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재 문화방송 ‘정운영의 100분 토론’이란 프로그램에서 사회를 맡고 있는 경제학자 정운영씨는 ‘시지프의 언어’란 책에 수록된 한 칼럼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를 당해내지 못한 이유를 재미있게 소개한 적이 있다.
조직과 자금면에서 1주일에 한번씩 ‘전당대회(예배)’를 열고 ‘당비(헌금)’를 갹출하는 기독교의 활동을 4년이나 5년에 한번씩 당대회를 열고 당비라는 개념조차 생소한 정치조직이 발치에서나마 따라가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1주일에 한 번씩이 아니라 매일, 그것도 네차례나 ‘새벽전당대회’를 여는 교회가 있다. 이 교회의 새벽기도회에는 평균 5000명의 교인이 모이는데 매년 3월과 9월에 한달동안 열리는 특별새벽집회에는 2만3000명이 넘는 교인들이 매일 다섯차례 열리는 새벽기도집회에 참석한다. 이 기간동안 이 교회 일대에는 몰려드는 승용차의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룬다.
서울 강동구 명일동에 있는 명성(明聲)교회. ‘명일동의 소리’라는 의미로 지어진 명성교회의 명성(名聲)은 이미 명일동의 경계를 넘어 한국 기독교계는 물론 해외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한국을 방문하면 명성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마치 ‘관광코스’처럼 되어 있다.
“수만명이 새벽기도집회에 참석한다더라”,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남자들이 워낙 많아 명성교회 일대는 출근 때 대기업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다”,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마치 거대한 규모의 군대가 지나가면서 내는 군화소리 같다”는 등의 소문을 듣고 명성교회를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4월8일 토요일 오전 5시50분경. 명성교회 본당 앞 주차장에는 수백 대의 승용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중년으로 보이는 남성들이 정장을 한 채 6시부터 시작하는 제3부 새벽기도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 본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교회 본당 1층 좌석의 약 3분의 2가 순식간에 채워졌다. 눈 짐작으로는 2000명이 넘어 보였지만 교회직원이 집계한 결과는 1350명이었다. 모두 30~50대 사이의 중년 남성들이었다. 여성들과 잠없는 노인들만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진 새벽기도회에 대한 통념이 부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 중년 남성은 대부분 금요일에 직장동료나 동창들과 함께 술을 곁들인 회식을 밤늦게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대개 늦잠을 자게 된다. 그런데 토요일 새벽에 정장을 한 채 단정하게 앉아 있는 이 중년 남성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무슨 매력에 이끌려 새벽 잠의 유혹도 뿌리치고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일까.
성경공부를 겸한 새벽기도집회는 무척 단순했다. 찬송―기도―성경봉독―설교 등으로 이어지는 예배의 기본 골격은 여느 교회나 똑같았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목사의 목소리는 평이한 대화체였고 설교내용도 무척 단순했다. 성경속에 감춰진 ‘오묘한 진리’를 설파한다든지 신도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사자후를 토할 것이라는 기대는 설 자리가 없었다.
3부 새벽기도회가 마친 직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한 교인에게 왜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는지 물어보았다. 자영업을 한다는 이창열씨(44)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는 것. 이씨는 87년 명성교회에 교인으로 등록해서 현재 집사를 맡고 있다.
오전 4시, 1부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한국바스프 인사팀장 이사 정원영씨의 대답도 이와 비슷했다. 정씨는 현재 명성교회 집사인데 명성교회와 가까운 고덕동에 살고 있다. 스포티한 옷차림이었는데 얼굴이 아주 밝아 보였다.
“대부분 교인들이 새벽기도집회에 참석하면 하루 일과가 잘 풀리고 참석하지 않으면 일이 꼬인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새벽에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을 하는 것과 새벽기도회 참석을 병행했는데 이제는 새벽기도회를 선택하게 됐어요. 새벽에 운동을 하면 몸이 가뿐하지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어제 회사에서 어려웠던 일, 속상했던 일들이 모두 풀려요. 하루 시작을 가뿐하게 합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새벽 4시에 왔지만 다른 요일에는 새벽 6시 예배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와 아침 먹고 출근하는 게 생활화됐습니다.”
