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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회고록] ① 북으로의 철수를 포기하다
정읍으로 철수, 월북 실패, 창평으로, 다시 동복으로
코리아포커스>는 19일부터 매일 총 8회에 걸쳐 고 박현채 선생의 회고록을 연재합니다. ‘선생이 남긴 글’은 많으나, ‘선생에 대한 글’은 많지 않습니다. 선생이 한국사회에 찍은 깊은 발자욱에 비해 그 흔한 평전 하나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번 회고록은 선생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리한 유일한 글이자, 언론에 최초로 공개되는 육필 원고입니다.
박현채 선생의 글은 악문과 악필로 유명합니다. 회고록 원문 역시 많은 비문과 오탈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게재되는 글은 원문을 최대한 살리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장을 다듬고 각주를 붙인 것임을 밝힙니다. 원문의 향기를 느끼기 원하시는 독자들께서는 첨부한 원문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쓰려다 못쓴 글, 하려다 못한 말, 선생 삶의 짧은 순간을 <코리아포커스>에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초라한 철수
1950년 9월29일 아침. 23명의 동료학생들이 노령산맥 언저리의 도로가에 모였다. 그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각종 증명서와 서류들을 한 데 모으고 거기에 국기 등 깃발을 모았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국가(*주1)가 불려졌다. 노래는 점점 커지면서 오열로 변해 갔다.
1950년 9월28일. 인민군의 전면철수와 함께 우리들은 학교단위로 1개 소대를 편성, 철수를 준비했다. 우리는 학교를 떠나 광주사범학교로 집결하여 최후 비상선에 대해 논의하였고 약간씩 자금이 배분되었다.
최후비상선은 춘천이었고 노령산맥을 통해 정읍으로 철수하라는 지침이 시달되었다. 임시편제이기는 하지만 편성은 소대편제로 하였다. 여름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우리들의 철수준비는 9월말이라는 가을 날씨에 비추어 그다지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담양에서 저녁 급식 후, 집단적으로 국도를 통한 철수가 시작되었다. 늦저녁 추위가 우리에게 엄습했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우리의 행군은 초라했다. 철수를 위해 모인 수백 명의 대원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었다.
하지만 우리는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주변에 즐비한 농작물을 지나면서 겨우 익은 벼의 낟알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규제와 자제를 하였다. 일부 조급하고 미숙한 친구들이 밭작물에 손을 대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러한 행위는 모두에게 자율적 규제의 대상이었고, 공공연히 큰 규모로 행해지지는 아니하였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굶주림은 더해 갔다. 그러나 우리는 행군을 계속했다. 발걸음은 점점 더디어 갔다. 그 사이 전차 캐터필러의 굉음이 우리를 가로 막기 시작했다. 거의 새벽이 되어 여명이 우리 앞을 밝힐 때, 전차 소리 속에서 정읍 함락의 소식이 전해졌다.
월북과 귀환의 기로에서
우리는 모여서 소지품을 처리한 후에 상급생인 5, 6학년은 적진을 뚫고 월북할 것을 결의하였다. 어린 4학년과 조직의 신규 참여자 등 나머지는 집으로 귀환하도록 결의되었다.
하지만 나(*주2)는 집으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소 안이한 낭만적인 생각이지만, 곡성에 있는 도림사로 가서 중이 되는 것이 그 당시 상황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담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우리는 한 무리의 인민군과 민간인 철수 집단을 만났다. 이들 중에는 세 사람의 민간인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수창국민학교의 선생님이었고, 그를 따라가는 의용군 모습의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나의 수창국민학교 여학생 동기였고, 나이 먹은 비무장의 민간인은 박태남이라고 하는 의용군 후방사령이었다.
동기인 여자 의용군은 우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남자새끼들이 총소리 몇 방에 떨어 북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일단 가기로 마음먹었으면 모든 시련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조직원의 당연한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쉽게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것은 투항의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소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격한 감정을 자극시켜 그들과 함께 북을 향한 철수의 길로 다시 돌아서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대포소리와 소총소리가 뒤섞여나는 가운데 무장한 몇 명의 인민군들이 길에서 사라지더니 무기들을 버리고 다시 나타났다.
우리는 그들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어디에 버렸느냐고 추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무기를 버릴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며, 버린 장소는 알려주지도 않고 철수만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무장을 하다
우리는 철수를 포기하고 무기들을 찾기로 했다. 그들이 갈 수 있었던 지역을 잠시 수색한 결과 그들이 버린 따발총 1정과 아식보총(*주3) 1정 등 2정의 무기들을 약간의 실탄과 함께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2정의 무기로 무장하고 그들과 결별했다.
처음으로 무기를 획득한 우리들은 들떠서 실탄이 그다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쏘고 조작을 해보는 등 시끄러웠다. 이 과정에서 우리 대열 내에 다툼이 생겨 4학년생인 송정석은 하산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동료들의 허락을 얻어 우리와 갈라져서 자기의 고향인 담양이나 광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로써 동료들 간의 개별행동이 허락되었고 정황에 따른 개별활동이라는 원칙이 확립된 셈이다.
우리는 무장을 한 후 지나가는 노령 주변의 많은 토착세력으로부터 통합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당에 선을 연결하여 정확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 당시 나는 총을 갖고 얼마간 이동하다가 우연히 김용팔(*주4)이라는 한 인민군 소년병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몸에 400여 발의 실탄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실탄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실탄은 중대장으로부터 운반을 명령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는 그것을 중대장이 요구한대로 끝까지 운반하는 것이 자기 임무이기에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기가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구하면서 끝끝내 실탄 인도를 거부하였다.
우리는 의복이나 경제적 보상 등 여러 조건을 제시해 보았지만 그는 조직에 대한 의무준수라는 명목으로 거부했다. 우리는 그의 충실한 의무감에 감동하여 결국 탄환의 취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가 중대장을 다시 만나 자기 의무를 다할 것을 빌어 주었다. 나는 1951년 가을에 부상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당과의 접선을 시도하다
우리는 확실한 연결선 확보를 위해 토의를 거듭한 끝에 당시 우리 인접 지역에 있는 분들과의 접선을 실현시키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대원들을 두 구성으로 나누어 조희성과 일부 6학년들을 노령에 남기고 선 접선의 조치를 생각한 후 일부를 옥과로 보내 선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런 구상은 당시 우리학교 교위의 한 멤버가 곡성출신이었는데 그의 부친이 당의 고위간부였기 때문에 그와의 접선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6학년 네 명을 노령에 남겨놓고 김장호, 박태일, 김희종, 박현채 우리 네 명은 한조가 되어 접선을 위해 출발하였다. 우리는 먼저 노령을 넘어 담양 순창간 국도변에 있는 한 농가에 도착하여 밥을 시켜 먹은 후, 옥과로 가기 위해 설산을 넘기 시작하였다.
설산은 그다지 큰 산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저녁에야 도착해보니 상당히 큰 산이었다. 초저녁 무렵부터 언저리에 붙어 오르기 시작한 설산은 산자락을 넘어 올라 온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좀처럼 마을을 만날 수 없었다. 제대로 산을 넘었다는 증표가 될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두려움을 서로 달래면서 새벽녘에야 한 부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인민위원회가 아직 장악하고 있는 부락민들의 협력으로 조금 잠을 자고 아침을 얻어먹고 옥과에 이르렀다. 옥과는 무인상태였다. 정상적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그 고위간부의 가족을 만나 그분이 벌써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등산이나 백아산으로 가기 위해 곡성군 화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던 중 목표가 무등산 보을로 정해져 옥과 삼거리에 이르렀다.
나는 여기서 중대한 결단을 했다. 보을로 가기 전에 담양 창평에 피난 나와 계시는 부모님을 뵙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결단이었다. 유격대에의 입대는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었으므로 창평에 가서 부모를 만나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지들에게 이 뜻을 전한 후 2, 3일 후에 보을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약간의 식량과 단도 하나를 소지품으로 하는 혼자만의 창평행은 당시 상황에서는 지극히 비장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가진 단도는 외삼촌한테서 얻은 것이었다.
부모님 만나러 창평으로
나는 창평까지 무사히 혼자 갈 수 있었다. 대덕을 거치기는 했으나 창평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는 광주로 들어가신 뒤였고 아버지만이 남아 계셨다. 아버지는 고모부 동생 집에 혼자 계셨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내일을 계획했다. 아버지는 광주에 들어가시고, 나는 당분간 길이 트이는 대로 고향이나 보을로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경찰부대가 창평에 들어와 주둔했으므로 나는 창평을 떠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 다음날 바로 광주로 떠나셨다. 경찰은 그 뒤 5, 6일이 지나서 점령지 확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경찰이 떠난 바로 그 다음날 나는 고모부 누님의 길안내로 고향으로 떠났다.
아침 출발할 때 고숙의 동생 되는 사돈이 단도를 두고 갈 것을 말했으므로 단도는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맨손으로 그 다음날 창평 삼천리를 경유하여 앞산을 넘어 무등촌으로 빠지는 길로 나와 고향으로의 길을 재촉했다.
인민군 철수 후, 산간지역의 길은 이해가 다르고 적대적인 집단 간에 분주히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광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시골로 찾아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 언저리 길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입장을 달리 하는 사람들 간에 충돌은 거의 없었다. 적대적인 대립이나 간섭 없이 상호 묵인 속에 발길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동복까지 가는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나 대화는 거의 없이 약간의 인사만을 교환하였다. 쌍방은 서로 상대방이 가고 있는 방향이 어느 쪽이든 상대방이 그곳으로 가야할 이유를 서로 아무런 확인 없이 인정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동복으로 가는 도중 담양 남면에서 부락 자위대에게 검문을 받았으나, 그들의 성향을 알지 못하여 일상적인 말로 변명하느라 상당히 고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후에는 무사히 화순 이서면 야사에 이르렀고, 산을 넘어 동복 신거리로부터 동복에 이를 수 있었다.
동복에는 사촌형과 외삼촌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9·28 이후에는 주도권이 극좌적인 분자들에게로 이행되어 지식인들은 소외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양조업자였던 사촌형은 민청(*주5)위원장으로 있었지만 경성제국대학 중퇴자라는 이유로 지식분자로 몰려 소외되었다.
큰 외삼촌은 유격대에 있었으나 초기 6․25후에 동복지서를 무장해제한 작은 외삼촌의 성분 때문에 극좌분자들로부터 아무런 임무가 주어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② ‘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 되다
540부대 연락병으로 임무 시작...문맹퇴치 사업 완수
빨치산이 되다
나는 외가 작은 할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조선옷을 해 입고 새끼를 꼬면서, 시골사람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이서를 경유하여 동복으로 들어오셨다. 어머니와 나는 앞으로의 문제를 협의했다.
어머니는 나를 광주로 몰래 데리고 가기 위하여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오셨다. 그러나 나는 입산해서 싸워야 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나의 입장을 지켜내야만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처해 있는 입장을 설명드리면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올바른 삶을 영위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는 것을 밝혔다. 비록 죽음이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으로서 견지해야 할 중요한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나의 태도는 맹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를 보는 자기신념에 입각한 것이며, 역사적으로 살면서 지켜야 할 올바른 길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살면서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스스로 살지 못할 때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는 없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은 죽음으로써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나의 주장들을 납득하시고 동의하셨다.
그런 합의를 보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동복면 독상리 지방자치대에 검문당하여 체포되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동복면당까지 연행됐다. 우리를 연행한 독상리 자위대장은 외할머니의 소작인이었던 뱀장사였다. 면당에 가서보니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람들이었고, 특히 아저씨뻘 되는 오지호 선생이 계셔서 큰 힘이 되었다.
나는 개인의 피신을 폭로했으므로 면당은 나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타 지역에로의 이동을 도와주거나 아니면 입산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면당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책임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으므로 우리는 다시 동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안이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오시다가 들른 산간 부락지역에서 아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고 하시며, 나의 입산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그 분들의 부락으로 가시기로 했다. 어머니는 광주로 가신다는 이유로 동복을 떠나 이서 쪽으로 가셨다.
