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6 - 삼니움 전쟁과 피로스왕 전쟁 승리로 이탈리아를 통일하다!
로마는 귀족 계급과 평민계급의 권력투쟁을 완화하기 위해 평민의 요구대로 성문법을 제정하기로
하고는 그리스를 시찰하고 12표법을 만든 후 정치개혁을 하는 중에 다시 전쟁을 하게 됩니다.
1. 라틴 전쟁
라티움 전쟁(기원전 340년~338년) 은 로마에 인접한 라티움 민족들이 로마에서 독립하려는
전쟁이니 이 전쟁으로 라티움 동맹이 해체되고 라티움인에게 부분적인권리와 다양한
수준의 시민권을 부여하고는 라티움의 여러 영토는 로마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기원전 343년 삼니움은 카푸아 북부의 작은 도시국가 시디키니를 공격하여.... 제1차 삼니움 전쟁이
일어났는데, 기원전 341년 로마는 삼니움과 평화조약을 맺어 삼니움에 시디키니를 넘겨주었습니다.
로마편에 싸우던 라티움과 캄파니아 동맹국은 조약을 시디키니에 대한 치욕스러운 배반으로 여겼으니
기원전 340년 한 대사가 로마 원로원에 파견되어 라티움과 로마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단일국가
형성을 요구하자 이전부터 로마는 라티움 동맹 맹주였으므로 이 제의를 거부하였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라티움인들이 삼니움으로 진입하자 로마-삼니움 연합군은 푸치노 호수로 이동해 라티움군을 피해
캄파니아 영토로 들어가서는 베수비우스 화산 인근에서 라티움과 캄파니아군을 공격했습니다.
베수비우스 전투에서 데키우스 무스와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의 지휘를 받은 로마군은 라티움군을 격파
했으니 로마측 사료에 따르면 만리우스의 아들이 우연히 불복종을 저지르자 그를 처형하여
일벌백계로 삼았다고 하며, 데키우스는 로마의 승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신에게 희생했다고 합니다.
1년뒤 트리파눔 전투에서 만리우스는 라티움군을 다시 무찔렀으니 캄파니아에서 밀려난 라티움
군은 라티움으로 가서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패했으니 기원전 338년에 전쟁이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패배한 라티움인들은 로마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일부 라티움
도시는 로마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는 투표권 없는 제한적인 ‘라틴 시민권’ 을 얻게됩니다.
로마는 “라틴 연맹” 을 해체하 동맹국으로 삼으며 새“라틴 연합” 의 우두머리가 되는데....
이때 로마가 점령한 라틴 도시 국가들을 대한 태도는 고대 사회에서는 매우 드물게
온건한 것이었으니 로마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부여해 주었고, 매년 연공을 요구
하지도 않았고, 단지 전쟁이 났을 때 로마에 보조병을 보냄으로써 협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2. 삼니움 전쟁
로마가 라티움 지역에서 주도권을 쥔후 아펜니노 산맥에 살고있는 목축업을 하던 폐쇄적이었던
삼니움족 중 일부가 서쪽 평야 지대에 남하하여 비옥한 땅에서 살려고 마음먹었으니 이들은
로마가 버티고 있는 라티움 지역을 피해 바로 아래쪽 평야지대인 캄파니아 지역으로
"민족 이동" 을 시작하자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들이 라티움의 맹주인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니
로마는 소속 동맹국과 함께 삼니움족을 내쫓고 캄파니아 지역 도시들도 동맹국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삼니움족은 15년 뒤 대대적으로 캄파니아 지역을 공격해 오니 제2차 삼니움 전쟁 인데
이미 캄파니아의 우두머리 까지 된 로마는 바로 요격하였는데, 하지만 이번엔 호락호락하지
않아 삼니움족과 로마의 전쟁은 무려 22년을 끌게 되는데, 로마군은 평원에서 회전을
하는데 익숙했으나 삼니움족은 산악 게릴라전을 벌였던 것이니... 로마군은 전쟁 초기에
평원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연이어 거두었기 때문에 20년이 넘는 장기전이 될줄 몰랐습니다.
왜구로 부터 600회 이상의 침공을 받고서야 1388년 1차 박위에 이어, 1419년 세종때 3차
이종무는 병선 227척에 1만 7천 병력으로 6월 20일 대마도에 침입해서는 왜군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1,939호 민가를 불지르고 129척 선박을 노획해 불태웁니다.
이후 절제사 박실이 좌우군을 거느리고 산속으로 진격하다가 이로군에서 복병을 만나 편장
박홍신과 백수신등 장수와 군사 180명이 전사(일본측 기록 1천 5백명?) 하자
조선군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반격하지 못하고 13일만인 7월 3일 철수한 것을 연상시킵니다.
거듭된 평원전투에서 연승에 고무된 로마군은 삼니움족의 본거지인 아펜니노 산맥으로 진격해 궤멸
시키기로 결심했으니.... 삼니움족은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어 로마군을 급습하는 게릴라전으로
맞서자 로마군 기병대는 무용지물이고 중무장 보병대도 힘을 쓰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5년을
이어가던 중에 기원전 321년에 삼니움군 전체가 풀리아 평원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옵니다.
