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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4:1-5절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주제 : 너는 복음을 지키고, 가르치고, 전파하라
강론
디모데후서는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4:6)한 순교를 목전에 둔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유언과 같은 최후서신입니다. 당시 상황은 계시록에서 짐승(적그리스도)으로 묘사된 네로의 불같은 시험이 다가오고 있는 때였고,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악성 종양과 같은 다른 복음”(2:17-18)은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4:10),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4:16)한 복음이 위기를 만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뒤로 한 체 떠나야 하는 바울의 관심사는 자신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복음”을, 그리고 주님의 피로 사신 “성도들”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옥중 서신인 빌립보서에서도,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고 진술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은 빨리 주님에게 가기를 원하나, 성도들을 생각한다면 좀 더 머물러 있는 것이 유익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를 가리켜 핸들리 모울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서신이라” 말하고 존 칼빈은,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특히 목회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신임이 분명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할까요?
먼저 디모데후서의 전체주제를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언과 같은 서신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만 두 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 첫째는 1:13-14절인데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지키라”는 것입니까? 바울이 전해주고 성령께서 부탁한 복음을 “보수”(保守)하라는 말씀입니다.
㉡ 둘째는 4:1-2절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기를 “항상 힘쓰라”합니다. “복음을 보수하면서, 전파하라”는 이 두 주제가 디모데후서의 중심주제요, 디모데후서를 대하는 오늘의 “디모데”에게 하시는 주 성령의 명령인 것입니다. 전체 주제를 파악했으니 각 장의 중심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1장의 중심점은 1:10절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전하라 하신 “복음”이 어떤 방도로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복음의 귀중 성을 말씀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합니다. 이점에서 “나타나셔서, 드러내셨다”는 점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심이 끝이 아니라 “사망을 폐하시고” 썩지 아니할 생명을 “드러내신지라”합니다. 어떻게 드러내셨는가?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해서입니다. 핵심은 “나타나셔서, 드러내신” 이것이 “복음”이라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 이렇게 증언한 후에 1:11절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합니다. 이점에서 11절의 순서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생각에는 세 가지 직분 중에 “사도”를 먼저 언급할 것 같은데 “선포자”를 맨 앞에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는 바울의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알았기에 “선포자”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나타나셔서, 드러내신” 복음을 누가 바르게 선포하느냐 하는 책임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1장의 요점입니다.
② 2장의 중심점은 2:2절입니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합니다. ㉠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바울--디모데--충성된 사람--또 다른 사람”, 이렇게 확장되어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6:1절에 보면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당시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은 역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처럼 “충성스런 사람”을 만나 복음을 계승시킨다는 것은 전도자에게는 중요한 직무인 것입니다.
㉡ 2:9절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합니다. 어찌하여 복음이 “매이지 않는다”고 말하는지 바로 앞 절인 2:8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즉 사망이 우리 주님을 매어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복음도 “매이지 아니 하니라”(행 2:24)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2장의 요점입니다.
③ 3장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하고 시작이 됩니다. 무슨 뜻인가? 디모데는 루스드라 출신인데 바울이 1차 선교 당시,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한 곳이 루스드라입니다. 아마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는 장면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이점이 3:11절에서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한 언급에 나타납니다.
㉠ 그 후 디모데는 2차 선교여행에 합류하여 바울과 함께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나는 복음과 함께 많은 고난을 받았으나 너의 때는 순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오히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즉 말세가 될수록 더욱더 고통하는 때가 될 것이니 단단히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바울이 예견한 대로 더욱 “고통하는 때”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복음을 보수하며 전파하기가 더욱더 어려운 고통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④ 4장에서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4:3-4)는 예언적인 말씀을 합니다. ㉠ 3장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한 것이 사회상(社會相)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4장의 “때가 이르리니”한 것은 교회의 타락(墮落)상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4:5)고 격려합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나 자신은 “나타나셔서, 드러내신”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욕(私慾)을 따를 스승”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것이 4장의 요점입니다.
각 장의 요점을 파악했으니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에 등장하는, “나, 너, 그들, 우리”라는 인칭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디모데후서가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나, 너, 그들, 우리” 중 어느 누구의 입장인가를 살펴보게 됩니다.
