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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
증 언 자 : 안은경(여)
생년월일 : 1959.(당시 나이 22세)
직 업 : 대학생(현재 약사)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안은경 씨는 1978년에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하여 1980년에 약대 자율화추진위원으로 활동한다. 1980년 5·18 당시에는 개별적으로 피신하거나 시내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별 활동은 없었고 이후 학교측으로부터 직권휴학을 당했다.
불우이웃돕기 '일일튀김집'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5년 나는 광주천변 양동에 자리한 광주중앙여고에 입학했다. 1남 5녀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언니들의 보살핌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자라온 내게 고등학교 진학은 자연스러운 과정에 불과했다.
그런데 입학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2, 3학년 선배들이 양성우 선생님(현 평민당 국회의원)의 사직과 관련하여 운동장에 나와 데모하는 것을 보았다. 평소 성격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이 아닌 나에게 그 일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던 1학년 2학기에 유선영이란 친구로부터 일 한가지를 부탁받았다. 선영이는 교회를 다니면서 학생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불우이웃돕기 튀김집을 운영한다면서 일손을 거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승낙을 해놓고 아직 한 번도 튀김집에 나가지 않았는데 그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버렸다. 사실 선생님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불량스러운 일이 전혀 아니었는데 남학생들과 어울려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 때문에 학교측에서는 펄쩍 뛰며 우리를 나무랐다.
그 일로 인해 나는 근신 처분을 받아 3일 동안 반성문을 쓰면서 그야말로 근신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편이었던 나는 그 일로 인해 더욱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버렸다. 그 후 무난히 3년을 보내고 1978년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갔어도 나는 특별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약대 서클인 '생약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무슨 연사초청 강연회 등이 있으면 혼자서라도 찾아다니며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특별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대학생으로서 들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그때 들었던 강연회 연사로 김동길 교수가 생각난다.
몇 번 연사초청 강연회를 찾아다니다가 한번은 약대 선배인 명희 언니의 눈에 띄어 그 언니로부터 동일방직 등 노동자들의 무슨 모임에 관한 팜플렛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모임에 참석했던 나는 생전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뭐가 뭔지 잘은 몰랐지만 가슴속에서 작은 분노가 생겨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학 초년생의 한 학기를 보내고 2학기를 맞이했다.
우리 약대 선배 언니 중에 유성희라는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하루는 나를 보자고 했다.
"우리가 비록 자연과학도이지만 자연과학은 또한 사회과학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을 함께 공부하는 그룹이 있는데 참여해 볼 생각이 없느냐?"
나를 앉혀놓고 그 언니가 한 말이었다.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많은 편이었던 나는 새로운 방향의 공부를 한다는 생각에 호기심 반, 욕심 반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그때부터 1979년 10·26 이전까지 약대 선배들과 본대생들과 함께 학습과 수련회, 기타 문화행사 등에 참가하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도 박정희가 죽자 나는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계엄해제는커녕 정치적 일정이 오히려 얽혀만 갔다. 작은 힘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모든 것이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사회과학 서적 몇 권 읽어가지고 해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에 대해 회의마저 들었다. 계속해서 해오던 스터디 그룹에도 의욕이 없어져 흐지부지하다 방학을 맞이하고 말았다.
약학대학 자율화추진위원회
어느새 대학 3학년이 되고, 비운의 1980년의 날은 밝았다. 나는 3월에 개학하자 마자 가칭 '약대 자율화추진위원회'의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약대의 자율화운동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와 발맞춰 학내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하고 민주적인 학사일정을 이끌어가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의 경향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10여 명 정도로 구성된 가칭 약대 자율화 추진위원회의 일은 결코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강의실을 점거해 철야농성도 하고 다른 단과대학들과 연대하여 가두시위도 하면서 제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에 총장이었던 박철웅과 연관된 사학 비리에서부터 정치적 현안문제인 '전두환 퇴진'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요구는 다양하고 정당한 것이었다.
잘 풀려 나간다고 낙관하고 있던 차에 5월 18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계엄이 확대 선포되고 말았다. 나는 그때 연일 계속된 집회에 참석하고 여러 일에 관여하느라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마침 5월 18일은 일요일이어서 겸사겸사 쉬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약대 친구들 몇 명과 무등산 중봉을 아침 일찍 올라갔다. 오후 2시쯤 산에서 내려와 전남여고 부근에 와보니 시내는 온통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던 우리 일행은 급변한 시내 분위기에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공수부대가 시내를 활보하면서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사람은 모조리 잡아 죽인다고 끔찍한 말을 들으며 우리는 가두시위가 한창인 금남로로 갔다.