두 집정관은 부대를 서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지만 이건 거짓 정보이니 삼니움족 주력은 평원에
이르기 전인 산지에 매복하여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산악지대로 접어든 로마군은 곧 평야
지대로 나가면 식량 보급이 가능할 것이라 보고 평소 행군시 열흘치 식량을 지참하는게 관례라
그 보다 적은 소량의 식량만 지참했는데 카우디움이라 불리는 협곡에 이르러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로마군 선봉이 다시 좁은 통로를 지나 골짜기를 빠져 나가려고 할 무렵 나무를 쓰러트려
만든 바리케이드가 앞에 나타났으니 놀란 로마군은 골짜기를 되돌아와 다른
입구로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그 길도 나무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으니 협곡은
좁은데다가 양쪽은 깍아지른 암벽이 노출된 험준한 산이어서 기어오를 수도 없었습니다.
골짜기의 출구와 입구는 바리케이드 뒤에 진을 친 삼니우족 병사들이 쉴새없이 활을 쏘는
지라 돌격해 나갈수도 없었으니 1만명을 헤아리는 로마군 병사들은 협곡에 꼼짝
없이 갇혀 버렸으니 병사들은 숙영지를 짓기 시작했고 주위를 참호나 울타리를
쳐서 방어벽을 만들었으나 정작 문제는 삼니움 족이 전혀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것이라.....
며칠이 지나도 삼니움족은 공격해 오지 않았으니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로마군이 얼마나
용맹한지는 삼니움측도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려는
로마군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식량이 떨어진지 사나흘이 지나자
말까지 잡아먹었지만 굶주림으로 허약해지니 기진맥진한 로마군은 마침내 항복을 합니다.
집정관의 부관이 삼니움족에 파견되어 화평을 제의하자 삼니움족의 조건은 로마군이 나폴리등
캄파니아에서 철군하고 식민지도 포기하며 삼니움족 세력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조약이 민회의 승인을 얻을 때 까지 로마병사 600명을 인질로 삼기로 했는데 문제는 로마
전사들은 패퇴는 했어도 항복은 400년간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지라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라....
로마군은 골짜기로 들어와 삼니움족 앞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창도 칼로 방패도 내려놓아야
했으며 전사로서는 불명예스러운 무장해제가 된 상태에서 항복하는 것이니 집정관도 진홍빛 망토를
벗어야 했으며 병사들은 노예취급을 받았으니 갑옷을 벗고 속옷인 하얀 셔츠만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바로 "노예의 차림" 을 의미했으며 게다가 로마군은 속옷 차림으로 창을 빼들고 빈틈
없이 늘어서 있는 삼니움족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양쪽에
늘어선 삼니움족은 지나가는 로마군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개중에는 창으로
찌르는 자들도 있었으니 이미 극도로 허약해진 로마 병사들 중에 사망자도 다수 나왔습니다.
600명 인질은 감옥에 쳐넣어졌고 속옷차림으로 돌아가던 로마군은 동맹국에 도착하여 따뜻한
대접을 받았으며 삼니움족이 로마와 공존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대접은 졸렬한 것이었으니
로마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은 “명예” 였는데.... 그 명에에 깊은 상처를 준 것입니다.
일설에는 로마군단병을 생포한 삼니움 족장이 고심하자 아버지는 군단병을 모두 처형하든지 아니면
조건없이 풀어주라고 조언했다는데.... 이유인즉 모두를 처형하면 로마는 쇠약해질 것이고, 조건
없이 풀어주면 로마인들의 호의를 얻을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족장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인들의 무장을 해제한채 속옷 차림으로 멍에 밑을 기어가도록 한뒤 로마로 돌려보낸 것 입니다.
“카우디움의 평화” 라고 불리는 로마와 삼니움족의 강화는 5년간 계속되었는데... 패배한 로마인의 특징
은 세가지로 요약할수 있으니 패전한 장수는 카르타고나 중국과는 달리 처벌하지 않았으니 명예심
을 제일로 치는 로마인에게서 당사자가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는 만큼 충분히 처벌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는 것이니 군단(레기온)을 구성하는 중대 지휘관은 필요하면 독자적
인 행동도 임기응변으로 취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니 이로인해 기동력을 살릴수 있었으며
삼니움족이 사용하는 투창 '필룸' 과 사각 방패 '스쿠툼' 등 삼니움족의 무기를 로마군에 도입
했으며 기존의 팔랑크스 편제를 폐지하고, 유연하고 전략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마니플-
코호트 단위로 군대를 조직하니..... 로마의 레기온은 훗날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를 쳐부숩니다.
셋째는 “로마연합” 의 확장과 확립을 계속 추진했으니 동맹국 확대는 로마군에 새로운 병사를 공급해
주고 보급선을 늘려주었으며 그 결과 삼니움족의 근거지를 포위하게 되었으며 군대를 배로
늘려 집정관 마다 2개 군단씩을 지휘하게 되면서 기원전 316년 다시 삼니움족과 싸울 준비를 마칩니다.