단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구태여 명성교회에만 참석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유독 명성교회 새벽기도회에만 은혜를 가득 부어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교인들이 명성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이카시대가 열리기 이전에는 명성교회로부터 거리가 먼 곳에 사는 교인들 중에는 전날 밤에 미리 명성교회 부근의 여관에 묵었다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열성파’도 있었다.
현재 당회장인 김삼환(金森煥·55) 목사가 명성교회를 세운 것은 1980년 7월6일. 당시 명성교회는 홍우상가 2층 건물의 34평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20여 명의 교인이 참석해 예배를 드리는 개척교회에 불과했다. 명성교회 주변은 주택보다는 논과 밭이 더 많은 서울 동쪽의 변두리였는데 시내버스 500번의 종점이었다. 김목사는 이곳에서 버스기사와 안내양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중노동에 지친데다가 ‘나그네’처럼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인으로 정착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명일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명성교회 교인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교회를 세운지 3년 만에 출석 교인 수가 1500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연건평 627평의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 83년 겨울 크리스마스에 새 건물에서 성탄축하예배를 드렸다. 이로부터 4년후인 1987년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수가 4500명으로 늘어나 기존 교회 건물을 헐고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2년 뒤인 89년에 연건평 2684평에 지하 2층 지상 6층, 교회 본당 좌석수 4000석의 건물이 완공돼 그해 부활절예배는 신축 교회당에서 드렸다.
2000년 4월5일 현재 명성교회 교인으로 등록한 수는 5만5478명. 주일 낮예배에 참석하는 장년은 2만3000명이고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취학 이전의 어린이들과 초 중 고 대학생은 1만2000명으로 3만5000명의 교인들이 매주 모이는 셈이다. 주일 낮예배는 교회 본당에서 아침 7시30분부터 오후 4시40분까지 6차례 열리는데 매주 50명에서 90명 정도의 신입교인이 등록을 한다. 현재 주차장 규모는 800대이기 때문에 주차하지 못하고 교회 주변을 빙빙 돌다가 돌아가는 승용차들도 상당수 된다고 한다. 현재 교회 건물과 주차장의 크기로는 더 이상 교인들을 수용할 수 없는 포화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올해부터 명성교회는 새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동차 안 타고 교회오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영아부터 초·중·고·대학생 및 청년들은 샬롬교육관(연건평 270평), 은혜교육관(연건평 302평), 베들레헴의 집(1103평) 등에서 연령이나 학년을 나눠 3차례씩 총 45회의 예배를 드린다. 명성교회가 짧은 기간 동안에 이처럼 급성장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교회가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곳이라면 일반 음식점의 경우와 대비시켜 볼 수 있다. 한 음식점이 요리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 고객들이 몰려드는데 가장 먼저 음식점 외형과 분위기를 살펴보게 되고 음식점 안에 들어가 앉으면 종업원들의 서비스와 주방장의 요리 솜씨를 평가하게 된다. 고객들은 그 음식점에 서너번 다녀보고 음식이 입맛에 맞고 종업원들의 서비스가 좋고 음식점 분위기가 괜찮으면 단골이 되는 것이다. 교통도 좋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명성교회는 확실한 ‘단골’을 확보한 셈이다. 아무리 잘되는 음식점이라도 점심이나 저녁 한때 손님이 몰려들게 마련인데 명성교회는 매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교인들이 북적거린다.
명성교회 입지조건은 황금어장에 어선이 닻을 내린 격이다. 서울지하철 5호선 명일역에 내려 약 3분정도 걸어가면 명성교회가 보이는데 삼익아파트, 현대아파트 등 아파트숲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일요일 오전이면 인근 아파트에서 교회로 가는 교인들의 행렬이 줄지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교회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인근아파트 주민의 30~40%가 명성교회 교인이라고 한다.
