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건망증, 울화병을 고치는 자귀나무
글 _ 김승호 (광주 자연마을한의원 원장) / 사진 _ 권혁세 (야생화 사진작가)
지난해 여름 태풍 볼라벤이 휩쓸고 간 뒤 산에 올라가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큰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거나 몸통이 부러진 게 부지기수였다. 남쪽의 산들은 직격탄을 받아 산 일부가 폐허처럼 돼버린 곳도 있었다. 곳곳에서 쓰러진 거목들이 길을 막았다.
얼마나 바람이 셌으면 아름드리나무들이 견뎌내지 못한 걸까. 키 큰 소나무나 참나무의 뿌리들이 암반층 일부를 움켜쥔 채 훌러덩 나자빠진 참상을 보고는 대자연의 거대한 힘에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 더러 눈에 띄는 귀한 나무들은 내가 심은 것이나 되는 것처럼 아까웠다.
천태산 뒷자락의 커다란 자귀나무 한 그루도 그 해 볼라벤의 강 펀치를 못 이기
고 허리가 꺾어진 채 쓰러져버렸다. 소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경우 태풍 득을 봤다고 해야 할까. 쓰러진 나무에겐 야박하지만 뜬금없는 횡재수라고 해야 할까. 안 그래도 약재로 쓸 합환피(合歡皮) 곧 자귀나무 껍질이 아쉬웠다. 한의원에 들어오는 제약업체의 수입 합환피는 약재로 쓰기엔 질이 너무 떨어졌다.
자귀나무같이 수피를 약재로 쓰는 것은 아무래도 나무가 나이를 좀 먹어야 한다. 그래야 기미(氣味)가 제대로 난다. 막 벗겨낸, 싱싱한 자귀나무의 껍질은 냄새가 향긋하다. 맛을 보면 혀가 조금 아릿해 온다. 탄닌과 사포닌이 있어 살짝 떫은맛이 단맛과 콩과 식물 특유의 콩 비린내와 어우러지는데, 씹을수록 그 맛이 싫지 않다. 자귀나무 껍질은 그런 기미(氣味)를 가지고서 불안과 건망, 불면, 우울, 분노 등 사람의 어지러운 마음을 풀어헤쳐 편안하게 만든다. 심장과 비장을 조화시켜 정신과의 뭇 질환을 다스리는 안신약(安神藥)이 된다.
약업사의 합환피는 수피의 두께도 실망스럽지만, 우리나라 산야에서 나는 이 합환피의 맛이 도대체 안 난다. 그래서 위품(僞品)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다고 생나무 껍질을 함부로 벗길 수는 없었다. 볼라벤 덕에 필자는 수년을 쓸 보물 같은 합환피(자귀나무 껍질)를 공으로 얻게 됐다. 물론 그 두꺼운 수피를 벗기느라 한나절을 낑낑댔지만.
자귀나무는 아시아가 원산지인 콩과 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선 황해도 이남의 따뜻한 곳에서 흔히 자란다. 깃털 같은 잎사귀 생김새가 인상적인데, 살짝 건들면 오므라드는 미모사의 잎을 크게 확대해 놓은 것 같다. 『본초강목』 등 옛 본초서에는 ‘잎이 주엽나무(?莢)나 회화나무(槐) 비슷한데 아주 잘고 빽빽이 나며 서로 마주 난다. 그 잎이 저녁이면 맞붙기 때문에 합혼(合昏)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자귀나무의 마주 보기로 난 작은 잎들은 낮에는 활짝 펴지지만, 밤이 되면 마주 보는 잎을 합쳐 애인처럼 끌어안고 잠을 잔다. 미모사처럼 밤이 되면 잎이 닫히고 잎자루는 밑으로 처지는 수면운동을 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자귀나무를 ‘미모사 트리’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네무노끼(ねむの木)’라고 부르는데 ‘네무’는 잠 또는 수면(眠)을 뜻한다. 말 그대로 ‘잠자는 나무’라는 의미다.
자귀나무의 이런 수면운동은 잎자루에 있는 엽침 세포에서 수분이 일시적으로 빠져나오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지만, 옛사람들은 이를 보고 재미나게 나무의 이름을 붙였다. 합환수(合歡樹) 혹은 합혼수(合昏樹)가 그것이다. 생각에 따라 적잖이 야하기도 한 표현이다.
밤이 되어 어두워지면 남녀가 합해지는 것은 기쁨을 나누는 일이어서 이를 ‘합환’이라고 한다. 전통 혼례 때 신랑 신부가 서로 잔을 바꾸어 마시는 술을 합환주(合歡酒)라고 했던 걸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게 밤이 되면 상열지사를 하듯 합쳐지니 합환 또는 합혼수다. 같은 의미로 야합수(夜合樹)라고도 했다.