싸울 구실은 삼니움족이 제공해 주었으니.... 동맹국이 배반하는 경우는 독립해 자립할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개는 다른 강대국과 새로운 동맹을 맺었기 때문인데... 종주국은
항상 자기가 더 강하다는 것을 동맹에 보여주어야 하는데, 로마연합의 일원이던 카푸아가
삼니움족 쪽으로 돌아선 것도 저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나폴리 북쪽의 카푸아는 고대에는 나폴리 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진 도시로 남부 이탈리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카푸아를 제압하는게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니 이는 로마에는 큰 위협인지라 로마군이
출진해서는 먼저 삼니움 지원군 부터 격파하고는 바로 카푸아로 쳐들어 갔으니 점령후 카푸아
유력자는 처형했는데 훗날 카푸아가 다시 한니발 쪽에 돌아설 때 까지 카푸아는 로마에 충성하게 됩니다.
전쟁에 패한 나라는 처음 한번은 로마의 관용을 기대해도 좋지만 다시 배반하면 명예나 신의를 중시하는
로마는 가차없이 처벌하는 것서이니 카푸아를 되찾은 로마는 4ㄴ녀후인 기원전 312년에는 저 유명한
카푸아까지 아피아 가도를 건설하니 이제 삼니움에 접근할 고속도로가 생긴 것으로 그럼에도 주변을
다진 로마는 4개군단 상비군 힘으로 삼니움의 지배를 받고 있던 지방을 하나둘 로마쪽으로 돌려놓습니다.
로마인들은 산으로 올라가 삼니움족과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고 전략을 바꾸어 이들을 산
위에 고립시키는 전략을 폈으니...... 즉 삼니움족의 도시들 중 산 밑이나 중턱에 있는 도시를
공략하고, 이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평야 지대의 도시들을 공격해 로마의 동맹국
으로 바꾸는 방법이었는데 이 전략은 성공적이라 삼니움족은 계속 궁지에 몰리기 시작합니다.
3. 삼니움족과 켈트족등 네 민족과 전쟁
패자를 동맹국으로 삼고 요충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천천히 그러나 끈기있게 삼니움족의 근거지
포위망을 완성한 로마는 기원전 304년에 삼니움족과 새로운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6년후에
로마의 시선이 온통 남쪽에 쏠린 틈을 타서 기원전 390년에 로마를 점령해 반년동안이나 로마를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욕보이며 금은을 받고서야 물러갔던 켈트족이 다시 로마를 탐내기 시작합니다.
에트루리아인이 이 켈트족과 손을 잡고는 북쪽에서 야금야금 로마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으니 그러자
아펜니노 산맥 동쪽 아드리아해 쪽에 사는 움브리아인들도 여기에 합세했으니 로마에 밀려 점점
산지로 후퇴해 들어가던 삼니우족도 용기를 내어 합세하니.... 로마는 저 네 세력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로마군은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 세방면에서 네민족의 적과 싸워야 했는데 기원전 297년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6세에서 40세까지만이 아니라 평소 병역을 면제받던
60세까지의 예비군도 소집했으니.... 독재관 후보 파비우스는 귀족이라 평민의 지지가 염려
된지라 독재관 대신에 2명의 집정관에 퀸투스 파비우스와 젊은 보르미니우스가 선출되었습니다.
5번째 집정관에 선출된 파비우스는 민회에 나가 젊은 보르미니우스 대신 자기와 함께 3번이나 집정관
을 함께한 장년이자 평민인 데키우스를 선철해 달라고 요구했으니... 나이 차이로 인해 의견이
맞지 않아 통일된 작전을 세울수 없다는게 이유였는데.... 민회는 투표를 다시 해서 요구를 들어줍니다.
삼니움족이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들은 로마군은 부대를 넷으로 나누어서는 기동력을 발휘해
적진으로 순식간에 달려가서 격파하는 작전을 채택했으니 삼니움군을 상대한 자는 카우디움 협곡에서
항복했던 전직 집정관 센타움스였으니 네 나라 군대는 아펜니노산맥 동쪽 센티노땅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군 본진은 적진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진을 쳤는데 연합군은 켈트족과 삼니움 족이 먼저
로마군과 대결하고 그 다음에 움브리아군과 에트루리아군이 후속 전진해 전장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작전을 짜는데..... 에트루리아인 3명이 탈영해 이런 정보를 접한 파비우스는
작전을 수행중인 부대에 전령을 보내서는 파괴활동을 에트루리아 영토에 집중하라고 지시합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으니 자국이 당하고 있는 참상에 마음이 어지러워진 에트루리아군은 싸우기도 전에
전선을 이탈했으며.... 로마군 본대에 오른쪽은 켈트족, 왼쪽은 삼니움군 1만이 쳐들어 오는데 1군단과
3군단을 이끈 파비우스가 삼니움족과 맞서고 5군단과 6군단을 지휘한 데키우스는 켈트족과 맞섰으며
보르미니우스가 이끄는 2군다과 4군단은 삼니움족의 대동단결을 저지하기 위해 남쪽에 파병되었습니다.
삼니움족 병사도 켈트족 처럼 서전에는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전투를 오래 할수록 파괴력
이 줄어든다는 것을 파비우스는 알고 있었으니.... 로마군은 처음에는 정면대결을 피하다가
적의 전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려서 총력을 투입하는 전술을 채택했으니, 로마군 우익에서는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기하는 것이 임무인 기병대는 손실 없이 전력을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데키우스 부대는 반대로 서전 부터 총력을 다하는 전술을 채택했으니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한데 5군단과 6군단은 켈트족과 처음 부터 격전이 벌어졌으니 데키우스는 결판이 나지
않자 기병대까지 투입했는데 하지만 켈트족(갈리아인) 기병대는 용맹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으니... 나중에 카이사르는 갈리아인으로만 로마 군대의 기병대를 편성할 정도 였습니다.
