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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신 시집 『부처님 소나무』
자아와 타아, 그 무량한 심법
김 창 희(시인)
1.공간적 언어의 자맥질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이는『논어論語』의「옹야편雍也篇」에 나오는 말이다.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공자의 말씀은 몇 천 년의 시공간을 건너왔어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언어의 미적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앎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충동설에서 말한 쾌락설이나, 네덜란드 사학자 호이징가가 인간의 본성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 보았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정신적 품격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의 여러 가지 특성 중 하나도 그것을 향유하는 향유자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을 대할 때의 느낌이나 좋은 음악을 듣고 난 직후의 감동, 혹은 문학작품을 읽고 난 뒤 제일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다” “재미없다” 혹은 “새롭다” “감동받았다”등의 감정표현이다. 동물적 수준의 생존을 위한 행동이 아닌 놀이의 정신적 질서를 고취시키고자 하는 고급한 행위이다. 예술의 한 갈래인 문학이 글쓰기를 통한 즐거움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詩에도 놀이의 성질이 짙게 배어있다고 할 수가 있다. 시어의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언어를 집어넣고 빼기에 골몰하는 시인들의 시쓰기는 일종의 글자놀이이다. 시어가 놓인 자리에 따라 시의 맛이 달라지고 의미가 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토씨 하나에도 시의 긴장감이 사라지거나 생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마다의 개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영신 시인이 그의 세 번째 시집『부처님 소나무』를 상재 하였다. 1991년「현대시」로 등단한 시력 20년 가까이 된 시인치고는 과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을 내 놓으면서 시인은 ‘문학과창작 작품상’을 수상하였으니 오랫동안 시어의 담금질을 거듭해 왔던 그의 시편들이 생생하게 줄기를 뻗어나가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봄볕 속을 걸었다. 환한 볕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자기 몸짓으로 노글노글, 또렷또렷, 살아나고 있다. ..중략..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언어를 끌어안고 맘껏 뒤흔들고 종 부리듯이 제대로 한번 부려보길 꿈꿔본다.” 이영신 시인이 시집『부처님 소나무』의 서두에 적은 시인의 말 중 일부이다. 봄볕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자기의 몸짓대로 또렷하게 살아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시인은 시인의 생태대로 그것들을 함유하고 있는 언어를 끌어안고 뒤흔들며 치대어 마음대로 표현해 보고 싶은 창작적 놀이의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시인의 첫 시집 『망미리에서』의 시편들이 삶과 사물의 희노애락을 진솔하게 드러내주는 풋풋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 『죽청리 흰 염소』에서는 이미 자아와 타아의 말 걸기로 객관적 진실을 형상화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박제천 시인은 이를 재미와 긴장을 갖춘 ‘제정신 찾기’의 시쓰기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영신 시인의 세 번째 시집『부처님 소나무』는 제목에서 보듯이 수록된 시편들이 결코 가볍지가 않다. 오히려 무겁고 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어를 종 부리듯 부려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는 시어의 날을 예리하게 세우고 날렵하게 시적 대상인 타아의 존재 속을 관통하고 싶은 시인의 또 다른 함의로 보인다. 고도의 숙련공들은 몸놀림이 현란하지 않은 법이다. 물 흐르듯 스치고 지나가는 동작들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섣불리 흉내 내지 못할 경이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자아自我의 타아화他我化 혹은 타아의 자아화로 서로를 관통함에 있어 자극을 느끼지 못할 만큼, 대상에 대해 앎을 가질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이영신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무거운 질량의 시임에도 가벼운 차림으로 봄나들이를 나서듯 간결한 느낌을 갖게 하는 시편들이 많다. 봄 햇살 속을 다투어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처럼 작지만 또렷한 존재감으로 팽창해나가는 시어의 시적 파장을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평이한 시어들은 따뜻하면서도 오히려 낯설어 보이는 새로움이 있다.
떡개구리 한 마리가 연잎 문 위에 달랑 올라앉아
동네구경을 하고 있네.
떡개구리 이 산중에 이사와 인사떡을 돌리고 싶어지네.
붉은 팥고물 듬뿍 얹어 방금 쪄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시루떡을 한 접시씩 돌리고 싶어지네.