어머니가 떠나신 며칠 후 친척 되는 오 동무가 무장을 하고 동복에 나타났다.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 날도 적정이 있어서 피해 있는 판에 연락이 와서 만나보니 그 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할아버지뻘 되는 외가의 친척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부탁을 받고 왔다는 것이다.
준비를 하고 그와 함께 유천리 쪽으로 가다가, 동복면당에서도 나를 입산시키기로 결정이 나서 데리러 오는 길이라고 하는 두 동무를 또 만났다. 면당 동지들에게는 면당보다는 지구당 쪽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산 너머인 야사(*주1) 쪽으로 넘어 갔다.
이태식과의 만남
야사의 부대는 지구당의 정보과 분트(*주2)였다. 성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능주(*주3) 출신의 주 동무와 나를 데려간 오 동지가 주축이고, 현 동무라고 하는 여성 동지가 있었다. 그들은 적과의 접합지역에 주둔하면서 적이나 인민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었다. 나의 임무는 정보보고를 수시로 사령부에 올리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야사에서 540지구부대 사령부에 보고서를 전달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었다. 주둔지에서 보고서를 갖고 가서 사령부에 전하고 점심을 먹고 원대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었다. 당시 540지구부대의 조정현 부사령관에게 가는 레포(*주4) 전달 사업은 적의 동기공세가 시작되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런 일련의 사업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빨치산인 이태식(*주5) 동지와의 관계이다. 어느 날 사령부에 가서 기동대가 모여 있는 곳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갖고 있는 M1소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소총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면서 나와 크게 다투었다. 그런 좋은 총은 자기들에게 와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 가 있으니 자기들에게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기동대 부대장이라고 했다.
나는 내 것이므로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만약 이 총이 필요하면 정식절차를 밟아 참모부를 통해 요구하라고 하면서 우리 트(*주6)로 와버렸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의 이와 같은 행위가 그에게는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이태식과 나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홍기현과의 재회
이 시기에 나에게 중요한 사건은 전쟁 초에 서로 헤어졌던 홍기현과의 재회이다. 1950년 8월초에 우리는 집단적으로 교위(*주7) 성원들이 모든 학생에 앞서 의용군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조직으로부터 자기 의무를 저버리고 극좌적인 행위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고 아침에 전부 학교로 돌아가 일할 것을 명령받고 되돌아왔다.
이 때 군에 입대하는 것이 허용된 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홍기현이었다. 그는 나주 다도 사람으로 인민공화국 수립기념 투쟁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 건실한 그는 전쟁기간 중에 인민군대에 참여했는데, 어디로 가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후 전쟁 중 적의 포위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비무장으로 백아산 지역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야 할 지점에 몇 사람의 무장인원이 매복하고 있는 것이 인지되었다. 추적을 받고 있던 우리로서는 그 지점을 지나가야만 했는데, 그들의 소속이나 피아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를 밝히지 않는 상황에서 적의 추격은 긴박하게 다가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주 동무가 국기를 내흔들면서 앞에 있는 사람들과의 교신을 시도할 때였다. 그쪽 사람들은 우리에게 총을 내밀고 손을 들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을 자세히 봤을 때 그는 바로 홍기현이 아닌가.
내가 홍기현이를 불렀을 때 다른 동지들은 손을 들고 있었다. 홍기현은 나를 확인하자 갖고 있던 총을 내던지고 달려왔다. 홍기현과의 극적인 상봉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는 인민군대에 있다가 9·28을 만나 마산 쪽에서 전라도로 오던 중 전남 빨치산에 입대하여 백아산에 있는 전남도당 보위중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이 안 좋은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동지를 보위하면서 온 힘을 다해 보람 있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동안의 만남 후에 기현이는 보위병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선 대기를 하러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헤어져야만 했다. 홍기현과는 이후 서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소식을 간간히 전하다 그가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만났다.
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
1차 포위작전을 겪은 후 부대는 재편되었다. 나는 정보과 분트 근무에서 후방부로 근무가 변경되었다. 후방부 연락병이 된 것이다. 당시의 540지구 후방부장은 화순 출신의 장돌뱅이인 ○○○으로 전형적인 룸펜이었지만 당시 빨치산들이 부대보급 방법으로 쓰고 있었던 지방장시 보급의 전문가였다.
후방부장 연락병 시기 나의 생활은 비참했다. 그는 자기가 후방부장이라는 요직에 있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나에게 항상 그의 칼빈총을 들고 수행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가 어느 부서에든 가게 되면 방 밖에서 대기할 때 소총 이외에 일본도도 한 자루 갖고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처음에는 이것에 따랐으나 나중에는 그가 참모부에 들어가면 나는 나대로 자리를 찾아서 쉬면서 보초에게 나의 소재를 알려 놓았다. 이에 대해 그와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기하는 일상적인 관례가 되었다.
당시 나는 잘 먹지 못하는 생고기로 인해 위장장애를 일으켜서 고생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락병으로서 한달 가까이 지난 다음에 우리 부대에 돌격중대라는 소년보위 중대가 조직되었다. 20세 미만의 소년들을 기간으로 조직된 이 부대는 이미 조직되어 있었던 따발·강철·폭탄중대와 함께 540지구 부대 기동대의 한 구성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독립중대의 문화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독립중대의 중대장은 화순중학교의 6학년인 김안근이가 되었고, 대원들은 약 30명을 약간 넘어서는 수였다. 설건방진 일부 서울내기 의용군 출신을 제외하고는 대원들은 순진한 농민 출신이었다.
문맹퇴치로 전투력을 제고하다
내가 문화부 중대장에 취임하여 맨 먼저 시작한 것은 문맹퇴치 사업이었다. 글을 모르고서는 자기 신념을 확립할 수 없고, 자기 뜻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참된 유능한 빨치산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한 길은 그들에게 자존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문맹퇴치 사업은 그들의 자존심을 자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한달이 넘지 않아 그들은 국문을 해독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교양물을 쓰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문맹퇴치는 그들을 빨치산의 일상적인 정치활동에 참여시키고 교양활동의 확대로 이어졌다.
교양활동의 제고는 나만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것은 상급의 지원에 의해 진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도 좋은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 우리 부대의 정치부 출판과장은 우리 교장이셨던 박준옥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여러 모로 도와주셨다.
선생님은 많은 교재를 주시고 시간이 있으면 강의를 우리 부대에 와 해주셔서 우리 중대의 교양활동에 도움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 부대의 정치적 수준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대원들의 높은 정치의식으로 인해 보다 효율적으로 부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1951년의 재귀열(*주8) 공세 속에서 우리 중대가 한사람의 환자도 내지 않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의 빨치산 간부로서의 시작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내가 젊은 나이로 빨치산이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나에게 안겨준 시련 때문이었다.
③ 초등학생 시절 동맹휴학과 독서회 이끌어
화순탄광 노동자들에게 감화돼 현실참여의 길로
면서기의 아들로 태어나다
1934년 11월3일, 나는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297번지 산 중턱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당시 광주 서중을 졸업하고 면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산등성이 밭에 감나무 식재를 해서 농장을 조성했던 유기업자 오재홍의 둘째 딸인 16세 오순희였다. 어머니는 언니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15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결혼 1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 뒤 아버지는 만주와 동남아에의 꿈을 버리고 세무서에 취직을 하여 곡성세무서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네 살 때 곡성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당시 곡성 읍내 밖 다리를 건너 오르던 촌길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는 8세 때 곡성중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해이다. 우리는 전쟁의 진전에 따라 근로 작업에 많이 동원되었다. 시골에 거주하는 우리는 마초와 산딸기, 송진 채취 작업에 많이 동원되었고, 집안 형편상 통명산에 가서 나물 채취에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1944년 2학기말에 아버지가 광주로 전근을 하여 우리는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광주는 동복 가는 길에 몇 번 들렀는데, 큰 곳이었다. 우리는 경민이 당숙집 서중 뒤에 집을 얻어 얼마 동안 누문동에서 살았다. 그리고 친척 선생님이 계시는 수창국민학교에 전학하여 수창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결의형제들
나는 수창국민학교에 다니면서 김희종, 김영배, 민영기, 박석운, 박두순, 모리 히로시 등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이들과 인생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박석운, 모리 히로시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그러나 우리의 결의형제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우리는 국민학교인 수창 4학년 시절에 삼국지의 고사에 따라 결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이름의 일본음을 따서 신고(일본음 모리 히로시), 신겡(아라이 겐사이), 신샤구(아라이 샤구운) 삼인의 의형제를 맺는 것이었다.
해방 후에 알게 됐지만 모리 히로시는 마산의 항일 공산주의자 김형직의 아들이었고, 연안 독립동맹 김명시의 조카였다. 그는 1946~7년경에 소식 없이 광주를 떠났다.
박석운(샤구운)은 여수 제주간 연락선 경주호 납북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인생 역정에서 나의 길이 그러하듯 나의 친구들은 국민학교만이 아니라 중학에서도 비극으로 생을 끝낸 이들이 많았다.
중학은 광주서중으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나는 생산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 공업학교의 진학을 원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좌익 친척들과 해방을 맞이하다
해방은 박경민 당숙의 5구 라디오 앞에서 조주순, 박석민, 박경민, 아버지, 나 등 온 가족이 함께 맞이했다. 당시 조주순 삼춘은 그간에 우리 집을 박헌영 동지와의 접선을 위해 수시로 밤에만 드나들다가 8·15 이틀 전에는 화순을 떠나 아예 우리 집에 기식하고 있었다.
그는 살기 위해 화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이제 지게꾼이라도 해야겠다고 하면서 우리 집에 와있었다. 그때 나는 화순의 큰 주조장 부자집 아들이 왜 다른 직업을 갖지 않으면 살 수 없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박석민 아저씨는 우리 하고는 가까운 친척이고 아버지의 중학교 선배였다. 그는 외할아버지의 누나의 아들이었다. 그는 광주학생 사건 때 퇴학당하여 서울에서 자유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전쟁이 격화되니까 광주 우리 집으로 피난 와 있었다.
그의 큰 딸이 나와 동급생이었는데, 해방되었을 때 이미 한글을 자기 아버지에게 배워 다 깨치고 있어서 나를 잠시 열등감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박정민 당숙은 당시 북면 원리의 박 부자의 작은 아들로 일제에 협력하여 경방단(*주1) 부단장이었으나, 나름대로 민족해방 세력과 연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주순 삼촌이 수시 공개적으로 만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이하는 날 주순 삼촌은 방송 처음 부분을 듣고 일본의 패전을 결론짓고 일어서 나갔고, 우리는 다 듣고 나서 술 파티를 같이 가졌다. 온 동네가 시끄럽게 밤새 떠들어댔다.
해방을 같이 맞이한 분들의 정치적 성향은 모두 좌익 쪽이었으나 소속한 당은 저마다 달랐다. 주순 삼춘은 공산당의 전남공청위원장을 맡았다고 들었고, 나머지 분들과 경민이 당숙은 여운형 선생의 인민당원이 되었다.
주순 삼촌은 박헌영 선생과 함께 서울로 갔다가 며칠 후에 돌아왔고, 우리들은 각기 생활하랴 정치운동하랴 모두 바쁘기만 했다.
석민 아저씨는 가족을 놔둔 채 서울로 올라갔다. 우리는 1946년경에 남동에 집을 사서 이사 갔고, 얼마 안 있어 우리 사회에는 노동당이 결성되고, 아버지는 목포로 전근 가시게 되어 우리는 남동 집에서 자취하게 되었다.