게다가 기원전 297년에 전쟁터는 오래전 부터 켈트족이 정착해 사는 곳과 가까웠으니 데키우스의
기병대는 조국을 방어하겟다는 기개로 충만한 켈트족 기병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햇으며 차례로
스러지는 아군의 말에 눌려 중무장 보병까지 공황상태에 빠지는데 데키우스는 신들에게 로마군
에 승리를 안겨주면 목숨을 바치겠다고 외치니 패주하던 병사들도 이 맹세에 부끄라움을 느낍니다.
병사들은 앞장 서서 적진으로 뛰어드는 사령관의 뒤를 따랐고 파비우스군단에서도 마침
지원군을 보내오니 전세는 역전되었으며 파비우스도 기병대를 투입시키니 적의
보병대를 양쪽에서 협공하는 것이었으니 전열이 흐뜨려지자 삼니움군은 켈트족 병사들
사이로 도망쳐 들어갔고 파비우스는 기병대에게 켈트족의 배후를 공격하라고 명령합니다.
삼니움족의 총사령관이 전사했고 포위된 켈트족도 좁은 입구를 통해 숙영지로 도망쳐 들어가려다가
울타리 앞에서 로마군에 차례로 죽어나갔으니 이날 전투에서 적은 2만 8천명이 전사하고 포로
8천명이 나온 반면 로마군 전사자는 데키우스군단이 7천명에 파비우스 군단이 1천 7백명 이었습니다.
데키우스의 시신은 이튿날 동이 튼 다음에야 발견되었는데 신들에 대한 자신의 맹세를 지킨 셈으로
파비우스는 정중히 장사지내고 오랜 친구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쉴틈도 없이 북진하는 로마군에
켈트족은 달아났으며 움브리아인과 에트루리아인은 항복하고 “로마연합” 에 가담할 것을 약속합니다.
7년이 지난 기원전 290년 끈질기게 저항하던 삼니움족도 산에서 내려와 항복하고 “로마연합” 의
“소키(동맹국)” 가 되었으니 그들이 사는 산악지대 한가운데에 로마의 식민도시가 건설
되었으며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285년에는 식민지 베누시아(베노사)까지 연결되었으니.....
로마 가도는 6개로 늘어났고 이제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타렌토등 그리스 도시들과 접하게 됩니다.
4.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도시 타렌툼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하자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자연히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계
도시들 ('마그나 그라이키아') 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과의 분쟁에
개입하여 이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니 로마는 투리이의 분쟁에 개입하여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기원전 283년 나폴리를 로마연합에 끌어들인 탓에 해군을 갖게 됐는지 10척 로마 배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
중 가장 강력한 도시 타렌툼의 영해를 지나다가 태풍을 피하기 위함인지 타렌툼 항구로 피해 들어왔습니다.
타렌툼과의 조약에는 이들의 영해를 로마 선단이 지나면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타렌툼은 이 로마 선단을 공격했고, 5척의 배는 침몰하고 나머지 5척은 간신히 도주
하는데 이 일에 분노한 로마는 타렌툼에 손해배상을 요구했는데 타렌툼은 이
사절단의 그리스어 발음이 엉터리라며 비웃고는 쫓아내니 이에 로마는 전쟁을 결의합니다.
오늘날에도 타렌토(타렌툼)는 이탈리아 해군의 군항이니 천연의 양항인데 로물루스가 동족에게
밀려나 3천명을 이끌고 로마를 세우던 무렵에 그리스의 스파르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니 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도시로 타렌툼과 코린트인이 건설한 시칠리아
의 시라쿠사는 마그나 그라이카이 (대 그리스) 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테베 같은 유력도시들이 쇠퇴하고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40년 전에 동방정벌전을 벌이던 중에
요절하면서 다시 옛날 상태로 회귀 했는데...... 로마가 서서히 일어서던 무렵에
이탈리아는 사실상 북쪽 에트루리아와 남쪽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처음에는 손해배상 정도로 일을 끝내고 싶어 했으며 타렌툼의 거절로
원로원은 전쟁결의를 하긴 했으나 오랜세월 삼니움족과 싸웠고 좀 전에 켈트족과
에트루리아 및 움브리아등 4개 국가와 싸운 때문에 지치기도 했고 또 새로
획득한 넓은 땅과 민족을 관리해야 했기에 사실 전쟁 준비를 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렌툼이 로마 원로원의 전쟁 결의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게 문제였으니.... 스파르타인
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 치고는 불가사의 하게도 전쟁을 싫어하고 아테네처럼 통상민족
으로 살아온 탓인지 그들은 직접 싸우는 대신에 돈으로 용병을 사기로 하고는, 타렌툼은
그리스 서쪽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에페이로스 왕국에 사절을 급히 보내서는 도움을 요청합니다.
5.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 1세
알렉산드로스 대왕 어머니의 나라 에페이로스 왕국의 왕은 피로스 1세로 지중해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장군이었으니 40년전에 요절한 알렉산드로스대왕을 생각했는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우스를 흠모했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니 대왕의 뒤를 잇고싶어 했습니다.