아파트 주변에 교회가 너무 가까이 있으면 각종 종교행사 등으로 사생활이 침해받기 때문에 집값이 떨어져 주민들이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관공서로 각종 민원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명성교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명성교회 서무실에서 일하는 한 관계자의 말.
“애당초 명성교회가 먼저 들어서고 그 다음에 아파트가 들어섰으니까 주민들이 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인근 아파트의 주민이 대부분 명성교회 교인이고 이 지역 아파트 주민들이 집을 내놓으면 먼 곳에 사는 교인들이 서로 이사오려고 하기 때문에 집값이 떨어지지 않아요.”
명성교회를 처음 방문하면 주차장이 아파트와 연립주택, 그리고 단독주택과 인접해있어 어디까지 교회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애당초 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예상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넓혀간 것이기 때문에 교회 주차장이 서너곳에 산재해 있고 교회 본당과 멀리 떨어진 교육관도 있다. 도시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짜임새가 없어 보이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성역인 교회는 주거지와는 구분되는 경계선이 필요한 법인데 명성교회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구조가 역설적으로 교인들과 주민들의 생활공간을 겹치게 한다. 교회주차장은 새벽이나 저녁, 그리고 일요일에는 교인들이 이용하고 낮에는 주민들이 무료로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와 지역 주민을 갈라놓은 대문이나 담이 없기 때문에 지역 주민은 거리낌없이 교회로 접근할 수 있다.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명성교회 안과 밖에서는 남녀노소들이 끊임없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고 봉사활동을 한다.
명성교회 건물은 바깥에서 보면 건축미학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다. 음식점으로 말하면 안팎의 장식에 신경을 쓴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는 아니다. 설렁탕이나 냉면을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점 분위기가 짙다.
다만 뾰족한 고딕식 지붕에 있는 십자가 두 개가 인상적인데 구약의 히브리족 지도자 모세가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형상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김목사는 균형있는 신앙을 평소 강조하는데 이 두 개의 십자가는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 기도와 말씀, 이성적 신앙과 감성적 신앙 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김목사가 강조하는 균형된 신앙은 명성교회가 속한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분위기와도 일치한다. 한국 개신교내에는 수많은 교단이 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이 대형교단이고 나머지는 군소교단이다.
장로교는 크게 대한예수교 장로회(예장) 교단과 한국기독교 장로회(기장) 교단이 있는데 예장은 다시 통합, 합동, 고신으로 나눠진다. 교단의 교리나 사회 참여를 기준으로 볼 때 고신이 가장 보수적이고 다음이 합동이고 통합은 중도적이다. 기장은 가장 진보적이다. 교단 규모는 예장 통합이 가장 큰데 명성교회는 여기에 속한다. 서울 강북에 있는 영락교회와 새문안교회, 강남에 있는 소망교회도 예장 통합에 속한다.
명성교회 교인은 비교적 남성이 많고 연령층이 30~40대 중년층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교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이 느껴진다. 등록교인 5만5478명 중 남자는 2만5051명이고, 여자는 3만427명으로 성비가 1:1.2로 남녀 비율이 비슷하다.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여성 교인이 많은데 평균 70%수준으로 알려진다. 20대 이상의 연령층을 보면 40대가 등록교인의 25%를 차지해 가장 많고 30대가 16.3%로 다음으로 많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도 가장 활동이 많은 세대인데 교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한다.
대부분의 도시 교인은 익명성을 좋아해 조용히 예배만 드리는 스타일을 좋아한다. 예배에 ‘참여’하기 보다는 감동적인 영화 한편 감상하듯 분위기 좋은 교회안에서 ‘구경’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명성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생활중 한 부문에 참여하고 있었다.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주차장에서 주차정리를 하는 남성교인, 교회 본당 입구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안내하는 여성교인, 새벽기도회부터 저녁예배 때까지 설교전에 특별찬양을 하는 교인은 당장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분야에서 활동하는 교인도 많았다. 매주 수만 명의 교인이 쏟아내는 쓰레기를 깨끗하게 치우는 교인, 부활절을 앞두고 마련된 성화전시회에 전시할 성화를 그리기 위해 평일에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도 있다. 매주 금요일 오전에는 구역장들의 모임이 있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간식을 나눠먹는다. 매주 약 3000명이 참석하는데 이들이 먹는 음식들은 모두 교인들이 미리 집에서 준비해온다. 교인 1인당 10명이 먹을 분량을 교대로 준비해오는데 과일, 호박죽 등 다양하다.
