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초, SBS 드라마 <사랑과 야망> 제작발표회에는 20여 명의 출연진이 전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수현 작가의 명성이 가져온 유례없는 상황이었다. 중년 연기자들이 잔뜩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니 한고은이나 이훈 같은 젊은 주인공들은 기가 눌려 제대로 인사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무거운 분위기도 이경실(39세)의 한마디에 풀어졌다.
“파주댁, 이경실입니다. <사랑과 야망>의 진정한 꽃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는 역입니다.”
한바탕 웃음에 분위기가 풀리니 활기찬 대화가 이어진다. <사랑과 야망>에서 이경실이 맡은 역할도 마찬가지. 1960년대 가난했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가 무겁게 흐를라치면 파주댁이 나와서 분위기를 띄운다.
아직은 내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이경실은 <사랑과 야망>의 열렬한 시청자였다. 대학시절, 술을 먹다가도 인기 드라마를 보겠다고 집으로 뛰어가서 TV를 켜던 기억이 생생할 정도. 젊은 주연배우들처럼 드라마가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오히려 부담스럽다. 당시에도 ‘초호화 캐스팅’으로 이목을 끌 만큼 대배우들이 출연했기에, ‘그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할 작정이라고. 그녀는 자기가 작가 복이 많다며 행복해한다. 연기 데뷔작인 <불량주부>의 경우 <파리의 연인> 강은정 작가가 집필했고, 두 번째 작품이 바로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
“김수현 작가님이 말씀하신 파주댁의 이미지는 ‘속없이 좋은 여자’예요. 20년 전, 남능미 선생님의 연기를 생각해보면 어떤 이미지인지 알 것 같아요. 원하시는 대로 드라마에서도 촬영장에서도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죠.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촬영장이 화기애애해지거든.”
웃음소리가 호탕하다. 나이 든 초보 연기자, 이경실은 드라마를 앞두고 의기충천한 모습이다. 연기를 겸업하는 개그맨이 꽤 늘었지만 이경실은 상당히 늦게 입문한 케이스. 이전까지는 쇼 프로그램의 MC 일에 많은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부터 연극을 많이 한 덕분에 떨지 않고 즐길 수 있다. 지금은 개그맨들에게 으레 주어지는 감초 연기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냥 엄마’처럼 무게감 있는 캐릭터를 맡는 게 목표다. 언젠가는 박원숙과 같은 대배우가 되고 싶다는 야심을 비추기도 했다.
“드라마 촬영은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게 흠이에요. 기다리면서 자꾸 주전부리를 하니까 어렵게 뺀 살이 다시 찌려고 하거든요.(웃음) 시간 날 때마다 러닝머신 타고 요가도 해야죠. 당분간 연기에만 올인할 예정이라 몸매에 신경이 쓰여요.”
그녀의 전문 분야라 할 만했던 쇼프로그램 MC는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제의는 많이 들어오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것.
몇 달 전, 이경실은 <야심만만>에 나와서 어려운 고백을 하다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과 야망> 출연진들이 나와 ‘내가 저지른 가장 큰 불효는 무엇인가?’에 대답하고 있었다. 다른 출연진의 말을 들으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경실이 “내가 저지른 가장 큰 불효는 이혼”이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을 해서 어머니 가슴을 아프게 한 게 가장 큰 불효예요. 전에는 밤에 술 마시고 들어오거나 잠을 못 자도 어머니가 별로 걱정을 안 하셨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혹시 쟤가 그 일 때문에 그러나’하면서 제 눈치를 보는 게 너무 죄송해요.”
조그맣게 터진 눈물은 통곡으로 이어져 녹화장 분위기가 한동안 숙연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고백에 시청자들은 더욱 놀랐다. ‘손만 잡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껴지는’ 좋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깜짝 고백 이후로 이경실에게는 인터뷰 요청이 이어졌지만 전부 거절한 상황. 밀려드는 토크쇼와 예능 프로그램 출연 제의도 사절했다. 그날 <야심만만> 녹화장에서도 어렵게 털어놓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야망> 홍보를 위해 다 같이 출연해서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데, 저 혼자 입 꾹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아직 제 얘기를 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요.”
