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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오노다(小野田) 재흥(再興) 7천일
※ 오노다 재흥 7천일 [기업 창조의 인생]은 "나의 이력서: 니혼게이자이 신문 1980년 3월" "히어링 안도 상담역(安藤相談役)회고록: 오노다 시멘트(본사: 山口県小野田市)백년사 편찬회(百年史編纂会)"에 가필 보정한 것이다.(*安藤豊禄 1897~1990 大分県出身)
3장 오노다 재흥 7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1 세정(世情) 불안의 시대 입사
내가 오노다(小野田)에 입사한 것은 다이쇼 10년(1921년) 4월이다. 이 해에는 하라 다카시(原敬1856~1921) 총리가 암살되는 등 사회가 어수선하였다. 오노다에 입사하기 전까지의 나는 도쿄대 응용화학과 학생으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특기할만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당시의 추억을 꼽자면 나가이 유자부로(永井雄三郎)와 가나모리 겐지(金森乾次)라는 두 수재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정도일까. 이런 추억도 있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묘한 생각을 했다. 공학사가 되는 것 외에 고등문관시험(지금의 상급국가공무원)에도 응시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거래서 나름대로 공부를 해서 패스할 정도라고 자신을 가졌지만, 선배로부터 그것은 "새 흉내를 내는 박쥐' 같은 것으로 공과, 법과 양쪽에서 미움을 받으니까 그만 두는 것이 좋다고 하는 충고를 듣고 계획을 포기했다. 그런데 취업은 해야하는데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시멘트 회사가 생각났다.
쓰루미(鶴見: 別府市)의 아사노(浅野)시멘트 공장을 견학했고 3학년 여름 실습에는 오이타(大分)의 쓰쿠미(津久見) 공장에 한 달 정도 체류한 경험이 있어, 그때 왠지 시멘트 공장 같은 것이라면 자신에게 적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쓰쿠미 공장이라고 하면 그 무렵 한 해의 생산 능력은 7만 톤이었다. 현재의 능력은 연 450만 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오노다 시멘트를 지망하자 다행히 다른 사람이 양보해 주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상경하여 계시는 가사이(笠井) 사장님을 만나니 풍모가 저의 아버지와 꼭 닮은 것에 놀랐지만, 그만큼 금세 친근감을 느껴 그 자리에서 입사를 확약했다. "적어도 10년간은 그만두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했던 기억이 난다.
졸업은 1921년 4월 10일이었다. 우리 반 대표로 나가이 유자부로(永井雄三郎) 군이 약식 졸업식에 나가서 증서를 받고 그것을 사무실에서 나눠주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졸업식이었다. 다만 일금 5엔을 내고 아서원(雅叙園)에서 중화요리의 사치스러운 졸업연을 했고 도조(東条)사진관에 부탁해 독일어로 표지 제목을 그려 넣은 사슴가죽으로 만든 훌륭한 사진첩을 만들었다. 학급동창회 이름은 졸업일을 따서 '십일회(十日会)라고 지었다.
4월 26일 오노다 시멘트의 본사가 있는 야마구치현 오노다시(山口県小野田市)에 도착했다. 회사에 가보니 고색창연한 목조 단층집 사무실과 분석소(分析所)는 다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해 입사한 다나카(田中), 야마우치(山內) 두 사람은 이미 부임해 있었다. 거처로는 오카모토(岡本) 씨라는 전기 주임 기술자 집의 안채 2층에 하숙을 정했다.
3장 오노다 재흥 7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2 월급 80엔의 현장배속
제조계라는 현장에 배속되었다. 에모토(江本) 씨라는 중학교 졸업으로 독일에 유학한 적도 있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계장이었는데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나의 월급은 80엔으로 자격은 기사였다.
우선 첫 번째 실습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해서 석회석 운반을 선택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허리가 아파서 힘든었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자 석회석 취급도 운반차 다루는 법도 익숙해져, 2주간의 실습 기간을 마칠 무렵에는 어엿한 한 사람 몫의 인부가 되었다.
이곳에는 디치키른이라는 입식가마(竪窯)가 당시 7기가 있었는데 이는 가사이(笠井) 사장이 독일에서 수입하여 직접 건설 운전한 것이었으나 일 년 후에 폐지될 계획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구경만으로 끝났다. 그 것을 아쉬워 하는 표정을 짓던 가사이 사장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남아 있다.
여기서 잠깐 내 결혼 이야기를 언급해 두고 싶다. 5고(구마모토 소재 제5고등중학교) 시대에 히라야마 료키치(平山良吉)라는 친구가 있었다. 뒤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그도 도쿄대를 입학하여 그와의 교제는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第五高等学校: 1887年5月に熊本市に設立された官立高等中学校を母体とする旧制高等学校. 略称は五高)
다이쇼 9년(1920년) 봄 무렵 그는 가형(家兄) 히로시(寛)와의 사이에 의사소통이 결여되어 내가 그 사이에 서서 그의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여동생을 만난 것을 계기로 아직 재학 중이었으나 다이쇼 9년 말에 약혼을 했다. 졸업 후 오노다에 입사할 무렵 때마침 어머니가 큰 병에 걸려 결혼식 이야기는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곧 조선·평양으로의 전근이 결정되고 부임 날짜도 다가오고, 또 약혼 후 1년이나 지나, 시골의 관습으로 그렇게 늦출 수 없다며 다이쇼 10년(1921년) 12월 식을 올렸다. 처 쓰루코(鶴子)의 집은 히로시마현 가모군(広島県賀茂郡-지금은 히가시히로시마시)의 주조가(酒造家)로 이른바 지방의 부호인 아버지 노리카즈(範一)는 지방 최고의 명망가이기도 했다.
오빠 료키치는 이후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会社)에 들어가 승진을 거듭해 상무이사가 되어 동양척식의 전 중국 대륙 사업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종전 후 귀국,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쇼와 23년(1948년)에 병사했다. 우리 부부는 다행히 오늘까지 생존, 올해는 결혼 64년을 맞이하려 하고 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3 조선으로의 첫걸음
오노다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즉 다이쇼 10년(1921년) 가을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평양 공장에 가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어 나는 이것을 기꺼이 받아드렸다. 외지에서 일한다는 것은 청년의 희망이고, 또 한편으로는 수당이 있어 수입도 많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부임은 다이쇼 11년(1922년) 5월로, 4월 말일에 시모노세키를 출발했다. 3600톤의 부관 연락선에 올라 처음으로 반도 땅을 밟는다. 봄도 아직 이르고 바위가 많은 철도 연변의 산들을 바라보며 경성(서울)에 도착한 것이 5월 1일 오후였다. 친구의 마중을 받아 그곳에서 1박한 후 다음날 평양에서 환승해서 승호리(勝湖里)의 평양지사에 도착했다.
