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10년, 로봇이 우리가 하는 일의 절반을 가져갈 것이다. 그래도 두려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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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비용을 줄이자는 것이었습니다.” 켄 딘은 말했다.
2000년대 초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인근 스프린트Sprint에서 딘은 IT 매니저로 우편물실을 관리했다.
미국의 3대 데이터 센터인 이 회사에서는 청구서 봉투 작업을 하는 직원만 해도 수백 명이었다.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두 가지가 우편료와 인건비였습니다.” 딘은 말했다. 많은 대기업들이 실감하고 있던 것을 그도 알게 되었다. 전자청구서로 우편료를 줄일 수 있고, 기계가 사람들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데이터 센터 안에서 하는 일의 80~90퍼센트를 로봇 한 대가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 데이터 센터의 효율성을 높이는 테크놀로지를 찾아내는 것이 그의 업무가 되었고, 그는 그 일을 잘 해냈다. 자연히, 비용이 크게 줄었다. 직원도 크게 줄었다.
딘이 도입한 효율성 극대화 테크놀로지는 피할 수 없는 종착지를 향해 차근차근 발전해 나갔다. 결국, 2008년에 딘은 스프린트의 마지막 데이터 센터의 문을 닫았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직원 70명은 일자리를 잃었다.
딘은 노동 시장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주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망연자실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자신의 가치와 자신감이 자신이 받는 월급에 기초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라는 맥락 밖에서도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편업무는 이제 왕년의 일이 되었다. 오늘날, 작업장 자동화―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두려움―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어 택시에서 운전기사를, 저널리즘에서 기자를, 그리고 식료품점에서 점원을 몰아내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를 설명할 때 경제 성장과 경제 축economic pivot을 구분한다. 성장은 상품과 서비스를 증가시킨다. 축은 이러한 상품과 서비스가 생산되고 전달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영화를 생각해 보자: 한때는 영화를 보려면 벽돌과 모르타르로 지은 대여점을 찾아가야 했지만, 이제는 클릭 한 번으로 디지털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점원은 필요 없다.)
노동시장이 축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들 말하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써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시티그룹Citigroup과 옥스퍼드 대학교의 공동연구 결과를 보면, 앞으로 10년 안에 직업의 47퍼센트가 자동화될 수 있다.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전체 직업의 거의 절반을 이미 존재하는 기술들―드론, 자율주행 자동차, 자동화 매점, 로봇 점원, 자가 학습 소프트웨어, 3D 프린터, 기타 인공지능들―이 대체할 수 있다.
미국 제조업 일자리 상실의 가장 큰 원흉은, 교역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라고 경제학자들은 지적한다. MIT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 이후에 미국에서 산업 로봇 한 대를 새로 들여놓을 때마다 3~6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로봇은 미국에서만 수백만 개의 경력을 단절시킬 것이며, 이런 경력 단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쓸모없게 된 기술을 가진 중간 경력자로 전락하여 불완전 고용 상태나, 더 나쁜 경우에는, 실직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는,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 안정감을 주던 예측 가능한 노동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됨에 따라, 가족과 지역사회 전체에 충격을 줄 것이다.
솔직해지자: 불확실한 취업 전망은 가장 깊은 수준의 두려움을 유발한다. 평범한 현대인들의 모범은 열심히 일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사람이다. 앞으로 일자리를 가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은 인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우리의 전제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내러티브를―능력과 시장의 힘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우리는 시장을 초월하는 가치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이야기인지를―믿고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시대이다.
우리가 어느 쪽 이야기를 따르느냐에 따라 일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과 행동이 결정된다. 그러나 한 이야기만이 로봇의 그림자가 밀려오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일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
일에 대한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이야기를 우리는 물질주의 내러티브materialist narrative라 부를 것이다. 물질주의 내러티브의 뿌리는 인간을 생존능력에 따라 규정하는, 다원의 자연선택 메커니즘이다. 경쟁적인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술skills을 가진 사람들은 내일을 이어가고, 그 기술을 능력주의 사회의 특권으로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다.