개그맨 일을 시작한 후 20여 년간 MC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이경실이 연기에 올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경실이 생각하는 MC는 출연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 속마음까지 끌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려면 단순히 질문만 던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도 게스트들의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04년, 이혼하기 전 남편의 폭행으로 갈비뼈가 골절되고도 2달 만에 쇼 프로그램에 복귀해서 “내가 오늘은 많이 못 웃으니까 이해하세요”라고 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정신적으로 위축된 건 아니에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기보다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하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해야 더 잡음이 없을지를 생각하게 돼요.”
이경실은 기자에게 ‘자기는 아직 내 말뜻을 모를 거야’라며 웃는다. 2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경실. 그녀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놓은 MC 일에 비하면 초보나 다름없는 연기를 하며 버는 수입은 턱없이 적다. 밤샘이 이어지다 보니 시간 맞춰 녹화장으로 출근하면 되던 MC 일보다 훨씬 고생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일에 매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특히 쇼 프로그램과는 달리 정성스럽게 찍어서 완성도를 높이는 드라마의 경우 훨씬 큰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동료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를 믿는 거예요. 저를 바라보고 달리는 여자 후배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MC의 영역에서처럼 드라마에서도 저만의 입지를 만들어나가려고 해요. 그런 모습을 후배들이 지켜봐주었으면 좋겠어요.”
딸 유학 보내고 컴퓨터를 배우다
주말 황금시간대마다 정선희, 조혜련 등 입담 좋기로 유명한 여자 후배들과 함께 쇼 프로그램을 끌고 나가던 이경실이 드라마 조연으로만 모습을 보이니 시청자들이 보기엔 활동이 크게 줄어든 느낌이다. 하지만 <불량주부>가 끝난 후에도 DMB 채널의 시트콤 <얍>을 촬영하는 등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고. 그러다 보니 캐나다로 유학 간 딸과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 지난 1월 9일, 딸 수아를 타국으로 보내면서 같이 여행 한 번 못 한 게 못내 아쉬웠다고.
사실 딸아이가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노발대발 말렸다. 대학 진학 후에 어학연수 정도는 생각할 수 있지만, 당장은 떨어져 살기 싫었기 때문이다. 1년 넘게 조르던 딸에게 “어차피 시집갈 테니 같이 살 날도 많지 않은데 왜 벌써부터 떨어져 살아야 하느냐”고 잘라 말해왔다. 작년 봄 <불량주부>를 촬영할 때만 해도 “엄마 돈 없으니 절대 못 한다”고 말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나 보다. 결국은 그녀가 직접 딸아이가 살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심이 안 돼서 제가 캐나다에 가봤어요. <불량주부> 끝내고 넉넉히 시간을 내서 둘러보았죠. 제가 아는 부부가 거기서 홈스테이를 하는데 자기 자식처럼 철저하게 돌보더라고요. ‘이 정도면 믿고 맡기겠다’ 생각하고 딸아이를 놓아주었어요.”
13살 수아는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어린 아들과는 달라서 늘 엄마의 좋은 친구였다. 함께 요가와 헬스를 하는 등 바쁠 때도 매일 함께하다 보니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결국 딸을 외국으로 보내고서는 이경실의 컴퓨터 실력만 늘었다. 아이들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일촌’을 맺었더니 아이가 요새 무얼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고, 매일 볼 수도 있어 행복하다고.
“유학을 보냈다고 해서 아이 성적에 연연하는 것은 아니에요. 의사나 법관처럼 남들 보기 좋은 직업을 가지길 원하지도 않고요. 무엇을 하든 자기가 행복한 일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희 딸이 저보고 ‘무조건 엄마 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도 그렇거든요.”
‘무조건 엄마 편!’이라고 외쳐주는 딸이 있기에 오늘도 그녀는 연기에 몰입할 수 있다. 언젠가 속에만 담은 모든 말을 할 날을 기다리면서.
첫댓글 이혼은서로에게신뢰가부족하기대문이죠~믿고신뢰한다면무엇보단대화가많이있어야할것같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