⑤ 첫째로 디모데후서에 등장하는 “나”가 누구입니까? ㉠ 1:11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한 바울입니다. 다시 상기시킵니다만 “사도”보다 “선포자”를 맨 앞에 내세우는 바울의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박해자였던 자신을 복음 전도자로 택하신 목적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대하면서 나 자신도 “복음”을 바로 “선포”하는 이 시대의 “바울”이 되겠다고 다짐하게 합니다.
㉡ 4:7절에서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진술합니다. 이점에서도 “달려갈 길을 마치고” 보다 “믿음을 지켰다”는 말을 맨 마지막에 언급하는 바울의 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말한다면 “믿음을 지키면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진술하는 의도는 1:9절에서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破船)하였느니라”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는”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많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점을 명심하십시다.
⑥ 그러면 둘째로 “너”는 누구입니까? 디모데후서를 받는 디모데입니다. 1장 안에는 디모데를 가리키는 “너”가 14번이나 나옵니다.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1:3), 네 눈물을 생각하여(1:4),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1:5)합니다.
㉠ 이처럼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1:8절에서는 어떤 축복이 아니라 “너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합니다. 2:3절에서도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거듭 “고난”을 말합니다.
㉡ 그리고 “너”와 결부해서 명심해야 할 점은 “그러나 너는”하는 말입니다. 3:14절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합니다. 그리고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러나 너는” 달라야 한다는 차별성입니다.
㉢ 4:5절에서도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합니다. 어떤 문맥에서 “그러나 너는”하는가?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4:3-4)한 문맥에서 “그러나 너는” 달라야 한다고 정체성을 일깨워줍니다.
㉣ 그러므로 3:5절에서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합니다. “돌아서서” 가야 하는 길은 좁은 길이요, 주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인 것입니다.
⑦ 그러면 디모데후서에서 언급하는 “그들”은 누군가 하는 점입니다. ㉠ 2:17절입니다.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다”고 말합니다. 2:18절에서는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그것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 그러면 “너와, 그들”이 무엇에 의하여 분별(分別)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2:15절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分別)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을 양성하는 신학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교회와 거짓교회는 강단에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느냐 여부에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 그런데 심각한 언급이 2:26절에 있습니다.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라는 묘사는 그들이 사탄에게 속고 있으며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깨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계하는 바울 자신도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빌 3:6), 우리도 전에는, 속은 자요”(딛 3:3)라고 실토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충성하는 줄 알고 열심히 교회를 박해했는데 이것이 사탄에게 속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11절에서는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아보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를 모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단은 자신이 “이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나 자신은 사탄의 계책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합니다.
⑧ 끝으로 “우리”라는 대명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합니다. 이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를 일컫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 1:7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합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네 눈물을 생각하여”(1:4)한 디모데가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주의 종은 울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
㉡ 1:9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었으며 이 복음을 증언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 순교를 목전에 둔 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4:8)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곧 여러분에게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⑨ 마지막으로 힘 있게 붙들어야 할 말씀은 목회서신의 중심단어 중 하나인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 전후서에서 5번(딤전 1:15, 3:1, 4:9, 딤후 2:11, 2:13)이나 “미쁘다 이 말이여”합니다. 이는 믿을만한 진실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미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11-12절을 보겠습니다. 세 마디로 되어 있는데 ㉠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합니다. ㉡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합니다. 그리고 ㉢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디에 근거해서 “미쁘다 이 말이여”하고 확신을 나타내는지 아시겠습니까? 2:13절은 이에 대한 답변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11-13)고 대답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지키시지 않는다면 “의로우신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미쁘다 이 말이여”하는 것입니다.
“은사도, 능력도, 축복도, 기사와 이적”도 폐할 날이 옵니다. 그렇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합니다.
죽도록 충성한 노 사도가 순교를 목전에 두고 의지할 주님은 “미쁘신 주님”이요, 붙들어야 할 말씀은 “미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미쁘신 주님)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1:12)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참수대로 걸어가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미쁘다 이 말이여”, 이 말씀을 붙잡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미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진실성을 죽음으로 입증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말은 “…갔고, …갔고,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4:10, 16),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4:17)하고, 주님만은 자신을 떠나시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말씀은, “그러나 너는”(3:14, 4:5)한, 너는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디모데후서가, “지대한 영향을 주는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너는 복음을 지키고, 가르치고, 전파하라”는 디모데후서입니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변하여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49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