“영웅전” 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니... “ 왕의 측근인 키네아스
가 피로스왕에게 물었으니..... 로마인은 뛰어난 전사라고 합니다. 게다가
많은 부족을 거느리고 있다는데 우리가 이기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일단 로마를 굴복시키고 나면 광대하고 풍요로운 이탈리아는 내것이 되는거지, 시간 문제일 뿐이야”,
키네아스가 입을 열렀다 “이탈리아를 정복한 뒤에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에 가깝다, 농경지가 풍부하고 인구도 많은 섬을 그냥 둘수야 없지, 아가토클레스가 떠난뒤 무정부 상태야”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도 “대왕증후군” 에 걸려있었으니 시칠리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강대국 카르타고에 전쟁을 걸어 한때는 지중해 서부에서 이름을 날렸었는데.... 피로스왕 에게는
그의 딸이 여러 부인 중에 하나였으며 아가토클레스는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9년 전에 병사했습니다.
키네아스는 다시 왕에게 물었다. “그럼 시칠리아를 제패하고 나면 우리의 원정은 끝나는
것입니까?” “시칠리아를 손에 넣으면 리비아와 카르타고도 바로 옆이니 아가토클레스
가 할수 있었던 일을 우리도 못할 리가 없지”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면 마케도니아
와 그리스 전체도 우리에게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이 질문에 피로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푹 휴식이나 취해볼까? 날마다 술을 마시며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지난 싸움을 회상하는거야” 키네아스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 지금 술에 취하면 안될까요? 금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즐겁게 회상할 전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제 새삼스럽게 많은 피를 흘리고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타렌툼이 35만명의 보병과 2만명의 기병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로마를 격파하고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을 자신의 세력에 넣으려는 욕심으로 요청을 허락하면서 먼저 키네아스에게
선발대로 3천명을 주어 보내고 본대인 2만명의 보병과 3천명의 기병, 2천명의
궁병에다가 5백명의 투석기병, 꼬끼리 20마리를 이끌고 기원전 280년 봄에 이탈리아에 상륙합니다.
에페이로스를 떠나기 전, 피로스는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와 동맹을 맺고 9천
명의 병력과 50마리 코끼리 부대를 받겠다는 약속을 얻는 데 성공하였으며 또한 테살리아의
기병, 로도스 투석병을 모집해 2만 5천여명에 달하는 병사들과 함께 타렌툼에 들어온 것입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8개 군단과 같은 수의 보조병
(Auxilia)을 편성한 8만명의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뉘어 각지에 배치했으니 2개 군단은
전직 집정관 바르불라의 지휘하에 베누시아에 주둔하며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견제
하여 피로스의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로 하고 2개 군단은 로마에 남아 방어를 맡았습니다.
남은 4개 군단은 그해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가 각각 2개 군단을 지휘하여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는 에트루리아를 압박하여 피로스
와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하고 라이비누스는 타라스(타렌툼)로 가면서 루카니아인들의
영토를 약탈하고 헤라클레아를 향해 진군했으니 그는 이곳을 점령해 피로스와 그리스의
식민지인 칼라브리아의 연결을 끊어 칼라브리아가 로마에 반기를 드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6. 병법의 천재 에페이로스왕 피로스 1세
그리스에서 이탈리아 타렌툼은 배로 2~3일 거리지만 피로스는 태풍으로 2천명의 병사와 꼬끼리 2마리를
잃고 타렌툼에 상륙했는데 타렌툼 시가지는 전쟁 준비라고는 눈을 씯고 보아도 찾을수가 없었으니 야외
극장과 체육관은 시민들로 가득찼고 약속한 37만 병력은 그림자조차 찾아볼수 없으니 피로스왕은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도 없는지라 즉각 극장문을 닫으라고 하자 타렌툼 시민들의 불만을 삽니다. 용병 주제에?
로마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피로스왕은 우선 자신이 데려온 26,500명의 병사와 꼬끼리 18마리만
데리고 싸우기로 하는데 로마도 북쪽 에트루리아 제압에 군대를 보낸지라 우선 절반의
병력만 집정관 레비누스가 이끌고 남하한 것인데 피로스왕은 타렌툼의 재력이라면 시칠리아
와 아프리카에서도 용병을 대거 모을수 있으니 저 37만을 허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전쟁을 할수 있는 상태가 아닌 로마는 동원할수 있는 전체 병력은 4~5만에 불과했으니 피로스왕과
타렌툼의 용병 37만 병력이 합세하기 전에 전쟁을 하기로 한 것이니... 첫 전투 장소가 타렌툼
에서 멀지 않은 헤라클레아이니 로마가 얼마나 초조했으면 그 먼거리를 황급히 달려 내려온 것입니다.
레비누스가 이끈 로마연합군은 로마군 8천명에 동맹국 병사 1만 6천을 합쳐 2만 4천이니 피로스
왕의 군대와 비슷한데 다만 피로스왕에게는 로마군으로서는 처음 보는 꼬끼리 18마리가
있었는데.... 밀집된 중무장 보병들의 방진인 그리스의 팔랑크스에 비해 로마는 레기온이니
“켄투리아(백인대)‘ 라는 핵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조직체로는 한결 견고해 보입니다.
