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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경 : [DVD] 맨발의 기봉이 (신현준,김수미,임하룡,탁재훈,권수경) - 한영/ 싸이월드 | 2년전, 2009년 2월 7일/ 맨발의 기봉이(Barefoot Gibong) 감독 : 권수경 출연(배우) : 신현준 , 김수미 , 임하룡 장르 : 드라마 , 가족 상영시간(분) : 99분(전체관람가) 제작사 : (주)태원엔터테인먼트 발매일 : 2007-05-29 [ 상세정보.../ www.cyworld.com/| 나이스가이(daum 2011)
권수경 : 2011.01.10/ 권수경 - 무비스트/ 영화감독 권수경, 맨발의 기봉이 연출, 바이오그래피, 관련기사 제공./ http://www.movist.com/movies/ 전체 > 인물 > 영화인 > 영화감독 > 권수경(daum 2011)
권수경 : 권수경 - 씨네21/ 영화감독 권수경, 맨발의 기봉이 연출, 관련기사 제공./ http://www.cine21.com/Movies/Mov_Person/ 전체 > 인물 > 영화인 > 영화감독 > 권수경(daum 2011)
권수경 : 맨발의 기봉이 - 씨네21/ 휴먼 드라마, 권수경 감독, 신현준, 김수미 출연, 제작노트, 스틸컷, 리뷰 제공./ www.cine21.com/Movies/Mov_Movie/movie_detail.../ 영화 > 영화작품 > 맨발의 기봉이(daum 2011)
권수경 : 감독 2006년 맨발의 기봉이/ 각본 2006년 맨발의 기봉이/ 권수경 감독은 100여 편의 CF를 감독하고 북경 영화학교에서 장예모 감독에게 영화수업을 받은 후 <맨발의 기봉이>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됐다. 영화 <비천무> 조감독 시절 친구가 된 배우 신현준의 권유로 영화의 소재가 된 다큐멘터리를 처음 보고 감동을 받아 영화화를 결심하고 오랜 시간 실제인물들을 설득해 마침내 영화화하게 됐다. 감독은 실제 이야기의 감동적인 요소를 잘 살려내기 위해 최대한 다큐멘터리에 충실하면서 극적 호소력을 갖추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일기예보, 카메라, 빨래 같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소개된 실제 에피소드는 그대로 살리면서 이장의 아들, 사진관집 주인 등 가공의 캐릭터를 덧붙여 갈등과 애정의 구조를 만들어 영화의 극적인 재미를 더하게 된다. 오랜 CF 감독시절을 통해 익힌 섬세한 영상연출 감각이 빛을 발할 <맨발의 기봉이>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만큼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감동을 끌어내는 아름다운 휴먼드라마로 탄생할 것이다./ [Filmography]/ 1995~1997 광고,TV CF 100 여 편 연출(daum 2011)
권수경 : 〈스포츠칸〉[충무로 파일] ‘전체관람가’ 흥행작 A to Z/ 9시간전, 2011년 1월 12일 오전 3:48 | 경향신문 | 미디어다음 >/ ...(2009)는 292만9713명, 장진 감독의 < 굿모닝 프레지던트 > (2009)는 253만3312명, 권수경 감독의 < 맨발의 기봉이 > (2006)는 234만7311명이 관람했다. < 말아톤 > < 집으로… > 열풍도...(daum 2011)
권수경 : 〈스포츠칸〉[충무로 파일] 흥행 감독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지난달, 2010년 12월 20일 (월) | 경향신문 | 미디어다음/ ...)은 외국어대 터키어과, 김대우(방자전·음란서생)는 외국어대 이태리어과, 권수경(맨발의 기봉이)은 경희대 국문과, 오종록(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은 부산대 독문과, 손재곤(달콤...(daum 2011)
권수경 : 2011 '연기돌' 블루칩 미리보기①…수지·대성·동호/ 지난달, 2010년 12월 16일 (목) | OSEN | 미디어다음/ ...'에 캐스팅돼 내년 활발한 활동이 기대되는 아이돌이다. 걸그룹 시크릿 멤버 한선화는 권수경 감독의 영화 '리틀히어로'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남주인공 정준호와 호흡을 맞춘다. 한선화는...(daum 2011)
권수경 : 대창80년사:부록(10) 부장교사-대입자(1)/ 작성 장병창/ 지난달, 2011년 2월 11일 (금)/ ...(체육), 권기철(경영), 박경수(건축), 황석근(무역), 김운기(미술교육), 이용희(태권도), 권수경(국문), 이일형(미술교육), 윤권화(경영), 변우서(금속), 여규덕(체육), 하종찬(무역), 이형수(산업.../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1)