도중에 아는 남자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공수부대원들이 대학생들을 보기만 하면 잡아가니 빨리 피하라고 했다. 얼떨결에 우리 일행은 두암동에 사는 친구집으로 몰려갔다. 집에는 전화연락만 하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사태를 관망했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친구집에서 서울에서 온 친척 오빠들이랑 대학생이 6, 7명 모여 있게 되었다.
5월 18일을 내내 불안하고 당혹스럽게 보내고 나니 오히려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친구집에 모여 있던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당시 전남대병원에 간호원으로 일하던 친구 언니가 택시 두 대를 잡아주면서 옥과에 있는 친구집으로 가라고 했다. 옥과에는 친구 아버지가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피신했다 돌아온 광주
옥과로 내려간 우리는 답답함을 억지로 참으며 이틀밤을 보냈다. 모두들 광주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몰라 답답해 했다. 광주로 들어가는 차가 없는 것을 보면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는데, 라디오 방송을 들어보면 기껏해야 경찰 한 명에 시민 한 명이 부상당했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나왔다.
20일 저녁쯤에 광주 소식을 들을까 해서 이리저리 라디오 채널을 돌리는데 우연히 북한방송이 잡혔다. 거기서 언뜻 들리는 얘기가 광주시내를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광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다음날인 5월 21일에 아침을 먹은 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마침 버스 한 대가 병원 앞에 멈추더니 광주로 간다면서 광주 갈 사람 있으면 타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만 보고 있던 나는 두말 할 것 없이 그 차에 올랐다. 영문을 몰라 어떨떨해져 있는 친구들에게 나는 차창 밖으로 소리쳤다.
"나 광주 올라간다."
버스에는 차장하고 운전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밖에 없었다. 버스가 담양에 도착하자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다며 나를 내리라고 했다. 담양에 내려서 보니 가족 단위로 피신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광주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수부대의 잔학한 행위를 말했다. 너무 잔인하게 사람을 해치고 다닌 까닭에 광주시민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시내가 온통 전쟁통 같다는 얘기도 전해 주었다.
나는 피난 내려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걸어서 광주로 들어갔다. 교도소를 지날 때 보니 무장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별탈 없이 광주로 들어온 나는 우선 목이 말라 목도 축일 겸해서 두암동 친구집으로 갔다. 친구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옥과에 가만히 있지 뭐하러 왔느냐'며 나무랐다. 언니는 내게 절대 시내에는 나가지 말고 잠시 쉬었다가 중흥동에 있는 우리 집으로 곧장 들어가라고 했다.
친구집에서 세수만 하고 나온 나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선 선배, 후배들의 행방을 찾아볼 생각으로 시내로 나갔다. 누구라도 아는 사람이 있어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올라탔다. 많은 시위차량들이 지나다니고 있어서 금방 차를 탈 수 있었다.
내가 탄 차에는 남자 서너 명과 어려보이는 여자 몇 명이 타고 있었다. 차는 신역을 돌아 구역으로 갔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 차는 잠시 후 도청으로 가는데, 도청은 아직도 치열한 접전중이다. 목숨이 아까운 사람은 미리 내려라."
그 경황 중에도 나는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을까 두리번거렸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 자세한 내용을 듣기도 전에 덜컥 시내에 나간다는 것이 두렵게 느껴져 나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구역에는 많은 사람과 차량들이 오가고 있었다. 시위군중 속에 아는 얼굴이 있을까 해서 나는 다시 어느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나는 차내에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쳐다보며 아는 얼굴을 찾는데, 아는 얼굴은커녕 대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조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는 더욱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도 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총을 가지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 보니 사람들이 차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데 상당히 서툴러 보였다.
내가 남자만 같았어도 그들을 이끌어보았을 텐데 더욱이 여자라고는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주로 '애국가'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되는 것 등 주로 군가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차가 장성으로 무기를 가지러 간다며 시외로 나갔다. 가는 길에 비아에 들러 알아보니 비아에서는 이미 무기를 가져갔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장성으로 갔다.