기존 팔랑크스와 새로운 레기온의 대결인데 포진을 끝낸 로마군을 언덕 위에서 시찰하던 피로스는
키네아스를 돌아보며 “저 야만인들, 진영만 보면 그렇게 야만스럽지는 않은 것 같군,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내일 시험해 보기로 하지” 그리스인은 타민족을 모두 “바르바로이(야만인)” 이라고
불렀는데 로마군은 삼니움족과 싸우던 산지형인 세로진용이고 피로스는 가로로 긴 진용을 취합니다.
로마의 예상과 달리 꼬끼리는 중앙이 아닌 양쪽에 배치되었으니 피로스는 중앙의 단단한 로마군 진영은
아군의 팔랑크스에 맡겨놓고 전차에 해당하는 양익의 코끼리는 로마군 기병과 대결시키려고 했는데
피로스가 생각대로 보병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꼬끼리는 로마 기병을 격파하자 그 틈에 피로스의
기병대는 로마군의 배후로 돌아갔으니 한니발이 병법의 스승으로 생각한 피로스왕 다운 전술이었습니다.
포위된 로마군은 7천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전장에 남겨두고 패퇴했으며 피로스측도 전사자만
4천명에 이르럿으니 이들은 보충이 불가능한 그리스에서 데려온 병력이라 피로스왕
에게도 뼈아픈 승리인데.... 그래도 이 소식으로 로마 세력에 편이된걸 불만으로
품던 이탈리아 남부 세력들이 들어오면서..... 피로스왕도 병력을 일부는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서전의 승리와 병력 보충으로 기세가 오른 피로스왕은 북진해 로마를 공격하기로 결심했으니 로마로
진군하는동안 “로마연합” 에 가담하고 있는 부족들이 로마에 등을 돌릴 것이라는 것을 계산했는데
피로스의 기대와는 달리 나폴리와 카푸아 그리고 로마와 끈질기게 싸웠던 삼니움족 조차도 피로스
의 유혹을 거절했으니 로마에서 불과 60킬로미터 지점까지 진격한 피로스의 기세를 꺽어 버렸습니다.
아피아가도는 꼬끼리를 데리고도 순탄한 행군이 가능했으니... 로마는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가진게
없다는 뜻에서 “프롤레타리아” 라고 불리던 무산자 계급까지 소집해 대군을 편성해 기다리고
있었으니.... 피로스왕은 모든 것을 다 갖추었지만 인내심만은 모자랐는지 아니면 로마연합의 부족이
단 한 나라도 자기에게 귀순하지 않는 저 불가사의한 의문 때문에 기가 꺽인건지 그만 회군해버립니다.
타렌툼으로 돌아간 피로스왕은 로마와 타렌툼간 강화를 중재하겠다고 나섰는데 측근 키네아스를 로마
에 파견해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계 도시를 존중하고 불가침을 선언할 것 둘째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로마연합에서 해방해 독립시켜 중립지대를 둘 것” 을 제시했는데 그러면 삼니움족땅
한복판에 건설한 로마 식민지인 루체리아와 베누시아는 철수해야 하며 아피아가도도 불완전해 집니다.
피로스는 로마 지배층 부인들에게 중 값비싼 선물까지 딸려 보냈지만 로마 여인들은 그처럼
세련된 배려에는 익숙하지 않앗으며 로마인들은 강화를 진지하게 토의했는데 원래
그리스계 도시를 정복할 목적으로 시작된 전쟁도 아닌데다가 소문으로 들은 피로스
왕의 교묘한 전술과 꼬끼리에도 주눅이 들었는데 원로원의 대다수는 강화를 찬성합니다.
이 소식에 격분한 이는 노령으로 은퇴한 장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이니 아피우스 가도를 건설한
장본인으로 남의 팔에 의지해 원로원에 나타나서는 호되게 꾸짓었으니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떠나는게 강화의 전제조건이고 우리집 마당에 눌러앉는 적은 강화교섭의 대상이 될수 없다는
말에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제안을 거절하기는 무엇한지라 포로의 몸값을 가진 특사를 파견합니다.
피로스는 “나는 장사를 하러 온게 아니오, 전쟁터에서 결말을 냅시다, 다만 포로들은 강화체결을 미리
축하하는 뜻에서 석방할테니 데리고 가시오”, 파브리키우스는 600명 포로를 데리고 가지만 강화
가 성립되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로마 원로원은 토의 끝에 제안을 거절
하기로 하자 저 600명 포로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가족과 헤어져 다시 피로스에게 돌려 보내집니다.
당시 피로스의 시의가 로마 원로원에 밀사를 보냇으니 피로스를 독살하면 무슨 보상을
해줄거냐고 묻자 로마는 자초지종을 피로스왕에게 알리니 그는 고마운 나머지 저
600명 포로를 조건 없이 다시 로마로 돌려보내니 로마도 그냥 받을 수는 없다며
로마에 포로로 잡혀온 그리스 병사들을 돌려 보내니 참 아름다운 일이라! 이런게 신사도?