권수경 : 예천동부초등학교총동문회cafe/ 예천 출신 감독이 만든 멋진 영화 "맨발의 기봉이" 꼭 보시와요/ 3년전, 2008년 1월 21일/ 꼭 한번 보세요. 영화명 : 맨발의 기봉이 감독 : 권수경 (예천초등학교68회 권세민, 대창고 졸) 예천읍 상리 출생 출연 : 신현준, 김수미, 임하룡, 탁재훈.../ cafe.daum.net/yceast(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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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모([나의 大學 合格記] 포스텍 新素材工學科 合格한 권순모 : "많은 問題 풀기보다 槪念整理가 優先") [記事] : 2008년 포스텍 신소재공학과에 입학한 권순모(19) 군은 경북 예천의 대창고교를 졸업했다. 산과 들로 둘러싸인 농촌학교에서 꿈을 키우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수업과 선배에게 물려받은 참고서로 공부하고, 인터넷 강의로 보충한 것 외에 다른 공부도구는 없었다. 군(郡)에서 주최한 과학경시 대회에 나가 두 번 상을 탔지만 '날고 긴다'는 수재들이 모이는 전국 경시대회엔 나간 일도 없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도회지 학교로 떠날 때도 그는 고향에서 책을 들었다.
[■부모님의 가르침] : 권군은 예천 풍양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전교 49명 중에서 4등을 했다. 예천보다 규모가 큰 상주나 점촌의 고교로 '유학'갈 생각이었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그의 형은 상주고에 진학한 상태였고 동생도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여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아버지의 경제 부담이 걱정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대창고 교사들이 권군의 집을 찾아와 3년 전액 장학금을 제시, 그냥 고향에 눌러 앉게 됐다. 그는 "줄곧 1등을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 부모님이 '여자애가 공부해서 뭐하느냐'며 강제로 두꺼비집을 내릴 정도로 시골은 공부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제 부모님은 달랐다"고 했다. 책을 사서 읽게 하고 수학 한 문제라도 더 풀게 채근했다고 한다. 권군은 "부모님이 어린 시절 사주신 책들 중에 유독 수학과 과학에 관련된 책이 많아 관심이 이공계 쪽으로 향했다"며 "과학자의 꿈도 책을 보며 키웠다"고 회고했다.
[■공부 이야기] : 언어영역은 고2 때까지 "점수가 너무 잘 나와" 순탄했지만 고3 갑자기 내리막을 탔다. "고3 첫 모의고사부터 참담했다"며 "비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었기에 문제푸는 감이 떨어졌고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언어영역 슬럼프는 7월까지 이어졌다. 아무리 문제풀이를 해도 성적은 제자리였다. 그러나 "그 해 여름 인터넷 강의를 통해 취약했던 기본 개념을 꼼꼼히 다지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수리영역은 문제를 많이 풀어보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점수대는 80점 초반에서 90점 초반 사이를 오갔지만 왠지 불안한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기본 개념이 취약해서인지 어떤 응용문제가 나올지 너무 불안했다"는 것이다. 불안 돌파구는 개념 위주의 학습이었다. 기본 정의와 개념을 확실히 알고 개념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개념을 응용한 평가원모의고사나 수능기출 문제도 많이 풀었다. "직관적 사고와 개념 다지기를 거듭하면서 점수가 90점대로 안정권에 들어 너무 기뻤다"고 했다. 과학탐구 영역 역시 문제집과 참고서 위주로 공부했더니 점수가 들쭉날쭉했다. 역시 해답은 개념 공부였다. "인터넷 강의로 개념을 다시 잡았더니 바로 안정권에 들더라"는 것이다. 권군은 "언어와 수리, 과학탐구 영역 등 거의 전 영역에서 문제풀이를 하다가 개념을 익혀 점수를 비약적으로 올렸다"며 "요즘 들어 기본개념을 적용시켜 응용하는 유형의 문제가 수능에서 많이 출제된다"고 귀띔했다.