명성교회 본당 안에는 오른쪽 정면에 성가대가 앉는 자리가 있는데 그 위로 대형 성화가 걸려 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상반신이 없는 예수의 양 손만 그린 성화가 걸려 있었는데 처음 보면 마치 미완성작 같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곧 상반신은 그려 붙이리라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부활절을 앞두고 새로운 성화가 걸렸는데 이 성화도 예수의 상반신은 없고 양 손과 가시관, 그리고 성만찬에 사용한 빵과 포도주만 그려져 있다.
두 작품은 모두 미완성작이면서 완성작인 셈이다. 교인들이 스스로 예수의 상반신을 채우는 생활을 할 때 완성작이 될 수 있다는 암시가 들어있는 것이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교회 본당 정면에 그림을 걸지 않는다. 상징적인 십자가만 걸어놓을 뿐이다. 예수의 상이라도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반쪽짜리 성화는 이런 우려를 피하면서도 교인들의 신앙심을 불러 일으키는 묘한 장치로 볼 수 있다.
음식점의 지리적 입지가 좋고 분위기가 좋은 것만으로는 단골손님을 확보하는데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주방장의 음식솜씨가 뛰어나야 한다. 고객의 입맛을 아는 주방장은 결코 단골손님을 놓치지 않는다. 가장 좋은 재료를 준비하고 정성껏 조리해 먹음직스럽게 손님 앞에 내놓는다.
얼핏 들으면 평범하기만 한 김삼환 목사의 설교는 어떤 맛을 담고 있기에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일까. 교인들이 왜 한결같이 김삼환 목사의 설교가 “구수하고 서민적이고 진솔하다”고하는 것일까. 이미 오랫동안 명성교회를 다닌 교인들은 싫증이 나지는 않을까.
4월9일 오전 11시20분 제3부 주일예배에 참석해 김삼환 목사의 설교를 직접 들어보았다. 김목사는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3시예배까지 모두 5차례 똑같은 주제로 설교를 한다. 오후 4시40분에 드리는 6부 예배에는 청년과 대학생들이 주로 참석하는데 이미 녹화된 김목사의 설교가 화상으로 전달된다.
1부와 2부 예배에서 워밍업이 이뤄지면 교인들이 가장 많이 참석하는 3부 예배에서 ‘절정의 설교’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제3부 예배를 택했다. 교회 본당 2, 3, 4층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가득 찼다. 앞의자와 뒷의자의 간격이 너무 좁아 교인들이 일어선 자세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을 정도였다.
교회 본당 정면에는 가시가 휘감긴 십자가가 있고 그 밑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었으며 왼쪽에는 태극기, 오른쪽에는 교회기가 세워져 있었다.
시온성가대가 ‘죽임 당하신 귀한 어린양’을 장엄하게 부른 후 김삼환 목사가 강대상 위에 나타났다. 높은 천정 위에서 조명이 강대상 위로 은은하게 쏟아져 내렸다. 이런 분위기라면 설교자는 만면에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손을 높이 들고 강대상 아래의 교인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할렐루야’를 외치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김삼환 목사는 강대상에 올라서자마자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드렸다. 교인 대중들과의 접촉에 앞서 하나님앞에 먼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겸손해보였다. 김목사보다 학벌이 좋고 똑똑한 교인들이라도 이런 모습 앞에서는 마음의 자세를 낯출 수밖에 없었다. 기도는 길지 않았고 목소리는 간절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듯 자연스러웠다.