하늘타리네도 한 접시,
족두리네도
살구네도 한 접시,
엊그제 칡덩굴 아래에 두렵게 허물을 벗어 놓은
누룩뱀에게는
줄까 말까
아직 맘을 못 잡았네.
식구 많은 박새네는 시루째 다 주고 싶어지네.
애기 다람쥐도 빠뜨리면 섭섭하겠네.
마음만 그득
눈알을 이리저리 크게 굴려보며 긴 다리 쭈욱 뻗어보며
새로 이사 온 둠벙으로
신바람 나서 첨벙 뛰어드네.
뛰어드네.
ㅡ 「둠벙 파놓자 개구리 뛰어든다」 전문
위의 시「둠벙 파놓자 개구리 뛰어든다」는 이사를 한 후 붉은 팥죽이나 팥시루떡으로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던, 인심 좋은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이다. 또한 커다란 연잎 위에 올라앉아 새로운 이웃들을 돌아보는 떡개구리의 시선은 독자로 하여금 한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재미를 갖게 한다. ~네로 반복되는 종결어미가 인사떡을 돌리고 싶은 떡개구리의 정감어린 삶의 심성을 리듬감 있게 끌고 가면서, 시적화자와 대상과의 관조적 거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적장치로 작용되고 있다. 화자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견자로서의 친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친화성은 어느새 시의 공간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시루떡 한 쪽씩 모두 떼어줄 것 같은 생동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꽃이 꽃잎을 피우느라/ 땀을 흘리고 있자/ 지나가던 시간이 재미있다고 다가왔다./ 다가와서 과꽃 잎에 진분홍색을 칠해준다./ 조심스레 천천히 칠하다가/ 넋놓고 칠하다가/ 허리가 아프다고 / 쪼그려 앉아 칠해주고 있다./ 이제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햇살의 등을 민다./ 먼저 가라고 등을 밀어낸다./ 바람이 다가와 걱정스레 시간의/ 귀밑머리를 귀에 꽂아준다./ 달님도 들여보내고/ 별들도 들여보내고/ 시간은 과꽃 옆에서 마냥 앉아만 있고싶다./ 붙박이라도 되고 싶다.
-「꽃처럼 시간처럼」전문
이영신 시인의 시가 재미있게 읽혀지는 것은 의인화한 시적상관물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속도와 표정을 입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꽃처럼 시간처럼」은 꽃잎을 피우려는 과꽃과 지나가던 시간과의 관계를 마치 한편의 드라마나 영화의 플롯처럼 전개시켜 나간다는 점이다. 시적 화자가 전지적 관찰자의 모습으로 한여름 밤 모깃불 옆에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시의 행간을 이끌고 있다. 이는 또 꽃과 시간의 속성을 통하여 다의적인 사유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어린이에서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시를 감상하고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꽃잎을 피우느라 땀을 흘리는 과꽃 옆을 무심히 지나던 시간, 재미삼아 과꽃 옆에 머물러 꽃잎에 진분홍색을 칠해주다가, 천천히 넋놓고 칠하다가 햇살도 보내고 달님, 별님도 들여보내고 끝내는 과꽃 옆에 그대로 붙박이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순정한 마음이 넘치는 이 시편은, 시적 대상인 시간의 심리적 변화를 점층적으로 보여준 시행의 배열 효과가 탁월하다. 반면에 시간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시적대상으로 끌어 와작은 꽃 한 송이의 삶이라도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만물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우주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네 삶에 만물이 깃들어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시이다.