다음해 279년 봄에 로마가 신중하게 고른 전쟁터는 삼니움족의 땅에 루체리아와 베누시아 양대
식민지 중간에 있는 아우디우스라는 곳인데 로마세력권의 최전선이고 산 아래 자리한지라
피로스의 기병대와 꼬끼리부대가 종횡무진 활약을 허용하지 않기 위함인데 손자병법에
전투는 아군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유리한 방식으로 해야 승리한다 했던가요?
2명의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은 4만이고, 피로스왕의 군대도 이탈리아인 지원병이 가담한
덕분에 4만으로 대등했는데 숲이 양쪽에 바짝 다가와 잇어 전쟁터가 좁았으니 피로스는
지형에 맞추어 전술을 바꾸었으니 중무장 보병에 유연성을 주었는데 첫날은 기복이 많은
좁은 전쟁터는 말과 꼬끼리의 움직임을 둔화시켰으니 어느쪽도 우세를 잡지 못하고 끝납니다.
"동물도 죽음을 슬퍼한다. 적지 않은 종이 가까운 사이였던 동물이 세상을
떠나면 꽤 오랫동안 곁을 지킨다. 일종의 애도 의례이다."
얼룩말은 죽은 얼룩말의 사체 곁에 한동안 꼼짝 않고 머문다. 코끼리는 죽은 코끼리의
몸에 흙을 뿌려 매장하고 사체가 있는 장소로 반복해 되돌아온다. 코끼리의 ‘장례’
인 셈이다. 죽음을 목격한 원숭이는 상실감에 빠져 평소 보다 더 많은 상대와
털 고르기를 한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애도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이다.
30년 이상 세계 각지에서 코끼리를 연구한 미국 행동생태학자인 저자는 코끼리를 비롯해
다양한 야생동물의 인사와 놀이, 애도, 선물 등 10가지 의례 행동을 소개하하며 또,
인간과 동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들 의례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상기시킨다.
인간이 놀이를 통해 배우듯 동물도 놀며 생존과 번식 기술을 깨친다. 남아프리카의 나미비아
사막에서 연구하던 저자는 어느날 눈을 뜨자마자 새끼 사자들이 암사자와 함께 활기차게
노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은 사냥 연습을 하듯 서로 거칠게 부딪치고 머리와 목을 물며
장난을 쳤다. 기린도 목을 서로 감싸 상대의 옆구리를 들이박는 ‘네킹’ 이라는 싸움
놀이를 한다. 목을 얼마나 친밀하게 감싸느냐는 기린의 짝짓기를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선물은 동물에게도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갈라파고스제도 에스파뇰라섬 멸종위기종 코끼리
거북은 구애할 때 상대에게 야생 토마토를 선물한다. 코끼리거북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이기
때문이다. 푸른발부비새 수컷은 둥지를 지을때 쓸 나뭇가지나 돌을 암컷에게 건네며 구애한다.
환경이 바뀌어 더이상 둥지가 아닌 맨땅에 알을 낳는데도 저 조상의 습성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을 위해 인사가 왜 중요한지, 집단의 힘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 등을 다채로운 동물
행동 사례와 함께 제시한다. 저자가 찍은 생생한 사진도 풍성하게 실렸다.
인간과 동물, 자연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의례하는 삶’
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기술 발달과 사회적 거리 두기로 서로 단절된 현대인이
저 단단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관계 회복에 필수적인 의례의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 로 유명한 영국 작가 겸 영문학자 C S 루이스(1898∼1963)
가 ‘실낙원’ 서문에 남긴 말을 인용하며 의례의 의미를 강조한다. “의례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면 우리는 의례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의례를 치르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고는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거기에 집중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튿날 피로스왕은 또다시 전술을 바꾸었으니 좀더 평탄한 지역으로 로마군을 유인해 낸 것
인데 너무나도 교묘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로마군은 자신들이 유인당한다는걸 알아
차리지도 못했으니 전술은 효력을 발휘햇으니 로마군 전사자는 집정관 한명에 병사
6천명이었고 피로스측은 3천명으로 문제는 보충이 불가능한 그리스에서 데려온 병사들이라?
로마군이 패퇴하는 것을 보며너도 피로스왕의 가슴은 납덩이를 삼킨듯 침울했으니 “로마군
에게 이길 때 마다 아군의 전력도 줄어드는구나” 그 자신도 가벼운 상처를 입엇는데
훗날 역사가들은 이런걸 “피로스의 승리” 라고 말하니 로마군은 아무리 죽어도 끊임
없이 전력을 보충할수 있었지만 피로스왕은 이길수록 병력이 줄어들어 결국 패하게 된다는....
7. 피로스 왕 시칠리아로!
패주하는 적을 뒤쫓지도 않고 침울한 마음으로 타렌툼으로 돌아온 피로스왕에게 시칠리아 시라쿠사에서
참주 티니온의 사절이 왔으니 로마가 피로스에 대항해 동맹한 카르타고의 공격에서 그리스인들을
지켜달라는 부탁이라? 타렌툼이 약속한 37만 병력을 지원해 주지 않는데다가 전투 기계인 로마인
과의 싸움에 덧증이 없어 싫증이난 피로스왕은 자세히 조건을 따져 보지도 않고 덜컥 수락해 버립니다.