[■꿈을 위한 항해] :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마다 낙담하며 슬럼프를 경험했다고 한다. "공부를 적게 한 것도, 게을렀던 것도 아닌데 점수가 제자리일 때 힘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고3 초반에는 점수가 급락했다. 어려운 고비마다 부모와 마을교회의 박형섭 목사, 박춘욱 담임선생님의 격려가 힘이 됐다고 한다. "고비를 겪을 때마다 뛰어넘는 과정의 결과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더욱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 노력이 나중에 한꺼번에 포스텍 합격으로 나타났다"고 활짝 웃었다. 고3시절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오후 6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잠깐 잠을 잔 뒤 새벽 4시까지 공부하는 강행군을 계속 했다. 부족한 잠은 틈틈이 학교에서 잤다. 고3 여름방학 때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어' 고시원에 들어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루 세끼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18시간 공부에 집중했다고 한다. 권군은 "힘들었지만 힘들다고 느낄 여유가 없었고 시골학생의 꿈인 포스텍에 입학하는 꿈을 꾸면서 버틸 수 있었다"며 "제 미래의 인생계획을 이루기 위해 포스텍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고 잠시라도 쉬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김태완 記者 朝鮮日報 2008.04.23 16:20)
권순모 : [나의 대학 합격기] 포스텍 신소재공학과 합격한 권순모/ 3년전, 2008년 4월 24일/ "[나의 대학 합격기] 포스텍 신소재공학과 합격한 권순모 "많은 문제 풀기보다 개념정리가 우선" 올해 포스텍 신소재공학과에 입학한 권순모(19) 군은 경북 예천의 대창고교를 졸업했다. 산과 들로 둘러싸인 농촌학교에서 꿈을.../ cafe.daum.net/papa.com/ 파파안달부루스(daum 2011)
권순모 : 재경예천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 cafe.daum.net/seouldaechong/ 2007학년도 교외장학금 지급 내역/ 3년전, 2008년 1월 13일 000/ 35 “ 2-1 노태윤 “ “ 36 “ 2-2 백창열 “ “ 37 “ 3-2 권오준 한국산업장학금 “ 38 “ 3-4 권순모 “ “ 39 “ 3-4 황범식 “ “ 40 “ 2-3 양경남 “ “ 41 “ 2-3 도경민 “ “ 42 “ 2-5 권오민 “ “ 총계 ...// 모교 장학기금 - 모교장학금지출현황/ 3년전, 2008년 1월 11일// 대창고등학교 포항공대 2명 최종 합격/ 4년전, 2007년 10월 25일(daum 2011)
권순모 : 재경예천군민회/ cafe.daum.net/woruddPcjsrns/ 대창고-서울대,포항공대 -지방명문대 합격/ 3년전, 2008년 2월 12일 주위를 놀라게 하고 있다. 12일 학교 관계자에 따르면 2008학년도 2학기 수시에서 정준각, 권순모 군이 포항공대에 합격한 데 이어 정시모집에서 권종원 군이 서울대 사범대 수학교육과에 합격했으며...(daum 2011)
권순모 : 모교 장학기금 - 모교장학금지출현황/ 3년전, 2008년 1월 11일/ (이채운외3) 400,000 5. 8 성적우수자 장학금(박언진외3) 1,000,000 7. 3 성적우수자 장학금(권종원,권순모) 1,072,800 11. 14 체육우수자 장학금(김세진외2) 300,000 12. 