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7;37-44.2. 목마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2016.12.04
지난주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가지고 2016년 대강절을 맞이하여 주님을 사모하면서 지금 이 시기에, 이 국난의 세월에 우리에게 무엇이 넘쳐야 할까요?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분명 한때는 아름다웠고, 한때는 총기가 넘쳤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 모습, 이 모양이 되었을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분명 피부는 늙어가고 주름은 져 가는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성경도 말씀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겉 사람은 후패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가 감히 따라올 수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는 노년의 아름다움, 나이 들어감의 매력과 인격과 믿음과 신앙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도다. 라고 합니다. 이 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바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구가하지 못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일까요? 왜 영향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요?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요? 한국의 민속 가요 중에 홀로 아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리랑의 옛 가사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을 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엘로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아리랑을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알이랑 고개를 넘어간다.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 여기서 고개를 넘어 간다 는 뜻은 우리 민족이 먼 곳에서 우리나라로 오기까지,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이 시간 이 자리에 있기까지 첩첩 산 고개를 넘고 넘어 하나님과 함께 왔다는 뜻입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 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간 사람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는 뜻입니다. 여러분, 의미가 있지요? 홀로 아리랑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맞으니, 독도(친구)야, 간밤에 잘 잤느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로 동해 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여러분, 2016년 12월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망망대해 바다 가운데 홀로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홀로 아리랑의 가사가 너와 나를 안아 줍니다. 여러분, 주안에서 힘내십시오, 흐르는 눈물을 삼키더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됩니다. 세상이 무어러 하더라도 울 비전교회 교우들은 주님과 함께 가다가 힘들면 쉬었다 가더라도 서로서로 손잡고 가고, 같이 갑시다. 아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종교학 시험이 있었습니다. 시험문제는 가나 혼인잔칫집에서 있었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기적을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답지를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험감독 교수의 눈에 아직 한 글자도 적지 않고 창밖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한 학생을 발견했습니다. 교수는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왜 답안을 작성하지 않나?”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쓸 말이 없습니다.” 교수는 어이가 없었지만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시험이 끝나기 5분 전까지 그는 미동도 않은 채, 창밖만 바라봅니다. 드디어 교수와 그 학생만 남았습니다. 교수는 학생에게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단 한 줄이라도 쓴다면 낙제는 없을 걸세.” 학생이 펜을 들어 몇 자 쓰고는 시험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 이 답안으로 최우수 학점을 받은 학생이 바로, 후에 영국의 위대한 시인이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입니다.
여러분, 잔칫집에 포도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원래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주께서 매우 좋은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새 시대를 여시는 주님의 강력한 선포이자 질적인 변화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요2;9에 이 비밀은 그 물을 길어 온 하인들만 알았습니다. 착하고 지혜로운 종은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립니다. 성찬에서 포도주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신자들의 흰옷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빨아졌으며,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 나라의 일꾼입니다. “일꾼”이란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종”, “시중드는 자”, “수종자”라는 의미이며, “집사” 역시 “디아코노스”로서 식탁이나 다른 천한 일에 “시중드는 사람”, 먼지를 뒤집어쓰고 “청소하는 사람, “선생”, “목사”를 말합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두 번째 대강절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습니까? 그렇게 인정이 되시고 믿음이 갑니까?