금수산 허리께 1207번지/ 병을 앓다가 반절은 삭신이 삭아버린/ 오동나무에 새 한 마리 매일 놀러온다./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놀러 온다./ ..중략..// 오동나무는 새 한 마리가 어떤 짓을 해도 날마다 반긴다./ 안아준다./ 업어준다./ 잠이라도 달게 자라고 토닥거려 준다.// 그것뿐이다./ 오동나무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다 내준다./ 간도 빼주려고 한다/ 내일 또 온다고 기약만 해 주면 된다. -「담양군 적성면 상리」부분
시인의 ‘완석산방’이 있는 마을의 지명을 시제로 한 이 작품은 오동나무와 새 한 마리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 이타적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병으로 삭신이 삭아버린 오동나무에 날마다 놀러오는 새 한 마리, 그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조심성도 없이 오동나무를 놀이터 삼아 자신을 온전히 풀어놓고 있다. 그의 모든 행위를 받아주는 오동나무는 어떤 불평도 없이 날마다 놀러와 주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이 둘의 관계 속에는 어떠한 타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새는 진발로 날아 와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흙을 묻히고, 침을 묻히고 갓 핀 꽃잎에 재채기도 해대는 무례를 범한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새의 행위를 정작 오동나무는 날마다 놀러 와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병든 오동나무에게 적막은 더 큰 아픔일 수도 있을 테니까. 내 안에 너를 그대로 들여앉히는 이 행위가 일방적인 포용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이타적 합일로 여겨진다.
2.무량한 침묵 밝히기
이영신 시인의 시의 속살을 가만히 들쳐보면 슬프거나, 아프거나, 괴롭거나, 지독히 그립거나 등이다. 그러나 그의 시행을 따라가는 시의 운율은 그 처절한 생의 이면들을 천연스레 치유해내는 매끄러움을 지니고 있다. 그저 무심한 듯, 괜찮은 듯, 견자로서의 시선을 유지한 채 “哀而不傷”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2009년 ‘문학과창작 작품상’을 수상한 수상작「부처님 소나무」를 따라가 보자.
목포에서도
멀리 더 멀리
나가 앉은 홍도 단옷섬
절벽엔
소금 바람소리에 키가 자라지 않는
소나무 한 그루 살고 있다.
발 아래엔 풍란 한 포기 키우질 않는다.
빠돌 하나도 거느리지 않는다.
혼자 살고 있다. 친구도 먼 친척도 하나 없다.
저녁때면 이장을 맡은 낙조가
불그스름해진 채로 한 번 휘익 돌아보고 갈 뿐
검푸른 바다 들판에
돔, 농어네 가족 희희낙락하는 것
물끄러미 바라보고,
시간이 들여다보고 물러나면
솔잎 옷 어쩌다 갈아입고...
한 번도 ‘호젓하다’ 말하지 않는다.
입이 무겁다.
-「부처님 소나무」전문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도 멀리 나가 앉은 홍도 단옷섬의 소나무는 홀로 된 자이다. 벼랑 위에서 소금기 가득 머금고 키도 자라지 못한 소나무는 결핍의 존재이다. 세상과 단절된 유배자이다. 그러나 친구도 친척도 없고 그늘 아래 거느릴 존재도 없는 그는 세상과 주고받을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호젓하다” 말하지 않는 그는 물끄러미 세상을 바라보는 동안 애끓음과 안타까움, 절망이나 원망의 그림자를 마음으로부터 떠나보낸 스스로에게 해탈된 조화로운 자인 것이다. 그 조화로움이 입을 무겁게 하고 그저 바라봄의 세계를 편안케 하는 무량한 표정으로 또 다른 세계를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쑥부쟁이 칡덩쿨 가시여뀌/ 10월 바람에/ 한 풀 꺾이니/ 있는 듯 없는 듯/ 묵묘墨墓가 드러났다./ 둥그스름하게 드러났다./ 누구네 집 누구라 불리우던 이름도 없이/ 성씨 하나도 없이/ 피붙이는 저 푸른 하늘 저 뒤 어디/ 언뜻 보여졌다 스러지는 구름 한 조각이거니/ 그냥 침묵을 담은 말줄임표이거니/ 기다리다 기다리다/ 봄, 여름, 겨울, 겨울 지나/ 잎 지고 흩날리는 백암산 늦가을 속/ 볕 좋은 입동 전날/ 묵묘 주인장 모처럼 느긋해지는 하루/ 한 마디 툭 내던진다.// 그대 잠깐 쉬어 갈 자리로 내주면/ 앉을 텐가?