시칠리아만 손에 넣으면 다음은 부유한 카르타고라는 생각이 피로스왕을 들뜨게 한것 같은데
타렌툼에는 시칠리아 공략은 쉽게 끝날터이니 곧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고는 병력을
이끌고 279년에 메시나 해협을 건넛지만 그러나 시칠리아를 수중에 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3년동안 피로스왕을 괴롭힌 것은 카르타고가 아니라 동포인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 이었습니다. 타렌툼이고 시라쿠사고 신용이라고는 없는 그리스인들....
장기간에 걸친 번영과 화려한 도시문명은 그리스 이주민의 정신을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600명 로마
포로 송환에서 보듯 피로스왕의 기사도 정신은 소박한 로마인이라면 몰라도 난숙한 시칠리아
의 그리스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서로 협력할줄 몰랐고 내분과 배신에 우롱당합니다.
피로스왕은 카르타고를 상대할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그리스계 도시들에 군자금을 요구했고,
그리스계 도시들은 피로스왕이 시칠리아를 점령해서 통치할지도 모른다고 여겨 피로스
왕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는데다가..... 카르타고의 해군력을 제압할 방법이 없게 되자
피로스왕은 3년 세월만 허송한채 시칠리아 공략을 포기하고 다시 타렌툼으로 되돌아 옵니다.
8. 로마 피로스 왕에 승리
282년에 병력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타렌투 시민들도 시라쿠사의 그리스인들과 다를바 없었으니 신용과
약속을 지킬줄 모르는 자들이라.... 타렌툼은 군대를 재건하도록 도와주는 것 조차도 아까워했으니, 반면
에 3년동안 로마는 로마연합을 확고히 자기 세력으로 묶었는데 기원전 275년 여름 피로스는 자기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으니 로마군 2개 군단은 말벤툼(베네벤토) 에 있고 2개 군단은 남쪽 산지를 행군중이라?
피로스는 우선 말벤툼에 있는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했으니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피로스
가 선택할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니 로마군이 집결하기 전에 전투를 시작해야 하는
지라 피로스는 매우 서둘렀으니.... 동트기 전에 기습공격을 하기로 햇지만 산지를
행군하는데 그의 예상 보다 오래 걸리지라 말벤툼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밝아 있었습니다.
또 꼬끼리 울음소리에 놀란 주민들이 알린지라 로마군은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는데 집정관
마니우스는 피로스군이 미처 진형을 갖추기 전에 먼저 공세를 펼쳤으니.... 오히려
피로스 군대가 기습당한 셈인데 전황은 로마군이 우세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전투 시작 전
에 로마군 전령은 다른 로마군에게 급보를 전하니 이제 앞뒤로 포위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두뇌 회전이 빠른 피로스는 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으니 빠르게 타렌툼으로 돌아왔고 이해 초가을
피로스왕은 타렌툼을 떠나 자신의 고향 에페이로스로 돌아갔으니 우너정에 따라 나섰던
28,500명의 병사들 가운데 왕과 함께 귀국한 병사는 30%에 불과한 보병 8천명과 기병 500
명 뿐이라.... 전력이 엄청 줄어든 약체의 피로스는 그 3년 후에 스파르타와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라틴민족의 일개부족에 불과했던 로마는 당대 최고의 명장인 피로스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 부상했으며 2년후 이집트에 특사를 보냇고.... 피로스에게 승리를 거둔 전쟁터
말벤툼은 “나쁜 바람‘ 이라는 뜻이었기에, 좋은 바람이라는 뜻의 ”베네벤툼“ 으로 이름을 바끕니다.
9. 로마 타렌툼 점령
2년 후인 기원전 273년 로마군은 타렌툼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남에게 의지할 가망도 사라진
타렌툼은 바로 항복했으니 로마는 타렌툼을 6동맹국으로 받아들였는데 다른 로마연합과는
달리 타렌툼에는 자치권을 주지 않았으니 타렌툼을 직할 해군기지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군항 타렌토는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이고..... 걸프전쟁 때도 중동으로 가는 함대가 출항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시 영국 커닝햄 제독 함대가 독무대를 이루던 지중해에 히틀러와 손잡은 무솔리니
의 이탈리아 해군이 대두해 그리스를 노리자 영국 해군은 타란토(타렌툼) 공격을 결심하니
항공모함 함장 리스터 소장은 타란토항에 정박중인 이탈리아 군함 46척을 향해 1940년
11월 11일 영국 항공모함 일레스트리어스호에서 어뢰를 장착한 항공기 21대를 발진시킵니다.
문제는 연합군 항공기의 급강하를 막기위해 타란토항에 설치된 그물을 피해 급강하해서는 투하된 어뢰가
바다속으로 떨어져 정확히 군함 밑부분을 타격하는 기술이라.... 영국 해군은 오랜 정보수집과 실전같은
훈련을 통해 야광탄을 쏜후 어뢰를 투하해 어뢰 방지 그물을 지나 전투함 3척과 순양함 2척을 대파합니다.
멀리 동방에서 이 타란토 전투를 철저히 연구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일본 이라.... 일본 해군은 장교
를 타란토 현지에 파견해서는 이 타란토 전투를 철저하게 연구해 1년 후인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격에 성공하는데..... 이때도 하와이 진주만의 수심이 너무 얕은지라 비행기에서 투하한
의뢰를 미군 함정 아랫부분에 정확히 타격하는 훈련을 사전에 수없이 해서 마침내 성공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