기도가 끝난 후 김목사는 교인들을 향해 한 주일동안의 안부를 가볍게 물었다. 이날 김목사의 설교제목은 ‘나의 삶을 베드로처럼’이었는데 ‘예수는 잘난 사람, 조건이 좋은 사람을 제자로 택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 같은 무식한 어부를 제자로 택했다’는 것이 요지였다. 기독교인이라면 몇십번 들었을 법한 이 평범한 진리를 김목사는 재미있고도 감동적인 예화를 통해 교인들에게 전달했다.
김목사가 설교에서 예화로 든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성악을 전공하려고 이탈리아에 유학간 한국인 여자 유학생이 쌍꺼풀 수술을 하려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쌍꺼풀이 없었던 덕분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는 10년전에 김목사의 구두를 닦아주었던 한 구두닦이가 이제는 목사가 되어 편지를 보내왔다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김목사는 이 두 가지 예화를 제스처를 섞어가며 마치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듯 이야기했다. 마치 원고도 없이 즉흥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같았다. 교인들이 웃음으로 화답하면서 마음의 문을 연 것은 당연한 일. 이때 “진실된 모습대로 살자” “천한 사람이라도 주님은 귀하게 쓰신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했다.
김삼환 목사는 평범한 진리, 상식적인 윤리를 진부하지 않게 전달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경말씀’이 밥이라면 자신의 체험을 반찬으로 삼아 교인들이 맛있게 먹도록 밥상을 차려놓은 것이다. 교인들도 김목사의 설교를 “계속 먹어도 물리지 않는 설렁탕이나 된장찌개”에 비유하곤 했다. 경상도 출신인 김목사는 설교중에 가끔 시골에서 자란 체험을 구수하게 털어놓기도 하고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김목사의 설교를 두고 ‘고향신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교인에게 고향의 맛을 느끼도록 하여 예수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예화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고기 잡던 이야기, 죽 쑤어 먹던 이야기, 이 잡던 이야기, 화투치던 이야기 등 교인들에게 푸근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소재가 있으면 모두 활용한다.
김목사의 설교에 대해 교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교인들의 체험담을 직접 들어보았다. 기독교에서는 신앙적 체험담을 말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하는데 교인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 교회와 목사의 목회 방향에 대한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간증은 ‘죄를 짓고―말씀을 듣고 회개하고―새로운 삶’을 찾거나 ‘병에 걸려―목사의 안수를 받고 나은 후―새로운 삶’을 찾게 됐다는 식의 3단계 구조로 전개된다. 전자의 경우는 ‘말씀’이 강조되고 후자의 경우는 ‘치유능력’이 강조되는데 두 가지가 병행되기도 한다.
명성교회 안수집사인 하덕규씨(42)는 전자의 경우에 속한다. 하씨는 일반인들에게는 ‘시인과 촌장’의 멤버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가수 조성모가 불러 대히트를 친 ‘가시나무’의 원작자다. 가수 양은희이 부른 ‘한계령’도 하씨가 작곡 작사한 것이다. 4월14일 오전 하씨와 전화통화를 했다.
―어떻게 해서 명성교회에서 다니게 되었습니까.
“86년에 명성교회 교인으로 등록했어요. 82년부터 명성교회에 다니던 누님이 권유하기에 85년 12월31일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했어요. 목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고 교회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계속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노래를 만드느라 약을 먹어가며 밤을 새웠는데 심신이 상당히 지쳐 있었어요. 그런데 86년부터 새벽기도 집회에 거의 매일 참석하면서 그런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새벽기도집회에 많은 교인들이 참석하는데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목사님의 영적 지도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목사님의 예리한 통찰력은 그 분야 전문가들도 놀랄 정도입니다.”
―김목사의 설교는 아주 단순하고 평범해보이던데요.
“목사님의 말씀은 균형이 잡혀 있어요. 이성적이면서도 은혜가 넘칩니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이해할 정도로 쉽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느낌이 한결같습니다. 영감이 풍부하신 분이지요. 드러내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신유(병고치는 것)의 은사를 받은 분도 많아요.”
