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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金千兩에 買收된 唐의 使臣
이때에도 김인문은 옥중에 있었고 김인문을 따라 翰林郞 朴文俊도 옥중에 있었다. 당나라 고종은 박문준을 불러 따졌다.
― 그대의 나라에서는 무슨 비법이 있어서 우리 唐大軍이 두 번이나 갔는데도 살아서 돌아오는자가없느냐? 박문준의 대답은 이러했다.
― 배신(陪臣=朴文俊을 말함)은 이 上國(唐나라)에 온지 10년이 넘어서 본국의 사정을 알수 없아오나 듣 사온데 본국에서는 상국의 은혜로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삼국을 통일하였아옵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새로 사천왕사를 낭산 남쪽에 세우고 황제(唐帝)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있다하옵니다.
이마을 들은 당제는 속으로는 매우 기뻐하면서 禮部侍郞 낙붕구(樂鵬龜)를 신라에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는 절을 당의 사신에게 보여서는 될 일이 아니었으므로
따로 남쪽에 절을 지어 기다렸는데 낙붕구가 도착했다. 낙붕구는 지체치 않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축원한다는 四天王寺에 가서 분향을 하겠다고 서들렀다. 그래서 그를 새로 지은 절에 안내했다.그런데 낙붕구는 이는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 하면서끝내 들어서지를 않았다.
신라조정은 하는 수 없이 그를 구슬러 금천냥을 주어 그대로 돌려보냈다.
돌아간 낙붕구는 신라가 천왕사를 세워 황제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있음이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당제는 더욱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겼다. 신라는 이때를 이용하여 强首로 하여금 김인문 석방 表文을 지어 舍人 遠禹를 사자로 당에 보내어 김인문을 석방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제고종은 이 名文의 표문을 읽고 곧 김인문을 석방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그런데 김인무이 아직 옥에 갖히여 있을 때 신라에서는 그를 위한 절을 세워는데 仁容寺라 이름했고 觀音道場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인문은 귀국도중 해상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러자 도장의 이름을 미타도장(彌陀道場)이라고 고쳤던 것이다.
◆ 金庾信將軍의 등에 七星으 무늬
유신공은 진평왕 16년(591辛亥)에 출생하여 문무왕13년(西紀673년癸酉)7월에 사망하였으므로 82세를 일기로 마쳤다. 유신공은 (七曜〓日,月,火,水,木,金,土의 七星을 합한 이름)의 精氣를 타고 났으므로 七星의 무늬가 등에 있었고 또한 神異한일이 많았다. 나의 18세되던해에 劍術을 닦어 國仙(花郞)이 되었는데 이 때에 白石이라는 청년이 어디서 온지는 알수 없었으나 郎徒中에 속해 있었다. 유신공이 항상 고구려 백제등 두나라를 정벌할려고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백석이 그점을 알고 유신공에 하는 말이 호랑이를 잡자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되는것과 같이 전국을 정복하려면 전국의 사정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고 하니 유신공이 이에 동의하여 백석을 대동하고 전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어느 고개에 이르러 쉬고 있을 때 어떤 여인이 두사람 나타나 동행하게 되었는데 骨火川(永川郡內) 에 이르렀을 때 또 한 여인이 나타나 동행이 되어 3여인과 이야기까지 하게되었다.
3여인이 가지고 온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서로간의 戀情을 보내게 되었는데 여인들이 이 눈치를 알아차리고 유신공에게 귀속말로 하는말이 백석을 때어 두고 저숲 속으로가자하는지라 유신공이 백속을 혼자 쉬게 하고 3여인과 숲속으로 갔을 때 3여닝이 급작스레 神人이 되어 하는 말이 우리들은 奈林(慶州부근) 혈례(穴禮〓慶州부근) 골화(骨火〓永川郡內)등 세곳의 護國神이온데 지금은 적국사람이 공을 유인해 가는 것을 공은 이를 모르고 따라가므로 만류시키려고 이 곳에 온것이라 하고 말을 맞치자 행방불명이 되었다.