평양지사라고 하지만 위치는 평양 외곽 25km에 있었다. 말하자면 시멘트 공장뿐인 한촌으로, 시골에는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역시 암담했다. 그러나 평양부(平壌府)는 북부 조선의 큰 도시이다. 인구는 아마 15만 정도는 되었을 것 같다. 일본인도 1만 명 이상 있었다. 전한시대(前漢時代) 낙랑군(楽浪郡)의 수도였기 때문에 역사에 있어서도 조선 제일의 도시로, 유유한 대동강(大同江)이 평원을 서류(西流)하고 있다.
모란대(牡丹台)공원에서 대동강을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천하의 절경이었다. 청일전쟁의 대전적(大戦跡), 하라다 쥬키치(原田重吉)용사 분전 이야기도 유명하다. (*原田重吉-はらだ じゅうきち: 1868年11月23日 - 1938年8月6日. 大日本帝国陸軍軍人. 篤農家. 日清戦争での平壌の戦いにおいて「玄武門破り」の英雄として知られた. )
메이지 42년(1909년) 10월에 하얼빈 역두에서 일본의 원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을 세 발의 총알로 암살한 안중근의 옛 거처는 우리 집에서 4킬로미터 정도 되는 마을에 있었다. 황해도 중화군 파읍(黄海道中和郡破邑)의 남강(*대동강 남쪽 지류) 강변의 단풍나무 숲 속의 아늑한 마을에 있었다.
그러나 다이쇼 12년(1923년) 9월의 대홍수로 그 부락은 쓸러갔고 지금은 강의 일부가 되었다. 쇼와 50년(1975년) 9월, 나는 안중근 의사 탄생 백년제에 초대되어 참석했다. 그 안중근 의사는 한국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다.
내가 부임했던 무렵의 조선 총독은 사이토 미노루(斉藤実1858~1936. 제5대총독 1919년 8월~1927년 12월 재임) 해군 대장이었다. 그 3년 전 다이쇼 8년(1919년) 3월에 3.1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던 민중의 일부가 일본인 경찰 두 명을 죽였고, 그 범인은 당시 인구 2만 명의 수원(水原)성 안으로 도망쳤다. 이 범인을 붙잡기 위해 일본의 보병 일개 연대가 수원성을 둘러쌌지만 좀처럼 범인을 내보내지 않아 탈출구 한쪽만 열고 주위에서 불을 질렀다.
민중은 그 열린 곳으로 달려나간다. 그것을 기관총으로 사격하여 6천여 명의 남녀노소가 사망한 비참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전 조선은 난리가 났고, 그 책임을 지고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제4대 조넌총독 재임 1916년 10월~1919년 8월) 총독은 퇴임하고 대신 사이토 대장이 부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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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 3·1 사건의 여파가 남다
부임 당시 아직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어 사이토 총독은 경성역두에서 폭탄을 맞았다. 몇몇 부상자를 냈지만 총독은 태연자약, 웃으면서 관저에 도착했다. 이 모습에 일반 민중은 완전히 감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이쇼 12년(1923년) 9월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에서는 조선인 학살 사건이 벌어져, 우리들은 조선인의 봉기가 있지 않을까 하고 크게 걱정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간토(関東) 대지진은 시멘트의 대수요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고 예상되었다. 때마침 평양공장은 제2 회전요(回転窯)가 완성돼 생산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하량이 많아진 것은 다음해 가을 무렵부터였다. 평양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 진남포(鎮南浦)에서 천오백 톤의 기선으로 도쿄 시나가와 앞바다까지 대량의 시멘트를 보낸 것이었다.
평양 공장의 시멘트는 주로 스미다 강의 교량 건설용으로 사용되었다. 다리 건설용이기 때문에 품질은 최고이어야 한다. 평양 공장의 시멘트는 그만큼 높이 평가받은 셈이다. 그런데 우리 공장 시멘트에 이중 응결이라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골치 아픈 소식이 들어왔다.
그 무렵 이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은 전혀 없었다. 나는 품질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 밤낮 쉬지 않고 연구했지만 전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황하던 중 본사에서 전보가 와서 바로 출두하라고 한다. 본사에서는 카사이 사장으로부터 열화와 같은 꾸중을 들었다.
어쨌든 도쿄의 공사장으로 상경하여 사과하고 동시에 몇 가지 수단을 강구하다 보니 결과가 점차 좋아져서 무사했다. 그때 마루노우치호텔에 45일간 머물며 완전히 녹초가 됐다. 이 이중응결의 문제는 지금까지 정확한 이론이 정립되어 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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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 천내(川内) 공장건설
이중응결 문제도 그런대로 정리가 되었으니 유학을 다녀오라는 말이 나왔다. 목적지는 미국이어서, 평양의 미국인 목사 부인을 선생님으로 하여 영어회화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원산(元山) 쪽으로 공장 건설 이야기가 나오면서 유학은 중단되고, 공장 건설을 위해 조사를 하게 되었다.
장소는 함경남도 문천군 도초면 천내리(咸鏡南道文川郡都草面川内里)로, 동료와 부하 등 총 5명이 조사요원으로 선발되었다.다이쇼 15년(1926년) 10월 5일부터 쇼와 2년(1927년) 1월까지 외양간 옆에 붙은 방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사무실은 판잣집을 다섯 사람의 손으로 지었다. 그곳에서 영하 20도의 추위와 싸우면서 수백번의 분석과 매장량 조사를 했다.
그 사이 다이쇼 천황(大正天皇1879 08 31~ 1926 12 25 재위15년)이 돌아가셨다. 붕어 소식은 문천군청에 가려고 도초면사무소를 지났을 때 그곳 게시판에서 알게 되었다.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25일 오후였다. 조사 결과의 본사에의 보고는 쇼와 2년(1927년) 1월, 중역회에서 약 3시간에 걸쳐 설명을 실시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가사이 사장은 큰 소리로 "공장 건설을 결정한다. 즉시 스태프 인선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와 같은 기쁜 일은 다시 없다. 그래서 곧바로 평양지사로 돌아가 토지 매수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문천군 김홍태(金鴻泰) 군수에게 공장 건설 계획을 밝히고, 함경남도지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경찰 쪽과도 연락을 취했다.