- 「묵묘墨墓」전문
이영신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언어의 간결성에 있다. 감정을 최대한으로 절제한 언어는 무심하여 별스럽지 않고 쉽게 읽혀진다. 그러나 지나가듯 던지는 언어들이 모여들면 묘한 시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그 시의 여운은 오래도록 읽는 이의 마음을 차지하고 만다. 위의「묵묘墨墓」에서도 딱히 끄집어 낼 대표적 시어는 찾기 힘들다. 그러나 객관적 진술로 쓰여 진 시행 중 마지막 연의 “그대 잠깐 쉬어 갈 자리로 내주면/ 앉을 텐가?”를 읊조리고 난 후면 독자의 마음은 만 가지 회한에 싸이게 된다. 묘비도 없이 그저 형태만 둥그레남아있는 수풀 속 묘지는 초목이 동면에 들 10월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잊혀 진 존재인 무덤 속 주인은 기다림이라든가 그리움에 대한 애절함은 깊이 묻어 둔 채 무덤 앞을 지날 모든 존재에게 시공을 초월한 말걸기를 시작한다.「부처님 소나무」에서와는 달리 존재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시라 하겠다.
칡덩쿨과 산딸나무 사이/ 우둘두툴한 자갈 위에 처음 보는/ 무늬 천이 있구나./ 가죽혁대와 같은 무늬 천이 놓여있구나./ 찬찬히 살펴보니 누룩뱀이 옷을 갈아입고 갔구나./ 누룩뱀이 벗어 놓고 간 겉옷이구나./ 엄마가 지어 입힌 그 옷을 벗느라/ 꽉 끼인 그 옷을 벗어내느라/ 몸부림을 쳤겠구나. 무척이나 쳤겠구나./ 초승 달빛을 전등 삼았을까?/ 새벽 별빛을 전등 삼았을까?/ 그 누가 손잡아 주었을까?/ 옷 하나 벗고 새 옷 갈아입기도/ 만만찮다고/ 한 나절 사이 톡톡히 값을 치렀구나./ 숨 한번 내 쉬는 것도 만만찮다고/ 값을 치렀구나. - 「라 캄파렐라」전문
위의 시는 앞서의 시편들과는 달리 생존의 치열성을 보여주고 있다. 생활의 경쟁적 대상과 조우하기 전에 먼저 자아 극복의 성장통을 치루는 누룩뱀의 모습을 필사적인 허물벗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라 캄파렐라」라는 활기찬 속도의 바이올린 연습곡을 시제로 하여 그 역동성을 은유화하고 있다. 알레그로 빠르기로 한 옥타브 이상 차이나는 음의 도약 부분이있는 이 악곡은 허물을 벗는 누룩뱀의 고통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는 누룩뱀에 대한 연민과 안쓰러움을 다른 시작에서와는 달리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어린이 집을 운영하면서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시인을 생각하니 어린 것에 대한 유난스런 애정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해탈된 자아와 관조적인 타아의 침묵 속을 걸어가면서 시인은 생명을 밝히려는 생의 역동성을 늘 발아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 시편이라 하겠다.
3.미뉴에트 심법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춤곡, ‘미뉴에트’를 시제로 한 시편들이 이영신 시인의 시에는 여러 편 등장한다. 미끄러지듯 감미로운 선율에 따라 춤을 추는 아름다움과는 달리 이영신 시인의 ‘미뉴에트’에는 삶의 아픈 질곡들이 깊게 배어있다. 시적 아이러니이다. 어쩌면 시인은 눈 떼기 어려운 현실 속 고난들을 춤곡의 스텝을 밟듯 가볍게 미끄러지면서 넘어서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구급차를 타고 단숨에 병원으로 달려온 아기,/ 흔들흔들 엄마 앞가슴 아래/ 슬랭 띠 안에서 거짓말처럼 잠들었다./ 복도 끝까지 달아나도 우는 소리 따라오더니/ 순식간에 쿨쿨 잠들었다.// .. 중략..// 혼자서만 잠든 아기 야속타고/ 혼자서만 잠든 아기 고맙다고/ 흔들흔들 슬랭 띠 온 몸으로 흔들며/ 젊은 아기 엄마 크게 하품을 한다.// 입이 찢어질 듯 입안을 다 보이며 하품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병원 응급센터/ 다시 물 끼얹은 듯이 잠잠해진다. - 「미뉴에트, 응급실」부분
아이를 길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씩은 경험했을 한 밤중 병원응급센터 소동을 소재로 한 시이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가슴이 무너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엄마의 심리적 정황이 간결하고 선명하게 잘 표현 되고 있다. 금방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지게 울던 아기가 고통이 가시자 언제 그랬냐는 듯 쿨쿨 잠들어버리면, 늦은 밤 뒤 늦게 찾아온 피곤함에 엄마는 안도의 하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병원 문을 나서는 엄마의 발걸음이 ‘미뉴에트’다.