유신공이 이 말을듣고 크게 놀라 쓸러지며 女神들이 사라진 곳을 향해 두 번절하고 나와 骨火에서 그날밤을 유숙하면서 백석에게 이르기를 적국의 정세를 알려고 하면서 긴요한 조사 서류를 두고 왔으니 돌아가서 가지고 오자하여 낭사(郎舍)로 돌라온 유신공은 백석을 결박하고 문초하니 백석이 실토하였다. 백석은 본래 고구려 사람인데 군신이 말하기를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우리나라의 점쟁이 추남(楸南)의 化身인데 국경에서 흐르는 냇물이 順流하지 않고 역류(逆流〓웅자(雄雌)라하여물이 엎지락 뒤치락 하는 것) 할때가 있었으므로 그를 점치게하였다. 추나이 말하되 궁내에 있는 大王의 부인이 음난한 행위를 하고 있으므로 그 표징(標徵)으로 물이역류한다는 것이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생각했으며 왕비는 크게 노발(怒髮)하여 요망스럽고 여우스러운 말이 있느냐? 하면서 왕에게 고하기를 다른 것으로 시험하여 그 사실이 맞지 아니할때는 중형(重刑)에 처하자고 하였다. 이에 「쥐」한마리를 함속에 넣어 추남에게 묻기를 함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물었다. 추남이 아뢰되 주가 여덟마리 들어 있다고 하였다. 추남의 말이 틀린다 하여 처형하려고 하자 추남은 결사코 쥐가 여덟마리라 하였다. 그러나 모른다는 이유로 추남을 처형하려하니 추남이 맹세하기를 처형되며는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으로 추남의 목을 자른뒤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으므로 추남의 점이 맞은 것을 알았다. 그날밤 대왕의 꿈에 죽은 추남이 신라 舒玄公(서현공) 부인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신하에게 말하니 신하들이 말하기를 추남이 매서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다. 하고 그것 때문에 나를 보내서 이렇게 꾀한것이라고 하였다. 유신공은 백석을 처형한 후 각가지 음식을 만들어 3신에게 제사를 드리니 3신이 나타나 흠향하였다.
★ 의상大師
法師 의상은 성은 金氏요. 부친은 韓信이니 29세에 서울(慶州) 福泉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원효(元曉)와 같이 중국을 갈려고 요동(遼東)까지
갔다가 고구려의 경비원에게 잡혀 첩자로 몰려서 수십일간 고새을 하다가 귀국하여 있다가 당나라의 사신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처음 양주(楊州)에
머물 때 州將 유지인(劉至仁)의 청을 받아 관사(官舍)에 있게 되었으며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얼마후에 종남산(終南山)으로 가서 지상사 지염(至相寺 至儼[지엄])을 뵈오니 지엄이 말하되 전날밤 꿈에 海東의 큰 나무가 지엽(枝葉)이 무성하여 중국을 덥고 그위에 봉(鳳)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마니보주(摩尼寶柱)가 있고 그광명이 먼곳에까지 비치였다. 하며 오늘 그대(의상)를 만날줄 알았다.
하고 무한히 기뻐하였으며 의상법사도 또한 지엄을 만나 화엄(華嚴)의 교리를 깊이 깨달았다. 의상법사가 귀국한 후 十寺에 교리를 榮州浮石寺 原州 비마라사(O摩羅寺) 가야 해인사(伽倻 海印寺) 비실(옥천사) 금정 범어사(金井 梵魚寺)등이 있다. 또 의상에게는 다음과 같은 제자가 있다. 悟眞 智通 表訓
眞定 道融 良圖 相源 能仁 義宿등 十名이다.
◆ 괘릉(掛陵)
문무왕은 왕21년(681辛巳)6月에 의상대사를 불러 말했다.
