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제3공화국 시절 우리나라 3대 요정(청운각, 삼청각, 대원각)이었던 대원각이 1995년 <대법사>란 이름으로 사찰등록이 되고, 1997년 지금의 이름인 <길상사>란 이름의 절이 되었다.
입구엔 <삼각산 길상사>라고 씌어 있었다.
이절의 전신이었던 대원각은 김영한이라는 기생이 주인이었는데, 그녀는 시인 백석의 애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스님께 불도량으로 등록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1995년 송광사의 말사인 <대법사>란 이름으로 등록되게 된다.
당시 대원각은 대지가 7,000평이었고, 싯가로는 1,000억원대에 이르는 가격이었다고 한다.
그 2년후 1997년 그녀는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게 되었으며, 대법사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란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길상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법정스님이 기거하셨던 진영각이 있고, 스님의 유골의 반이 모셔져 있다. (유골의 반은 송광사에 모셔져 있다.)
이곳의 옛주인인 김영한은 젊은 시절 백석을 사랑하여 만주로 도망칠 생각까지 하지만 김영한을 위해 만주행을 포기한 백석으로 인해 그들은 헤어지게 된다.
당시 백석의 심정을 담은 시를 하나 소개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기생과 유학파 도련님과의 사랑이야기, 집안의 반대, 남북분단으로 안타까운 영원한 이별
어찌돼었든간에 그들은 헤어지고 김영한은 서울로 내려와 고급요정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을 잊지 못하고 매 해 백석의 생일 7월 1일이면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
또한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여 젊은 시인들에게 지속적인 후원을 함으로써 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달랬다.
그리고 결국 김영한은 1999년 죽어 그녀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에 한 줌의 재로 뿌려졌다.


천주교인인 최종태 조각가가 만들어 보냈다는 종교간의 화합의 염원이 담긴 성모마이라를 닮은 관음보살상






김연한이 모든 것을 기증한 후에 염주와 길상화라는 법명 하나만을 가지고
"죄 많은 사람이 바라는 것은 기생들이 옷을 갈아 입던 팔각정에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라고
그의 염원이 이루어져 범종이 울리고...















법정스님의 영정사진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유골을 모셨다는 작은 표시가 되어 있는 진영각



길상사를 둘러보고 누들로드로 가서 국수를 먹으려 했는데,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는 소리에 발길을 돌려 광장으로 향했다.

이곳 성북동이 각국 대사관저가 많아서 외국인도 많네요.














첫댓글 모처럼 부부가 행복한 나들이를 하였네....축하한다, 항상 행복하여라.....구경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