물질주의 내러티브에서는 인간 목적보다 실용주의―유효하면, 살아남는다―가 먼저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그리고 심지어 대부분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이, 이 내러티브에 기대어 이렇게 생각한다.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서 인간끼리 경쟁하고 있을 때, 이 내러티브는 고학력과 훌륭한 경력을 갖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구미에 당기는 것이었고, 심지어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인간보다 뛰어난, 인간 아닌 것들이 이 경쟁 안으로 들어오자, 더욱 혼란스러운 현실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014년 다큐멘터리 〈인간은 필요 없다〉Humans Need Not Apply에서 그레이C. G. P. Grey 감독은 인간을 말에 비유했다. 새로운 형태의 운송수단과 기계 장치 때문에 1915년 이후 말 개체수가 급감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더 나은 테크놀로지가 더 많은, 더 나은 일자리를 말들에게 만들어 준다고 말하는 경제 법칙은 없다.…그러나 말 대신에 인간을 대입하면, 사람들은 그럭저럭 맞는 말이라고 생각을 바꾼다.”
일터에서 기계들이 마치 우리의 동료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인데다, 조만간 컴퓨터의 복합성이 우리 두뇌의 복합성을 능가하게 되면, 인간이 대체가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윌리엄 데이비도우와 마이클 맬런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썼듯이, “우리는 조만간 경제 가치가 제로인 시민 무리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이러한 전망에는 비관이 깔려있다. 우리의 삶의 가치를 경제적 생산성에서만 찾는다면,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절반이 시키는 대로 하는 로봇에 의해 대체된다면, 우리가 서 있을 곳은 없다. 우리는 모든 가치를 강탈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질주의 내러티브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 인류가 생존의 대격변기에 있다면, 사람들은 창조가 아니라 소비에, 협력이 아니라 경쟁에 몰두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사실을 더 잘 안다.
인간은 살아남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관계 능력과 도덕 감각도 물려받았다. 우리는 자기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또한 이기심을 버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도 있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다. 우리는 소비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발명하고, 설계하고, 생산한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신중하게 설계되었다.
이것을 물질주의 내러티브는 완전히 놓치고 있다. 우리의 ‘노동 불확실성’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른 틀, 우리가 창조 내러티브creation narrative라 부를 그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길, 하나님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관계적이시다. 창조 내러티브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인생은 지극히 가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다(창1:26-27).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가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에 담긴 뜻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인간은 설계 되었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며 관계적인 설계자를 닮았다면, 우리 인간을 말이나 컴퓨터, 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 않은 어떤 것과 비교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회의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여기에는 신학적인 이유도 있지만, 또한 실제적인 이유도 있다: 마이클 해리스가 〈결핍의 상실〉The End of Absence에서 썼듯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가장 복잡한 컴퓨터 시스템, 그리고 가장 발전된 인공지능에도 “단 한 명의 인간 지성의 잘 연마된 내러티브 원동력이 결여되어 있다.” 소프트웨어와 회로는, 뇌의 기계적 처리를 모델로 삼지만, 지성의 겹겹이 쌓인 복잡성을 완전히 복제할 수는 없다. 이 점을 과학자 에머슨 퓨Emerson Pugh는 이렇게 지적했다: “인간의 뇌가 매우 단순해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 단순해서 우리의 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인간에게는 특별한 소명과 은사들이 있다. 일은 유쾌하지 않은 수고, 살아남기 위한 수단, 또는 지위와 신분 추구를 위한 수단 그 훨씬 이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소비자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창조적으로 섬기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반영하는 우리의 능력들을 활용하여 당신께 영광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북 캘리포니아 대학교 프레드 브룩스 교수는 그리스도인이고 세계 최정상 컴퓨터 과학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돌봄을 실행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은 양도할 수 없는 자산이라고 강조한다. “로봇이 간호사의 일을 돕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브룩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봇이 인간처럼 그것을 할까요? 아닙니다.” 인간들이 하는 여러 가지 서비스들은 간단하게 자동화될 수 없다. “로봇이 실수 없이 더 나은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마침내 로봇들이 당신과 대화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로봇이 인간과 똑같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양심과 도덕적 인식은 우리를 외부의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영적인 주체가 되게 한다. 창조 내러티브는 인간을 도덕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구글 모기업의 집행이사회 의장인 에릭 슈미트가 유저의 데이터를 충분히 제공 받는다면 자기 회사는 “당신을 더 스마트하게”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구글의 알고리즘들은 결로 인간을 너 낫게 만들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가 점점 더 데이터 중심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 줄 것이지만, 결코 도덕적 탁월함이나 더욱 깊이 사색하는 도덕적 상상력을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자유행동free agency과 의무obligation; 타인들과의 의미 있는 연결; 긍휼과 선의지와 헌신, 모두가 있다. 우리 존재의 가장 심오한 속성들은 결코 프로그램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속성들은 논리가 아니라 영혼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우리의 영광이다.