현실참여의 길로
자취는 나와 외삼촌, 이모부, 세 사람으로 시작되었으나, 시작되자마자 주순 삼촌과 김재옥 매부의 전남도당 시당 조직에 함께 참여하여 복잡하게 되었다. 나는 이 시기에 나의 삶의 방향을 둘러싸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격동의 역사적 시기에 당하여 이 시기를 어떻게 역사와 자기에게 부끄럼 없는 삶으로 영위할 것인가 하는 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나는 민족적인 참여의 시기에 견결히 현실에 참여한다고 생각했으나, 어느 쪽으로 참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나의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화탄 노동자들의 현실참여였다. 광주와 화탄 간의 거리는 약 30리 거리였지만 행사가 있을 때마다 화탄 노동자들은 도보로 광주행사에 참여하였다. 우익 측인 독립촉성회 노인들의 참여에 비할 때, 그들의 강건한 현실참여는 모든 사람들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민족의 운명을 나약한 늙은이들에게 내맡기기보다는 젊은 생산계급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던 주먹밥은 나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결국 민족의 새로운 내일을 걸머질 힘은 그것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생산 활동을 하는 계급에게 역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역사의 진보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간에 읽은 관념적 영웅전에 대한 결론으로 노동자 편을 선택했다.
좌익활동에 참여하다
나는 좌경적인 책들을 읽기 시작했으며 주순 삼촌이나 재옥 매부의 이동문고로 가서 마르크스주의 글읽기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런 선택은 국민학교에서의 독서회 활동으로 연결됐다. 우리 국민학교에도 진보적 활동 조직은 있었다.
사로(*주2)계였지만 최충근 선생은 학교 안에서 독서회 써클을 지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무등산 언저리에 모여 독서회 활동을 했다.
내가 에드가 스노의 <붉은 중국>을 접하게 된 것도 이 모임에서였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관련서적에 대한 남독(濫讀)으로 되면서 나의 정치적 경향이 정해지게 되었다.
나는 광주 수창국민학교에서 전학생이지만 학생으로서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을 했던 듯하다. 1946년 졸업생 송사를 내가 읽었고 1946년초, 학교에 처음 만들어진 학교자치위원회 자치위원장이 되었다.
자치위원장으로 맞이한 중요한 문제가 학교 유리값 문제로 생긴 동맹휴학이다. 1946년 당시 우리 학교의 교실 유리창은 많이 깨져 있었다. 후원회에서는 이것을 고치기 위해 후원회비를 대폭 인상했다.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후원회비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시기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국립 서울대학의 창설문제였다. 국립대 안으로 이야기되는 현안문제는, 당시 좌우익간의 중요한 문제였으나 우리같은 소학생들이 참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동맹휴학을 이끌다
그런데 석운이가 이 문제를 가지고 자기 반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여 동맹휴학을 선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그가 진전시키는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이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4학년 이상의 학생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투쟁이 저학년까지 침투되어 결국 사실을 선생님들이 알게 되었고, 자치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안건은 그와 같은 학내투쟁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으로 되었다.
선동의 주동자인 내가 주재하는 회의임에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은 6학년에 이르기까지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자기변명들만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상황 전개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나는 내 스스로가 주동자임을 밝히고 여학생들을 비난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전개에 교장선생님은 폐회를 선언하고 자치위원장인 나를 상대로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교장선생님은 60세 가까운 나이로 광산군 주변출신이었으며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그다지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그와 같은 요구를 학교자치위원회가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하시며 위원장이 앞장서서 이에 대한 타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셨다. 단 동맹휴학이라는 비합법적 방법에만 의존할 경우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동자들은 결국 중학교에의 진학에 큰 장애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이 점을 양해하고 후원회장과의 회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적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우리의 입장으로서 그것을 전면에 제기할 수는 없었고 경제투쟁상의 요구만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박석운의 끈덕진 반대행동과 학생동원을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우리는 문제를 이 정도에 한정시키고 후원회의 양보를 상당히 얻어내면서 타결지을 수 있었다.
독서회를 운영하다
이런 비합법투쟁과 함께 우리는 합법적인 써클 조직과 활동을 갖고 있었다. 최충근 선생의 지도 하에 독서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말이면 최충근 선생의 집이 있었던 광주시 변두리 무등산변의 산수동에 모여서 독서회를 가졌다.
독서회 운영 과정에서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에드가 스노가 쓴 <붉은 중국>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시기의 우리들의 독서회 활동은, 그 뒤 우리들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임과의 관련 속에 잊혀지지 않는 친구는 박두순이 있다. 그는 광주사범 재학시에 조직선이 떨어져, 유격대 건설에 대하여 나하고 몇 마디 한 말을 경찰에서 자백하여 나를 어려움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6·25 당시에는 무장 빨치산으로 나타나서 우리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9·28 철수 후에는 광주에서 사라진 내가 산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우리의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광주서중 박대성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북동에 있었으나 지금도 그곳에 가족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산수동에서 나는 독서회를 가지면서 많은 개구리의 해부를 했다. 지금 그런 정열은 사라졌지만 그때에는 과학에의 집착 때문에 많은 개구리들을 희생시켰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과학자로서 자기 길을 열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④ ‘프롤레타리아’ 꿈꾸던 학내 좌파 리더 시절
광주서중 1학년 C반 입학, 전쟁 발발 후 교위 장악
경찰서에 잡혀가다
국민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경험은 경찰에 잡혀간 것이다. 1947년초 공무원들의 파업이 있었다. 아버지도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검거되시고 남동 우리 집이 수색 대상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 노트와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이란 책이 압수되어 문제가 되었다.
나는 광주의 전남경찰국에 잡혀 갔으나 구속은 되지 않은 채 많은 핍박을 받았다. 책은 취득 경로가 설명되었으나 노트에 그려놓은 이승만, 김구의 초상과 그것에 써놓은 ‘매국노’라는 욕지거리가 문제였다. 나의 개인적인 판단을 써놓은 것이었지만, 이 내용들은 반동적인 경찰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많은 구타를 당하였다.
당시 사찰과장이었던 경감은 나에게 아주 못되게 굴면서 이승만의 매국행위를 증명해보라고 윽박질렀다. 그 시기 나는 광주서중의 지도자였고 박석운의 자형이었던 김씨를 거기에서 보고 최초로 지문을 찍게 된다. 그러나 12시경에 어머니의 노력(당시 전남 기동대장이었던 정래혁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광주서중에서의 조직활동
국민학교 시절, 그와 같은 정치운동에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나는 광주서중에 응시하여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당시 극좌적 사고 때문에 인문중학인 서중에는 진학하지 않으려고 했다. 생산적인 활동만이 민족의 장래에 기여하는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자기 모교인 서중으로 갈 것을 강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신껏 공업학교를 지원했다. 당시 광주공업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학교였지만 그때는 시험이 인문 중학보다 빠른 전기였다.
나는 광주공업학교에 응시시험을 치루었으나, 신체검사 결과 적녹 색맹으로 판명됨에 따라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낙방하였다. 할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서중으로 지원하여 합격을 하고,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서중 진학은 아버지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직접 발표장소에도 가시고 학교에 들러 선생님들에게 부탁하는 등의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광주서중에서 나는 1학년 C반이었다. 입학하여 나는 독자적으로 서클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상적인 민애청(*주1) 조직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친구들을 만나 비합법조직과 연관을 가졌다.
이 당시 송정석, 김수명, 이춘형, 맹환계, 홍기현, 김희종, 홍삼희, 박정재, 최은주 등이 우리 조직의 기간요원이 되어 조직을 이끌어 갔다. 우리 조직은 당시 재학생들의 70~80%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조직에 학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인민공화국 수립투쟁을 하다
학년마다 약간씩 역할의 차이가 있었으나 나는 주로 조직을 담당했다. 우리가 민애청 조직원으로서 한 주요한 투쟁은 일상적인 것 외에도 큰 것으로는 인민공화국 수립투쟁이었다. 우리들은 선거참여를 위한 연판장 투쟁부터 참여해서 시위, 봉화투쟁, 국기 게양투쟁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런 일련의 투쟁에서 자기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친구로 나는 홍기현을 꼽는다. 그는 국기 게양투쟁 등 어려운 투쟁을 거의 맡아 했으며, 투쟁 중에 적과 마주치면 개별적인 폭력 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투쟁의 결과 그는 일련의 투쟁이 끝났을 때 퇴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서동에 있던 대성대학 발기위원이었던 터라 모든 수단을 다하여 복학했고 다시 비합법적 투쟁을 지속했다.
서정국민학교에서의 데모도 이 시기에 두 번인가 있었다. 우리 조직의 지도원들은 1~2년 위의 선배였다. 김평수 지도원은 권투선수였으나 하와이로 이민 갔다고 들었다.
그 후임 지도원은 2년 위의 선배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건재하여 현실에 참여하고 있다. 그 선배도 징역을 살다가 4·19후 재심을 청구하여 자유를 회복하여 서울에 살고 있다.
그러나 가장 비극적인 동지는 1950년도에 올구(*주2)였던 1년 위의 형이다. 박정재로 기억되는 그 형은 1950년 초까지 우리를 지도했었다. 1950년대초 내가 산에서 들은 소식에 의하면, 백아산과 무등산 사이에 있는 화순군 이서면 보월에 공작 차 침투하다가 대밭 위에서 죽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이 시기에 가장 많이 한 투쟁은 삐라투쟁이었다. 한 집단의 삐라투쟁은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세환, 홍삼희, 홍정희 등과 같이 삐라투쟁을 조직한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분주했던 조직활동
이 밖에도 나의 일상은 조직투쟁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항상 분주했다. 회비의 징수문제는 회비를 내게 함으로써 성원으로서의 참여의식을 고취하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한달에 50전이거나 1원의 수준이었던 회비는 가벼운 부담이었지만 조직활동의 주요 내용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직활동과 관련하여 집에 머물러 공부하는 시간은 많지 않은 일상이었다. 지도와 활동의 조직이 주요과제로 되어 자기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다.
남들이 서중 재학 시에 성적이 좋았으리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의 성적은 76점 수준을 넘는 것이 아니었다. 의리 누님과 의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자가 몇 번이고 집을 찾아왔지만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이 시기 내가 얼마나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 당시 내 생활은 조직활동(조직의 관리활동)이 중심이었고 학업은 부차적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안 해도 현상 정도는 유지할 수는 있었다. 이후로 조직이 와해되면서 부담은 더욱 많아졌다. 3학년말 쯤 교위가 해체되었고 우리가 교위까지도 맡게끔 되었다. 이 시기에 학교는 그다지 잘 다니지 않았다.
꿈자리가 나쁘거나 하면 결석하기가 일쑤였고 그것은 집단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김수명은 동반자적 역할을 많이 했다. 그는 학동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학교 가기 전에 서로 행동을 같이 하기가 쉬웠다.
반동의 시기를 지내며
이런 과정 속에 발발한 1948년의 여순사건은 나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여순사건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익에 의한 큰 반동을 구체화시켰다. 우리에게서는 A조 조직이 학련(*주3)에게 폭로되어 박정재와 최은주가 징역 2년을 복역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나는 이 시기에 학교를 무단결석하여 약 2개월을 목포 아버지 집에 머무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극좌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학교는 다니고 있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그만두고 프로(*주4)로서 사는 것이 보다 나은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단을 못 내리고 우선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한 연후에 나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아버지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셨기에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두 달 후 서중교감이던 아버지 후배로부터 내 문제를 거론한 편지가 왔다. 서중 내에서 정치적 바람은 이제 끝났으므로 내가 학교에 나오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고, 하는 수 없이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사이에 학련 놈들의 고발에 의해 경찰에 몇 번 잡혀 갔고, 직접 학련에 잡혀 가기도 했다. 1950년 봄에는 학련 놈들에게 잡혀 대인동 학련 본부에 잡혀간 적이 있다.
