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기사 네티즌들 퍼날라, 문광부 "확인 불가" 싼타페를 직접 몰고 문화관광부에 나타나는 등‘파격’ 행보를 보이고 있는 영화감독 출신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아버지가 '남로당 간부를 역임했던 좌익이었다'는 네티즌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와 파장이 일고 있다.
- 제5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오아시스'의 이창동 감독(왼쪽)과 신인배우상을 받은 여주인공 문소리씨가 인천공항에 도착,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문제의 글은 1993년 9월 7일 <세계일보>의 인물평 기사로 이창동 장관이 입각하고 난 다음 이 기사가 시민단체 등 언론사 게시판에 퍼옮겨지면서 다시 한번 네티즌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는 것. 네티즌이 올린 세계일보 기사는 소설가 조용호 기자가 취재한 것으로 이 장관의 삶에 대한 역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기사에는 "대구에서 태어난 이씨는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번도 공납금을 제때에 내 본적이 없다. 어머니가 삯바느질해서 만든 돈으로 겨우 다음 번 납기가 돼서야 턱걸이를 했다.
부친은 깨어있는 날보다 술에 취한 날이 더 많았고 모친까지 괴롭히기 일쑤였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남로당 간부를 역임했던 좌익이었다. 체제를 부정하다보니 자기 파괴적으로 흘렀고 생활력도 없었다"고 적고 있다.
부친 좌익 관련 부분에 대해 이창동씨는 이렇게 인정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숨기는 분이 아닙니다. 이승만 시절에는 이승만욕, 박정희 시절에는 박정희 욕… 어릴 때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고 이해가 안갔습니다. 철이 들면서 왜 그분이 좌절해야만 했는지 그 꿈과 이상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됐지만, 아무리 공동선을 추구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복합성과 한계를 느끼게 된 거지요』
이와 관련 문화관광부 공보관실은 <세계일보>에 실렸던 이창동 장관 부친 관련 기사에 대한 사실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답할 수 없다"라며 답변을 피했다. 또 장관 비서실도 관련 기사에 대한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아직도 답변이 없다.
그러나 한국언론재단이 구축한 신문기사를 검색하는 '카인즈'에는 네티즌이 게시판에 올린 기사가 아직도 검색이 되고 있고 또 문인 출신인 조용호 기자가 쓴 기사에는 당시 소설가였던 이창동 씨가 직접 자신의 아버지관련 부분을 시인하고 있어 세계일보에 실렸던 기사는 사실로 판단된다.
또 이 정도로 중대한 사안에 대해 문광부 공보관실이 성의없는 답변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기사를 사실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민의 다수가 ‘참여정부’ 첫인사는 “능력이 채 검증되지 않은 인사가 다수 포함돼 있는 실험적 인사”라며 우려하고 있다. 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관으로 일했던 이범재(41)씨가 반국가단체에 가입, 활동한 혐의를 받고 구속 수감된 사실도 있어 이창동 장관 부친의 과거가 노무현 정부 정체성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사건이 될 전망이다.
[세계일보] 1993-09-07 인물평/약력 14면 3235자
이창동/문화예술인:8(이사람/2천년대를 여는 한국의 차세대:14)
◎지치지 않는 문학열정… 「희망」의 작가/소시민적 삶의 진실 포착에 초점맞춰/「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 발표
문단주목/“지상의 가치는 내면속에… 「자기아픔」 당당히 외칠수 있어야”
소설가 이창동씨(39)가 창조해낸 주인공 하나는 밤길 공사판 똥구덩이에 주저앉아 울었다. 온갖 오물과 증오와 버려진 꿈들로 퇴적된 현실의 고달픈 삶이 서러워 목을 놓아 울었다. 그러나 그 누추하고 초라한 인생에게도 밤하늘의 별은 「참 예쁘게도」반짝이고 있었다.
중편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 등장하는 소시민의 보잘 것 없는 삶에 이창동씨는 이렇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별빛을 남겨두었다. 그 별빛은 그 주인공처럼 똑같이 남루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험난한 세상살이의 좌표였다. 그것은 90년대들어 대부분의 「80년대 작가」들이 혼돈과 고뇌 속에 방황할 때도 지치지 않는 작가적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이념의 벽이 무너지고 사회적 긴장도 줄어들었지만, 우리의 삶은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습니다. 뭔가 외칠 수 있을 때, 자기 아픔을 당당하게 소리 칠 수 있을 때 그 인간의 값은 더 나가는 것 아닐까요. 인간들이 부박하게 세상의 표피적인 흐름에 좌충우돌해도, 지상의 가치는 변할 수 없는 하늘의 별처럼 기실 우리 내면 속에 있습니다』
이씨는 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전리」로 등단,10여년 동안 2권의 소설집만 낸 과작(과작)으로 유명하다.87년 데뷔 5년 만에 처음으로 「소지」를 내놓았다. 전쟁 미체험 세대가 내놓은 분단 소설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이 소설집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지난 92년,「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선보였다. 첫번째 소설집에서는 시대에 대한 도덕적 채무로 인해 「현실」과 「인간」을 똑같이 바라보았지만 두번째 소설집에서는 작가의 무게중심을 확연하게 인간쪽으로 옮겨 놓았다.