1. 오늘 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교회가 교회입니까? 내가 사람입니까? 내가 직분자입니까? 내가 성도입니까? 내가 주님의 사람입니까? 현재의 교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눈감고 귀 막으려 하지 않습니까? 움직이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신앙이란 이름으로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중심을 추구하고, 들어야 할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까? 성공만이 참된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에서 시작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예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갈릴리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변두리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데, 도대체 누구의 목소리를 듣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현실 앞에서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나, 자신입니까?” 진리 아닌 것이 진리의 위치에 서 있고, 하나님 아닌 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대해 “아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는데, 비록 소수로 서는 것이 외롭고 서글프지만, 거룩한 신앙의 선조들처럼 스스로 광야로 걸어가야 합니다. 메마르고 결핍이 같이 존재하는 광야이지만, 경이로운 주님과의 만남과 은혜와 소통이 있는 믿음의 광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이고 이 사람이 주님의 사람입니까?”라는 시대의 질문 앞에 “이것이 우리 교회이고 저입니다.”라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소통하고, 주님 안에서 함께 부르심의 길을 가는 교회의 모습이고,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 배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는 사람의 삶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 37-39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주님께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돈 없이 값없이 마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그 생수가 바로 ‘성령님’입니다. 목마름을 해갈시키고, 상쇄시킬 생수로 비유된 성령님이 왜 인간의 심연인 배에서부터 넘쳐 나와야 하는지는 지난주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가장 문제 있는 그곳,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화장하고, 치장하고, 위장하고, 변장하는 것으로써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목마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목마른 사람들 아닙니까! 오늘 이 시간 대강절에 주님을 사모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잔치에 참석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줄은 알았지 포도주가 떨어진 줄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 갈증을 느끼면서도 니고데모처럼 한밤중이라도 찾아올 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애타는 목마름을 느끼면서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주여, 영생하는 물을 내게도 주옵소서”라고 간구할 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찾아가지도 못하고, 간구하지도 못하게 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38절을 역으로 묵상하면, 그 이유에 가까이 갑니다. 그것은 ‘주님을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마침표가 아니라 시작점입니다. 욕망과 탐욕의 중심부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 역시 신앙의 시작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생수가 넘쳐나고, 성령님이 내 생명이 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것이 내, 자신을 증거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라는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 고래는 시계가 흐린 바다 속에서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알립니다, 상황을 알림으로 같은 무리와 소통을 합니다. 개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학물질을 쏟아냄으로써 함께 의사결정하고, 함께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그리스도인 됨을 나타내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을 때에 우리 욕망의 심연에서부터 솟아나오는 성령님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속에는 생수가 솟아나고 있습니까? 나는 그 생수에 젖어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성령님으로 살고, 주님과 소통을 하고, 주님으로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질문하고 답한 이 자기점검표 앞에서 우리는 누구를 향하여 외쳐야 할까요? 누구부터 변화되어야 할까요? 여러분, ‘정신의 종속만큼 강한 지배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정신이 종속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떤 누군가 기도해 봤는데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전에 맞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 독립된 존재로서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영으로 주님과 교감을 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단하게 이루어야 할 개혁이 있다면, 우리에게 임하신 거룩한 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개별적, 독립적 영적존재'로서 영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시끄럽고도 복잡했던 날을 뒤로 하고 주님 앞에 고요히 머리 숙이는 이날, 숨이 차오르던 시간들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바쁜 것을 핑계로 자주 찾지 못해서 서먹해진 영혼과도 소통을 하고 어루만져 주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흩어졌던 믿음의 마음을 모으고, 감각적 쾌락에 찌든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손길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사물에 대해 닫았던 창을 열고 눈을 맞추고 소리를 맞추고 믿음의 마음을 맞추는 참된 소통의 삶이어야 합니다. 개미에도 훨씬 못 미치는 감각과 의사소통 능력으로 진리를 산다고, 진리의 길을 간다고 자부했던 교만함과 어리석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한 때 물이 흐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마른 천으로 사는 메마른 영혼의 소유자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생명수에 연결이 된 항상 생명의 생수가 흐르는 천으로 살아야 합니다. 몇 마디 말로, 믿어온 시간으로 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에서부터 성령의 생수가 흐르는 것으로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나 한 때 그렇게 살았던 사람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으로, 오늘 이 것을 증명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미혹의 영에 휘둘리지 않고, 내 자신을 진리의 영으로 흔들고, 깨우고, 바꾸어서 주님과 소통을 하고, 살아가는 거룩한 무리, 소수자,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2016년 가장 뜻 깊은 대강절과 복된 시간이 되기 위해서 이런 삶을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면서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함께 가는 울 비전교회 성도,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오늘 본문 마지막에 중요한 표현이 등장을 하는데 44절에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해야 세상 사람들이 사탄과 어두움의 세력이 저와 여러분에게 손을 대지 못할까요? 