―가수 조성모가 부른 가시나무를 작곡 작사하게 된 것도 신앙생활과 관계가 있습니까. 가사가 좋다는 사람이 많은데요.
“가시나무를 작곡 작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운동권 노래를 만들었어요. 구호적이거나 투쟁적은 아니지만 현실을 풍자하는 노래가 많았지요. 87년 대선에서 군정종식이 좌절되자 직접적으로 투쟁하는 목소리를 담은 노래를 제작하기 위해 녹음을 하고 있었어요. 운동권에서도 제 작품에 대한 기대를 했죠. 그런데 88년 3월 특별새벽집회를 하면서 목사님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관한 설교를 하셨어요.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을 돌로 쳐라’는 대목 있잖아요. 그때 저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저는 그동안 김민기씨나 밥 딜런 등의 저항가수를 좋아했는데 그런 가수처럼 불의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으로 영웅이 되고 싶어했던 제 모습을 보게 된 겁니다.”
하씨는 일면식도 없이 처음으로 통화하는 낯선 기자에게 마치 친구에게 고백하듯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3월 특별새벽기도집회 한달 내내 저 자신의 모습을 회개했어요. 집회 기간이 끝나고 작업실에 돌아와 그동안 만들려고 했던 운동권 노래 녹음 테이프를 모두 내려놓고 엉엉 울었어요. 그렇게 한참동안 울고 난 뒤 오후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데 자연스럽게 어떤 노래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어요. 그것을 그대로 가사와 악보로 옮겨놓은 것이 바로 ‘가시나무’입니다. 그동안 만든 운동권 노래는 모두 폐기하고 이 노래를 새롭게 녹음하기 시작했어요. 이 작업을 하면서 완전히 내면적으로 자아성찰을 하는 음반을 만들게 됐어요. 음반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거죠. 제 삶의 방향도 전환됐습니다.”
―가시나무 노랫말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는데….
“제가 의식하고 한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경 로마서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시나무’의 첫머리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로 시작된다. 영웅적인 심리에 들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뉘우치는 하씨의 종교적 체험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수 조성모가 부르면서 대중적인 가요로 히트한 것은 무척 흥미롭다.
―김목사의 설교 중에는 어떤 것이 가장 가슴에 와 닿습니까.
“너무 많아 한 가지만 말하기 힘든데 자동차 안에서 듣는 설교테이프 중 50번 정도 들어 외우는 설교가 있어요. 겸손에 관한 건데 지난해 여름 쯤 하신 설교입니다.”
명성교회에는 하씨 외에도 음악활동을 하는 교인들이 많은데 그룹 핑클의 이진과 성유리도 명성교회에 다닌다.
명성교회 협동장로를 맡고 있는 심재현(62)씨는 조각가다. 심씨는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인 오는 5월18일에 개막될 ‘광주 5·18 현황 조각공원’의 조형설치물을 만든 주인공이다. 심씨는 광주시의 공모에 응모했다가 당선돼 97년부터 조형물을 제작하여 99년말에 ‘아 광주여, 영원한 빛이어라’란 작품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조형물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스테인리스를 사용해 빛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심씨는 홍익대 미대 조각과를 졸업하고 70년에 도미, 오티스 미술학교에서 유학하고 줄곧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95년에 귀국했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서 살고 있는 심씨는 96년부터 명성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미국에 오래 살았는데 김삼환 목사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미국에 있을 때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들었는데 좋았어요. 목사님께서 LA영락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하셨는데 누가 녹음을 했다가 저에게 들려줬어요.”
―그때 느낌은 어떠했습니까.
“우리 목사님 말씀은 문장이 아주 짧아요. 함축성있는 짧은 문장이 아주 아주 쉬워요. 원래 저는 지적인 설교를 좋아했어요. 신학이나 철학적으로 어려운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는 공부를 하지 않는 목사라고 무시했어요. 그런데 우리 목사님은 영적인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명성교회를 나가게 됐습니까.