안녕, 비인간적 노동이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닭과 오리를 처분하는 섬뜩한 일을 노동자들이 직접 했다. 이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한 노동자가 어셈블리라인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30초마다 컨베이어가 털이 숭숭한 오리 몸통을 그 노동자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는 신속하게 내장을 제거한다. 30초 뒤에 또 다른 오리 몸통이 온다. 그렇게 몇 시간씩 같은 일을 반복한다.
모든 일―아무리 일상화되고 또는 따분한 일이라 하더라도―은 서비스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똑같이 인간다운 것은 아니다.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자동화에는 낙관의 이유도 있다. 특히 창조 내러티브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렇다. 기술 혁신으로 우리의 노동의 질이 향상되면, 우리는 창의성을 발휘하고 협동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수 있다.
분명히,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에도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마치 시지퍼스의 그것처럼 끝없이 되풀이 되는 고역을 대체하는 지능형 기계들이 그런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들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 기술에 의한 파괴적 혁신technological disruption은 노동으로부터의 추방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또 다른 형식의 노동으로의 초대일 수도 있다. “인간의 창의적 능력은 의미 있는 노동의 필수 요소입니다.” 리디머 장로교회 ‘신앙과 노동 센터’ 이사 데이비드 킴이 말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반복하는 기계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일도 나름 가치 있을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열정을 갖고서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화가 가져온 엄연한 현실 앞에 우리는 서 있다. 팀 이스트릿지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북미의 한 대형은행에서 그는 많은 동료들을 서서히, 그러나 불가피하게, 대체하게 될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그의 알고리즘은 수작업을 제거하여, 이론적으로는, 직원들이 더 인간적인 일―고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린다.
그러나 음산하게 다가오고 있는 이러한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일터로 모든 사람들이 단절 없이 옮겨가지는 못할 것이다.
“자동화는 마치 대양의 파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트릿지가 말했다. “멀리 있을 때는 야트막하고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오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파도의 물마루에 올라타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나머지는 뒤쳐져 떠내려가거나 기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대양의 파도는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게렛 복음주의 신학교의 윤리학자 브렌트 워터스에게, 이것은 틀린 질문이다. “저는 자주 학생들에게 이러한 추세들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빙산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워터스가 말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예측하기 힘든 불안정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미국의 포스트모던 경제―대부분 물질주의 내러티브의 산물이다―는 목표 없는 수단이라고 비평가들은 지적한다. 이러한 경제는 진보를 촉진하지만, 정작 앞에 있는 것이 정말 더 나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시장은 사람들의 인격을 따지지 않는다. 시장은 노임과 급여를 초월하는 인간 가치에 대해서는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시장은 선지자도 아니다. 시장은 선지자처럼 우리를 선하고 올바르고 참된 곳으로 인도할 수 없다. 우리가 만든 시장은 필요에 따라 사람들과 일들을 이러 저리 휘젓는 장치일 뿐이다.
