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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덕문
승려와 신도, 힘 합쳐 대중불교 건설에 노력하라
금강산 건봉사로 출가해 교학을 공부한 후 송광사에서 참선 정진을 한 대련덕문(大蓮德文, 1887~1949)스님은 유점사 총림 율주와 만일염불회 회주를 지내며 조선불교 중흥을 위해 정진했다. 또한 신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법회를 개설하는 등 선구자의 발자취를 남긴 대련스님의 수행일화를 손상좌 석산(石山, 서울 정법사 회주)스님의 회고와 해방 전후에 발간된 신문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승려와 신도, 힘 합쳐 대중불교 건설에 노력하라”
만화·응화 스님 이어 ‘만일염불회’ 회주로 추대
승려대회 참석·교정 전형위원 등 불교수호 활동
○… 대련스님의 손상좌인 석산(石山, 서울 정법사 회주)스님은 일제강점기 금강산 건봉사 만일염불회 대중이 정진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무렵 만일염불회 회주는 대련스님.
“법당에 10여 명의 스님이 예불을 모신 후 서로 마주 보고 앉습니다. 많을 때는 20~30여 명이 운집할 때도 있고 사월초파일이나 정초에는 재가불자들이 스님들과 함께 했지요. 우선 천수다라니 진언(眞言)을 30분 정도 염송한 후에 염불을 합니다. 주로 나무아미타불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요.”
석산스님의 기억에 따르면 하루 4번씩 염불정진을 했다고 한다.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사분정근(四分精勤)에 맞추어 한 것이다.
<사진>1939년 백화암 법화회상 강주로 있을 무렵의 대련스님. 사진제공=서울 정법사
○… 대련스님은 1929년 1월 개최된 조선불교승려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불교승려대회에는 한암스님과 만암스님 등 전국 각지에서 100여 명의 스님이 동참했다. 이 해 1월3일부터 5일까지 진행된 조선불교승려대회에서는 종헌(宗憲)과 중앙교무원(中央敎務院) 원칙(院則) 제정을 비롯해 3부장 선거 등이 실시됐다. 당시 기념사진 촬영은 경성실천여학교(京城實踐女學校) 교정에서 했다. 이때 대련스님은 교정(敎正)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으로 뽑혔다. 대련스님이 대중의 신망을 받았으며,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었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다. 당시 교정전형위원으로 선출된 스님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재적사찰. 김포광(해인사), 오리산(범어사), 권상로(불교사.잡지사), 김운악(유점사), 백성욱(불교사.잡지사), 황경운(통도사), 이대련(건봉사), 김정해(전등사), 이고경(해인사), 최인○(금○사), 김해은(송광사), 이혼성(유점사).
○… 대련스님은 출가 후 교학 연찬을 시작한 후 참선수행과 계율 공부에도 전력을 다했다. 또한 건봉사 만일염불회 회주 소임을 보면서 ‘공부 방법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종합적인 수행방법’을 실천하며 정진한 것이다. 특히 스님은 참선수행을 위해 강원을 마친 뒤에는 남방으로 내려와 순천 송광사 선원과 합천 해인사 선원에서 화두를 들었다.
○… 대련스님에 대한 기록은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장이 작성한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에도 나타난다. 1929년 3월28일 작성된 이 서류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제7회 평의원회 개최의 건’이다. 같은 해 4월12일 ‘조선불교중앙교무원 통문에 관한 건’에도 대련스님이 언급돼 있다. 대련스님이 건봉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을 때였다. 스님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도 주요 소임을 보았다. 함께 일한 스님으로는 만암스님과 지암스님 등이 있다. 1934년 총독부가 작성한 ‘중(重)한 단체표’에는 조선불교중앙교무원과 대련스님 등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해방 후 스님은 금강산을 떠나지 않았다. 평생 머물러 온 도량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북한에는 남한과 다른 ‘불교총무원(佛敎總務院)’이 설립됐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발행된 <불교신보>에는 ‘삼팔이북교계소식(三八以北敎界消息)’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삼팔이북 불교총무원 위원장 원보산 화상의 사임으로 인하여 그 후임에 이대련 화상이 피선(被選)되었는데, 아직 정식으로 취임하지 아니하시고 계시다고 한다.”
○… 한암(寒巖)스님이 남긴 ‘건봉사 만일원 신설선원 선중방함록’에는 “1921년의 가을 9월 상순에 건봉사 주지 이대련 … 온 절의 대중과 마음을 모아 협의한 결과, 예전의 만일염불회외에 새로운 선회(禪會)를 설치하기 위해 각 처의 선객들을 초청해…”라고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대련스님이 주지로서 선회를 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건봉사 선회 조실은 한암스님이고, 32명의 수좌가 정진을 했다. 동산(東山)스님이 서기 소임을 보았다.