여러분, 항상 때와 기다림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어렵고 힘든 점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손꼽히는 것은 아마도 기다림입니다. 오랜 시간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이 더디 이뤄질 때 계속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시간표(timetable)가 우리 손 안에 있어서 그 순서대로 체크하면서 사는 것이라면 이처럼 힘들거나 힘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재와 실상은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정 자체가 급합니다. 어느 때는 우리가 경험해 온 하나님이 좀처럼 움직이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우리는 빠름을 원하는데 주님께서는 바름을 원하시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빠름과 바름은 분명 자음 하나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과 본질은 확연히 다릅니다. 그 다름으로 인하여 늘 믿음의 저항과 신앙의 갈등이 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무엇이 되고, 단숨에 모든 것이 바뀌어 지는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도 느리게, 그리고 조금씩 일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의를 일삼고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의 속도는 우리를 추월하여 엄청난 속도로 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100미터 출발선에서 우리는 나막신이나 고무신을 신고 긴장한 채 스타트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말을 탄 채 여유 있게 서 있기도 합니다. 심판의 제지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더디심에 대하여 지루해 하고 못 견디다가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기다림을 견디지 못해서 이집트 여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품에 안았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40년을 이집트 왕궁에서 왕의 교육을 받고 성장을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니 요게벳을 통하여 히브리 민족의 신앙교육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적인 지식으로나 신앙적인 지식에서 최고점에 이른 상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당장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매우 궁금하고 답답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학문탐구와 지위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는데 사용되기를 간절히 추구하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자기 생존과 생업에 급급해 있을 때 모세는 그 시대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란 이 백성을 구출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모세는 실행에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모세가 시도한 자기중심의 하나님의 일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몸을 던져 헌신하는 사람들을 좌절케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 합니다. 행 7:25에 “그(모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지 못 하였더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가 상상하던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라면 마땅히 인식을 하고, 함께 뜻을 같이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 반대였습니다. 최고의 학문과 제왕적 권력, 갈고 닦은 언변과 설득 능력, 그리고 지도력을 겸비한 모세에게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히 준비되었고 믿고 행동했는데, 모세는 그것으로 인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미디안 광야에서 잊혀진 사람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40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날카롭던 학문의 실력도 녹이 쓸었고, 빛나던 재능도, 의욕도 모두 상실되어 무명의 몇 마리 안되는 양을 치는 사람으로 지내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내 백성을 구원하라”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40년 전에 시도할 때는 도와주시지 않더니 이제 와서 그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왜 그때는 실패를 했고, 이번은 성공한 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이며, 다른 하나는 그 때에 가장 적합하도록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의지, 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뜻 앞에서 엎드릴 수 있고, 그 뜻에 따를 수 있도록 준비된 그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고 그 뜻에 따를 수 있는 함께 가고 손 잡고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1. 하늘의 때를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지개를 보기원한다면 먼저 비가 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가 일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고, 통과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때와 달리 하나하나의 퍼즐조각이 맞춰져 가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새인 알바트로스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바보새’(mollymark)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명은 60년으로 한번 짝을 이루면 평생 같이 살아가는 신비스럽고도 엉뚱한 새입니다. 날개를 펴면 3.5m에 이르는 지나치게 큰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때로는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큰 물갈퀴로 인해 걷거나 뛰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사람들이 돌을 던져도 날아갈 줄 모르고 뒤뚱뒤뚱 오리처럼 도망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한번 날았다 착륙하면 온몸이 진흙으로 뒤범벅되거나 상처를 입는 바보 새입니다. 사람들에게 쉽게 잡혀서 멸종위기까지 내몰린 바보 새, 그래서 세계자연보전연맹에서 취약 종으로 분류된 국제 보호 새입니다. 이것이 알바트로스가 오랜 시간동안 바보 새로 불려 진 이유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폭풍이 몰려오고 모든 새들이 바람을 피해 숨을 때, 바보 새는 이름값을 하느라 어딘가로 피신하지 않고 바보처럼 바람과 맞서 절벽에 섭니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그 바보 새는 갑자기 긴 날개를 꿈틀거리며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바람에 자신의 몸을 던지고 절벽에서 뛰어 내립니다. 모든 새들이 숨죽이고 있을 때 그는 바보처럼 엉뚱하게 바람 앞에 대면합니다. 하지만, 폭풍우 몰아치는 그 순간이 바보 새가 비상할 수 있는 절호의 때라는 것을 다른 새들은 모릅니다. 바보 새는 마침내 비상을 하게 되고 최대 6일 동안 한 번의 날갯짓도 없이 하늘에서 계속 날 수 있고, 두 달 여정으로 지구 한 바퀴를 비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 그리고 가장 멀리 지구를 횡단할 수 있는 바보 새. 자신의 힘이 아니라 바람의 힘을 이용해 비행하는 새,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 새를 ‘신천 웅’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늘에 몸을 맡기고 거대한 몸짓으로 넉넉한 여유를 즐기는 새라는 의미입니다. 땅에서는 사람들과 작은 새들에게 놀림을 당하지만, 하늘에서 만큼은 비상할 때 거대한 바람에 자신의 몸을 던지며 용기 있게 절벽으로 뛰어 내리는 활공의 명수입니다. 사실 이 새는 날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날 수 있는 시간이 오지 않았기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긴 기다림의 시간, 그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바람이 몰아쳐 올 때 가장 높이 나는 새, 가장 멀리 나는 새의 모습으로 자신의 실재, 그 존재를 증명합니다. 날아올라야 할 그 때를 알고 있었기에 폭풍 앞에서도 당당하게 대면했습니다. 