우리가 이 기계를 멈출 수는 없다면, 이것을 다룰 수는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성인 인구 전체에게 일종의 기본소득universal income, 즉 정부 보조금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제한하고 있다. 미국은 알래스카 상설 기금Permanent Fund of Alaska[알래스카 주는 석유 판매 수익을 재원으로 모든 주민에게 연말에 현금을 지급한다] 같은 기본소득 보장 제도들을 실험하고 있다.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면, 자동화로 거둬들인 부를 로봇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분배할 수 있을 것이다. 일자리가 사라진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 제도가 없다면, 정부는 사회안전망 확장이나 직업전환 교육을 통해 로봇 관련 실업에 대응해야 하는 압박을 더 강하게 받게 될 것이다.
매력적이고 잠재적으로 필요한 것이긴 해도, 비용이 많이 드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창조적 노동의 대안은 아니다. 정부의 지원이 봉사할 기회의 상실을 구제할 수는 없다. 은행의 돈이 인간의 번영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물질주의 내러티브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시장은 진보를 촉진하고, 정부는 우리가 [진보에 따른] 부수적 피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장치들을 제공할 뿐이다.
경영 내러티브 바꾸기
우편물실 관리 매니저 켄 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딘은 스프린트의 마지막 남은 프린트 데이터 센터를 자동화하면서 직원들이 해고될 날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해고자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렸다.
노동대체 기술을 통한 효율성 증대에 10년 동안 매진한 그가 내린 결정은 자신도 대체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저는 이전보다 더 깊이, 더 풍성하게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덕분에 나의 관점을 바꾸었고, 나의 진짜 가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딘은 직원들이 그들의 가치와 자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신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 자신도 지위와 생존이 목적이었다.
딘은 물질주의 내러티브에서 창조 내러티브로 이동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그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비영리단체에서 재정 컨설턴트로 봉사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동화의 위협이 교회에는 최고의 기회이다. 사람들에게 경영 내러티브를 바꾸도록 공개적으로 권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동화 경제에서 교회의 핵심 과제는 물질주의 내러티브에 매여 있는 우리를 풀어내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더욱 신실하게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직업이 있건 실직을 했건) 모든 성도들이 보편적 존엄성과 가치, 관계와 공동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봉사의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비전을 품고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모든 노동에는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와 혁신적 가치가 있습니다.” 리디머 장로교회의 킴은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들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비전을 확장함으로써 자신의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치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이끄는 그리스도인들은 불가피하게 다양한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창의적 봉사와 능력 개발의 새로운 표현들을 탐구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앨라배마 주 셀마에 있는 ‘블루 진’ 교회는 소프트 스킬soft skills 훈련, 일자리 지원,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몇 가지 사역을 육성하고 있다. “우리의 지역사회를 변혁하는 것은 교회로서 우리의 사명의 한 부분입니다.” 판사이자 블루 진 교회의 설립자 중 한 명인 밥 암스트롱이 말했다. “이러한 훈련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기능입니다.”
미국에는 네트워킹 이벤트, 일자리 전환 워크숍, 훈련과 멘토십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교회들이 매우 많다. 파라처지 단체들은 지역 교회와 비영리 단체를 통해 실업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자동화가 심화될수록, 오히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창의적 대응은 교회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기업가들은 테크놀로지와 실직의 현실을 거론할 수 있는 아마도 최적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단순히 직원들에게 공정한 훈련과 적절한 급료와 혜택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산업 분야든 기업인들은 직원들의 기술 향상과 재교육에 투자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생산적인 직원으로 만들 수 있다. 직원을 해고하거나 대체해야 할 때조차도, 해당 직원은 입사할 때보다 더 가치 있는 기술과 기회를 갖추고서 떠날 수 있다.
기독교 기업들은 직업 훈련을 시킬 뿐만 아니라 직업을 창출할 수도 있다. 켄터키 니콜라스빌의 제이스 플레이스 커피 앤 카페J’s Place Coffee and Cafe는 수익을 인근의 중독자 회복 센터를 지원하는 쓴다. 이 카페는 “진짜” 사역을 단순히 지원하는 곳이 아니다. “비즈니스는 사역입니다.” 그 중독자 센터를 운영하는 리바이브 미니스트리즈의 이사인 토드 존스가 말했다.