11 신입생유치 장학금(김종현외.../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권순모 : 대창고등학교 포항공대 2명 최종 합격/ 4년전, 2007년 10월 25일/ 대창고등학교 포항공대 2명 최종 합격 포항공대에 정준각(기계산업공학과-대창중 졸업)과 권순모(신소재공학과-풍양중 졸업)가 최종 합격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 지역균형선발에서도 정준각(대창중.../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권순모 : 대창고-서울대2명 / 포항공대 2명-수시합격/ 4년전, 2007년 10월 8일/ 각각 1차 합격하였고 포항공대 수시모집에서 정준각 군이 기계산업공학과에 합격하였고 권순모 군 이 신소재공학과에 1차 합격하였으며 경북대학교 수시모집에 5명이 1차 합격하며 홍익대 수시모집에.../ cafe.daum.net/seouldaechong(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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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대(權寧大) : 1908- , 감천 출신, 대창학원 졸업, 1956년 민선 감천면장이다.(慶北大觀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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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록(權寧錄) : 1916-1986, 예천읍 왕신리 139번지에서 태어나 예천읍 남본1리 245번지로 옮겨 살았다. 본관은 안동, 태선(泰善)의 아들, 대창학원(大昌學院) 졸업, 궁시장(弓矢匠)으로 16세 때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활을 만들기 시작하여 20여만장의 활을 만들기까지 평생을 활과 함께 생활하였다. 자신이 만든 활로 전국관광민예품경진대회(全國觀光民藝品競進大會)에서 특선을 한 후 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으로 지정(1971.9.13)되었고, 한국전통보존협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활의 원료인 민어풀, 물소뿔은 타이페이, 베트남, 태국 등 외국에서 구입하여 오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애로가 많고, 산뽕나무와 참나무도 주로 지리산과 태백산 등지에서 구입하여 오나, 이도 산림령 등으로 순조로운 운반을 하지 못하여 원료 공급이 되지 않아 활을 만드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의 집안은 400년 동안 11대째 계속되는 활의 명문가(名門家)였다. 조선 숙종 때 그의 10대조인 계황(繼黃)이 개성에서 예천으로 이사와 활을 만들기 시작한 후 대대로 내려왔다. 그 중 그의 6대조인 희직(熙直)은 순조 임금의 명령으로 당시 남해안 깊숙이 들어와 노략질이 잦았던 왜구를 무찌를 활 10만 장을 만들어 바침으로서 교위용장(校尉勇將)이란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의 장남 오규(五奎, 1941-?)와 차남 오영(五榮, 1944- ), 3남 오덕(五德, 1944- )도 활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시위 소리만 들어도 내가 만든 활은 언제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훤히 알아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 과녁에 꽂힐 때의 쾌감은 활을 만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지요"라고 말한 그는 연평균 150개의 활을 만들었다. 그는 수렵 도구에서 병기(兵器)로, 병기에서 스포츠 기구로 변한 활과 더불어 평생을 살고 활에 가문(家門)의 명예를 걸었다.(每日年鑑 1985 1986, 醴泉新聞)
권영록(權寧錄) [弓矢匠] : 1916-?, 본적은 예천읍 왕신리 169번지, 주소는 예천읍 남본리 245번지이다. 무형문화재 제47호(1971.9.13 指定)로서, 슬하에 3형제(長男 五奎, 2男 五榮, 3男 五德)에게 전수하였다. 학력은 한학이다. 부속품으로 톱(길이 55cm) 1개, 활밀이(길이 75cm) 1개, 줄(길이 45cm) 1개, 나무찝개(길이 40cm) 1개, 짜귀(길이 27cm) 1개, 두루자(길이 29cm) 1개, 사련(길이 28cm) 1개, 심빗(길이 18cm) 1개, 도가니(직경 13cm, 높이 12cm) 1개, 디짐지(직경 23cm) 1개, 대칼(길이 26cm) 1개, 대빗(길이 25cm) 1개, 심노이빗(길이 21cm) 1개, 도지계(길이 35cm) 1개이다. 