○… 1949년 대련스님이 홍천 수타사에서 입적한 후 <불교신보>에는 부고 기사가 실렸다. ‘고(故) 이대련 선사(禪師)의 추도식(追悼式)’이란 제목의 대련스님 입적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3월24일 개성부 룡산 송림사(松林寺)에서는 한때 개성불교의 영도자로서 전법사상(傳法史上)에 혁혁한 업적을 남기고 세연이 다함은 … 지난 2월12일 입적하신 고 이대련 선사를 추모하는 개성일원을 망라한 사부대중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사진>대련스님이 전계대화상으로 기록돼 있는 호계첩. 행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수월음관(水月音觀) 스님 법명도 등장하는 보기 드문 자료이다. 사진출처=‘건봉사사적기’
○… 대련스님은 어린이포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1937년 1월1일자 <불교시보>에는 ‘원산포교당의 일요학교 창립’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스님은 당시 일요학교 교장을 지냈다. “대본산 석왕사 원산포교소에서는 아동의 불타(佛陀)의 정신적 함양을 위하여 지난 11월8일 일요학교를 창립하였는데, 직원 생도수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교장 이대련 선사, 교사 김규은 이명렬 김윤식 최봉아, 생도수 남(男) 160명, 여(女) 42명.”
○… 스님은 원산교당에 머물면서 참선회(禪會)를 만들어 신도들에게 교리연구와 정신적 수양을 하는 것을 손수 지도했다. 일제강점기 석왕사 원산포교소에서는 매일 밤마다 신도들이 교당에 모여 교리 공부와 참선을 했다.
○… 스님은 1928년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을 펴냈다. 유일한 사지(寺誌)였다. 이 사적의 서문에서 대련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 사찰은 역사의 불완전이라고 하느니보다 실로 역사가 없는 것이다. 사찰의 역사는 불교역사의 대부분이 될 것인즉 사찰역사의 결함은 곧 불교역사의 결함이다.” 이 사적의 편찬은 만해스님이 했다. 따라서 두 스님은 각별한 사이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원산불교신도단’ 목적은 … ■
“소비조합 창립…경제활동”
석왕사 원산포교소서 조직
대련스님은 석왕사 원산포교소에 주석하면서 지금의 신도회에 해당하는 ‘불교신도단(佛敎信徒團)’을 조직했다. 이때가 1936년 10월27일이다.
“신도간에 긴밀한 결합과 불타정신에 제종사업(諸宗事業)을 하기”를 목적으로 설립된 원산불교신도단의 활동 목표는 다음과 같다. △승려와 신도가 합력(合力)하여 대중불교건설에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 △단(團)의 기금을 적립하야 소비조합(消費組合)을 창립하여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 △종교적 본질에 맞는 제종사업(諸宗事業)에 봉사할 것. △포교반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것.
당시 석왕사 주지인 이환해스님이 고문으로 위촉됐고, 대련스님이 포교사(布敎師)를 맡았다. 포교사는 지금의 지도법사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신도단 설립의 목적과 활동계획 수립에 스님의 의중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 행장 ■
건봉사 응하스님 회상으로 출가
교학공부 후 송광사 선원서 정진
1887년 9월(음력)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대련(李大蓮). 열 살 되던 해(1897년)에 고향 근처에 있는 금강산 건봉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응화(應化)스님. 1924년 석전 박한영스님이 글을 쓴 만화관준(萬化寬俊, 1850~1918)스님의 비명에는, 법은사(法恩嗣)에 응화스님, 법은손(法恩孫)에 대련스님이 제일 앞에 있다. 즉 만화스님의 법맥이 응화스님을 거쳐 대련스님에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만화스님의 비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건봉사 법무(法務) 소임에 만해(萬海)스님이 기록돼 있다는 사실이다.
출가 후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교학을 깊이 공부했다. 건봉사에서 대교과를 마친(1912년) 스님은 참선수행을 위해 남방으로 갔다. 1914년 순천 송광사 선원에서 정진한 스님은 이후 해인사를 거쳐 다시 출가도량인 건봉사로 돌아왔다. 선교(禪敎)를 겸비한 스님은 1917년부터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1924년에는 금강산 유점사 총림의 율사(律師)로 추대됐다. 대중의 신망을 받은 스님은 1927년 건봉사 주지로 취임했고, 1932년에는 건봉사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회주(會主)를 맡았다. 1934년에는 건봉사가 도심포교를 위해 전국 주요지역에 세운 포교당 가운데 하나인 개성포교당의 포교사 소임을 보았다. 1936년 11월10일 원산 석왕사의 포교사로 부임했다. 건봉사 주지로 있으면서 설이 되면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설 비용을 전달해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사진>1924년 4월8일(음력) 경성 각황사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한 대련스님 소식을 전한 신문기사.
1937년에는 건봉사 12암자 가운데 하나인 백화암에서 법화회상(法華會上)을 열고 강주(講主)를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1936년 퇴경스님(훗날 권상노 선생)이 지은 ‘법우경원설립비(法雨經院設立碑)에는 대련스님이 산중노덕(山中老德, 지금의 원로스님) 21명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돼 있다. 1940년 겨울에 준공된 건봉사 문수교 명문(銘文)에는 대련스님의 소임이 강사(講師, 지금의 강주)로 되어 있다. <금강산사적>에 따르면 대련스님은 1919년 11월~1923년 10월, 1926년 10월~1936년 4월18일 등 14년간 건봉사 주지를 지낸 것으로 확인됐다. 스님은 각황사(지금의 서울 조계사) 창건 당시 ‘건축기성회(建築期成會) 통상위원(通常委員)’에 위촉되기도 했다.
스님은 1949년 2월12일(음력) 강원도 홍천 수타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62세, 법납 52세. 손상좌인 석산스님과 증손상좌 법진스님(선학원 이사장)이 매년 기일에 서울 정법사에서 추모재를 지내고 있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