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 터
성주 수륜 법수사지 [星州 修倫 法水寺址]
추억의 오솔길~
소년이 고향 성주에서 시골중학을 졸업하고 부산의 고등학교로 입학을 앞두고 있었던 1964년 1월,
당시 경북 성주군 수륜면 송계동에 살던 누님댁에 들렀다가 도보로 합천 해인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가야산 자락 동쪽, 남쪽 비포장 도로를 따라 가다가 그 길을 벗어나 고개를 넘으면 해인사 입구로 가는
큰 길을 만나게 된다.
가야산 자락 남동쪽은 수륜면 백운동인데 제법 높은 고산지역, 황량한 산촌에 버려진듯, 임자 없는 폐허에 덩그마니 쓸쓸하게 자리한 석탑 하나..... 주위는 확연히 엄청난 규모의 넓다란 절터였음을 수이 인식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소년의 한생을 통하여 뇌리에 남아 있는 외로운 잔영 있었으니~
그것은 인륜을 닦는다는 수륜(修倫)땅 가야산 칠불봉 자락에 자리잡은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 백운동 법수사 터였다.
쓸쓸히 버려진 황량한 폐허 위에 홀로 앉은 삼층석탑은 2010년 7월 5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 1656호 법수사지 삼층석탑이다. 60여년 기나긴 세월, 추억의 뒤안길에 옛소년, 어이 반가운 소식 아닐지랴~!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서 가야산 산록을 따라 가는 국도59호선을 따라 가면 이 구간은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서 합천 해인사 진입로인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로 이어지는데, 가야산 산록을 끼고 달리는 산복도로라 한적하면서도, 명산인 가야산 정상부 능선의 만물상..그 절경을 한눈에 두고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
길 건너 한편엔 쓸쓸하고 황량한 폐사터~!
성주 수륜면 백운동 (修倫面 白雲洞)
가야산국립공원 칠불봉 자락 백운동 야영장 앞 길 빈터에 "성주 법수사 터 삼층석탑 및 당간지주"가 있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화엄사찰은 처음에는 "금당사(金塘寺) "였지만 언제부터 "법수사"로 개명되었는데 그 연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고 단지 해인사에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이었다는 것은 유적지 규모로 추측할 수가 있고 임진왜란 때 폐찰된 것으로 추정...
최근 발굴 조사로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지금은 사찰 터에 주초석 등 절터 흔적만 쓸쓸하고
삼층석탑과 당간지주가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법수사지 금당지 앞에 조성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아래 기단 네 면석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고
전형적인 신라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어 법수사 창건 때인 9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지주에는 특별한 장식 없이 간결하고 단아하지만 간대석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져 "나 여기 있소" 한다
신라는 멸망했다
그 마지막 경순왕의 왕자가 출가하여 법명 범공(梵空)이 머물렀던 사찰이다.
그는 왜 그곳에 머물렀을까? 서라벌이 보이나...
성주 수륜 법수사 터 [星州 法水寺址 三層石塔]
삼층석탑 ( 국보 1656호)
법수사(창건당시 사찰명은 금당사)지 금당지 앞에 조성되어 있는 통일 신라시대 석탑
한때 법수사는 전해지기로 중심 전각인 금당(金堂)만 9채, 종각만 8채..요사채가 천 여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장 큰 사찰 중 하나이고, 이웃했던 가야산 자락 해인사와 비교해도 쌍벽을 이루는 규모에
위상이었던 것이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막내아들 계자, 울산 김씨의 시조라는데..김덕지 또는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며
김덕지와 동일인물로 보기도 하는 김황(金湟)이라는 인물이 유력합니다.
[출처] 가야산(伽倻山) 남쪽 자락 대사찰 법수사 폐사지 그리고 신라 마지막 왕자, 승려 범공
아래 기단 네 면석에는 안상이 3구씩 음각되어 있고
전형적인 신라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어 법수사 창건 때인 9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상 조각
사찰이 언제 어떻게 폐사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9개의 금당과 8개의 종각이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다고 『경산지(京山志)』 불우조(佛宇條)에 전한다.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2중의 기단과 3층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탑은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함께 법수사지의 제 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우수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크다.(출처 : 성주군청)
석등 받침
불상 대좌
발굴한 다양한 기와 조각을 쌓아 놓았다
각종 석재 등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星州 法水寺址 三層石塔)
https://www.youtube.com/watch?v=8pn-i3ULuiQ&t=143s
Apr 19, 2021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星州 法水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1656호.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1번지)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한 법수사지(法水寺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지는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 잡고 있다.
사역은 남북 150m, 동서 150m 정도이고 크게 세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금당지로 추정되는 축대 아래에는 백운동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당간지주가 고목의 뿌리에 일부 쌓여 있다.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상․하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양식으로 노반 이상의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석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의 9세기 후반기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이 석탑은 신라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된 법수사지(法水寺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지는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 잡고 있다. 사지는 주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높은 위치에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전망이 아주 좋다.
대가람으로 전해지는 법수사(法水寺)는 임진왜란 이후 폐사(廢寺)되고 석탑과 금당(金堂)터의 거대한 석축,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계자인 김황(金湟)이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사찰이 언제 어떻게 폐사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9개의 금당과 8개의 종각이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다고 『경산지(京山志)』 불우조(佛宇條)에 전한다.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2중의 기단과 3층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탑은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함께 법수사지의 제 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우수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크다.(출처 : 성주군청)
이 금당지 불상 대좌 위에 주존불이 있었겠지...
해인사 대적광전 주존불로 안치되어 있는 비로자나불상이 원래 법수사의 주존불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불상은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1996년 비로자나불상 안에서 고려말( 1326) 만들어진 고려시대 의복 11점이 발견되었다
당간지주
당간지주에는
특별한 장식 없이 간결하고 단아하지만 간대석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사진으로는 연꽃이 보이지 않는다
보통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우는데
현재 법수사지 석축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져 있어
옛 법수사의 규모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고 마을 한 가운데 당산나무 밑에 서 있다
당간지주는 당산나무와 같이 있어 어울린다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출처] 해인사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 - 성주 법수사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