십만 평의 공장 부지와 백만 평 가까운 원료 매장지를 사야 한다. 이런 대규모 매수는 당시의 조선이라고 해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공장 건설의 설명만 해도 지주 농가의 노인들에게는 수긍이 가지 않았다. 울고 싶은 마음에 물러나는 일도 수십 번 있었던 것같다. 가격 협상은 더욱 힘들었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은 때와 장소 불문하고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서른 살도 안 되는 우리에게는 모두 서투른 일뿐이었지만, 어쨌든 수십 일 만에 대부분을 매수했다. 그동안 생명의 위험을 느낄 만한 일은 다행히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밤늦게 숙소로 돌아가던 중 조선늑대를 만나 잠시 오도 가도 못할 정도의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는 했다. 함경남도의 지사는 나카노라고 해서 나카노세이고(中野正剛1886~1943 福岡출신 정치가) 씨의 친척에 해당하며 항상 하오리 하카마(羽織袴:일본고유의복)차림으로 집무하고 있었다. 부지사는 조선인으로 유유한 어른으로 두 사람 모두 공장 유치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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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 폭발 사고도 젊은 나이로 극복하다.
그런데 실제 건설을 시작하려 하자 먼자 생각해야 할 것은 공장까지 철도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5km 남짓한 거리지만 당시 국유철도에서는 절차가 까다로워 제법 시일이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급히 사설 철도회사를 설립하여 만든 철도를 철도국에 넘기기로 하고, 당시의 돈으로 50만 엔을 자본금으로 천내리철도주식회사라는 것을 만들어 나는 그 전무이사가 되었다.
그런데 창립 직전에 이르러 예의 대만은행 사건 영향으로 갑자기 모라토리엄(*지급유예)이 되어 처음으로 금융공황의 영향을 받았다. 철도는 1년 반 만에 완성되었고, 개통은 쇼와 2년(1927년) 11월이었다. 물론 공장 건설도 병행하여 공장은 쇼와 3년(1928년) 12월에 완성되었다. 약 4백만엔의 건설비가 들었다.
그런데 시운전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큰 사고가 났다. 12월 23일 오전 3시 공장 하나가 폭발하여 약 백 평의 건물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나는 여우에게 홀렸나 하고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어 보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장이 없어진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때마침 조선은 혹한의 계절, 영하 20도이기 때문에 복구 공사는 쉽지 않았다. 나가노 이사무(長野勇) 공무과장의 제안으로 이렇게 된 이상은 전혀 다른 것을 다시 만들기로 하고 설계부터 공사 완료, 운전 재개까지 2주 만에 해버렸다. 역시 젊음의 힘인 것 같았다.
개업식은 쇼와 4년(1929년) 5월, 바람이 부는 계절이었다. 경성(서울)에서 천내공장까지는 약 200km 거리에 있었다. 그 사이를 전용 차량을 준비하여 참석자를 맞이했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꽤 대규모 개업식이었다. 그 비용에 3만엔이 들었다. 가사이 사장의 '너무 사치스럽다'는 핀찬의 말에, 나의 득의만면이 머쓱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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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 독일 유학
천내 공장의 조업도 궤도에 올라 드디어 유학의 꿈이 실현되는 행운이 왔다. 목적지는 지난 번 이야기와는 달리 독일이었다. 출발 전 우선 일본 내 우수 공장을 견학하기로 하고 각 시멘트 공장, 구레(呉: 広島県)해군 공창, 기타 기계 제작 공장 등을 한 달 가까이 시찰했다. 이것은 매우 도움이 됐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쇼와 5년(1930년) 2월 18일 무렵 도쿄를 출발, 조선을 경유해 하얼빈에 도착, 현지 친구 야마다 고이치로(山田鴻一郎) 조선은행 지점 차장의 신세를 져 1박, 다음날 시베리아 철도로 대륙 횡단 여행을 했다. 때마침 소련·장학량(張学良: 1901~2001 중국군인-정치가)화의협정 이후의 첫 기차였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섬뜩한 분위기였다.
시베리아 철도에서는 빵을 살 수 없다고 해서 지름 30센티미터나 되는 큰 빵을 사들고 승차했다. 마침 침대칸이 있었기 때문에 객차로는 1급, 한 방에 부부 둘, 상하 침대, 세면 화장실도 딸려 있다. 다만 기관차의 연료가 장작이기 때문에 속도는 느렸다.
기찻길의 연도는 모두 흰눈만 보이고 인적은 단지 정거장에서만 볼 수 있을 뿐 '황량한 시베리아' 라는 말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아직 그 무렵에는 정치보안대의 눈초리가 매우 날카로울 때여서 쾅쾅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요리는 컨저베이션(보존식)을 주로 하면서도 꽤 맛있었다. 스펠드롭스크 즉 제정시대의 유리카테린부르크를 깊은 감회를 가지고 통과했음을 상기한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3월 1일이었다. 호텔 사보이에 들었다.
그 호텔은 40년 후인 쇼와 45년(1970년) 2월에 가보니 그 모습은 남아 있었지만 이름은 메트로폴 호텔로 바뀌어 있었다. 모스크바를 저녁에 출발하여 폴란드로 향한다. 국경역(国境駅)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짐을 옮겨 실을 때 무료라고 되어 있었는데 잘 몰라 포터에게 3루불의 팁을 주었더니 싱글벙글하며 날라주었다.
바르샤바에는 시차 관계로 역시 3월 1일 저녁에 도착했다. 그랜드 호텔의 호화로움에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한 미쓰비시 상사의 이이노(飯野) 지점장으로부터, 부인에게 코트를 입히는 유럽식 매너를 어색하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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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 모든 것이 놀라운 베를린
저녁 식사 후 바르샤바를 출발, 3월 2일 오전에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트라세 역에 도착, 독일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의 가와구치(河口 )씨의 마중을 받아 호텔 데프카이저 호프에 들었다. 이 호텔은 나중에 들으니 일류 중인 일류 호텔로 비스마르크(*1815~1898 독일 정치가)도 이 호텔에 자주 묵었다고 한다.
우리들의 방은 3층 정면 쪽의, 다다미 40장 정도는 되는 넓이였다. 터무니없이 큰 목욕탕이 붙어 있어 조금 간담이 서늘해졌다. 가와구치 씨는 우리 부부를 큰 부자로 착각해 최상등에 가까운 방에 들여보낸 모양이다. 저녁 식사 때 식당을 들여다보니 남자들은 모두 턱시도, 여자들은 모두 이브닝 드레스로 우리에게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식당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서 거리로 나와 작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호텔에 돌아가서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기 위해 '221호실'이라고 했는데, 몇 번을 말해도 331호 열쇠를 가져온다. 아무래도 내 발음이 'Z'와 'D(T)'인가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런 독일어로도 아내의 쇼핑을 며칠간 도와 주었는데, 그러다가 아내가 더 잘하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독일어는 5고(五高) 시절 담당 마쓰오(松尾)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히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던 것인데 학교 어학 같은 것은 믿을 수 없다. 베를린에서는 모든 일이 다 놀라웠다. 지금으로부터 50년이나 전의 일이니 서로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고,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마도 감개무량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다만 그 무렵 일본은 무력적으로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기세다. 완력으로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 큰길을 가슴을 펴고 활보한 것이 분명하다. 대학은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운반 공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시멘트 관계도 동시에 공부하는 것은 물론이다. 객원 학생이기 때문에 정식 입학시험은 보지 않았다. 우선 몇 달 동안 독일어 듣기 연습 삼아 강의를 듣기로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의 운반공학 일반은 포문드 교수가 맡고 있었다. 이 분은 만주(현 중국의 동북) 푸순(撫順) 탄광의 유명한 노천채굴 설계를 한 사람으로 운반기계회사의 기사장을 지냈고, 공과대학의 전 학우회장을 맡고 있어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크레인 강의를 하는 캄멜러 교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생님이지만 아침 7시부터 강의를 하기 때문에 힘들었다. 광물학은 아이텔 교수, 무기화학은 호프만 선생님이었고, 일반 기계공학은 슐레징거 교수로 이분은 대전(大戦) 후 영국에 초빙되어 대영기계연구소장이 되었다. 도자기는 리케 교수로 당시 세계 최고의 학자로 꼽혔다.