제이스 플레이스는 경력 바리리스타를 채용하는 대신에 이 치유센터의 사람들을 고용한다. 일하고 봉사하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기회를 그들에게 제공하여, 그들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제이스 플레이스의 목표다. “경영의 잣대로 재면, 이것은 리스크입니다. 그러나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그 중심에 있는 일이 보입니다.” 존스는 말했다.
고무적이지만, 교회 연계 채용 사업이 자동화의 도전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는 단지 가혹한 사회적, 경제적 충격에 대한 완충장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의 일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스토리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고 리처드 존 뉴하우스가 한 말이다.
이 일은 교회 프로그램에서만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가치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교회의 모든 설교와 메시지에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자동화의 위협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인간성에 대한 진정한 스토리를 일깨울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이다. 이 스토리는 곧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를 깨우는 스토리이다. 이 스토리는, 항상 그러했듯이, 긴급하다. 우리의 노동과 열정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물질주의 내러티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서도 말이다.
우리는 생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롭고 혁신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우리는 노동시장에서의 성공을 사회적 특권과 연결 짓는다. 우리의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사업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가 출신이 많다. 은연중에 우리는 좋은 인생은 가시적인 성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부지런한 노동자를 일러 “기계”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생산성과 성공을 논하는 자기계발서와 논문들이 넘쳐난다.
의미를 포기하고 활동성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곳에서,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기란 더욱 어렵다. 인간은 결국 그 게임에서 패자가 될 것이다. 로봇은 결코 잠자지 않는다. 결국 우리 몫의 “생산성”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내러티브 안에서 살아가는 결과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두려움과 절망의 불가피한 증가이다. 자동화된 미래에 계속 발전하고 적실성을 유지하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하려는 우리의 욕구는 더욱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무자비한 능력주의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기 위해서 우리는 깊은 의미는 포기하게 될 것이다.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이력서 품성résumé virtues (직업 능력들)을 배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칭찬 품성eulogy virtues(인간적인 선함과 성품)의 함양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이 세상의 관심사와 추구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지향점을 창조 내러티브에 맞추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6:33)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실제적이고 적실하다.
실직은 실제적인 고통과 파괴를 가져올 것이다. 신앙인들을 위한 새로운 규범에는 예측 불가능한 이직 주기, 실직 기간, 또는 새로운 일을 익히는 훈련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소식은 교회가 실직의 고통과 그에 따르는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의 상실을 완화하는 곳임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실직한 사람들에게 좋은 곳이다. 그러나 실직한 사람들이 교회에 좋은 것이기도 할까? 그런 사람들이 셀마의 블루 진 교회에 있다. “어느 주일이든, 은행장과 실직한 사람이 나란히 앉아 예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회 지도자 암스트롱이 말했다. 이런 그림을 통해 우리는 실직자와 직업이 있는 사람 사이의 간극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넓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따라서 한 가지 가능한 교회의 대응은, 다른 직업을 가질 기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리더십이나 사역 지위를 제공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창조 내러티브는 하나님의 영원한 스토리 안에서 시작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신앙의 사람들을 초대했다. 앤디 크라우치는 The Tech-Wise Family(기술을 지혜롭게 다루는 가정)에서 일은 “인간의 노력과 기술을 통한 세상의 신실한 변혁이며, 그렇게 하여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직업이 바뀐다면, 우리는 일 곧 “신설한 변혁”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못하게 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킴은 말했다. “우리가 인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더 잘 어울리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일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미래의 직업 시장이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 말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직업 대체의 복합성과 자동화의 불확실성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창조 내러티브를 우리의 가장 큰 스토리로 수용한다면, 인간은 결코 가치, 관계, 그리고 일하고 봉사하는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6:34)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이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이 확실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