우리가 탄 차가 장성 고려시멘트에 도착하자 고려시멘트 직원들이 나와 시원한 음료수와 먹을 것을 차에 올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어떤 외국기자는 우리들의 모습을 취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의 운전수가 '취재만 하지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지 않는 저놈도 똑같이 나쁜 놈'이라고 하면서 차를 몰아 그 외국인 기자를 받아내려고 했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기자는 깜짝 놀라 혼비백산해서 도망가버렸다.
우리는 다시 장성역 광장으로 차를 몰았다. 장성역 광장에는 많은 장성 군민들이 나와 광주에서 오는 시위대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도착하는 차마다 음료수와 빵, 사탕 등을 넣어주며 고생한다고 치하해 주었다. 우리는 장성주민들이 준 음식만 얻어먹고 당초에 목표했던 무기는 접수하지 못한 채 다시 광주로 나왔다.
차는 다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오후 6시경에 화정동로터리에 차가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많은 차들이 모여든 화정동로터리에는 김밥을 싸들고 나온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아는 선배들을 찾으려고 사람과 차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무작정 차만 타고 다니자니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태극기에 덮여져 실려가는 시체와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는 부상자들의 모습과 총격전이 벌어지는 시내상황 등은 나 혼자서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것이었다. 그래서 줄기차게 아는 얼굴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단 한 명도 낯익은 얼굴이 없었다. 꼬마들에서부터 어른들까지 온 시내가 들끓고 있는데 대학생들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루 종일을 쏘다니다시피 한 까닭에 몹시 피곤해져 버린 나는 일단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막막한 시간을 보내며
시체들이 실려가는 것을 보면서 집에 들어가니 집은 나 때문에 발칵 뒤집혀 있었다. 옥과에서 올라오면서 들렀던 친구집에서 언니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 내가 집에 들어갔는지 확인해 보았던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집에 잡혀서 지냈다. 아는 선배들과 연락도 되지 않았고 소식을 물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동네 근처만 왔다갔다하면서 간혹 시내에 군중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시내에 구경간다며 여럿이 몰려가는 것을 보고 같이 따라 나갈까도 생각했으나 21일에 돌아다녀 보아도 뭘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을 상기하고는 그냥 집에 눌러 앉아 버렸다. 무기력한 생각만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우리 언니는 그때 기독병원 병리사로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언니는 시내 상황이나 병원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내가 자극받아 밖에 나갈까봐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광주에 도착한 이래 나는 계속해서 깊은잠을 못 자고 있었다. 골목에 나가보면 사람들은 여러 소문을 서로 나누었다. 동네의 어떤 담벼락에 붙은 벽보에는 미국이 곧 광주시민을 도와주러 오니 조금만 기다리자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걱정만 앞섰다.
27일 새벽에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시내 쪽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일이 터졌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참혹한 망월묘지에 무심한 뻐꾹새만이
5월 27일 이후 나는 더욱 꼼짝하지 못하고 집안에 갇혀 지냈다. 29일이 되자 한 선배로부터 안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렇게 만나고 싶고 소식이 궁금했던 선배와 친구들이었는데 29일에야 처음으로 연락이 된 것이었다. 곧이어 친구 선영이에게 그 친구의 삼촌이 27일 도청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영이의 언니 소영은 나와 약대 선후배 사이이기도 했는데, 그 언니는 이미 5월 17일 예비검속되어 있었다.
선영이의 삼촌은 전남대 공대를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왔고 1980년 2학기 복학을 앞둔 상태였다. 삼촌은 복학하기 전에 돈을 벌려고 충주에 있었는데 마침 1980년 5월 며칠이 생일이라서 잠깐 집에 왔다가 5·18을 맞게 되었다.
이왕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삼촌은 조카의 소식도 알아볼 겸 시내를 나갔다. 그런데 공수부대와 싸우는 시민군이 대개 어리거나 총기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 시민인 것을 보고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식구들에게 그러한 뜻을 알리고 도청에 들어가 총기교육을 비롯한 여러 일들을 지도하던 중 27일에 공수부대의 총탄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내가 달려가 보니 선영이 어머니가 슬피 울고 있었으며, 몇몇 선후배들도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선영이 삼촌의 사망에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서 있었다.
30일에 시에서 시체를 확인하고 인수받아 장례를 치렀다. 망월묘역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과정을 밟으면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여자들은 시체를 확인할 때 묘 가까이서 못 보게 했다. 시체들 모두가 워낙 처참한 몰골이라서 여자들은 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삼촌은 다리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가 나중에 확인 사살된 것 같았다고 했다. 얼굴 부위만 대강 남아 있고 머리 뒷부분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다.