모두들 위기라고 하는 때, 그것을 오히려 가장 적기로 알고 그때를 위하여 몸을 만드는 주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를 알고 때를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닌 바람의 힘으로 나는 알바트로스처럼 하늘의 때를 사는 사람, 그 바보 같은 사람을 주님은 찾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많이 흉용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생산지표가 떨어지고, 소비지표, 수출지표 바닥으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경제성장률은 겨우 1% 바닥을 달리고 있는 이 때. 미국 발 폭풍우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믿음의 사람이 세상과 구분이 가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임계점에 도달해 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고, 절망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힘이 아닌 하늘의 힘으로 비상하는 알바트로스의 때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자각을 한다면, 우리 역시 폭풍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 자신을 내어 던질 수가 있습니다. 역사의 회오리 앞에서도 일하고 계신 주님의 그 손길을 믿으며 절벽 위에서 믿음의 날개를 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시지요! 폭풍 앞에 서 계시지요! 세상의 바다 가운데 거센 바람을 맞고 있지요? 2016년 12월 첫 주일, 대강절 두 째 주일을 맞이해서 이런 때를 알고 뛰어 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그러면 손을 대는 자가 없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막절 마지막 날에 제사장들이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성전 제단에 붓는 예식을 행할 때에 예수님께서 서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과 예수님의 행적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 선지자인가? 혹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미혹자인가?’라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을 합니다. 물론 그때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난세였고, 여기저기서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이들의 미혹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 사회 지배계층이었던 많은 지도자들의 반응은 시대의 때와 그 흐름에 냉담했습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기존의 질서가 뒤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막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나라를 위하고, 예배 공동체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들 이권을 챙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과 진리의 편이 아닌 힘 있는 쪽에 줄을 서서 비선실세로 활약하며 득세했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흔들 싹을 자름으로써 체제를 유지해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 제거 대상 중에 가장 핵심적 인물이 바로 갈릴리 예수님입니다. 그 쟁론의 현장에 예수님을 잡아서 대제사장에게로 데려가기 위하여 사주를 받고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고 온 성전 경비대원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슬 퍼런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명령을 받았기에 적법한 법집행이라며 예수님을 체포해서 압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44절은 그 어떤 이들도 예수님에게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고 증거 합니다. 여러분, 왜 손을 대는 자, 체포하는 자가 없었을까요? 물론 분위기에 압도되고,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에 눌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명확한 이유는 아직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때는 초막절이 아닌 4달 후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 하시는 때를 의미합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앞에 7:33 - 34을 통하여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준비하신 예수님의 때가 있었기에 주님을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알고 하나님의 때를 사셨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폭풍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다가올 주님의 때를 준비하며 담담하게 주어진 그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복 주실 그 날, 다가올 그 날을 준비하며 손잡고 가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2-3. 그러면 기한과 때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참회록인 전도서에 때에 대한 세밀한 언급이 있습니다. 전 3:1-8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여러분, 모든 일에 정해진 '기한'이 있고, 만사에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를 안심케 하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잘 나갈 때 교만하지 않고 스스로 근신케 합니다. 실패했을 때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섬을 준비케 합니다. 병들고 아플 때 낙망하지 않고 그 아픔의 시기를 발판삼아 반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러분, 기한과 때는 조바심을 가진 우리로 하여금 기다림을 배우게 합니다. 한 번 뿐인 이 땅에서의 삶을 있어야 될 시간, 없어야 할 시간으로 분류한 채 왜곡된 삶을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때와 계획 속에 포함된 의미가 있는 시간이요, 삶이라 믿기에 그 삶을 마주하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과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하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도 모두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 때를 최선을 다해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해진 기한과 정해진 때를 우리 자신에게 자문케 합니다. 여러분, 정해진 생의 때,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시렵니까? 하나님의 때를 어떤 맘으로 기다립니까? 돌들이 소리치는 이 시대’를 어떤 모습으로 판단하십니까? 바람이 불고, 눈물이 납니다. 눈이 시리고, 가슴이 시립니다. 언제 더 큰 바람이 불어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시기,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때, 기한 속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당당히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합니다. 바뀔 것 같지 않은 상황 앞에서 소망의 불을 끄지 않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환경과 현실 속에서도 잘못된 판단으로 결론을 내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아야 합니다, 우리 생각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바름으로 정확한 때에 다가오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가을이 오듯이, 아무리 울창한 나뭇잎이라도 차가운 가을바람에 붉게 날리어 겨울 나목으로 준비되듯이, 하나님의 때와 기한은 그렇게 준비되고 있음을 신뢰하게 하며, 시대를 알되 시류를 좇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알고, 그 때를 묵묵히 열어가는 사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면 막을 사람이 없고, 막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때를 살아가시는, 그런 복된 삶을 사시되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함께 가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