그 무렵 심리공학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담당교수는 메데 선생님이었고, 브리온 선생님이라는 공업 경제 선생님도 계셨다. 당시 도이체방크 총재로 일본에도 유명한 샤하트 씨는 명예교수로 1년에 두 번 정도 대학에 와서 강연을 하셨다.
그런데 당시 독일 대통령은 힌덴부르크 원수였고 총리는 브뤼닝 씨로 기독교사회당수였다. 히틀러는 나치의 당수였지만, 여전히 대의원의 수는 12명, 극히 소수당이었다. 그것이 2, 3년 후에 그렇게 크게 되었으니 그 기세등등함에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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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 세계동력회의 참가
6월에 제2차 세계동력회의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이는 아마도 국제학술회의로서는 최초의 대규모이자 근대 설비들을 실제로 구사한 회의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온 대표로는 야스카와 다이고로(安川第五郎1886~1976.실업가) 씨, 오시마 요시키요(大島義清 1882~1957 응용화학자) 선생, 시바 츄자부로(斯波忠三郎 1872~1934 선박공학자) 선생, 마쓰바라(松原) 선생 등으로 웬일인지 단구(短軀)인 사람들뿐이었다.
개회식 때 총리대신이 임석했기 때문에 대표자들은 일제히 기립했다. 그런데 일본 대표들은 일어서지 않아 보였다. 일반석에 있던 우리 일본인들은 모두 걱정하며 누군가 대표해서 알리러 가자고 하던 중 자세히 보니 기립해 있었다. 큰 사람들 사이에 작은 사람들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개회식 후 200명 정도의 파티가 있었다. 상대성 원리의 아인슈타인 박사가 바이올린을 선보였다. 그 능숙하고 품위 있는 모습은 나처럼 음악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느낌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사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서도 유명하다는 것은 나중에 들었다.
몇 년 전인가, 미국 원자력 발전의 1인자 시슬러 씨가 일본에 왔을 때 시슬러 씨는 서른 살 남짓으로 당시 회의에서 미국 대표 간사 역할을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로부터 우연히 아인슈타인 박사의 바이올린 이야기가 나와 당시 참석자로서 듣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독일이 제1차 대전 후 어떻게 부흥하고 있는지 세계적으로 보게 하려는 의도도 있어서 독일은 기꺼이 각지의 제반 시설, 제반 공장을 공개하고 선전에 힘썼다. 일본 참가 회원들도 헬프의 광산지대를 비롯해 기계의 도시 브라운슈와이히, 철의 도시 에센의 크루프 공장과 뮌핸 등을 견학했다.
브라운슈와이히에서 미어구 공장을 본 뒤 기계학과 기상학의 권위자 멜러 선생을 방문했다. 멜러 선생은 오노다 시멘트의 제4대 사장 가사이 신조(笠井真三) 박사가 기숙하고 사사한 선생이다. 멜러 선생은 "카사이 씨는 일본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해서 “굳이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고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고 답하자,
“그건 이상하다. 독일에는 그 이상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일본에는 비슷한 사람이 꽤 있다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부인과 함께 항의했다. 가사이 사장은 1890년경 이 땅에서 기계를 배웠다. 몇 달 만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경쟁이 있어 가사이 청년이 1등을 했다.
다음으로 시의 장래를 묻는다는 현상 논문이 있었는데, 이 또한 가사이 청년이 일등을 했다. 물론 대학 성적도 뛰어나 수석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멜러 선생의 말에 의하면 독일에서는 이렇게 우수한 남자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그만큼 그와 같은 남자가 일본에 여러 명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10 크루프 공장 견학
크루프 공장 견학 때는 크루프 본부에서 호화로운 만찬를 대접받은 것이 즐거운 추억이다. 쾰른에 들어간 것은 쇼와 5년(1930년) 7월 1일이었다. 라인란드 일대에 주둔하던 연합군이 이날을 기해 철수한 날이니 독일로서는 가장 축하할 만한 기념의 날이었다.
뮌헨에는 그 다음날 들어갔다. 당시 세계 최대라는 독일박물관이 개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박물관의 훌륭함은 말할 것도 없다. 지하에 백 평 정도의 '세계의 해전(海戦)'이라는 넓은 방이 있었다. 뭔가 본 것 같은 그림이 많이 있구나 했더니 이것이 대부분 일본해대해전에 관한 그림이다.
아마도 60% 정도 이런 종류의 그림이었다. 생각해 보면 일본해대해전은 세계에 둘도 없는 대승리의 해전이다. 유사 이래 해전이라는 것은 이백 수십 번 이상이나 되며, 그중 전멸전에 가까운 것은 두 번 있다.
그중 하나는 수백 년 전의 일로 사실이 확실치 않다. 기록이 확실한 것은 일본해전 단 하나라는 설명이 있었다. 38척의 발틱 함대 중 21척 침몰에 7척 나포라고 하니 그 전과를 알아 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외국 박물관에서 상세하게 전시되어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뮌헨 대학은 화학 쪽에서 세계에서 으뜸가는 대학이었다. 리비히라는 대화학자가 보불전쟁(普仏戦争)의 불명예를 화학에 의해 부흥하려고 노력을 거듭했고, 그 때문에 화학이 유명해졌다. 가사이 사장도 브라운슈와이히에서 기계쪽 공부를 마친 뒤 뮌헨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가사이 신조(笠井真三 1873~1942 오노다시멘트 4대) 사장 유학 때 대재상 비스마르(1815~1898 독일정치가)의 80세 생일(1895년) 축하연이 있었다. 프로시아 이외의 여러 나라의 국왕과 총리 등으로부터도 축전이 오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탄생 축하였다.
