사슬 박을 구멍 뚫은 돌을 실어오는 일로 배 4척을 선생원 채석장으로 보냈는데, 군관 김효성이 거느리고 갔다.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다. 여도기지의 천자 배가 돌아갔다. 활쏘기 대회에서 우등한 명단을 전라감영으로 보내다.
맑다.
동헌에서 공무를 본 후 각 군대를 점고하다.
맑다.
둘째형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아니하다. 사복시에서 받아와 기르던 말을 올려 보내다.
맑다.
큰형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아니하다. 순찰사의 답장을 보니, 고부 군수 이숭고를 유임시켜 달라는 장계를 올린 일로 심한 물의를 일으킨 일 때문에 사임장을 내었다고 한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다. 안개, 비가 잠깐 뿌리다가 늦게는 맑다.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판자를 고르는데 때마침 방천에 피라미 떼가 구름처럼 몰려왔기로 그물을 쳐서 2,000여 마리를 잡았다. 기분이 상쾌했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 술을 마시며 우후 이몽구와 함께 새봄의 경치를 바라보다.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다. 쇠사슬을 걸어 매는 데 끌 크고 작은 돌 80여 개를 실어 왔다. 활 열순(1순: 5발)을 쏘다.
맑다.
새벽에 우후가 각 포구에 감시차 배를 타고 떠나다. 공무를 마친 후 활을 쏘았다. 탐라(제주도) 사람이 아들 딸 여섯 명을 데리고 도망 나와 금오도에 정박해 있다가 방답의 순시선에 붙잡혔다는 보고가 올라왔기에, 경위를 따져보고 수감시켜 순천부에 올려 보내도록 했다.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후 북봉의 봉화대 쌓은 곳으로 올라가 보니 축대 자리가 아주 좋아서 무너질 리가 만무하겠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알겠다. 종일토록 관망하다가 해질 무렵에 내려와서 해자 구덩이를 돌아보았다.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마친 뒤 활 18순을 쏘다.
맑다. 종일토록 바람이 세게 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다.
순찰사의 편지 두 통이 오다.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다.
발포 만호가 부임했다는 공문이 오다.
맑으나 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날 거북선에 쓸 돛 29필을 받다. 정오에 활을 쏘다. 조이립과 변존서가 겨뤘으나, 조이립이 졌다. 우후가 방답으로부터 돌아와서 방답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하여 말한다. 동헌 뜰에 돌기둥 화대(火臺)를 세웠다.
맑다.
새벽에 쇠사슬 꿰일 긴 나무를 베어오는 일로 이원룡에게 군사를 인솔시켜 돌산도로 보내다.
안개비가 오다가 개었다 흐렸다 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다.
김인문이 감영에서 돌아오다.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역관들이 뇌물을 받고 중국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는 짓까지 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중국에서는 우리가 일본과 함께 딴 뜻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게까지 했으니, 그 흉악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통역관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나 해괴하고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맑다.
식후에 배 위에 올라 새로 뽑은 군사들을 점고하다.
맑고 바람도 자다. 식후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해운대로 옮겨 앉아 활을 쏘다. 침렵치(무사들의 놀이인 듯)를 구경하니 무척 조용히 한다.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은 시를 읊다. 저녁에 돌아오다.
맑다.
우수사의 군관이 왔기로 살대 큰 것과 중간 것 100개와 쇠 50근을 보냈다.
맑다. 아산(어머님께) 문안차 나장(관아의 관리) 두 명을 보내다.
비바람이 몹시 불다. 석수들이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가 많이 무너졌으므로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하다.
맑다. 동헌에서 공무를 본 후에 활 6순을 쏘고 신구번(근무를 끝내고 교대하는 신 · 구번) 군사들을 점고하다.
맑다. 순시를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순천 부사가 자기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린다. 기생도 왔다.
6월 14일. 임금이 이날 아침에 영변에 있었다. 양사(兩司)가 공동으로 태천(泰川)으로 가자고 주청하였는데, 한편으로는 명나라 군대의 소식을 들을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왜적의 소식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마침내 요동으로 건너갈 계획을 정하고 선전관을 보내어 중전을 맞아 돌아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명하여 내부(內附; 중국에 들어가 의탁함)를 청하는 자문(咨文 : 관청과 관청 사이에 오가는 공문)을 작성하여 요동 도사(都事)에게 발송하도록 하고, 영의정 최홍원, 참판 유자신 등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를 모시고 강계로 가서 보전하도록 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나누어 세자를 따라가게 하였다.