“한국에 와서는 어느 교회를 나갈지 교회 ‘쇼핑’을 많이 하고 다녔어요. 소망교회 광림교회 등 부흥하는 큰 교회마다 어떤 메뉴가 있는지 알아보러 다녔는데 결국은 명성교회에 안착을 했어요. 쇼핑을 많이 해보고 결정을 한 겁니다.”
심씨는 껄껄 웃으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이 다닐 교회를 물색하러 다니는 것을 ‘쇼핑’이라고 표현한 것도 흥미로웠다. 요즘 도시 교인들은 이 교회 저 교회 다녀보고 선택을 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 같았다.
“좋은 목사님을 만나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심씨는 명성교회에 등록하기 전에 그 교회 교인들을 통해 김삼환 목사의 사생활이나 생각에 대해 이모저모 알아봤다고 한다.
―김목사는 서울 변두리인 명일동에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런 점에도 감동을 받았습니까.
“목회자들도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시험을 많이 받아요. 우리 교회는 얼만지는 자세히 몰라도 헌금이 참 많이 들어와요. 이 돈을 우리 교회를 위해 사용하면 남보다 더 큰 교회를 지을 수 있어요. 그런데 헌금의 상당액을 선교비로 사용합니다. 지방이나 농촌, 해외 선교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아요.”
심씨는 자신이 간접적으로 들은 김목사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
“목사님은 전세를 든 아파트를 몇 번이나 옮겨다니셨어요. 어려운 농촌 목회자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교회는 돈이 없으니 할 수 없이 아파트 평수를 줄여 이사를 가면서까지 도와준 겁니다. 해외에서 부흥회를 하면 받는 사례금은 그곳에서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는 데 쓰거나 모두 헌금해요. 이만한 윤리의식을 가진 목사님이면 그 교회 다닐 만하지요.”
―이 교회 저교회 ‘아이쇼핑’을 했으니 감각도 남다를 텐데 명성교회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교회 분위기가 좋아요. 우리 교인들은 참 열심히 봉사해요. 열심히 일하는 일꾼의 모습 있잖아요. 우리 목사님은 부목사님들을 모두 모아놓고 머슴목회를 강조합니다. ‘주의 종’,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도 섬김을 받으려는 목회자도 많지 않아요. 목사가 교인들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하면 은근히 싫어지는데 우리 목사님은 그런 면이 전혀 없어요.”
김삼환 목사는 경북 영양의 전형적인 유교집안에서 1남9녀중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종가집의 장손으로서 일년에 수없이 제사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목사의 모친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낳은 귀한 아들이 죽지 않고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가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김목사를 등에 업고 20리 길을 다녔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신앙심을 물러받은 김목사는 17세 때 시골교회의 종지기를 자원했다. 요즘 도시 교회야 종을 치지 않지만 시골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곤 했다. 김목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새벽종을 쳤다. 김목사가 서울에 와서도 새벽기도를 중시한 것은 이때부터 쌓은 새벽기도 훈련의 결과로 보인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서신학교에 입학한 김목사는 흥구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월전교회, 풍북교회, 해양교회 등 지방에서 목회하다가 1980년에 명성교회를 개척한 것.
당시 서울은 70년대 강남개발붐으로 잠실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는 중이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목사들 대부분이 잠실이라는 거대한 어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김목사는 종점인생들이 모이는 변두리 명일동에서 개척초기부터 새벽기도에 승부를 걸었다. 당시 다른 목회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던 새벽기도에 매진한 결과 명성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게 됐다. 명성교회에 등록한 교인들 중 대부분은 이 새벽기도에 매료됐다고 한다. 다음은 매달 30만부가 발행되는 월간 ‘좋은 생각’의 대표 정용철씨(46)의 말이다.