그 축하로 독일의 각 대학에서 최우등생을 비스마르크 저택으로 보내 축하의 아사를 드리기로 결정되었다. 뮌헨 대학의 최우등생은 화학과의 카사이 신조(笠井真三)가 선발되었다. 그런데 극동의 일본인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다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결국 가사이 학생은 비스마르크 저택으로 가서 대재상과 악수를 나누었다. 가사이 사장은 브라운슈와이히와 뮌헨에서의 유학 때의 에피소드를 부인은 물론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쇼와 12년(1937년), 우연한 기회에 나에게 말하여 주어 알게 되었다. 42년 동안이나 비화로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갈탄의 산지 할레 근처에 카를루스도르프라는 마을이 있다. 인구는 아마 5, 6백 명 정도나 될까. 그곳에 당시로서는 매우 적은 인원으로 가동되고 있던 시멘트 공장이 있었다. 나는 이 공장에 관심이 많아 4일 동안 실습을 한 적이 있었다.
숙소는 가스트호프 카를루스도르프라는 여관이었다. 이 숙소의 주인은 나이 육십 정도의 사람이었는데, 그는 러일전쟁으로 유명한 구로키 타메모토(黒木為楨 1844~1923)대장이 독일 유학 시절 그 밑에서 당번병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구로키 중령은 엄격한 무인의 전형으로서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었고, 특히 독일어로 거는 구령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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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 컴퓨터의 기초를 접하다
세계 최초로 컴퓨터의 기초를을 만든 곳이 크루프일 것이다. 쇼와 5년(1930년) 연말에 크루프는 베를린에서 전기 계산기의 첫 번째 영상 시연을 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매우 흥미를 느껴 바로 크루프 본사에 전화했더니 1월 3일에 와 달라고 했다. 나는 나흘 동안 엣센에 머물며 전기 계산기를 견학했다.
나는 진작부터 경리사무 합리화를 생각하고 있었고, 가능하면 이것을 도입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가격은 60만 마르크라고 해서 도저히 당시 오노다의 능력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움의 눈물을 삼켰다.
전기계산기는 독일에서는 끝내 상업화되지 못하고 미국 IBM에서 상업화하었다. 쇼와 9년(1934년)경 IBM의 기계가 일본에 들어오자 가사이 사장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지만, 독일 유학 당시 이에 대한 보고를 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이 궁색하게 되었다.
종전 후 일본에서 사장직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계를 도입했고, 미나미사와 노부로(南沢宣郎 1950년 도쿄대 졸업 후 오노다 입사)라는 천재적 인재에 의해 사내의 컴퓨터 이용을 발전시킨 바 있다.
지금은 컴퓨터 불요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30년(1955년)경까지는 입으로는 필요하다고 해도 속으로는 부정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요즘은 이러한 사람을 두고 '구닥다리' 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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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 귀국 여행
(*유학기간 : 1930년 2월~1932년 12월)
1932년 9월 말 베를린을 출발해 프랑스 영국 미국을 거쳐 귀국할 계획을 세웠다. 돌아오는 길에 첫 번째 들린 파리에서는 5고(五高)의 동급생 후루카와(古川) 육군 소령의 신세를 졌다. 파리의 첫인상은 왠지 거리가 지저분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 역시 지금까지 있었던 독일이 정리 정돈, 청소 청결이 잘 된 거리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업무상으로는 프레지네 씨를 만났다. 그 목적은 그가 발명한 콘크리트 바이브레이터를 견학, 구입할 생각이었지만, 만나보니 아무래도 하는 일이 다른 것 같다. 즉 프리스트레스 콘크리트의 대가인 것이다. 파리에는 두 명의 프레지네 씨가 있었고, 한쪽은 건축, 한쪽은 토목 기술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착오로 만난 프레지네 씨가 일본에서도 크게 활용되고 있는 강현(鋼弦 string-wire) 콘크리트의 발명자이다. 한편 또 다른 프레지네 씨의 바이브레이터도 일본에 수입됐다. 파리에서는 아내가 티푸스에 걸려 입원했지만 며칠 후 나은 것은 다행이었다. 호텔은 마스네였다.
영국에는 10월 초. 일본우선(日本郵船)에 근무하는, 우스사시(臼杵) 중학과 5고의 선배인 사카이 미노루(坂井実) 씨의 도움으로 런던, 글래스고, 맨체스터, 에든버러 등의 도시를 찾아 시멘트 공장, 파브요크의 보일러 공장, 선박, 항만 설비를 견학, 스코틀랜드의 풍경도 잠시 보았다.
사잔프턴에서 당시 블루리본 보유 선박인 오이로파호를 탄 것은 10월 하순이다. 대서양을 닷새 만에 횡단하는 5만 톤이 넘는 오이로파호는 매우 호화로운 배였다. 11월 초 뉴욕에 도착했다. 바로 이 무렵 일본은 금본위제 이탈 기미가 짙어 엔화 하락은 불가피해 보였다.
뉴욕에는 미쓰이(三井)물산의 이시다 레이스케(石田礼助 1886~1978) 지점장(후일 국철총재)이 있었는데 이분이 달러를 많이 매집하여 큰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과연 12월 중순 엔화는 금본위를 벗어나자, 달러당 2엔의 시세가 10일만에 2엔 60전 정도로 떨어지고 말았다.