“관전보(명나라의 국경 보루)의 차인(差人: 특사) 유괴가 관전참장 동양정의 패문(공문)을 가지고 의순관(의주 관아의 명나라 관리를 맞는 건물)에 도착하였는데, 그 패문에는 ‘진수총병 양소훈이 양원과 회합하여 이미 병사를 출발시켰으니 앞서 의주로 가서 호응 협력하라.’ 는 등의 말이 있고, 유괴는 ‘명나라 군사가 내일 저녁에 강가에 도착하고 모레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며, 부총 조승훈도 오늘 강연보(압록강 연안 요새)에 도착할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유성룡에게 지시하였다.
“오늘 윤근수 등의 장계를 보니 명나라 병사가 오늘 강을 건널 것이고 겸하여 호군(명나라 조정에서 조선의 군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을 위해서 은(銀)을 내려준 것이 2만 냥이나 되는 것을 알았다. 경은 중도에서 영접하여 접대할 때에 감사하다는 뜻을 간곡히 표하도록 하라.”
임금이 좌의정 윤두수에게 지시하였다.
“지금 윤근수 등의 장계를 보니, 명나라 병사가 오늘 강을 건너고 조 총병(조승훈은 부총병이지만 높여서 ‘총병’ 으로 부르고 있다)도 오며, 겸하여 호군할 은을 하사한 것이 2만 냥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군사들의 기세를 크게 신장시키기에 충분하니 경은 이런 뜻을 널리 알려서 모든 군사들로 하여금 용기백배하게 하여 오직 강(대동강)의 여울을 지키는 데 힘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고, 시일을 지연시켜 명나라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게 하라.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큰 기회이니 이웃 고을의 군기와 화약도 조치하여 들여보내도록 하라.”
6월 15일. 임금이 박천에 있었다. 유성룡이 평양으로부터 와서 임금을 뵙고 말했다.
평양의 강여울 방어가 무너지자 이원익 등이 미쳐 장계할 겨를이 없어 그 종사관 좌랑 이호민을 보내어 빨리 달리어 그 사실을 보고하도록 하니 임금이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선조 : 건너온 왜적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이날 임금이 가산으로 떠나려고 했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고, 또 내전의 행차가 멀리 덕천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출발하기가 곤란하여 이튿날 떠나려고 하니, 대신이 건의하기를 “선발대가 이미 출발하였는데 지금 만약 행차를 정지하시면 사졸들이 반드시 더욱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오늘은 밤중에라도 부득이 거동하셔야 합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드디어 출발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박천에서 가산으로 떠나가서 새벽닭이 울 무렵에 군(郡)에 들어왔다. 박천에서 처음 출발할 적에 마을 도적들이 간혹 조정 대신의 짐바리를 노략질한 자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날 아침에 임금이 가산에 있었다. 임금이 정주에 도착하였다. 궁인 중에는 그냥 걸어서 간 사람도 있었다.
임금이 정주에 있었다. 임금이 대신에게 지시하였다.
청원사(구원병을 요청하러 간 사신) 이덕형이 급보를 올렸다.
예조판서 윤근수, 참판 유근이 급보를 올렸다.
임금이 정주를 떠나 곽산을 지나 선천에 도착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이 급보를 올렸다.
김명원은 젊어서부터 장수의 명망이 있었지만 남을 거스르지 않고 옹골차지 못했으며, 결단력이 없어 실제로는 군사들을 제어하는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 창졸간에 도원수의 병부를 주었다. 왜적이 강을 위협하자 만사가 와해되어 한강 · 임진 · 대동강에 이르기까지 도처마다 패주하였다.
인성부원군 정철, 풍원부원군 유성룡, 대사간 정곤수, 지평 신경진 등이 만나 뵙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불러 물었다.
요동 유격 사유와 원임참장 곽몽징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임반관(선천에 있는 관아 건물)에 도착하니, 임금이 곤룡포에 익선관 차림으로 만나 재배를 끝냈다.
사유와 곽몽징 : 평양을 일찍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조 총병(조승훈 부총병)이 의주에 도착하면 우리들이 돌아가서 조 대인(조승훈)과 의논하여 결정하겠습니다. 귀국은 어떻게 계획하고 있습니까?
임금의 행차가 저녁에 선천에서 유숙하였다. 요동 순안어사 이시자가 지휘(직책명) 송국신을 보내어 공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공문에서 말하였다.
순검사 한응인이 급보를 올렸다.
예조판서 윤근수, 홍문관 부응교 심희수가 급보를 올렸다.
“신들이 17일 새벽에 강(압록강)을 건너가 조 총병을 보고 왜적이 이미 대동강을 건넜다고 알리니, 총병이 ‘오늘이나 내일 군마가 강을 건널 터이니 군량과 꼴을 준비하여 기다리라’ 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