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경기도 평택 진위에서 태어난 민세(民世) 안재홍은 평생 감옥을 드나들었다. 1919년 3·1혁명 이후 총 9차례, 7년 3개월의 옥살이. 한번 잡혀 들어갈 때마다 다시는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어두운 시간들을 가만히 버티지 않았다. 쇠창살 안에서 책을 펼쳤고, 역사를 파고들었고, 이 민족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고문보다 무서운 건 아마도 그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가 오랜 연구 끝에 도달한 결론 하나가 있었다.
'다사리'.
우리말 '다 사뢰다'(모두가 말하다)이자 '다 살리다'(모두를 살리다)라는 이중 의미를 품은 이 말이, 조선 고대의 민주주의 원리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화백(和白), 부여·고구려의 제가평정(諸加評定)으로 이어진 공동 결의 전통. 한자로는 '咸言(함언, 모두 말하다)', 이두로는 '和白'으로 표기되었다.
안재홍은 여기서 서구 민주주의 이론서가 아닌 우리 땅에서 자라난 민주주의의 씨앗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1945년 해방 직후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민족주의 사학은 단재 신채호가 1908년 '독사신론'을 발표하며 문을 열었다. 신채호는 유교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사관이 덧씌운 역사를 걷어내고, 단군-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주체적 역사체계를 복원하려 했다. 한영우, 김철준, 이만열 등 여러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평가하듯, 신채호는 유교적 중세사학을 청산하고 근대 역사학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었다.
박은식이 대종교(大倧敎)와 만나면서 유교의 틀을 벗어났듯, 이 흐름은 종교적 동력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단군신앙을 복원하며 창립한 민족종교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온기를 제공했고, 홍익인간·이화세계라는 건국이념을 항일투쟁의 언어로 되살렸다. 안재홍도 1917년 무렵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후 1944년에는 대종교 기본 경전인 '삼일신고'에 직접 주석(三一神誥注)을 달기도 했다.
중요한 건 안재홍이 민족주의 사학의 계승자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역사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지혜'를 찾으려 했다. 1937년 평택 고향에 칩거하며 '조선상고사감'과 '조선통사'를 집필하던 그는 고유의 언어·민속·문헌을 비교언어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면서, 한민족의 고대가 단순한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철학을 품고 있었음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안재홍이 주목한 고대의 정치원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삼(一·三) 사상이다.
조선 선민(先民)이 처음 발견한 세계관의 이치를 그는 '비'(허공·虛空), '몬'(물질·物質), '씨'(종자·種子)로 설명했다.
우주의 근원인 '일(一)'이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세 차원으로 펼쳐진다는 것.
현대적으로 풀면 천=정보·의식, 지=물질·질료, 인=기(氣)에너지로 이해되는 이 삼원론(三元論)은, 한국선도의 핵심인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세계관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안재홍은 이를 '한(一天)·둘(二地)·셋(三種)'이라는 고유 셈말로 풀어냈다. 서구 철학의 개념어를 빌리지 않고 우리말로 철학을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홍익인간 사상의 실천원리, 즉 성통공완(性通功完)이다. 자기 안의 밝음을 깨닫는 수행(성통)이 사회적 실천(공완)으로 확장되어야 비로소 홍익인간·이화세계가 이루어진다. 개인의 깨달음이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안재홍은 이 원리가 삼국유사의 단군사화에 이미 담겨 있다고 보았다. 환웅이 곰과 호랑이를 수행으로 이끌고(성통), 신시(神市)를 열어 세상을 이치로 교화한(공완) 것이 그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상의 정치적 표현이 바로 '다사리'였다.
안재홍은 숫자 '다섯(五)'에서 다사리의 뿌리를 찾았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다섯'의 '다사리'는 '섭리와 이치'를 뜻하며, 단군사화의 이화세계·홍익인간이 '다사리 주의의 근본이념이 태고에서 이미 연원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안재홍은 이렇게 썼다. "정치 곧 다사리이니, 접화군생(接化羣生)은 만생을 널리 사랑함이니, 홍익인간은 만민공생(萬民共生)이라. 이것이 그대로 민주주의요 민생주의이다."
정치는 다스리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사는 것이다. 1945년의 언어치고 꽤 급진적이다. 그러나 안재홍이 찾은 '다사리'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
고대의 화백이나 제가평정은 특수계급, 즉 귀족에게만 열려 있었다. 부·권력·지식은 공민(公民)에게만 독점되었다. 안재홍은 바로 이 지점을 손질했다. 고대의 다사리를 전민족·전민중으로 확대하는 것, 그것이 '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서는 민족주의가 '신민족주의'다.
구체적으로는 삼균주의(三均主義)였다.
경제적 부(富), 정치적 권력(權), 문화적 지식(智)을 전민중이 균등하게 누리는 것.
이는 조소앙이 '대한민국건국강령'(1941)에서 체계화한 개념이기도 하다. 조소앙은 고려사에 수록된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 구절에서 삼균론의 역사적 근거를 끌어냈다. 단군사화 이전 신시(神市) 시대의 사관이 쓴 문서에 이미 균등의 원리가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안재홍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신민족주의에 녹였다.
삼균주의의 사상적 배경에 대종교의 삼일신(三一神) 사상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환인·환웅·단군이 각각 조화(造化)·교화(敎化)·치화(治化)의 권능을 담당한다는 대종교 교리는, 삼균주의의 정치·경제·교육 3균과 구조적으로 대응한다.
다만 안재홍은 삼균은 권리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권리만 있고 의무가 없으면 신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만민개로(萬民皆勞), 즉 모든 사람이 노동이라는 의무를 균등하게 지는 것까지 포함해야 진정한 신민족주의라고 보았다. 오늘날 기본소득 논쟁이나 불로소득 문제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실패했다.
적어도 당대 정치에서는 그랬다.
해방 직후 그는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참여했다가, 이 단체가 좌편향하자 탈퇴했다. 1945년 9월 국민당을 창당하며 '초계급적 통합민족국가' 건설을 내걸었으나, 냉전의 격랑 속에서 중도파가 설 땅은 점점 좁아졌다. 1947년 1월 입법의원에서의 수정동의안은 44대 1로 부결됐다. 찬탁파라는 낙인이 찍혔다.
백범 김구조차 "도로무공(徒勞無功)일 것"이라 했지만, 안재홍은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민정장관직을 수락했다.
이 대목이 흥미롭다.
질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는 자의 논리는 무엇인가.
신라의 물계자(勿稽子)가 전공을 세우고도 개인 공명심에 집착하지 않고 피은(避隱)을 택했듯, 안재홍도 국가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이상에 목표를 두고 풍파 많은 세상길을 걷고자 했다. 홍익인간의 실천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1950년 5·30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제2대 국회의원이 된 안재홍은 그해 9월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1965년 3월 평양에서 생을 마쳤다. 향년 75세.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