미국은 물가가 비싸다. 게다가 앞으로 엔화 약세가 될 것 같아서 크게 절약하기 위해 구니베홈이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싸구려 호텔에 묵었다. 호텔에는 관리, 군인, 대학 선생님 등 많은 일본인이 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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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 마천루 풍경
뉴욕의 대하고루(大廈高楼)는 역시 훌륭했다. 그 무렵 엠파이어 빌딩이 완성된 직후라 바로 10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워싱턴 브리지도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이 현수교는 그 견본을 독일의 쾰른 공장에서 보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독일 쪽이 앞서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워싱턴에도 물론 갔다. 여기에는 유명한 뷰로 오브 스탠다드(표준계량검사국)가 있어 그 광대한 규모에 놀랐다. 국회의사당에서는 현관 바로 앞에 강당으로 여겨지는 200평 정도의 넓은 방에 2미터 폭 크기의 커다란 유리 붙박이 진열장이 열 개 정도 늘어서 있었다. 첫 번째 진열장에 워싱턴의 독립선언문이 들어 있었던 것은 이는 미국 1급 보물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네 번째 진열장에는 ‘히즈 마제스티 십(*폐하의 배)’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메이지 43년(1910년) 잠수정 사고로 죽은 사쿠마(佐久間) 해군 대위의 통렬한 유서였다. 이 유서는 원문 그대로 복사되고, 또한 영어 번역 문을 곁들여 장중(荘重)하거 진열하고있엏다. (*佐久間 勉-さくま つとむ 1879年9月13日 ~1910年4月15日 大日本帝国海軍軍人 最終階級 大尉 第六潜水艇艇長として事故で殉職し修身科教科書にも掲載)
일본의 일개 대위의 유서에 불과한데도 그의 충성심에 경의를 표하는 미국의 자세에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엄숙함을 느꼈다. 동시에 미국 해군은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태평양전쟁에서 미 해군은 예상대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제일의 시멘트 생산국이었다. 기술의 수준도 화실히 일본의 것보다 높다. 각지의 시멘트 공장은 말할 것도 없이 토목공사 현장, 항만 설비, 시카고의 미국 시멘트 협회 연구소, 일리노이의 토목공학 연구실 등을 열심히 견학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벌써 시멘트 운반에 탱크롤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든 수입하고 싶다고 귀국하여 진언했지만 일축당한 것은 유감이었다. 시카고에서 서해안으로는 싼타페 철도로 횡단, 샌프란시스코에서 타츠타 마루(竜田丸)를 탔다. (*龍田丸-たつたまる- 日本郵船が保有していた貨客船-浅間丸,秩父丸と姉妹船. 船名由来は龍田大社で, いずれの船も神社名にちなんだ命名であった)
미국 체류 중 절약을 한 덕분에 돈에 다소 여유가 생겨 배는 일등실로 잡았다. 1만 7천 톤의 타츠타 마루는 당시 일본의 최대 선박 중 하나였다. 태평양 횡단에는 15일이 걸렸다. 이렇게 해서 12월 말에 요코하마(横浜)에 도착. 요코하마에서 빈약한 일본의 항만시설을 보며 피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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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 다시 조선으로
일본에 돌아와 보니 엔화는 계속 떨어지고 있고, 경기가 다소 좋아졌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다시 조선의 천내(川内) 공장으로 귀임한 것은 쇼와 7년(1932년) 2월이었다.
시멘트의 수요는 일본 내지도 조선도 아직 그 조짐조차 없었다. 그러나 천내 공장의 가동 상황은 그저 그런 정도였으나, 천내 공장이 올리는 이익은 다른 이십여 공장에 비해 현저히 많았다. 곧 북부 조선 그것도 동해 연안 지방에 좋은 전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씩 회전식 가마(窯)의 증설 계획을 도모해도 좋을 것 같게 되었다. 네 번째 가마는 첫 번째와 모두 동형으로 정했다. 이는 제일 가마가 기대보다 훨씬 양호한 성적을 올린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천내 공장 제품의 상당 부분은 장진수력발전소 댐(당시 일본 제일의 댐) 건설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콘크리트가 일주일이 지나도 굳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는 수력공사의 생명을 좌우하는 사항으로 큰 소동이 났다. 그것은 골재나 시멘트가 나쁜 것이 된다. 시멘트의 품질에 대해서, 나로서는 당시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골재를 조사했는데 모두 지장이 없을 것 같은 양호한 골재였다.
따라서 역시 시멘트가 나쁜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내부에도 나와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다만 골재 중 희고 단단해 보이는 보기좋은 모래를 설마 하면서 이를 철저히 조사했더니, 이 최상등으로 보이는 모래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의 모래 안에 무색의 유기물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모래를 바꾸었다. 그것도 겉보기에는 훨씬 더 나빠 보이는 모래로 바꾸었는데, 그 결과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색깔이 좋아보이는 모래, 말하자면 그 겉보기 좋은 모래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카사이 사장이 찾아왔다. 장진댐과 관련한 문제의 건을 경성(서울)에서 듣고 공장에 도착하자 굳은 표정으로 분석시험에 들어가 즉각 보고하라고 했다. 다행히 그 몇 시간 전에 모든 문제점의 해결이 끝났기 때문에 명쾌한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사장은 심기를 고치고 스무 명 정도의 직원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 호엄한 사장이 독일어로 로렐라이를 불렀다. 우리들은 한숨돌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2가마 계통은 쇼와 9년(1934년)에 완성되었다. 이 설계와 공사는 모두 나가노 이사무(長野 勇) 공무과장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드디어 운전 첫 날을 마치고 둘째 날 들어 나가노 과장은 "오늘은 몇 톤 굽습니까"라는 물음에 "한 사백 톤 생산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400톤은 최대 생산용량이다. 둘째 날부터 최대 생산량을 낸다는 것은 세계에서도 예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김없이 400톤을 소성(焼成)했다. 나는 신기(神技)라고 생각했다. 쇼와 11년(1936년), 제3가마를 설치했다. 이것은 내가 스위스에서 견학하고 추천한 레볼 킬른이었다. 이 것은 발명 후 새로운 가마였으므로 이곳에서 과감한 개량을 가하여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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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 제3공장 건설
조선 전체의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특히 함경북도가 발전해 왔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는천내 공장은 지리적인 면에서 보면 남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 그래서 만주와 가까운 청진 부근에 제3공장을 짓게 되었다. 먼저 석회석 채취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 청진 북쪽 40km의 고무산(古茂山) 부근을 조사했다.
원료 조사는 어디서나 극히 비밀리에 한다. 능숙한 기술자라면 돌 하나하나를 다 분석하지 않아도 할 수 있고, 조선에서는 이 방법으로 해왔다. 고무산에서도 이 예에 따라 상당 부분의 분석은 하지 않은 채 조사를 종료했다. 결론은 오케이.
드디어 토지 매입에 들어가면서 대체로 잘 되었다. 경계를 정하기 위해 현지에 가면 공장장이 되어야 할 마쓰모토(松本) 기사가 은근히 속을 태우고 있다. 고무산의 석회석으로 생각했던 돌이 사실은 대부분 규석이었다는 것이다. 큰일을 앞두고 머뭇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찌감치 재조사를 하기로 하고 천내 공장에서 베테랑 야마자키 야스카즈(山崎保和) 기사를 불러들여 예정지에 이어지는 산을 정밀 조사했다. 운 좋게 부근에 석회지대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매수 부분을 확장 변경하여 무사했다. 이윽고 가사이 사장이 현지에 오셔서 "이 산의 외관 모습만 보고 잘못 선택한 것은 무리가 아니지만, 그러나 안도 군, 위험한 일을 하는구나"라는 말을 듣고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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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 중용열 시멘트(中庸熱セ) 개발
압록강 수전(水電)이 수풍댐을 축조할 때의 일이다. 이 무렵에는 한반도는 시멘트 생산 과잉으로 약 40%의 생산 제한을 하고 있던 관계로 가격이 비싸지고 있었다. 수풍댐에는 약 90만 톤의 시멘트가 필요하다. 그래서 수전(水電) 측에서는 스스로 시멘트를 생산하고, 부족분을 일반 시멘트 회사에서 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특별 공장 건설에 즈음하여 나는 압록강 수전으로부터 상담을 받았다. 노구치(野口) 사장, 구보타(久保田) 전무와는 오랜 지인사이이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차라리 오노다사의 평양공장 바로 옆에 수전사(水電社) 공장을 만들고 이를 평양공장과 공동으로 운전하면 저렴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제안, 실행에 옮겼다. 또 별도로 수풍댐 현장에 클링커(*시멘트덩어리) 분쇄 공장을 만들었다.