두들겨 맞고 있을 때 감찰부장 임병성이 들어와 우리와 자기들 투쟁의 정당성을 토론할 유위한 사람이 있어야 하겠다는 제기에 따라 서중 쪽에서 내가 그의 토론대상이 되어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에게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잘 모르나 논의 끝에 그는 나의 견해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나와 결의형제를 맺고 그것을 서중 학련 모두를 모아 놓고 밝히면서 나를 서중 학련 누구도 건들지 말 것을 선언함으로서 나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여 6·25가 끝날 때까지 나를 보호해주었다.
한국전쟁 발발, 기다림의 나날들
6·25는 우리에게 큰 결단을 요구했다. 6·25 당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는 병사국 앞까지 시위에 참여하는 등 그들에 추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면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나는 동지들을 모아놓고 조국해방전쟁의 발발을 알리고 학교를 떠나 자기를 보존하면서 해방의 날에 대비할 것을 전했다. 나는 6월26일로 학교를 그만둘 것을 선언하고 그날 오후에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날 때 학련 놈 한 놈이 막아섰으나 몸이 아프다는 이유를 대면서 약간의 빵값을 주고 떠날 수 있었다.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경찰청 앞 무덕정을 지나가다가 보도연맹으로 소집되고 있었던 동복 사람을 한 분 만났다.
그분에게 왜 무덕정에 모여 있는가를 묻자 경찰이 모이라고 해서 모였다고 했다. 나는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적이 모이란다고 모이는 사람들에게는 죽음밖에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달아나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따르지 않았고 나중에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학살당함으로서 일생을 끝낸다. 나는 그 길로 집에 가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동명동 작은 아버지 집으로 가서 라디오와 친해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본문학전집 등 사람의 죽음과 관련되는 글들을 보면서 기다림의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온 가족이 동네사람들과 같이 차고약 별장이 있는 동네 가까운 곳으로 피난을 갔다.
도시에는 인민군대가 왔으나 상공에는 미군폭격기가 계속 투입되어 폭격이 진행되었다. 피난처에서 주저하다가 7월23일 이후 1주일이 지난 8월1일이 되어서야 학교에 나갈 수 있었다.
학교위원회를 재조직하다
학교에서는 동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합법 때의 교위 간부들이 나와야 정식으로 사무인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 늦게 간 사이에 조직은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본래의 조직과 상관없는 축구부 중심의 비정통적인 조직이 상급 지도부와 관계를 맺고 합법적인 광주서중 민청조직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서중의 정통조직 성원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나오면 조직이 부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학교로 나가 대중적인 기대 속에 5학년들, 홍삼희의 형인 홍찬희와 만나 조직의 정상화를 논의하고 정상화를 결의하였다. 이어 총회 소집을 하고 총회에서 이미 전교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교위의 부당성을 들어 이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교위를 재구성했다.
우리는 다수였으며 재건과정에서 4, 5학년의 학년위원회의 결의와 선택을 따라 6학년 위원회를 형무소 석방자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학교위원회를 운영하도록 맡겼다. 이러한 조치들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도민청 등 상급기관도 나의 위치와 광주서중의 상황에 비추어 쉽게 손을 대지 못하였다.
나의 변혁적 조치가 있은 후, 조직에서는 상당한 논의를 거친 끝에 결국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추인하게 되었다. 서중 교위의 책임자는 김장호(6학년 형무소 석방자, 나의 이종사촌형)가 되었고 나는 교위의 학생 등록을 위한 제1심사위원이 되었다.
인민군에 자원하다
교위의 제1심사위원으로서 나는 모든 학생들을 관용으로 대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정치투쟁은 이제는 끝났다고 말하였다. 조국을 위해 보다 많은 학습을 하자는 말로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서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모든 학생들의 참여와 반성을 기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대화를 보장하고 손을 대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과오에 의한 것이므로 그것을 같이 논의하여 스스로 잘못을 인식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같이 이야기하였다.
이런 일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해방공간에서의 기쁨 속에 어느 누구도 박해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나는 도민청과 학교위의 일상적 접촉을 위한 연락원으로 있다가 나중에는 광주서중 교위의 강사로 근무했다.
이 시기에 우리는 교위 전체가 의용군 모집에 호응하여 일거에 응하기로 하고 모두 참여했다. 우리는 중앙국민학교에 소집되어 심사를 받았으나 교위 전부가 온 것이 노출되어 책임을 추궁 당하였다. 우리는 아침에 후방에서의 교위활동에 치중할 것을 주의 받고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인민군 응모 과정은 야간에 비행기의 공습을 견디면서 어려운 과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 때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 동료들 중에서 인민군대에 간 것은 우리 학년에서는 홍기현과 홍삼희 두 사람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밥을 먹으면서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씀드리는데, 어머니는 모든 경험을 잊지 말고 보다 값있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⑤ 산에서 낙오, 목숨 걸고 탈출하다
540지구 기동대 세포 승인으로 조선노동당 입당
김장호의 투항과 박준옥 선생님과의 재회
추석에는 어린 동생 영채를 데리고 작은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제사를 지내러 동복에 갔다. 동생을 데리고 가는 힘든 여행이었으나 의미있는 일이었다. 동생을 마지막으로 업고 갈 수 있었던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후 내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바로 이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광주에 있을 때 곡성군 옥과면까지 김희종과 단둘이서 쌀을 가지러 간 적이 있었다. 이 일도 오래도록 나의 기억에 남는다. 그날 광주는 미공군기에 의해 공습 당했는데, 우리는 옥과에서 쌀을 가져다 창평에 두고 불타는 광주로 급히 돌아온 적이 있다.
이것은 쌀이 떨어졌을 때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작업이었다. 옥과 김상옥 아저씨 집으로부터 식량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민청 완장의 힘으로 통행이 가능했다는 점은 당시 우리의 위치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랜 산중 생활에서도 이것은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고통을 무릅쓰고 같이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희종은 비록 삶의 방향을 달리 했어도 서로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이었다. 나는 그간 어렵게 홀로 생활해오면서 그 기억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갖고 있다. 잊을 수 없는 친구 김희종!
산에 들어와서 나는 장호 형이 있는 곳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시간이 나거나 다른 동지들이 다른 부대와 접촉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무들을 동행했다. 그러나 그것은 좋지 않게 끝났다.
남아 있는 친구들 어느 누구와도 접촉을 하지 못한 채 보월 쪽에서 540지구부대의 광주시 관계자들과 접촉했을 때 ‘누가 그런 반동적인 친구들과 아는가’라고 욕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들 신상에 무언가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나는 그들의 소재를 알아보려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서중 관계의 가까운 분을 만나게 된 것은 후방부장 연락병 시절 박준옥 선생님이 처음이었다. 후방부장 연락병으로 참모부에 갔을 때 보지 못한 늙은이 한 분이 참모부에 신고를 하는데 광주시 유격대에서 온 박준옥이라 하지 않는가.
자세히 보니 우리 학교의 교장선생님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랐다. 선생님은 일정 기간 참모부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은 김장호를 시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 데리고 있었는데 그가 투항해 버리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지구로 소환된 것이었다. 교육자로서, 제자들을 많이 거느린 분으로서의 고민은 뭇사람의 고민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다
빨치산 입대 후 나는 광주지구 부대의 성원이 됐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조국의 해방에 기여하려는 나의 노력은 헛된 것으로 되지는 않았고 무엇인가 새로운 결과를 맺어가고 있었다.
이태식은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는 있었으나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내심이 어떠하건 그 표현은 거칠고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지난 시절의 빨치산 지식인들처럼 도중에 탈락하느니 일찌감치 나갈 것을 권고했으며 그렇게 말함으로써 나를 분노케 했다.
나는 이 기동대장과의 대화 속에서 나의 삶이 비록 기본출(*주1)은 아닐지라도 그간의 싸움에서 자기 위치를 굳힌 투사라는 것을 강조했다. 일반적인 규정은 우리의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문제로 나와 그는 항상 의견을 달리하면서 서로 싸웠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두 사람이 보다 친선을 돈독히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후방부장 연락병으로서 약 한 달 가량 근무했을 때 나의 신상에는 변화가 생겼다. 우리 지구에 있는 20세 미만의 소년들을 주축으로 소년중대가 결성되게 되었는데, 이 소년 돌격중대의 결성에서 내가 문화부 중대장으로 발탁이 된 것이다. 내가 문화부 중대장이 되는 데에는 이태식 동지의 노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
돌격중대에서 나의 역할은 컸다. 중대장은 나의 기동대장 이태식 동지의 추천에 의해 화순중학교의 김안근 동지가 결정되었다. 첫 중대장에 이어 이○○동지, 그 뒤의 경상도 노동자 동지 등은 전부 나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돌격중대에서 나는 입당했다. 출생년월일이 1932년 3월6일(*주2)로 되고 3월21일자로 540지구 기동대 세포에서 승인을 얻어 조선노동당원이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나의 입당문제는 정치부 출판국장인 박준옥 교장선생님의 지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산에서 낙오하다
서울 점령 1951년 3월경에 돌격중대는 해체된다. 나는 기동대에 소환되어 며칠 후 지구사령관 보위병이 되었다. 내가 보위병으로 될 때 이태식 동지는 나에게 많은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내가 소집해준 지휘부 회의는 정치간부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를 보위병으로 임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거부하였다. 결국 나는 2시간 만에 다시 대대 정치부 대기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세 중대 가운데서 나에게 알맞은 중대를 고르기 위해 각 중대를 탐방하게 되었다. 따발중대는 특수중대라 나에게는 부적격했다. 강철중대에는 가고 싶었으나 좋은 측면이 있는 반면 학생출신 나의 선배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농민출신이 주축으로 구성된 폭탄중대로 갈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중대를 고르던 중 소속없이 보급투쟁에 참여하다가 선이 떨어져 낙오하는 사고를 당한다.
당시 기동대 부대대장은 문남철이었다. 그는 국방군 대위 출신으로 고향은 광산군으로 남노당 군 특수부 출신이다. 나와는 무척 좋아하는 사이였다. 그는 자기가 지휘하는 보급투쟁에 같이 갈 것을 제안하였고 나는 같이 가기로 하였다. 보급은 동면 화순탄광 옆 동네로 갔다. 보급은 무사히 끝났다.
보급부대가 별산 언저리의 보월주변에 이르렀을 때 나는 선 검열을 나갔는데, 후방부에 속해 있는 윤 동지가 선이 떨어진 채 바위 위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윤 동무를 질책하면서 윤 동무가 지체 없이 뒤따라 올 것을 명령하고 선을 잇기 위해 뛰었다.
한참 뛰고 나니 거기에는 토치카로 된 지서가 나왔다. 나는 자세히 살피고 그것이 보월지서라는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서 다시 뛰었으나 출발한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혼자 떨어질 것을 두려워 한 나는 밤에 보이는 길을 향해 나갔다.
그때 고랑 건너로 소가는 소리가 들렸으나 다급한 나는 그것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한참 뛰다보니 주변에 죽은 사람의 시체가 즐비했다. 시신은 다 썩었으나 의복은 그대로 안 썩어 사람의 형체가 완연한 투쟁인민들의 시신이었다.
길이 틀린 줄 알았지만 멈추거나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날이 새면서 수백 명의 죽은 인민들 모습은 더욱 확연히 확인되었다. 나는 그저 뛰다가 새벽녘이 되었을 때 화순 큰재고랑에 와있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나는 만연산 꼭대기에 와 있었다. 화순은 아침을 위한 연기로 가득하고 광주에서 트럭들은 줄지어 넘나들고 있었다. 무등산으로 갈 수는 있으나 부대로의 귀환을 자신할 수는 없었다.