활 만드는 기술자인 그는 본관이 안동, 시조 태사공 권행(權幸)의 34세손이다. 그의 조궁술(造宮術)은 조선 영조 때 그의 7대조인 권희직(權熙直, 활 製作의 功으로 當時 校尉, 勇將의 벼슬까지 지냈다)으로부터 대대가업으로 전승되어 왔다. 특히 11대조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인 개성에서 조궁술을 익혀 예천읍 왕신동으로 옮겨 대대로 살다가 권영록이 남본동 245번지로 이거 궁방(弓房)을 설치히고 활을 제작하였다. 그가 조궁에 종사케 된 것은 16세 때부터 연마하여 활의 인현력(引眩力)을 마음대로 조절해서 여러 가지 활을 만들어 관혁(貫革)에 맞히면 반동으로 되튀기게 할 수도 있고, 한(漢) 나라 유총(劉聰)의 활처럼 철판을 뚫을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국에 산재해 있는 자신의 활을 쏘는 소리만 듣고도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전국 활 생산량의 70%를 권영록이 제작하고 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물소뿔을 구할 수 없어 6년 간 활 제작을 중단하다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조궁업을 계속하였다. 신장 173cm, 체중 72kg, 건강한 편이었다. 아들 권오규(權五奎, 1938-?)에게까지 전수시켜 후계자로 양성하고 있다. 예천군내 활 제작자는 권영록, 권영호(權寧鎬), 권우갑(權又甲), 권선출(權宣出), 이치우(李致雨) 등 5명이고, 타지의 활 제작자는 권태은(광주), 권영덕(구래), 권인수(울산), 권태기(울산), 김봉원(진해), 기타(안동, 영주)이다. 예천읍에 궁도협회가 조직(會長 崔元漢, 會員 50名)되고, 남산공원에 무학정(武學亭, 弓道場)이 설치되어 무사도를 닦는다. 그리하여 도대회, 전국대회에서 석권하였다. 김장용(4단), 권영학(3단), 권오규(2단)를 사범으로 위촉하여 계속 궁술을 익히고 있다. 궁도을 군기로 삼고 예산을 지원(국궁 50%, 양궁 50%)을 군청헤서 하고 있다. 양궁은 국궁에 힘입어 1970년대에 예천여중고(교장 장기오)에서 양궁부를 창단하여 선수를 많이 양성했다. 그리하여 소년체전, 아시안게임, 세계궁도대회에서 석권하였다. 국궁의 제작 기간은 활 1개에 4개월이 소요되고, 국궁의 값은 6만-30만 원, 전통궁의 값은 5만-30만 원(포항, 광주), 화살은 10개에 1만 원(개당 1천 원)이고, 권영록의 생계 보조금은 문공부에서 국고로 매월 8만 원(연간 96만 원)을 지급한다. 본래 활은 어느 민족이나 다 공유(共有)하던 무기요 수렵 도구이다. 아득한 옛날의 돌화살촉의 발견은 인류가 신석기시대 이래 활을 얼마나 중요한 이기(利器)로 사용했던가를 입증한다. 적어도 우리 나라에 총이 수입된 이조 말기까지 2,000여년 동안 활은 먼 거리의 표적을 겨누는 대표적 무기였음에 틀림이 없다. 조고선 혹은 삼국시대에 관한 기록을 보면, 한민족이 활을 잘 쏜다는 칭찬이 자자할 뿐더러 그 활의 우수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 보내는 선물 가운데도 활이 중요 품목의 하나로 되어 있었다. 세계의 허다한 활 가운데 우리 나라의 활은 활장(弓幹)이 짧은 편이어서 단궁(短弓)이라 한다. 단궁은 중동의 ‘터키’에서부터 몽고, 중국, 한국에 분포하는 즉 기마민족계(騎馬民族系)의 것이고, 일본이나 서양의 것은 해양계(海洋系)의 한 길이 넘는 활이다. 활장이 긴 것은 연궁(軟弓)이어서 화살의 미치는 거리가 짧기 마련이고, 멀리 미치는 것은 강궁(剛弓)일 수 밖에 없다. 현재 국궁의 관혁 거리는 145m지만 옛날엔 190m였다 한다.(1970년대)
권영록(權寧錄) [記事] : 조궁술을 가업으로 이어온 지 400년, 무형문화재 47호, 권영록 옹은 조상들의 얼을 재현시키기 위해 50여년 간을 활과 더불어 살아왔다. 옛부터 활의 고장으로 이름난 경북 예천, 소백산의 정기 속에 맑은 시냇물은 옥류와 같은 활의 고장으로 더한층 돋보이게 한다. 권옹이 활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16세 때부터인데, 조궁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부친 권태선(權泰善) 씨의 옆에서 일손을 거들면서 전수자의 기초를 닥았다. 그로부터 48년의 긴 세월을 오직 활과 함께 살아왔다. 그 동안 20여만 장의 활을 만들어 국내 뿐 아니라, 일본, 홍콩 등에 수출도 많이 했다. 