누군가 커다란 베개를 베고 잠들어 있다.
참 편하게도 잠들어 있다.
정릉천 시멘트 다리가 보잘 것 없는 노숙자
때 절은 머릴 받혀주고 있다.
그 단단하고 거친 회색 덩어리 어느 구석에
한없는 부드러움이 있는 것인가?
시멘트 다리가 스폰지처럼 말랑말랑해져서
풋솜처럼 한없이 푸근해져서
노숙자가 그 품을 파고들어 잠들어 있다.
시멘트 다리가 조그맣고 가엾은 아기,
아기에게 해주듯이 그렇게 팔베개를 해 주고 있다.
시멘트 다리가 바로 하느님 품인가 보다.
하느님 따뜻한 품인가보다.
-「 미뉴에트, 팔베개」전문
시멘트 다리를 베개 삼아 잠들어 있는 이, 예전에는 단란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거리를 활기차게 걸어 다니며 가족과 함께 할 미래의 많은 꿈들을 꾸었을 것이다. 어쩌다 떠밀려온 세파에 많은 것을 잃고 홀로 기댈 처마조차 없이 고단해진 마음과 몸을 다리 위에 뉘었다. 참 편하게 잠들어 있다는 시인의 시선은 차마 그의 아픔을 헤집고 싶지 않은 연민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베개를 대신 받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하느님께 그가 좀 더 깊은 단잠을 잘 수 있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회색빛 시멘트 다리가 말랑말랑한 스폰지 베개로 느껴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뉴에트’, 빨리 미끄러져 고난의 문턱을 넘어 설 수 있기를...
밥값을 해야 하기에/ 사지로 묶인 곰이 무방비 자세로 혼절해 있다.// 젖가슴이 드러나 있다./ 아랫도리 사타구니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제는 더 감출래야 감출 것이 없다.// 남자는 화면을 통해 기진한 곰의/ 몸속을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본다./ 곰의 몸속에는 가지런한 길 같은 것이 있고/ 울퉁불퉁한 언덕도 있고 강물이 흐르듯이/ 평온해 보이는 곳도 보인다./ 남자는 주사기를 들이대곤/ 진공 펌프로 연록색 쓸개즙을 뽑아낸다.//..중략..// 한 동안 추스르느라 몸이 무거울 것이다./ 곰이 받아먹는 밥그릇도 꽤나 무거울 것이다. - 「미뉴에트, 곰」부분
사지가 묶인 채 밥값 대신 쓸개즙을 내 주어야 하는 곰은 주체를 잃어버린 존재이다. 유린당한 몸을 어쩌지도 못하는 곰에게 생존은 무거운 형벌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을 일구어 주던 삶의 진액들을 뽑아주고서야 잠에서 깰 수 있는 그는 어쩜 가해자인 인간,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곰이 마취에서 깨어나면 기운 없는 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문명의 이기 속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전락하는 인간은 우리의 영혼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되 물리는 존재의 끈을 얼른 풀어주자고 시인은 ‘미뉴에트’의 볼륨을 높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영신 시인의 시집 『부처님 소나무』의 다양한 시편들을 돌아보았다. 시인이 이번 시집의 대상을 당신이라고 한 것처럼 대립된 대상을 통해 각 시편들을 극화시켜 나갔다. 자아의 타아화, 타아의 자아화를 통해 시인은 선명한 이미지들을 구축해 나가면서 견자로서의 따뜻한 시선을 시편마다 풀어놓았다.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논어』의「옹야편」) 공자의 말씀처럼 시를 즐기며 사는 이영신 시인의 무량한 심법 속, 새로운 언어의 자맥질이 다시 기다려진다. 새로운 모국어의 변신을 기다리는 필자도 즐기는 자에 속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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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집 해설들...잘 읽었습니다.....일도 즐겨서 하면 힘이 들지 않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