만연산으로 생각되는 정상에는 봉화의 흔적이 있고 발자국이 나 있었으나 발 크기는 내 두배나 되어 내가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 곳이 만연산이라 규정짓고 무등산 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봄이라 딸기밭에 익은 딸기가 많이 열려 있었으며 목탄을 굽던 사람 없는 움막이 몇 개 있었으나 지역을 확인할 수 있는 주소나 기록된 문서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거기에서 나는 내가 부대트로 가는 길에서 이탈한 지점을 확인해야 했다. 가만히 확인해 본 결과 내가 뛰면서 이탈한 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지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밝은 낮에나 가능한데 그 주변은 모두 경찰이 장악하고 있었다.
나는 비무장이지만 밝은 날에 그 지점까지 도달하여 정황을 파악해야 했다. 오랜 생각 끝에 결단을 내렸다. 길이 틀어진 지점까지 밝은 낮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결정하고 바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산에 있는 꾀꼬리들이다. 이들은 사람을 따라 다니면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꾀꼬리 소리가 아름다운 목소리일지는 모르나 시신이 즐비한 지역에서 꾀꼬리 울음은 저주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그 목소리를 적이 확인한다면 비무장인 나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었다.
적진 탈출
어제 저녁에 길이 어긋난 지역에 이르자 가야 할 길이 파악되었다. 길 가까이에는 두 사람의 농민이 소를 가지고 와서 논갈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자지간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앞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낫을 가진 채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 사람에게 내가 유격대원임을 밝히고 곧 부대가 올 것이므로 당신은 칼두 쪽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는 그럴 것을 약속하고 칼두 쪽으로 갔으나 약 2백 미터쯤 가다가 아들과 함께 지서 쪽으로 갔다.
나는 그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갖고 있었던 쌀과 주전자를 싸서 진달래나무 밑에 묻고 위장 나무를 옷에서 떼어버리고 앞산을 넘어 보월지서 쪽으로 걸어갔다. 농민들은 밭 김매기에 바빴으며 나의 인사에 맞절을 하면서 김매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서에서는 경찰들이 일어나서 이불을 널거나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
부락에 들어서니 부락 아이들이 떼 지어 나왔다. 그런데 그 중 한 놈이 나를 보더니 지도원 동지하면서 인사를 하지 않는가. 나는 손을 들어 나의 입을 막으면서 그 자리를 피했는데 그 친구는 북면 송단리의 소년단원이었다.
조금 가니까 1월2일 우리와의 싸움에서 죽은 국방군의 묘지 옆에서 경찰이 총을 쥐고서 똥을 누고 있었다. 그를 보고 무등촌 쪽을 보니 넘어가는 길에 보초 한놈이 M1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는 망월동 쪽을 보니 거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상황파악에 기초하여 나는 망월봉과 무등촌 가는 길사이의 밭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지서 망루의 시계에서 벗어났을 때 지서에서는 악쓰는 큰소리가 나더니 일제 사격이 빗발치듯 시작되지 않는가. 나는 몸을 수그리고 약 1킬로미터쯤 떨어진 강가로 힘껏 뛰어갔다.
강가에서는 광주시당 사람들이 불탄 부락을 수색하면서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나는 배가 고파 그들에게 가서 소속을 밝히고 다시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갚겠다고 쌀을 조금 줄 것을 요구했더니 한 사람 한 끼 몫의 쌀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깨진 항아리 조각을 가지고 밥을 지어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잠이 왔다. 나는 부락의 언저리로 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오후 3시 정도 되어 일어났다.
그 너머에 있는 옥리로 갔더니 평소 알고 지내던 이칠진이 정보과 분트원으로 있었다. 나는 거기에 의지하여 그날 밤을 자고 아침에 짚으로 삼은 짚신을 하나 얻어 신고 혼자서 북면 송단리로 향해 출발했다.
옥리로부터 송단리까지의 혼자 길은 지루한 것이었다. 나는 점심 때쯤 되어서 송단에 도착하였다. 김매던 여성동무들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온 동네가 환호하는 가운데 도착하여 신고하고 부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문남철 동지는 책임을 추궁당한 모양이었다. 사기가 많이 저하되어 다시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부모를 쏴 죽일 수밖에 없었던 동지
폭탄중대로 간 뒤의 생활은 일상적인 유격투쟁의 연장이었다. 당시 부대는 웃강례동 건너편 묘지를 관리하는 제각에 위치하고 있었고 본부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중대장은 없었고 부중대장은 정보과 출신이자 이서면 출신인 정○○ 이었다. 나와 그는 같은 화순출신으로 친분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대원 중에는 서중 선배인 동면의 여동지가 있어서 나의 업무를 많이 도와주었다.
그 동네에는 곡성군 삼기면당이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부위원장이 부모를 쏴 죽인 인물이라고 알려져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나도 그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연대 결성에 안가고 그를 만나 보았다. 그분은 예상과는 달리 첫인상부터 아주 좋은 분이었다. 그 분이 양친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처음부터 양친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그 분과의 대화를 통해 진심을 이해하고 그 분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한 나의 이해가 관념적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결과 터무니없이 왜곡되어진 그의 생각은 동지들 간에 충분히 이해받아야 할 것이었다.
⑥ 좌측 갈비뼈 밑에 구멍 뚫리다
밀리는 전선, 증가하는 이탈자
정치지도원이 되다
연대결성 의례에 참여하고 돌아온 대원들의 나에 대한 축복은 대단했다. 1대대 정치지도원 겸 연대 부정치위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문화부 중대장으로서 했던 역할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당시 나의 행위는 별 것이 아니었으나 창립기의 빨치산 부대에서는 상당히 뜻있는 활동으로 높이 평가 받았던 듯하다. 경합자들이 20세를 넘는 당원들이었고 정치부의 현역지도원으로서 충분한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만큼 나의 임명은 의외였다. 2대대 정치지도원은 하동의 정○○였다. 10명 가까운 정치부 지도원 중에서 내가 수석으로 뽑힌 것이었다.
이 시기는 어려운 시기였다. 해방구는 경찰로부터 그 존립을 위협받고 있었다. 남원에 경찰토벌대가 조직되어 백아산 본산 마당바위에 주둔하면서 학천경찰서를 두었으며, 원리 앞 선새제 위에 지서를 토치카로 만들어 놓고 우리 방위부대와 일상적으로 대치, 전투하고 있었다.
우리의 경우 연대는 편성되었으나 편제를 완전히 조직하지 못한 채 전투를 매일매일 진행하고 있었다. 대대가 조직되어 일상적인 업무는 수행되고 있었으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면당부위원장 출신의 2중대 정치위원이 와 있었지만 1중대 정치위원이 광주작전에서 부상당하여 취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광주서중의 2년 선배였다.
해방구를 일정하게 유지는 하고 있었으나 백아산 정상을 빼앗기는 바람에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외곽지대를 지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대열의 동요는 심했다. 많은 대원들이 이 시기에 대열을 이탈하거나 자수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빨치산 투쟁에서 이 시기에 대열 이탈자가 가장 많았다. 어떤 녀석은 그날 저녁에 자수하려고 하면서 낮에 잠자는 나를 굳이 깨워 이발을 해주고는 밤에 대열을 이탈, 자수하였다.
부상을 당하다
그러다가 1951년 8월4일, 나는 부상을 당했다. 그날은 정치일꾼인 나에게도 부상당한 군사일꾼들을 대신하여 방위 지휘업무가 할당되었다. 나는 양지 뒤쪽 3각고지의 방위를 할당받았다.
대원 2명과 나, 3명이 방위에 임했으나 무장은 M1 1정과 99식 1정, 아식 보총 1정 등 총 3정이었다. 대덕에서 올라오는 경찰부대와 대치하여 총력을 다 했지만 중간에 M1이 고장나는 바람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구참모부장의 명령으로 병력을 집결시켜 방위를 조직한다는 명령에 따라 차일봉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령에 의한 후퇴였음에도 불구하고 1대대장은 불만을 표시하였다. 나는 대대장과 의견 대립을 하면서 논쟁을 하였다. 나는 후퇴가 상급의 명령이었다는 점을 들어 반발했다. 우리는 이제 3각고지 방위의무에서 벗어난 상태라 무기를 대원들에게 주고 더 이상 후퇴할 것을 거부하고 전투에 임했다.
차일봉 주변에는 중기와 함께 상당한 병력이 집결하여 이태식 동지의 지휘 하에 방위전이 전개되었다. 전투 중 적의 동향 가운데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다. 방촌재에서 적이 자꾸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확인하고 이태식 동지에게 보고하면서 전투에서 후퇴를 산 밑으로 조직하는 것을 삼갈 것을 건의하고 제자리에 돌아와서 전투에 참여했다. 이것이 적에게 인지되었던지 8월의 녹음 속에서 나의 움직임이 적에게 확인되었는지, 무엇인가가 좌측 갈비 밑을 때리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누워 있었다.
일어나서 배를 보니 좌측 갈비 밑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이태식 동지에게 부상을 보고했다. 이태식 동지는 자기가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상당했다고 말하면서 빨리 안전지대로 피신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돌아서니 박영기 중대장이 총의 인계를 요구해 왔다. 나는 총을 인계하고 돌아서는데 허리에 차고 있었던 가방이 떨어졌다. 나는 대대자료와 사회과학사전이 든 가방을 산골짜기로 내던졌다. 그리고 차일봉 위로 뛰었다.
총탄이 빗발쳤으나 나는 맞지 않고 위생병 있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위생병은 총격이 관통상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모든 힘이 없어져 버렸다. 그때부터 붕대가 매어지고 움직이지 못하는 나는 담가(*주1)에 의해서 야전병원이 있는 보름재로 운반되었다.
지구의 간부들은 나의 부상을 모두 애석히 여기며 자기들이 갖고 있는 붕대 등을 내놓았으며 석운이 어머니 등의 위문을 받았다. 나는 운반 도중 대원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담가를 없애고 나중에는 한사람의 도움만을 받으며 보름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김용원의 보은
나는 병원 입원에서 김용길 사령관 동지의 특별명령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환자트에 가지 말고 병원 직원트에서 직접 치료를 받도록 하라는 것이다. 나는 보름재의 환자트에서 환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환자로서의 생활은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었다.
환자트에 처음 와서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잃어 맨발이 되었다. 통신원 등 신발 사정이 좋지 않은 요원들에 의한 소행이었다 할지라도 활동에서 불가결한 신발을 잃는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바로 부대에다 편지를 썼다. 부상당한데다가 신발마저 없는 나의 형편을 알리고 빨리 신고 다닐 수 있는 신발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며칠 후, 부대대장인 김용원 동무가 이를 약간의 다른 보급과 함께 해결해 줘 무척 기뻤다.
김용원 동지는 소 앞다리 하나와 쌀 한 말, 그리고 고무신 한 벌을 가지고 내가 있는 환자트로 방문한 것이다. 나는 무척 반가웠으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쌀이나 고기는 조직의 전체적인 규제 속에 있는 것인데 내가 이것들을 임의로 취한다는 것은 조직규율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칙적인 규제에 따를 것을 그에게 요구해서 의무대에 이것을 대부분 귀속시켰으나 그는 이것에 저항했다. 그는 그런 자기의 행위가 대다수 우리 부대 성원의 합의를 얻은 합법적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용원 동지는 자기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부상 당했을 때 제일 먼저 자기를 방문한 사람은 나였다는 것이다. 그가 따발중대 중대장이었을 때 원리에서 평리꼬랑쪽을 봉쇄하고 있었던 경찰이 평리 밖에서 작전을 하고 다시 백아산 계곡으로 되돌아가는 따발중대를 요격하여 김용원이를 부상시켰다.
나는 특무장에게 말해서 미영배 2필을 마련하여 가지고 따발중대가 거점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검덕굴재로 가서 김용원 동지를 위문한 적이 있었다. 그의 위문에 내가 제일 먼저였다. 그때 김용원 동지는 어느 때든지 이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갚겠다고 기약하고 있다가 이를 실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환자트에서의 위기
환자 생활은 아침에 동지들과 함께 조를 짜서 피난을 조직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때 나와 함께하였던 피난조는 나와 함께 돌격중대 중대장으로 있었던 경상도 출신 노동자 김군과 곡성군 겸면 출신의 농민 김군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총사(*주2)와 분기점 중심인 3각 고지 밑에 피난처를 잡았다. 들어갈 때 피아를 가리고 밑에서 만세 수를 헤아려 피아를 가려 오후 2, 3시가 되면 나오는 방법이다. 이런 분별법을 한 번 잘못하여 큰 과오를 저지를 뻔 하였다.