유정수(有情樹)라는 이름도 있다. 각별한 정이 있다는 뜻이다. 두 남녀가 기쁨을 나누면 잠시나마 세상의 근심을 잊게 된다고 해서 망우수(忘憂樹)라고도 했다. 또 이파리 생김새가 여인이 허리에 두른 푸른 치마 같아 보인다고 해서 청상(靑裳)이라고도 했다. 맹갈, 오뢰수, 황혼목이라는 이름도 있다. 좌귀목(佐歸木)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쓰는 자귀나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경 자귀나무는 분홍빛과 흰빛이 어우러진 독특한 꽃을 피운다. 예쁜 색실이 모여 부챗살처럼 피는 이 꽃을 합환화(合歡花)라고 하는데, 꽃말이 환희, 사랑, 애정이다. 그런 꽃말과 어울리게 꽃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미롭다. 산야와 밭둑, 들판에 자귀나무 꽃이 피면 달콤한 꽃향기가 주위의 대기를 은은히 물들인다. 이 합환화의 향을 모아서 향수를 만들 수 있다면, 잘은 모르지만, 프랑스산 샤넬이나 크리스찬 디올의 고급 향수가 조금도 부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의보감』을 보면 자귀나무 껍질 곧 합환피(合歡皮)는 ‘성질이 한열(寒熱)에 치우치지 않고 평(平)하며 맛이 달고 독이 없다.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과 뜻(心志)을 안정시키며 근심을 없애고 즐겁게 한다’고 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합환피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편안히 하는 안신약(安神藥)이다. 주로 심장의 기운이 약한 심기허와 심양허, 또 심장의 혈액이 부족해서 오는 심혈허나 심음허 등에 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불안증과 우울증과 건망증, 밤새도록 잠을 못 자거나 꿈이 많은 실면(失眠)과 다몽(多夢), 가슴이 뜨겁고 답답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번조(煩燥)와 이유 없이 화가 치미는 분노(忿怒), 심장의 두근거림을 자각적으로 느끼는 동계(動悸)와 정충(??)의 증상이다. 이런 증상들에 합환피를 쓴다.
요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병이 많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장의 기운이 손상되어 생긴 마음병들이다. 필자의 어설픈 진단이지만 IMF 이후 펼쳐진 신자유주의의 세상이 힐링에 목마르게 만들어 버렸다. 이런 질환들은 병원에서도 치유가 안 된다. 무지막지한 화학적 합성 약물을 투여하지만 환자들의 고통은 종식되기 어렵다. 그래서 심정적으로 병원의 합성 약물을 거부하는 경계선상의 환자들은 멘토를 찾아 나서게 된다. 마침내 웰빙이 끝나고 힐링이 트렌드가 됐다. 그런데 힐링의 시효가 끝나면 그 후엔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합환피가 치료하는 위의 정신과 질환들은 심장의 질병이다. 그러나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심장질환과는 다르다. 오해하시면 안 된다. 양방에선 대부분 정신과 질환이다. 그러나 한의학에선 이를 심장의 문제로 생각한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더니 심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시는 분들은 이런 한의학의 진단이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겹치는 부분도 있긴 하다. 동계나 정충은 양의학에서도 부정맥으로 진단할 수 있겠다. 어쨌든 양방과 한방의 심장은 단어만 같다.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심장뿐만 아니라 간(肝)의 문제나 담(痰)으로 인한 정신적 질환도 있지만, 합환피는 심장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벡터가 심장이다. 그래서 불안한 정신을 안정시키고 답답한 울증을 푼다. 이를 안신해울(安神解鬱)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장이 탈이 나 생긴 분노와 억울, 우울증과 건망증을 치료하는 영약이 된다.
분노, 울분, 노여움, 부애는 모두 화의 다른 말이다. 틱낫한 스님의 책이 아니어도 화는 큰 병이다. 화는 육체와 영혼을 망가뜨린다. 합환피는 이 화, 분(忿)과 노(怒)를 힐링하는 힘이 있다. 진(晉)나라의 최표(崔豹)가 쓴 『고금주』에는 “사람이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이를 가라앉히도록 청상을 주었는데 곧 자귀나무다. 뜰에 자귀나무를 심으면 사람이 성을 내지 않게 된다”고 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혜강은 『양생론』에서 ‘자귀나무는 화를 가라앉히고(?忿), 원추리는 근심을 잊게 한다(忘憂)’라고 했다.
이런 질환들을 치료하기 위해 어떻게 합환피를 써야 할까. 그냥 합환피만 단독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큰 효과를 내기 어렵다. 원론적으론 심기허증이나 심양허증에 합환피 4∼6g을 인삼과 대추, 감초, 진피, 소엽 등과 함께 넣어서 쓴다. 심혈허나 음허증에는 작약과 황기, 당귀를 더 가미한다. 진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해야겠다.
합환피는 종기를 가라앉히고(消腫止痛), 타박상을 치료하며, 손상된 근육을 살리고 뼈를 잇는(續筋接骨) 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합환피의 힘이 그다지 세지 않아 다량으로 써야 효과를 볼 수 있다.
합환피만 약으로 쓰는 건 아니다. 자귀나무 꽃 곧 합환화는 부부 금실의 묘약(妙藥)으로 알려진다. 옛이야기 한 토막이다. 중국에 두고(杜羔)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조씨라는 현처가 있었는데 조씨는 매년 자귀나무의 꽃을 따다 말려서 베개 속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남편이 화를 내거나 심사가 불편한 일이 생기면 곧 그 꽃을 조금씩 꺼내어 술에 넣어서 마시게 했다. 합환화 역시 마음을 편케 하는 안신(安神)의 효능이 있어서 술을 마시면 평온을 되찾았다. 자연히 부부간의 금실이 남달랐다.
요순시대의 성군이었던 순(舜)임금이 창오라는 곳에서 죽자 두 아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도 후난성 상강에서 그 소식을 듣고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 죽은 두 여인의 영혼이 자귀나무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 때문인지 자귀나무를 애정목(愛情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엔 집 마당에 자귀나무를 심으면 가정의 불화가 없어지고 부부 사이가 화목해진다 하여 즐겨 심기도 했다. 자귀나무를 남도에선 ‘소쌀나무’ 또는 ‘소쌀밥나무’라고도 하는데 소가 즐겨 먹는 목초이기 때문이다. 소쌀나무를 먹는 소는 살도 잘 찌고 털이 윤택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는 전라남도 목포지방의 잎이 크고 엉성하게 나는 왕자귀나무를 이 지역 사람들이 소쌀나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