권옹의 가업은 400년 전 조선 숙종 때 11대 조상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인 개성에서 기술을 익혀 지금의 예천읍 왕신동에서 조궁업을 시작했다. 계황-광필(光弼)-성은(聖殷)-희직(熙直)-무겸(舞兼)-만영(萬榮)-병위(丙褘)-동락(童洛)-태선-영록 옹으로 이어졌다. 조궁 가업은 7대조 때 명궁으로서 그 이름을 떠치기 시작했다. 희직은 10만 장의 활을 만들었다. 이 활은 외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때의 공으로 희직은 교위 용장(校尉勇將, 現 軍人敎官)의 벼슬까지 하사받았다. 이로 인해 권씨 가문은 활의 명궁으로써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퍼졌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시직공원 뒤, 황학정에서 쏘던 활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시사하던 활이 모두 권옹의 작품이었다. 해방 3년 전부터 물소뿔 수입이 금지되면서 권옹의 가업도 중단되었다. 1948년 이 소식을 들은 이 대통령은 권옹을 경무대로 불러 위로한 뒤, 그 자리에서 물소뿔 수입을 명령할만큼 우리 활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국궁의 종가 권영록 옹은 예천읍 남본동 245번지, 나직한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 목조 3칸 짜리가 그의 집이자 작업장으로, 현재까지 활 만드는 가업은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계속 내려왔다. 경북 예천은 옛부터 활을 사랑하고, 활쏘기를 즐긴 궁술의 고장, 군내 1읍 11면 중에서 예천읍 남본동은 사내아이 걸음마 배울 때 활을 잡히고, 천자문 깨우칠 때 첫 시위를 당겨준다는 활 마을이다. 고추를 낳으면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달아놓는 대신 이 마을에서는 활을 걸어주기도 한다. 이 마을에 궁도가 번성한 데는 대대로 명궁을 만들어 후학을 키워온 조궁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기(郡技)가 궁도이고, 예천여고, 예천중의 교기가 궁도이며, 읍민 2만5천 명 중 반이 활을 쏜다는 자랑이다. 세계궁도대회에서도 이름 날린 김진호, 황숙주 등이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하여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다. 마음이 어지럽고 정신이 흔들려서는 활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뜻과 몸을 바르게 하는 본체가 궁도이기 때문이다. 권옹은 장남 오규(五奎, 42) 씨와 3남 오덕(五德, 35) 씨, 동생 영호(寧浩, 57) 씨, 영덕(寧悳, 42) 씨, 영강(寧康, 36) 씨를 비롯 친척동생 영익(寧翊, 36) 씨 등 6명에게 기술을 전수해줬다. 우리 나라에서 만든 활은 한 해 2만 장 가량되나 권옹 집에서 70%를 생산하고 있어 명실공히 조궁계의 종가를 이루고 있다. 권옹은 78kg의 체구에 봄 가을 전국 230개 사장(활 쏘는 장소)에서 고문으로 초청 받아 시범으로 쏘기도 하고, 심판으로 활약하면서 자신이 만든 활이 창공을 날아 표적에 명중하는 쾌감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물맛이 차고 달아 이름 붙여진 예천읍 궁술에서 활달한 기품을 키우고 궁도에서 예절을 배우는 주민들은 국궁의 후예답게 활터에서 산다. 권옹은 전통을 잇는 보람에 더욱 좋은 활을 만들기에 더욱 정성을 쏟고, 우리의 문화재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활을 아는 사람이 찾아줄 때가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조상의 얼이 담긴 국궁을 사랑하는 예천군민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醴泉女子中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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