11월 중에 우리는 총사 3각 고지 밑으로 갔다. 우리가 셈한 만세 소리로 3각 고지에는 우리 총사 동지들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능선으로 나왔다. 그날은 교전이 있어서 우리 부대 동지들이 중기 고지에까지 와 있었다. 우리는 동지들도 만날 겸 능선까지 버섯을 따면서 올라갔다.
그러나 서 있는 보초는 우리 동지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부르다가 총을 내밀었다. 우리가 그들을 바로 봤을 때 그들은 우리의 동무들이 아니고 순사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경찰임을 확인하고 뛰었다.
경찰은 우리를 확인하고 사격을 해왔다. 중기고지의 우리 동료들도 우리의 위기를 감지하고 돌격을 하면서 우리를 엄호해서 간신히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나는 두 달만에 처음으로 이태식 동지 등 우리의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부대로의 복귀
연대장인 이태식 동지는 약간 무리가 되더라도 퇴원할 것을 권유해 왔다. 그는 나에게 각별한 자기 나름의 관심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 있는 모든 환자들이 자기 휘하이고 기동대원들임을 고려할 때 나에게만 각별한 관심을 보일 수 없다고 말하면서 퇴원해서 얼마 동안은 연대본부에 있을 것을 제안해 왔다.
나는 고려해 보겠다고만 대답했다. 의무과 생활이란 그 시기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먹는 것은 통밀이 주였고 그마저도 끼니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또 통밀은 먹고 나면 소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산에서 모은 버섯이나 나물류가 부식의 주종이었다. 그나마 소금이 없어 그냥 먹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약이 없는 조건 속에서 화농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으로 개고기를 보급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때 아직 복부의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으나 퇴원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날로 퇴원 요구서를 제출하고 보름재 병원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로 보름재를 떠나 차일봉으로 옮겼다.
부대에 가보니 많은 동지들이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문남철 부연대장 동지도 없었고 정보과장 동지도 없었다. 나는 이태식 동지의 고려에 의해 연대본부에서 의식을 해결했다. 음식은 이태식 연대장의 것을 대신 먹고 나의 급식을 대신 이태식 동지가 나의 것을 배당받아 먹는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이태식 동지의 나의 대한 고려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내가 완전히 건강한 몸이 되었을 때 다시 부대로 배치되었다. 나는 일단 1대대 민청지도원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2중대 문화부 지도원이 되어 정상적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투쟁의 시기 1 : 동지를 총살하다
이 시기는 부대가 주요 거점을 백아산 바깥 능선에서 수양산과 8·8 능선의 담양쪽으로 옮긴 때였다. 우리는 해방지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화순군과 담양군의 경계를 넘나드는 불완전한 것 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 우리는 원리에서 갈전 서유로 이어지는 계곡을 우리의 힘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전투는 담양경찰과 연일 수덕산 능선을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었으며, 우리가 전투를 원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선정한 지역에 우리가 도피함으로써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의 우리의 행동양식은 새벽 일찍 고정트를 멀리 떠나 우리가 피신하고 공화국 시간이 된 2시 이후에 고정트로 복귀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투쟁양식은 이것에 상응하는 대응양식을 우리에게 강요하면서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첫째 문제는 이런 대응양식이 낳은 희생의 확대이다. 우리가 8·8 고지주변의 야산에 주둔했을 때 우리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것은 오해에 의한 희생의 확대 과정이었다.
우리는 1951년 광주시 유격대가 8월8일 날 격전을 치룬 8·8 고지 밑에 고정트를 확보하고서 그 부근에 자기활동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침에 고정트를 출발하여 유격투쟁을 위한 트로 이동하던 중 갈전 앞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부상 이탈 빨치산의 매복에 직면하였다.
그는 “나는 빨치산이요 동무들 나를 살려 주시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정보과원들과 함께 가까운 비트로 올려졌다. 그는 나이는 어리지만 구빨치산으로서 1950년 이전에 생포된 적이 있는 장성 출신의 김부숙 동무였다.
그들은 3일 전에 몸이 아프다고 부대 이동에서 탈락한 채 트에 남아 있다가 생포된 대원 2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정보과에서의 진술에 의하면 그들은 트가 포위된 상황에서 적에게 전투도 없이 투항했다고 한다.
그가 체포된 것은 중대장인 이북 출신과 함께였으나 이북 출신 한 사람과 경찰과의 화해는 쉽사리 이루어지고 심문은 이남 출신 그에게 집중되는데 쉽사리 화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보건대 남한 출신 빨치산의 긍지가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어 주저하는 것으로 경찰들에게 감지되었던 듯하다. 결국 적이 과한 요구를 제기하면서 불신이 확대되어 그를 마당바위 위에서 처형하였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치명상을 입지 않고 10여 미터의 추락에서도 죽지 않고 생명을 보존하여 우리 루트 가에 그가 접근, 선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정치부의 구상은 그를 대중토론의 대상으로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그것을 그의 구명으로 결론짓게 함으로써 그를 살리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원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투항과 토론 과정에서 목숨을 건지려는 나약한 태도는 대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마음을 격분시켰다. 결국 그의 죽음을 강경하게 주장하도록 만들어 그를 총살케 했다.
그 상황 속에서 그의 구명은 아무도 주장할 수 없었다. 사령관 김용길 동지는 그의 처형 후 울면서 그가 죽게 된 것은 자신이 잘못한 탓이 아니라 우리의 어려운 상황과 역량부족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서 우리를 눈물짓게 했다.
나는 이때, 그의 눈물을 통해 항상 원칙적이고 잔인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던 지휘관으로서의 김용길을 비로소 깊이 이해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2·12 사건 이후 김용길 사령이 살아남은 나에게 15발 칼빈탄을 주면서 그 이해는 더욱 구체화될 수 있었다.
부대 배치 덕에 살아남다
투쟁의 시기 2 : ‘소잡기’에서 배운 교훈
둘째, 이 시기에 나를 가르친 것은 소잡기다. 우리 생활에 질서가 잡히면서 개인의 생활에도 차츰 질서가 생겨났다. 대대 간부에게 할당되어지는 직일관(*주1) 제도는 나에게도 일주일에 한 번 주기로 찾아 왔고 이런 것들은 나를 일상적인 대대 업무 이외의 각종 업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직일관 참여를 통해 소를 잡는 동지들은 나에게 소를 잡는 그간의 역사적 관행과 조직을 위해 소를 사용하는 방법들을 가르쳤다. 나는 그들의 주장이 옳았으므로 이에 따랐다.
나는 소잡는 과정에서 생기는 생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약으로 제공하고, 그 나머지는 전 부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희소한 고기 종류만을 먹는 사람에게는 불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치료할 길 없는 병 때문에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좋아했다.
환자들은 토착적 치료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의 어리석은 행위로 인해 사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경우도 있었다. 소의 쓸개, 그것도 쓸개 덩어리(우황)는 중요한 약의 창고였으나 한 사람에게 이것을 전부 주었던 것이다.
나의 이 같은 행위는 많은 말을 생기게 했으나, 정식으로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부산물 처리 방식은 직일관으로 의무가 주어지는 한 지속되었다
투쟁의 시기 3 : 동료들의 고뇌
셋째, 이 시기는 모든 면에서 과도기적인 상황이었으므로 대원들의 행동 또한 과도기적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동료들의 태도는 비위에 어긋났고 그 과정에서 우리를 분격케 했다.
해만 떨어지면 많은 동지들이 서로를 피해 산 구석에 앉아 눈물을 쏟으며 훌쩍이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나는 그런 것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자리를 만나면 서로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일상적인 관행으로 되었다.
나는 그런 행위가 죽음을 회피하거나 운명적으로 슬퍼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한 적은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를 지적해서 논의를 제기했었다. 조국을 위한 의무를 수행하다가 죽음에 직면한다면 그것 앞에 서슴없이 기쁜 마음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그와 같은 태도는 그들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조국을 위해 싸우는 길이고 우리가 사는 길이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시기 나는 많은 동료들의 고뇌 속에서 나 자신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많은 동료들의 죽음과 변신 속에서 해결되어 갔다.
슬픈 귀환
유격투쟁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됨에 따라 우리의 운동 범위는 보다 광범위해져 갔다. 그 때까지는 일정 지역을 고정적으로 지키면 되었으나 이제는 적의 지배가 약한 곳이면 어디든지 자기 역량을 투입하여 장악하여 갔다.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운동영역이 확대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951년 초기에 우리의 활동영역은 백아산 주변이었는데, 후기에는 영역이 칼두 8․8고지 부근으로부터 무등산 주변으로까지 확장되었다.
1951년 초, 수리 이동에서 우리 중대는 많은 타격을 입었다. 수리 사건의 결과 나는 짚 타는 냄새를 기피하게 되고 이를 죽음과 연관짓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죽은 동지들을 수리 동네의 뒷산에 묻고 나머지는 병원에 옮겨 인도한 뒤, 우리는 그 다음날로 다시 백아산 쪽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적과의 전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과오 때문에 많은 동지를 희생시킨 사건이었기에 무거운 고뇌를 안겨주는 일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부주의로 인해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가 발생한 것에 있었다.
정하근의 집에 도착한 부대는 곧 취침에 들어갔다. 그러나 총괄책임자인 특무장은 부대가 책임진 비축물 그리고 운반물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순찰을 돌았다는 것이다. 그때 특무장인 한균배 동무가 입은 옷들이 떨어져 너덜거리기에 문밖에 내어 놓았는데 이것이 화로의 불씨를 건드려 불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쳐있던 동지들이 처음부터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기둥으로 세워진 움막을 성급히 들어 올리다가 움막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것은 아직 탈출하지 못한 나머지 성원들을 불속에 던져 넣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부대 요원들을 많이 잃고 원리 쪽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원리 부근에 돌아왔을 때 우리의 주적은 해병대이었다. 그들이 백아산 쪽을 휩쓸고 지나간 뒤, 토벌이 시작되면서 각 지역의 무장이나 비무장 부대들이 피신을 위해 백아산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귀환하는 길은 동시에 우리에게는 지역구(무등산 백아산 지역) 내에서 동지들을 몰아내는 눈물겨운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원리 못 미친 언덕길에서 불 쬐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서중 동기인 춘형이를 만났다.
몇 마디 하는 사이에 그의 부대는 관할지역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추방명령을 받고 철수하게 되었는데 지휘관이 “우리도 우리 땅에 가서 영광스럽게 죽자”고 하면서 부대를 이끌고 떠났다. 이런 정경들은 우리 모두를 눈물짓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평리로 가려다가 관음사 쪽으로 이동했다. 적의 소나기식 이동으로 주어진 혼란은 곧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은 시련이면서 동시에 질서확립을 위한 학습의 과정이었다.
망월봉 전투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였다. 우리는 1951년 1월1일을 백아산 앞 동네인 학천에서 맞이했다. 그리고 이 날은 총사 1연대와 연합으로 학천국민학교에서 합동신년회를 가졌다. 나는 이 모임에서 광주 서중생의 복장으로 신년사를 했다.
원래는 부대 대표로서의 참여였으나 내가 부대 대표로서 참여하기로 하니까, 광주 서중출신들이 복장을 준비해 와 교장 선생님의 지도 하에 그렇게 된 것이다. 신년회를 마치고 부대는 그날 저녁으로 무등산 밑의 무등촌으로 옮겨간다.