―태평세월이 계속되면 무인의 자손들도 참검을 쓰지못할 것이니 오랫 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왜인들이 또 언제 침입해올지 모르는바 그때는 어떻게 할것인가. 지금 東海海邊에 鎭國寺를 세우고 있으나 짐의죽음도 가까워오니 짐이 없도라도 진국사는 기필 완성할 것이고 짐이 동해의 용이 될 수만 있다면 왜적을 막고 이나라 백성들의 태평성세가 되도록 하겠거늘 용이 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에 의상대사는 용이 비록 조화불칙(造化不測)의 재주를 가졌다 해도 미물(微物)에 불과한것인즉 왕이 어찌 미물이 될려고 하나이까
한즉 왕이 말하되 미물이라도 용만되어 국토를 방위할 수 있다면 좋다고 하는지라 의상대사는 할 수 없이 지세(地勢)에 밝은 明知大德을 불러 물으면 대답이 있을것이라고 했다. 얼마후 입궐한 명지대덕은 시체가 용으로 화하는 지세가 있다고 말하며 태자(政明)을 불러 달라 말했다. 政明太子가 나타나자 명지대덕은 태자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승하하시면 내가 정하는 지점에 곧 장례를 지내고 3백일이 되면 용이된다고 일렀다.
그리고 그지세의 곳은 곡령하활상(鵠嶺下活峠)라고 말했다. 왕은 태자와 서불감, 소지후, 진복(舒弗邯,蘇祗候,眞福)등을 명지대덕과 함께 현지를 보게했는데 이를 답사하고 돌아온 명지대덕은 시화위룡지지(屍化爲龍之地)라고 이육화룡(以肉化龍)이며 이골화룡(以骨化龍)이 아니므로 뼈는 남는다고 했다.
왕은 7월1일 묘시(卯時)에 승하했다. 조정은 명지의 지시에 따라 즉일 장지의 땅을 팠다. 명지의 말대로 지하에 큰 구멍이 있었는데 왕의 체백(體魄〓屍體)을 구멍 위 중간에 걸고 장례를 마친다음 武士 3百名으로 경비하게 하였으며 왕의 채백을 구멍위에 걸었다 하여 괘릉(掛陵)이라 했다.
그런데 성용(成龍)이 된 후 신무왕 2년(682壬午)8월에 문무대왕이 평소에 정해놓은 묘지(墓地)로 이장(移葬)했다.
※신무왕편「世界에서 하나인 수장릉(水葬陵)參照」
원성왕은 생존시에 문무대왕의 治積을 앙모(仰慕)하였으므로 서기798년(戊寅) 12월29일에 붕어(崩御)함에 유조(遺詔)에 따라 소장(燒葬)한 후 유골은 문무대왕의 처음 장지인 괘릉에 안장하였다.
◆ 渤海國의 征唐計劃과 新羅의 三國統一
당나라는 고구려의 항복을 받은 후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설인귀를 군장(軍將〓駐屯軍司令官겸 軍政長官) 으로 하여 다스리게 하고 백제는 유인궤(劉仁軌)로 하여금 수비케하는등 고구려와 백제를 당나라의 永久領土化 하려는 생각이며 뿐만 아니라 기회를 보아 신라도 고구려나 백제처럼 점령하려는 기색이 분명했다. 그러나 왕은 그것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고는 당나라의 조공을 계속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경계하면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지음, 고구려의 대조영(大祚榮)이 만주에서 발해국(渤海國)을 세운후 당을 정벌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치므로서 교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나라일을 허술히하고 향락에 침몰하는 경향이 짙어지므로써 국기(國紀)가 문란했던 것이다. 당나라 국내사정이 이러한 틈을 타서 발해국이 당을 정벌해 보겠다는 생각을 낸 것이다.
당황한 당은 당군의 주력부대가 백제와 고구려의 점령군으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해외 주둔군을 본국으로 회군케 하지 않을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의 주류당군(駐留唐軍)이 철수하니 신라군이 이에 代置 됨으로써 신라의 三國統一이 위루어진 것이다.
◆ 車得宰相과 州吏安吉
文武王 때의 일화.
왕은 서재(庶才)인 車得에게 제상을 명했다. 차득은 자신이 제상의 자리에 않기 전에 전국을 순시하여 자세한 民情을 시찰할 필요가 있다하여 국내 각 州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는 장삼을 걸치고 중을 가장하여 비파를 들고 居士의 모습으로 서울을 떠나 하실라주(강릉) 牛首州(春川) 北原州(原州)등을 거쳐 武珍州에 도착하여 촌락을 순회 했는데 州吏 安吉이라는 자가 車得公이 보통사람의 아님을 눈치채리고 그를 집으로 안내하여 극진한 대접을 했다.