“88년 당시 우리 교회는 신축중이었기 때문에 피닉스 상가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3월 경에 아는 분이 권유하기에 새벽기도 집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새벽거리에 수백명의 교인들이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과 상가건물의 철판 계단을 올라가는 발자국 소리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삼환 목사는 균형있는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요소에만 집착해서는 안되며 열 가지 이상에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와 행정, 재정, 목회자, 당회, 제직회, 성가대, 행사, 교육정책, 교인관리 등 모든 부분에 관심을 갖고 추진할 때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명성교회는 현재 부목사 25명, 행정목사 1명, 교육목사 4명, 협동목사 3명. 전도사 22명이 있고 교구는 25교구 2200여구역으로 구성돼 있다. 각 교구는 부목사들이 교구장을 맡아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고 있다. 지역적인 조직 외에 기능별로 위원회를 만들어 교인들이 교회생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당회장인 김삼환 목사는 교회의 각 기관에서 전반적인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 권한을 위임하고 교인관리의 실제적인 분야인 교구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교구장에게 위임하며 중요한 사항들만 직접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금요 구역장 모임에서 김목사는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구역장들은 각자 구역으로 돌아가 구역예배를 본다. 구역예배에서 파악된 각 교인의 상황은 바로 교구장에게 보고가 되고 교구장은 다시 당회장인 김목사에게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김목사는 교인들의 상태를 늘 파악하고 있다.
재정은 헌금액중 40%를 선교비로 사용하고 있는데 연간 70~89억원 규모다. 현재 국내에는 700개의 지방 교회가 지원을 받고 있고 45개국에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해외선교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는 파키스탄의 경우.
1992년에 개척된 쓰다에 파키스탄 교회(파키스탄의 소리교회)는 세운지 8년 만에 주일예배에 400명이 모이는 큰 교회공동체가 되었으며 특별새벽집회에는 매일 200명 이상이 모인다. 36개 구역과 24개 전도구역에서 구역장들이 활동하고 있다. 명성교회에서 세운 쓰다에 파키스탄 봉사센터는 30여개의 지역교회를 도와 정착시켰으며 17개의 초등학교, 중학교에 2000여 명의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다. 문맹퇴치학교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3000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문맹에서 깨쳤다. 92년 시작된 파키스탄 성서신학교도 올해 6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됐으며 이미 배출된 40여명의 졸업생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교회를 개척하거나 기존 교회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명성교회는 특수선교에 신경을 쓰고 있다. 외국인들을 위한 쉼터도 제공하고, 영어예배와 비영어권 외국인들을 위한 다국어 예배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서울의 명일동과 고덕동을 비롯, 목포, 대구, 전주, 광주에는 6개 장학관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이 기숙생활을 하고 있다. 1909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가 세운 안동성소병원도 명성교회에서 인수했는데 만성질환인 신부전증 환자들에게는 평생 혈액투석 치료를 무료로 해주고 있다.
교인들의 영적 상태와 갈증을 제대로 파악한 김삼환 목사의 설교, 교회 생활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교인들의 네트워크와 조직, 여기에서 파생되는 에너지를 구제와 선교에 사용하는 것 등이 명성교회를 활력있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앞으로 김삼환 목사가 물러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4월8일 오전 4시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한 교인의 말이다.
“김삼환 목사님의 말씀이 좋지만 다른 목사님의 말씀도 좋습니다. 새벽기도에 김삼환 목사님만 보고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늘 강조하는 ‘오직 주님’만 보고 나오는 거죠.”]
첫댓글 동경이 글쓴거 첨본다..푸히.. 그래도 우리교회가 이렇게 성장한건 사람이 한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드신거양..^^
음...다읽었다...ㅋㅋ기분좋네~^^
오직주님!!!
멋짐..감동..
목사님이 전도사님이셨을때는 어떤 기업에 있는교회에서 섬기셨대..그런데 회사간부들이 목사님을 몹시핍박했다하더라~교회에 불나고 회사가 망해서 명일동으로 오신거래..ㅋ당시 그 회사 직원이었던 엄마말씀~ㅋㅋㅋ
그 회사 간부들 누구냐? 밟아주자..... ㅋㅋ 농담~~
흠.....기자한테 메일 보내야지-(내용은 비밀이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