1951년 초에 백아산으로부터 무등산으로의 이동은 큰 이동이었다. 그리고 이동 중에 많은 부락을 거쳐 오면서 구성원들의 자가 방문허가 요청이 제기되어 집이 먼 사람은 이것을 개탄하기도 했다.
최초의 대행군을 거쳐 아침에는 무등촌에 도착해 있었다. 무등촌의 지형은 나로서는 그 시기까지는 최초의 파악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보위중대로서 주요 보초선을 장악하고 있었고 내가 1월3일부터 망월봉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1월2일이 지나고 1월3일이 되었을 때 적정이 동면 쪽으로부터 비쳤다. 적군 부대인 20연대의 이동이 감지된 것이다. 이것에 대비하여 무등촌 방면의 방어를 전담하고 있는 돌격중대는 중대본부를 아예 반월봉으로 옮겼다. 방어망은 무등산 쪽으로 광주시 유격대와 광산군 유격대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것과 옆으로 잇는 망월봉 쪽을 책임지게 되었다.
18연대 전 병력이 연대장 정근상 동지의 지도하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국군은 망월동을 불지르면서 우리의 방어망을 공격했다. 무등산에서의 측면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군인들은 전투 전선을 무등촌에서 먼 망월봉 동쪽으로 이동시키면서 망월봉 쪽에서 도로 쪽으로 펼쳐 갔다.
우리는 이에 대응하면서 오후 2시경까지 버티다가 무등산 쪽으로 후퇴한다. 이 전투의 과정에서 적에게 타격을 주었으나 특기할 만한 것은 인민군식의 구령으로 적의 행동을 제약한 것이다.
전투가 치열해졌을 때 정근상 동지는 “사격중지”를 명하고 그에 이어 “반돌격 준비”를 말하면서 부대를 무등산 쪽 앞의 평지로 후퇴시킨 것이다.
이 구령에 착각을 일으킨 적은 우리가 산상에서 무등산 쪽 산봉우리에 올라서서 싸움을 돋굴 때까지 공격을 중단하고 사태를 관망함으로써 우리의 철수를 보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 “사격중지, 반돌격 준비”는 우리들이 좋아하는 구호가 되었다.
서울 ‘해방’
백아산으로 되돌아온 후 우리는 1월 중에 곡성군 겸면으로 보급투쟁을 갔다. 그리고 거기서 서울 해방의 소식을 듣는다. 우리는 기쁨에 들뜨면서 솔직히 너무 빠른 해방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소를 몇 마리 보급해다가 잡고 평리에서 대규모의 오락회를 가졌다. 오락회는 대규모로 해방을 축하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때 나는 술을 많이 먹었다. 오락회에 참여한 전 대원들과 한 잔씩 교환하고 그 다음은 자유롭게 교환했다.
그날은 심야에 소집 명령이 내려 술 취한 발걸음을 옮겨 서유로의 이동이 조직된다. 우리는 서유로 와서 광주를 정찰하고 해방에 따른 우리의 광주 진출을 대비하였다.
적은 초기에는 큰 혼란을 치루고 있었다. 유지들과 반동들은 개별적으로 해안가나 부산, 제주로의 철수를 조직하는 등 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나름대로 안정되기 시작한 것이 정황이었다. 인민군은 그 시기 중국의 인민해방군과 함께 평택 오산까지 진출하였으나 그 이상은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 시기 우리는 부대 재편의 방향을 내무서 부대의 조직을 정규군을 위한 기간 핵심부대의 창출이라는 형태로 진행한다. 나는 심사를 받았고 해방 후의 업무를 김일성대학 경제학과에의 진학이라는 형태로 배정받는다.
나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곧 중학교 4학년이라는 것을 강조했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일성대학에 가면 개별적으로 지도원이 배속되어 나를 지도함으로서 학력의 격차에서 오는 어려움은 당 지도의 차원에서 극복될 수 있고, 대학 과정은 충실하게 이수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우리의 모든 활동은 해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홍기현과의 재회
우리가 서유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15연대(광주연대)를 만났다. 광주에의 공격을 준비하기 위하여 총사 15연대가 우리 지역으로 온 것이다. 홍기현이도 왔다. 그러나 그때 내가 만난 홍기현이는 M1을 든 채 힘이 빠져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따발총으로 명령에 불복하는 대원을 위협하다가 그를 오발로 죽이는 바람에 부대 결의로 죽을 뻔 했다고 하였다. 다행히 도당위원장 박영발 동지의 보증으로 죽음을 면할 수는 있었으나, M1으로 무장을 격하 당하고 전투 시에만 따발총으로 무장이 허용되는 피제약 상태의 신분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잘못은 인정되었지만 그를 돕기 위해 자리가 비어 있는 돌격중대의 부중대장으로 그를 영입하기 위해 교장 선생님한테 말씀드려 15연대의 연대장 동지에게 교섭하기로 했다. 교장선생님은 나의 말을 듣고 15연대의 연대장 동지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15연대의 연대장 동지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으나 홍기현이는 15연대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과격한 작풍은 시정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지를 아끼는 마음으로 교육적인 제재에 여러분이 협조해 주셔야 한다고 하면서 이적을 거부하였다. 교장 선생님은 거기에 순응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홍기현이를 만나 그 이야기를 전하고 보다 나은 실천을 요구했다. 헤어지면서 내가 여유로 가지고 있었던 방한모를 하나 주고 그에게 영광이 있기를 기원하면서 헤어졌다.
광주 ‘해방’을 준비하다
서유에서의 생활은 대부분이 해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객관적 심사와 자기 요구를 기초로 장래의 자기 사업을 선정하여 각기 자기 갈 곳을 택하고 그것을 위한 교육을 받았다.
나같이 수가 적은 한정된 업무에 선정된 사람은 집단적으로 할 일이 없었으므로 한가한 편이었다. 나는 일반적인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지냈다. 시일이 지나면서 우리는 안정을 되찾았다. 부대의 동향도 도피보다는 현상유지로 자기의 기조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2월이 지나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3월 1일의 광주 진공을 조직한다.
광주 진공이 구상되자 서로 여기에 참여하기 위한 경합이 일어났다. 우리는 잔류조직의 보위를 할당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나는 장래 광주투쟁 참여를 위해 내 나름의 참여방식 대한 확고한 방침을 가지게 되었다.
광주에의 투쟁참여는 광주에서의 죽게 될 가능성이 많은 일이었다. 나는 1) 광주에서 죽게 된다면 나의 시신이 알려질 가능성이 있고 2)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학교 동료들이 나의 시신을 보게 되었을 때 발생할 부정적 효과를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죽게 될 장소로서 최소한 광주만큼은 배제해야겠다는 현실적 요구가 주요한 현실적 과제로서 제기되게 된 것이다.
이는 나의 투쟁참여에 대한 원칙으로 갖게 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유격투쟁의 격화 속에서도 내가 갖는 투쟁원칙으로서 견지되었다. 나는 부모님께 시신을 보여드리지 않음으로써 나의 생존에 대한 기대를 버리시지 말기를 바랐다.
이런 것들은 이후 서석학교에서의 작전 후 빨치산 가족들의 시체 확인이나 기타 상황정보를 통해 다시금 내가 꼭 지켜야 할 원칙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러나 1952년 2월, 부대 피격 시 우리 부대의 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한 원칙의 양보가 나를 죽음의 자리에서 피하게 한 적이 있다.
1952년 2월11일 수양산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친 우리 부대는 적의 토벌작전에 대비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고 무등산 쪽으로 이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개편에서 나는 광주소조의 정치책임자가 되어 광주지역으로의 투쟁을 하명 받았다.
그러나 나는 광주 기피의 원칙에 따라 정영국 사령동지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정치소조로 가는 것을 원한다는 주장이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전술한 광주 기피에 대한 나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함이었다. 보을 보급투쟁을 끝내고 돌아온 사령동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나에게 말했다.
사령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죽게 된다면 광주에서의 죽음만큼 값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서는 나름의 선택이 있다고 말하면서 정치소조에 소속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령동지는 너의 견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지금은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한 지휘부 회의소집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이번만은 본인의 요구를 억제하고 결정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나는 그것에 순응하여 나의 요구를 철회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씀드리고 본대로 돌아왔다.
그 시기의 상황은 아주 절박했다. 무등산 쪽의 고지에는 적이 주둔하여 큰 모닥불이 타고 있었으며 보을의 한 지역에서 달라붙은 적은 우리의 뒤를 따라 붙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나의 명령 선택은 결국 생사를 갈라놓았다. 내가 원했던 부대가 고랑으로 내려가 거의 전멸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대배치의 덕으로 광주돌격소조의 정치책임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의 성원은 광주지구 부대구성원이 5명, 광산군당이 5명 등 총 14명이 될 예정이었으나 그 시기는 4명뿐이었다.
8·8고지를 점령하다
이 시기 우리의 활동영역은 담양 남면 쪽에 치우쳐 있었다. 우리는 서유 뒤에서 ○○상에 이르는 능선에 주둔하고 일상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⑧(끝) 관료주의가 아니라 사람이 귀하다!
박현채 선생의 회고록 마지막 연재분입니다. 93년 여름, 이번 내용을 마지막으로 선생은 쓰려졌습니다. 편집자 주.
군사지휘권을 인계받다
이 시기 투쟁 중에서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화순 둠벙재에서의 싸움이다. 우리 부대는 담양 남면에서 수유에 이르는 능선방어로 지친 나머지 1951년 여름에는 화순 이서면과 화순면의 둠벙재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을 인민들의 결혼행사에 개입하여 우리의 급식문제를 해결하였다. 그 다음날 동면에서 보급투쟁을 한 뒤, 1대대는 그냥 담양 남면 쪽으로 이동하고 1개 대대는 둠벙재의 기존트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화순경찰서 기동대가 그 부근에서 우리의 이동을 감지하고 야간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보급투쟁에서 돌아온 부대가 배낭을 풀고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적이 기습해왔다. 사격의 신호탄이 올랐을 때 우리는 배낭을 벗고 아침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사격 개시!” 소리를 듣고 뒤를 되돌아 봤을 때 바로 옆에 일직선으로 탄흔을 남기면서 사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벗었던 신을 다시 신고 총을 찾아 들고 배낭을 걸머지고 골짜기로 빠져서 약간의 세력을 규합하여 산 위로 올라갔는데 위에서도 사격을 세차게 해왔다. 후퇴하여 피할 자리를 모색하는데 성원은 15여명 되었으나 군사지휘관은 없었고, 광주시당 부위원장과 몸이 안 좋은 중대장 한 명만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일꾼으로서 나는 군사지휘권을 인계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휘관으로서 나는 탈출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무등산으로 가는 길은 막혔고, 거기가 막힌 상황에서 밑으로 가는 모든 길 역시 막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길은 동면과 화순 쪽에서 오는 길과 마주치는 삼거리가 있으나, 거기에서는 적과의 전투가 예상됨에 따라 당 세포회의를 소집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당세포 회의를 소집하여 한 명의 당원(조○○ 동무)에게 척후로서 앞설 것을 명하고, 대원 가운데서 입당을 원하고 있었던 이○○ 동지의 입당을 허가하고, 조 동무와의 동행을 명하면서 삼거리로 접근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적은 삼거리에 매복이 없었다. 우리가 전투태세를 갖춘 채 논밭이 있는 평야 부위까지 상당한 정도 내려 왔을 때 이서에서 늦게 올라오고 있던 적이 우리를 발견하고 사격을 해왔다.
우리는 불의의 사격에 직면하여 일시 후퇴하였으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나의 지휘명령에 따라 되돌아서 일제히 돌격을 하여 적을 쫒아내고 도로를 따라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앞서간 동지들의 족적을 따라갈 수 있었으나, 동지들이 강가에서 족적을 없앴으므로 자창리 뒷고지로 올라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자창리는 곡성 화면의 경계에 있는 고지로 나와는 몇 차례 접촉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적의 주둔지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요지다.