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수풍댐의 사용 시멘트는 저열시멘트로 만들고 싶다는 강력한 요청이 수전 측의 토목 및 시멘트 관련 학자로부터 들어왔다. 저열 시멘트는 미국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교수의 제창에 의한 것으로 수화열(水和熱)이 60칼로리였다는 점에서 저열(低熱)이라고 불린 것이다. (*水和熱: 콘크리트가 경화될 때 물과 시멘트 등이 수화반응하여 수화물이 생긴다. 이 수화 반응에 따라 발생하는 반응열을 수화열이라고 함)
그러나 이 시멘트의 대량생산은 어렵고 대량사용이 되면 굳지 않을 위험이 매우 컸다. 그래서 나는 그 제조를 거절했다. "싫으면 타사에 발주하셔도 되고, 단 중용열(中庸熱)시멘트라면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했다.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져 중용열 시멘트로 결정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열 시멘트를 사용한 미야자키현(宮崎県)의 한 댐에서 콘크리트가 굳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게다가 데이비스 박사 주위에도 불상사가 있어 저열 시멘트는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지금의 댐 건설은 거의 중용열 시멘트로 정해져 있다.
조선의 시멘트 공장은 모두 함경남도와 황해도 이북에 있었고 남쪽에는 공장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쯤 남쪽에 세우기로 하고 후보지로 동해 쪽 강원도 삼척(三陟)을 선택했다. 이는 마스다 에이이치(増田英一)기사가 주가 되어 광범위하게 조사, 건설을 내정하고 있던 중 삼척 무연탄개발회사 설립이 갑자기 대두하여 문제가 되었다.
간사이전력(関西電力)의 부사장 나이토 구마키(*内藤熊喜1881~?) 씨가 당시 정무총감 이마이다 키요노리(今井田清徳 1884~1940) 씨와 연락을 취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토 씨라고 하면 전력의 귀재 마쓰나가야스 자에몬(*松永安左衛門 1875~ 1971) 씨조차 저런 훌륭한 사람은 없다고 칭찬할 정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진행되어 오노다 시멘트 같은 것은 안중에 없는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렇게 쉽게 나이토 씨의 말대로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일로 상당히 충돌했다. 어느 날 나이토(内藤) 씨는 나와 차분히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안도 씨 오노다를 그만두고 우리회사에 와주면, 월급은 지금의 세 배를 주겠다. 삼척개발회사(三陟開発会社)의 중역 자리도 주겠다" 는 것이다.
나는 후의를 감사하며 "그러나 조건이 있다. 월급이나 역할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나이토 씨가 내 부하로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나이토 씨는 흥분하여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젊은 시절이니까 나도 이런 위세 좋은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 공장은 쇼와 18년(1943년)에 완성되었다. 지금은 동양시멘트란 이름으로 이양구(*李洋球 1916~1989) 씨가 경영하고 있는데 생산 능력은 380만 톤으로 창업 때의 25배에 해당한다.
천내 공장의 제품을 싣고 있던 원산항은 수심도 얕아 기껏해야 삼천 톤 정도의 배밖에 정박할 수 없었고, 또한 한겨울이 되면 결빙되어 불편했다. 원산 부근에 항구를 만들 수 없을까 하고 조사를 한 결과 영흥항(永興港) 입구 부근에 적지가 있었으며, 당시 요새 지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새로운 선적항 건설 계획을 본사에 상담했더니 터무니없다고 꾸중을 들었다.
다만 다른 회사에 양보해도 된다고 해서 미쓰비시(三菱)계열의 조선무연탄광회사의 가토(加藤) 사장에게 말했더니 기꺼이 받아 들여 주었다. 문천(文川)역에서 5km 인입선을 깔고 항구에는 1만5000t급 접안시설 두 개를 설치, 시간당 770톤 운반능력의 벨트 컨베이어도 두 대 설치했다. 이 항구는 미나미(南)총독의 특명에 따라 원산북항이라 이름 붙였다.
태평양전쟁도 끝나갈 무렵 조선의 나진, 청진 등의 항구가 사용 불가능해져 제철용 코크스탄은 거의 모두 이 원산북항에서 선적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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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 수교선언의 땅 문경(聞慶)
경상북도에 문경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박 대통령이 "나는 비록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일본과 국교를 수교(事交)한다. 이것이 한국 부흥의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유명한 성명(声明)을 밝힌 곳으로 이름이 높다.
박 대통령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한촌(*구미)에서 태어난 수재로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 문경 인근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만주(현 중국 동북부) 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다시 도쿄의 사관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오노다(小野田)는 이 문경에 공장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쇼와 12년(1937년)경부터 조사를 시작하여 주임은 앞서 언급한 마스다(増田) 기사로, 공장 부지를 딱고 석회석도 수만 톤을 파서 저장하고 있을 때 종전(終戦)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 대한시멘트의 문경공장이다. 대통령은 이 시멘트 공장에 일종의 친밀감을 가지고 계셨을 것이다. 여러 차례 시멘트 공장의 임시비행장에 날아왔다고 한다.
쇼와의 전시색(戦時色-패색)이 짙어짐에 따라 산업통제법이 시행되면서 조선에도 그것이 시행되었다. 조선의 시멘트 공장은 당초 오노다사의 평양공장과 천내공장의 두 곳뿐이었으나, 후에 해주에 우베(宇部) 시멘트 계열의 공장, 봉산(鳳山)에 아사노(浅野)시멘트, 그리고 오노다사의 삼척(三陟) 공장이 생겼다.
그 무렵 우리들은 공업조합법에 의해 시멘트공업조합을 결성하여 내가 회장이 되어 통제적인 기능은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상공성으로부터 지시가 왔지만 통제회에 들어가는 것은 거절했다. 원래 일본·한국 병합 시 기본조약에서 일본과 한국은 법역(法域)을 달리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형식적으로는 일본의 법률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이 공업 조합은 종전까지 계속되었다. 현재의 일본 공업조합과 대동소이했다. 일본은 한일병합 이래 35년간 조선을 통치했다. 나는 그중 거의 60%에 해당하는 세월을 조선에서 보냈고, 또한 종전 후 두 해 동안 평양에서 억류자로서의 생활을 했다. 조선에 대한 추억은 많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18 "문화통치"의 사이토(斎藤) 총독
내가 조선에 부임한 것은 다이쇼11년(1922년) 즉 사이토 마코토(斉藤 実 1858~1936) 총독이 부임한 지 3년째에 해당한다. 3·1사건의 여진도 진정되어, 얼핏보면 평온한 상태였다. 설령 일본인이 길을 걸어도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사이토 씨는 문화통치, 인정(人情)통치를 근본으로 한 것처럼 보였다.