그리고 밤에는 妻妾의 한사람을 차득 침실에 들어가게 하여 함께 밤을 세우도록 했다.그런데 안길은 자기 처첩 세사람에게 居士손님과 동침하는 사람을 자기가 평생을 같이 해로(偕老)하겠다고 말했다.
이말을 들은 두 번째 처는 당신과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외관 남성과 동침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첫 번째 처가 이를 승낙하여 그날밤 차득공의 침실에 들어간 것이다. 이튼날거사는 이 집을 떠나면서 나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며 집은 皇龍寺와 皇星寺중간에 있고 이름은 「단오」라 한다. 주인이 서울에 가는 길이 있으면 찾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얼마후 안길은 10명의 州吏들과 함께 서울에 머물게되었다. 당시 재상의 호위병은 각주에서 10명씩 선발하여 담당케 하고 있는데 안길이 여기에 선발되어 上京한 것이다.
아니은 상경하자 황룡사와 황성사의 중간에서 「단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러한 집도 없었고 그러한 사람도 없었다. 단지 있는 것은 대궐(大闕)이 있을뿐이다. 그러자 한 노옹(老翁)이 나타남으로 그 노옹에게 단오의 집을 물었다. 노옹은 생각하더니 그는 바로 차득재상을 말함이오. 어떠한 사연이 있는가를 물었다. 안길이 사연을 말하?
車得宰相과 州吏安吉
文武王 때의 일화.
왕은 서재(庶才)인 車得에게 제상을 명했다. 차득은 자신이 제상의 자리에 않기 전에 전국을 순시하여 자세한 民情을 시찰할 필요가 있다하여 국내 각 州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는 장삼을 걸치고 중을 가장하여 비파를 들고 居士의 모습으로 서울을 떠나 하실라주(강릉) 牛首州(春川) 北原州(原州)등을 거쳐 武珍州에 도착하여 촌락을 순회 했는데 州吏 安吉이라는 자가 車得公이 보통사람의 아님을 눈치채리고 그를 집으로 안내하여 극진한 대접을 했다.
그리고 밤에는 妻妾의 한사람을 차득 침실에 들어가게 하여 함께 밤을 세우도록 했다.그런데 안길은 자기 처첩 세사람에게 居士손님과 동침하는 사람을 자기가 평생을 같이 해로(偕老)하겠다고 말했다.
이말을 들은 두 번째 처는 당신과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외관 남성과 동침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첫 번째 처가 이를 승낙하여 그날밤 차득공의 침실에 들어간 것이다. 이튼날거사는 이 집을 떠나면서 나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며 집은 皇龍寺와 皇星寺중간에 있고 이름은 「단오」라 한다. 주인이 서울에 가는 길이 있으면 찾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얼마후 안길은 10명의 州吏들과 함께 서울에 머물게되었다. 당시 재상의 호위병은 각주에서 10명씩 선발하여 담당케 하고 있는데 안길이 여기에 선발되어 上京한 것이다.
아니은 상경하자 황룡사와 황성사의 중간에서 「단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러한 집도 없었고 그러한 사람도 없었다. 단지 있는 것은 대궐(大闕)이 있을뿐이다. 그러자 한 노옹(老翁)이 나타남으로 그 노옹에게 단오의 집을 물었다. 노옹은 생각하더니 그는 바로 차득재상을 말함이오. 어떠한 사연이 있는가를 물었다. 안길이 사연을 말하여 노옹은 그렇다고 궁궐서쪽에 있는 귀정문에 가서 성명을 말하면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이렇게 안길은 궁궐을 들어갈 수 있엇는데 안길은 본 차득재상은 크게 반겨하며 떡 50가지가 나오는 큰 잔치를 베풀어 위로를 했다. 차득재상은 안길의 충성을 왕에게 고하고 성부산하(星浮山下)의 땅을 그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정해주기도했다. 산하의 밭은 30마로 종자 3석을 뿌리는 곳인데 이 밭이 풍작이 되면 무진주(武珍州〓光州)전채가 풍년이 들고 이 밭이 흉작이되면 무진주 전체가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