우리는 거기서 연기를 보고 우리 동지인 이 동지를 알아보았다. 그곳으로 동지들을 보내 접선을 한 후, 오후가 되어서야 합류를 하였다. 이어 서유 쪽으로 함께 이동했다.
둠벙재에서의 싸움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고 나에게는 최초로 화선당 회의 운용이라는 중요한 경험을 주는 것이었다. 화선당 회의는 부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당 일꾼이 긴급한 상황에서 조선노동당의 이름으로 변칙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세포위원장은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며 이 시기 당일꾼에 의한 당운영을 당이 사후적으로 추인하도록 되어 있는 비정상적이고 긴급한 시기의 당운영 방식이다. 그와 같은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당운영방식으로서 주어진 것이 세포위원장에 의한 입당 허용권이다. 화선당 회의에서 세포위원장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이 능선 투쟁에서 획기적인 것은 광주 시유격대와 유사한 투쟁을 우리가 초가을에 한 것이다. 광주 시유격대의 투쟁은 1951년 8월8일이었으므로 수양산의 한 갈래 능선인 그 곳은 8·8고지로 불리고 있다.
우리는 적이 사방에서 침공해왔으므로 일반적인 대응양식에 따라 서유 뒷고지로부터 적과 싸우면서 후퇴를 거듭하여 수양산 주봉과 그 아래 능선을 확보한 채 대결하고 있었다.
적은 사방에서 죄어들면서 여느 때와는 달리 집요한 공격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후 2, 3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가지 않고 우리에게 싸울 것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두 개의 고지에 몰린 우리는 방어전을 조직하면서 광주 시유격대의 전례에 따라 8․8고지에 관심을 가졌으나, 거기에는 담양군의 경찰들이 수시로 타격조를 출동시키면서 고지 전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우리가 장악하고 있었던 상봉은 적의 집중적인 공세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방위와 자위를 위한 필요로 인해 8·8고지 장악을 위한 논의가 제기되었고 이를 따라 부사령관 이태식 동지의 문제제기가 있게 되었다.
그는 대열 보존의 필요상 8․8고지 점령을 위한 투쟁을 조직하려는데 단위 부대의 자발적 지원방식을 채택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체 분위기가 이에 동조했으므로 자발적 참여에 의해 돌격조가 조직되어 일제사격 후 돌격이 시작되었다.
적은 다수였으나 돌격 앞에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별 저항없이 8·8고지까지 진격 점령하였고 적은 골짜기로 무너져 내려갔다.
곧 어둠이 왔으나 우리는 승리를 충분히 만끽한 다음에야 재집결트로 복귀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적의 공격에 의해 상봉을 빼앗기고 우리가 돌격을 감행한 고지로 철수할 수 있었다. 적의 8·8고지 주력은 분산 상태였으나 우리가 철수함으로서 살아났다고 한다.
나는 이 투쟁에서 이태식 동지와 같이 산 능선을 타면서 첨병으로 역할 했다. 능선을 뛰는 것이었으므로 항상 앞장 서 달렸고 이태식 동지의 너무 빠르다는 제재를 받아야 했다. 앞에는 수많은 적이 돌출하면서 뛰어 달아나기가 바빴고, 나는 그들이 전투과정에서 잃어버린 실탄을 획득하면서 돌격하기에 바빴다. 나는 전투에서 소모한 실탄을 그 이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싸움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연대의 부중대장이었던 화순의 최○○(전 화순중학교사)이 적의 기동대원으로서 우리에게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전투에서 그의 출현은 우리의 적대감을 드높이는 데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위원 강학구와의 논쟁
적과는 늘 부딪쳤지만 이 같은 투쟁들은 적의 예외적 활동에 의한 대응 양식이었을 뿐 일상적으로는 서로 버티기가 구체화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결정적 타격을 입은 후 우리 부대는 일정기간 삼나무 고랑에 머무르면서 견디었으나 이런 투쟁방식에는 여러 논의가 제기되었다.
정치위원 동지는 비록 주력이 소멸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에 굴하지 말고 정상적으로 전처럼 투쟁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보급도 제대로 하면서 부대활동을 정상화시킬 것을 주장한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반대하고 노령으로 간 피난부대가 되돌아오고 부대가 재편될 때까지 대열을 보존하면서 칩거할 것을 주장했다. 공식적인 토론으로 구체화된 것은 아니나 이런 논의의 과정에서 나는 자기주장을 강력히 하기 위하여 무장을 포기하고 비무장으로 된다.
논쟁은 나의 자발적인 무장해제로 끝나고 부대는 쌀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식을 위한 보급투쟁을 조직한다. 그곳은 무등산 도로가의 김덕령 장군의 묘지 뒤에 있는 부락이었다. 우리는 총력을 동원하여 투쟁을 하였으나, 부대전멸 시에도 살아나온 김 동지를 죽게 하고 한 사람(안 동무)이 중상을 입는 피해를 입고 철수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제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곧 우리는 철수 후 트로 복귀하던 중에 중간 솔밭에서 적이 매복하고 있는 것을 먼저 발견하였다. 그러나 총병력이 15명밖에 되지 않는 조건에서 척후는 후퇴해오고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부대는 옆길로 이동함으로써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로 얽혀 혼전이 되어버렸다.
비무장으로 적과 섞인 나는 그들에게 그만 쏠 것을 말하면서 후퇴해 왔으나, 후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리 쪽은 총을 한방도 안 쐈으므로 나는 그 말을 적들에게 말한 것이 되어 버렸다.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은 김 동지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약간 시간이 지나 동지들의 시체는 회수했으나 소총 한 자루는 적에게 넘어 갔다. 이것을 계기로 정치위원 강학구 동지와 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약 2개월 동안을 대원으로 지내면서 관계가 나빠지게 된 것은 나의 지나치게 원칙을 주장하는 미숙한 작풍에 원인하는 것이었다.
관료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다
정치일꾼으로서의 나의 위치는 초기부터 부대에서 컸다. 그러나 정치위원과 나와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북한에서 합법적 상황에서 면당 부위원장을 지낸 정치위원의 관료적 작풍에 대해 물들지 않고 오히려 극복하려고 처음부터 작정한 나의 작풍과 서로 어긋나 문제를 생기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대의 편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나는 새로운 작풍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 나름의 작풍에 의한 상호관계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사업의 집행 과정에서 사적 소유물을 갖지 않으면서,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도 직위와 관련된 관계는 갖지 않으려 하였다.
빨치산 종사기간 중에 내가 사적으로 가진 것은 총상치료제인 니라마이트 한 봉지 외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는 점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상급지휘관 이라 할지라도 사적으로 주고받는 관계는 일체 갖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합법시기에 속화된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관료적 작풍에 젖은 정치위원에게는 나의 태도가 무례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치위원은 이런 것들에 기초한 불만을 떠벌리면서 나를 모든 면에서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1951년 2월 이후 특별소조 정치지도원이었던 나를 정치 일꾼이 부족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원으로서 방치한 채 그냥 두었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2대대 정치지도원으로서 복무 중 다시 해임되고 정치부 대기를 명령받았을 때, 정치위원으로서의 나를 대하는 데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1953년경 그가 세포였을 때 화순에 있는 나와 같이 잡힌 동료에게 “동지들이 잡히고 난 뒤에야 사람 귀한 줄을 처음 알았습니다, 나의 이 뜻을 꼭 현채 동무에게 전해 주십시오, 이것이 나로서의 절실한 마지막 부탁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이후 어떤 삶의 길을 갖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같은 말들은 그와 나와의 사이에 무한한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난에 찬 투쟁활동
1951년은 전체적으로 유격투쟁을 위한 상황이 안 좋았다. 서유에서 우리들의 겨울 대비는 식량을 비롯한 먹을 수 있는 재화의 비축에서 주어졌다. 이 시기에 재화의 비축이 생감의 수집과 비축으로 이루어진 것도 식량의 겨울 비축을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운동은 나중에 상호 경쟁을 낳아 감나무 등의 벌채에 의한 감의 확보경쟁으로 된다.
한 해의 겨울을 보내기 위한 산 나무의 희생은 지나치게 낭비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비축경쟁은 뒤에 바로 수정되었지만 많은 감나무들이 베어진 것은 큰 자원의 낭비였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가고 나빠진 상황에 대한 우리의 대응 또한 자꾸 악순환이 되는 것이었다.
1950년 겨울에는 산간에 있는 인민들의 가옥에 의존하는 것이었으나 1951년 겨울은 길가의 산야에 무작정 잠자리를 마련하거나 산골짜기의 트에서 불을 피면서 잠을 자는 것이었다. 1952년이 되면서 고정트에서의 생활로 정착화된다.
1951년 겨울 우리는 적의 동기 공세 속에서 노변에서 잠을 많이 잤다. 한 번은 무등산 뒤 도로가를 이동하다가 우리는 길가 소나무 밑 황무지에서 숙영을 했다. 담요를 한 장씩 소지하고 있었을 때였기에 몇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한 장을 깔고 몇 장을 같이 덮고 잤다. 눈이 올 때이므로 밤에 자다 일어나 보면 모두가 눈에 잠겨 있고 서있는 것은 나무 밑에 서 있는 보초뿐이었다.
이런 잠자리에서는 중간에 깨어 다시 잠이 드는 일이 지극히 고난스러운 것이었다. 이 고통을 못 이기고 몇 사람이 투항을 했으니 그 상황은 지금의 나도 이해할 만 하다.
보급은 초기에는 후방부에 의한 배급이었으나 나중에는 부락에 할당된 현물세에 의존하고 나중에는 후방부대의 식량의 보급에 의존하다가 결국에는 전 성원의 자체조달로 되어 보급투쟁에 의존하게 되었다.
게다가 비생산적인 전투 일정이 중첩됨으로서 보급투쟁은 연속적인 활동이 되어 버렸다. 날마다 계속해야 하는 보급투쟁에 성원들은 자기 힘이 더 따라주지 못함을 얼마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광주특수소조의 정치지도원으로 있다가 부대가 괴멸되는 통에 나는 1대대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 시기에 비록 나는 대원이지만 다소 특이한 나름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빨치산 창립 초기부터 540지구의 멤버였으며 정치 간부직을 맡고 있었으므로 대원으로 강등이 된 뒤에도 동지들은 그냥 대원으로 맞이하는 것을 기피했다. 그들은 내가 식사당번과 같은 잡일 차례가 되면 나를 대신하고 자기 일을 나에게 맡겼다. 그래서 대원으로서 두 달 동안 있는 사이에 나는 보초를 많이 섰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는 주로 지휘부트에서 생활을 하였다. 1951년 말의 무등산 생활에서 우리는 고정트를 움막 형식으로 유지했다. 좁은 트에서의 생활은 좁음을 면치 못한다. 그런 경우 나는 연대본부나 사령부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대원으로서의 일상적 의무를 저버린 적은 없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우리 동지들에게 보다 넓은 자리를 줄 수 있었고 이태식 동지를 보좌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많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시기에 있어서는 긍정적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첫댓글 1986년 결혼 때 주례를 서 주신 분이 박현채 선생님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어찌어찌하여 그 분의 주례로 결혼을 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지요. 저는 당일 식의 형식적인 의미를 가벼이 여겨 진지하게 식에 임하지 못한 덕에 주례사를 제대로 담아 듣지 못했지만 식에 참여했던 이들의 기억엔 주례사가 특이했다 하더라구요. 어쨌든 한라님 덕분에 박현채샘의 삶을 엿볼 수 있고 개인적인 기억도 되새김해 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
대학때 읽었던 '태백산맥'의 한 글귀 글귀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사라집니다. 온몸으로 현대사를 겪으면서 느꼈을 박현채 선생님의 감정이 작게나마 전해오는 듯 합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선생님을 본것이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시던 모습인데 ...... 우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