구조적인 사회의 문제만 해결되면, 인간들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만 덜어진다면 그 속의 개인들이 큰 숨을 쉬고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변화의 기저에 깔린 잠재의식은 어린시절부터 부친의 이율배반적인 삶에서 일찍이 체득한 것이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이씨는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번도 공납금을 제때에 내 본적이 없다. 어머니가 삯바느질해서 만든 돈으로 겨우 다음 번 납기가 돼서야 턱걸이를 했다.
부친은 깨어있는 날보다 술에 취한 날이 더 많았고 모친까지 괴롭히기 일쑤였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남로당 간부를 역임했던 좌익이었다. 체제를 부정하다보니 자기파괴적으로 흘렀고 생활력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숨기는 분이 아닙니다. 이승만 시절에는 이승만욕, 박정희 시절에는 박정희 욕… 어릴 때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고 이해가 안갔습니다. 철이 들면서 왜 그분이 좌절해야만 했는지 그 꿈과 이상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됐지만, 아무리 공동선을 추구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복합성과 한계를 느끼게 된 거지요』
사회 전체를 적대시하는 부친 덕분에 그는 성장기 내내 스스로 소외되고 주눅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사회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큰형은 4·19 직전에 시위에 가담, 고2때 제적당했다. 둘째형도 결국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낭인생활을 하는 아웃사이더였다.
그가 4형제중 처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까지 나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의 가족의 사회화를 책임지는 유일한 출구였던 셈이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가입한 문예반에서 「우등상 한 번 못타본」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문제에 대해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소설가에 대한 욕망보다 절망적인 가족상황에서 탈출, 사회적으로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더 컸다.
그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경북 벽지의 영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대학 1학년때 원고료를 벌기 위해 대학신문에 연재했던 낭만적인 소설 「취할 수 있는 것들」을 계기로 만난 문학지망생 아내의 성화가 촉매로 작동했다.
서울에 올라온 1년동안 20대의 팔팔한 나이에 죽어간 선배의 죽음을 소설로 만들어낸다.
6·25때 겪은 영양실조가 원인이 되어 간경변으로 서서히 끔찍하게 죽은 선배에게서 그는 시대와 한 개인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80년의 시대배경과는 무관하지만 당시의 대량 살륙이 알레고리로 투영된다. 그 작품 「전리」로 83년 신춘문예 관문을 통과한다.
등단 후 「소설을 위한 소설」도 몇편 썼지만 그는 차츰 가능한 한 작위성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정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여유를 찾기 시작한다.
분단 문제를 다루되 소 재적 차원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을 중심에 놓고 정면 대응한 「소지」 「친기」 「끈」등을 담아,87년 첫 작품집을 내놓는다.
그러나 소설가 이창동의 진면목은 사실 그 이후에 내놓은 많지 않은 작품들에서 반짝이고 있다. 두번째 소설집에 등장하는 △학생운동을 하다 자신의 집으로 도피해온 이복동생을 고발하는 소시민의 절망(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광산촌 다방 레지로 내려갔다가 수난을 당하는 왕년의 운동권 여학생(하늘등) △술로만 세월을 보내는 왕년의 좌익노인네가 간첩사건이 발표되자 자신도 가담했다고 우겨대는 속 뜻(용천뱅이)등은 한결같이 80년대 소설의 도식을 거부한다.
문학평론가 성민엽씨의 지적처럼 『인간 이해의 여러 도식들과 싸우며 그 도식들을 넘어서서 삶의 진실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춰온 것』이다.
이창동씨는 87년 봄, 어렵게 이루어낸 사회화의 근간인 교사생활을 그만두었다. 실업자 반평생의 부친 그림자가 어른거려 불안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과감하게 소설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던 것. 그러나 그는 어렵게 소설을 「그리는」 결벽증에 시달리고 있다.
잡지청탁소설도 마감기한에 겨우 맞춰 보낸 뒤에도 맘에 안들면 다시 찾아올 정도다. 그런 그가 올 여름에는 집필실을 떠나 영화 촬영장의 조감독으로 땡볕 쏟아지는 남해안에서 소도구를 들고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사물의 반응이나 언어에 무디어진다는 게 두려웠습니다. 내 삶이 이렇다면 아무리 잘 다듬어진 소설이 나온다 해도 가짜 세공품에 불과할 겁니다. 내 삶을 흔들어 놓고 싶었습니다』
관념적인 유희에 함몰되거나 도식적인 현실 독법으로 경직되지 않고 세기말 한국의 「보잘것 없는」삶들에 비출 소설가 이창동의 새로운 별빛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