사이토 씨는 넓은 바다와 같아 한마디로 평할 수 없는 사람 같았지만 두뇌는 매우 날카로워 평소에 말하는 것은 통렬한 익살이 있었다. 그 의 유머는 유명하다. 어느 날 총독의 자동차를 교체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차는 링컨이었다.
총독이 말하기를 "링컨은 휘발유를 많이 먹는데 괜찮을까" 하니, 담당 과장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자 총독은 웃으며 "명색이 아브라함 링컨이라고 하지 않는가" 라는 말했다.
사이토 씨의 태연자약함 또한 유명하다. 부임 시 경성역두에서의 일은 앞에서 설명했다. 또 어느 때 압록강을 배를 타고 건넌 적이 있었다. 만주 측에서 저격이 있어 수행원들은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사이토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소를 나누며 신의주까지 건너갔다고 한다.
덧붙여 조선총독은 매우 위의(威儀)를 중시하여, 철도에 의한 여행은 모두 특별 차량, 그것도 천황 폐하와 같은 정도의 호화스런 것이었다. 사이토 씨는 퇴임 후 2, 3년 만에 다시 총독에 재취임하였고, 그 후 내무대신 때 2-26사건으로 쓰러졌다. 사이토 총독 후임으로는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 대장이 총독으로 취임했다.
우가키 대장과는 가사이(笠井) 사장을 모시고 몇 번인가 뵀는데, 남의 말을 듣는 것이 매우 능숙한 분이었다. 언젠가 총독실에서 가사이 사장 등 우리와 회담 도중에 잠시 자리를 떴다가 돌아오셔서, "가사이 씨, 방금 장녀의 신랑감이 결정되었다는 전화가 왔어요. 와타나베라는 철도 기사입니다." 라고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그런 와타나베 씨가 나와 관계가 깊은 오리엔탈 콘크리트 사장이 된 것은 인연이다. 우가키 씨는 산업에 중점을 두고 남면북양(南綿北羊)정책과 대발전(大発電)에 의한 산업개발을 추진했다. (*南綿北羊: 조선의 남부는 농업 북부는 목축 권장의 정책)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19 "정신(精神)" 강조의 미나미(南)총독
우가키(宇垣) 씨 후임은 미나미지로(南次郎1874~1955) 총독이었다. 미나미 씨도 언뜻 보기에 마음좋은 할아버지 같은 풍모로 두뇌는 지극히 명석하고 명쾌한 판단을 갖춘 듯한 일면이 있었다. 어느 날 고무산(古茂山) 시멘트 공장을 시찰 올 때 나는 도중 기차에 동승하여 미리 공장 설명을 했다.
청사진을 펼쳐 원료부터 제품, 출하까지 설명을 하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윽고 기차역에 내려 자동차에 동승하여 "저것이 석회산입니다. 점토산입니다" 라고 말하자, "알고 있다" 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 정도 설명으로 알고 계실 리가 없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의 미숙함 때문에 그것이 안색으로 나온 것 같다.
공장에 들어서자 "저게 석회석 분쇄 공장이냐" "저게 시멘트 분쇄 공장이냐" 라며 열심히 질문을 시작했다. 그것이 모두 정확했다. 미나미 대장은 기병과 출신으로 산하의 형세를 보는 눈은 각별하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로 정확한 것에는 전적으로 감탄했다.
미나미 총독은 오로지 정신적인 면에 힘을 쏟았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같은 마음의 일본 신민으로 만들고, 이윽고 조선에서 천황 폐하의 행차를 우러러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성 미나미는 원래 조선에 있는 성 남(南)씨로 통한다" 며 자진해서 조선복을 입고 사진도 찍었다.
또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라는 3개조의 문장을 만들어 이를 고창(高唱)하게 해 정신의 고양을 도모했다. 반도(半島)의 노래도 만들어 널리 단체와 학교에서 부르게 했다. 이어 이른바 창씨개명 운동을 일으켜 많은 조선인을 일본인식 성명으로 바꾸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로, 말하자면 안도(安藤)를 프랭클린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상당한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걱정하여 고향 오이타의 선배인 총독을 직접 뵙고 약 한 시간에 걸쳐 이 운동을 중지하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이미 방침은 정해져 있었던 듯, 물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강제가 아니고 자유의사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20 "창씨개명" 반대
나는 오노다 평양공장에서는 창씨개명을 원하지 않는 직원은 무리하게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했다. 공장 과장을 하던 도쿄고등공업 출신 이 군은 사정상 개명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대로 괜찮다고 해서 과장직을 계속했다. 이윽고 종전이 되어 이 사람은 금세 영웅시되어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요직으로 추대되었다.
미나미 총독의 정책은 다소 강요하는 듯한 면도 있었지만, 총독은 널리 사람들의 흠모를 받고 있었다. 이 분의 후임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国昭1880~1950) 총독이었다. 이 무렵에는 이미 태평양전쟁에 돌입해 있었다.
고이소 씨는 매우 일본 고대사에 정통했고 고사기(古事記) 같은 것은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 설득과 강연을 잘하는 분이라 나도 감탄해서 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반도에도 지원에 의한 징병 제도가 시행되었다. 전문학교 이상을 나온 사람에게 군대 지원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수의 지원자가 있었지만, 아직 지원하지 않은 자도 400명 정도 있었다. 이 사람들을 어떤 노무에 종사시키게 되어 시멘트 쪽으로 200명의 배치가 정해졌는데, 그 중 오노다 시멘트의 세 공장에서 120명 정도를 맡게 되었다. 어려운 일이지만 반대는 할 수 없었다.
이들 미지원 학생(일부 졸업생)의 출신을 조사해 보니 놀랍게도 그 8할이 서자(庶子)였다. 둘째 부인인 친모로서는 내 아이를 전사시키고 싶지 않고, 자식으로서도 어머니 한 사람을 남겨두고 전쟁터로 갈 수 없었다. 이렇게 그들이 지원하지 않은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이 일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이들 징용 학도들을 대했다.
나의 이 마음은 모두에게도 충분히 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소 총독이 이 학도들의 모습을 보러 시찰왔을 때, 나는 이소 씨에게 이 사정을 설명하고 총독의 학도에 대한 훈시에 이러한 내용을 포함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의 총독의 훈시는 매우 애정이 담긴 것으로 학도들도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었다.
이 훈시가 끝날 무렵 이소 씨의 총리대신 취임에 관한 전보가 와서 서둘러 그대로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이후 신임 총독을 면회할 기회도 없는 힘든 시간이 지났다. 전시상황은 과열되어 여행도 좀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