망월동으로 옮겨진 시신들은 몸이 부패해 몹시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좋은 관에 넣어 묻을 수가 없었다. 유동운(목사 아들)이란 사람도 식구들이 좋은 관을 가져왔으나 관에 넣을 수 없어서 그대로 묻었다.
선영이 삼촌의 묘 옆에는 상고를 다니던 어떤 고등학생이 매장되었다. 그 학생의 아버지 혼자서 장례를 치르러 왔는데 우편배달부가 알려온 소식을 직접 받고 식구들에게는 아무 말도 않고 혼잣 몸으로 왔다고 했다. 그날 따라 묘역 주변에서 뻐꾹새가 뻐꾹뻐꾹 그치지 않고 울어대 처참한 망월동 묘지의 슬픔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4년간의 직권휴학
사람들은 하나둘씩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갔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입도 뻥긋하기 어려울 정도로 살벌하게 변해 갔다. 그런 속에서 나는 암암리에 떠도는 광주항쟁 당시의 공수부대의 잔학성을 구체적으로 듣거나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느끼는 무력감과 함께 많은 충격을 받아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학교에 돌아가서 보니 약대 자율화운동은 허공에 떠버리고 문제학생 운운하며 형사들만 들락거리고 있었다. 약대 민주화, 자율화추진위원회와 관련하여 형사가 나를 면담하고자 한다는 연락을 받고 별 걸릴 것은 없었음에도 나는 몸을 피해 버렸다. 그 일은 그럭저럭 시일이 지남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었다. 5월 이후 선배이자 친구 언니였던 유소영이 약대에서 제적되고 3학년이었던 나와 백동진을 약대 자율화추진위원회와 관련하여 학교측에서 직권휴학으로 묶어버렸다.
그 이후 전남대학교의 경우 이와 같은 경우를 빨리 해제했으나 조선대는 박철웅 총장이 개인적으로 '너희들이 학교를 망쳤다'면서 쉽게 복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강제로 학교에서 쫓겨난 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했고, 공장에 취직해 일하기도 했지만 쉽게 적응을 못 해 그 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광천동 무등교회에서 기독교도들로 이루어진 문화패 '갈릴레오' 활동에 참여했다. 문화패 갈릴레오는 무등교회와 양림교회의 청년들이 모여 만들어진 기독교청년회 소속의 단체였다. 갈릴레오가 해체되면서 그 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에도 계속 운동권 주변을 맴돌며 활동하다 보니 1980년 5·18과 관련된 제적생, 직권휴학생들의 모임이 1983년에 생겼다. 그룹스터디처럼 모임을 가져 서로의 처지를 얘기하면서 의기소침한 상태를 극복하고자 모인 단체였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이우정 씨와 만나 결혼했다. 1984년에 전국적으로 대학자율화 바람이 일어 모든 제적생들이 대거 복적되었다. 조선대의 박철웅 총장도 어쩔 수 없었던지 직권 휴학생까지 복적시켰다. 그때 이미 결혼한 몸이었던 나도 다른 제적생들과 함께 복학했다.
부분운동으로 우리는 만나야 한다
복학한 후 1년을 보내고 4학년이 되자 뭔가 해놓고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예전에 사회과학 공부를 했던 약대생들을 모아 소모임을 만들었다. 광주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민중들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학생과 재야 기성운동가들뿐 아니라 조직적인 활동가들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극단 광대나 들불야학이 1980년 이전부터 있었던 조직을 십분 활용해 5·18 당시에 홍보작업 등 큰 역할을 해냈던 것을 보면 좋은 교훈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몸 부대끼며 활동하다 보면 일단 유사시에 많은 역할을 소화해 낼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소모임을 만든 것은 바로 그런 영향 때문이었다.
졸업 후 1986년 4월부터 약국을 경영하면서 나는 가칭 '전남, 광주 민주약사회'에 참여해 왔다. 커다란 사회 속의 부분운동으로 '보건운동', '의료인 연합운동' 차원으로 전남, 광주 민주약사회가 발전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직 5월운동과 전체운동에 대한 입장 정리를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 5월 14일에서부터 16일까지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집회를 하면서는 학생만이 아닌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고 무척 감동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학생들은 정치적으로 군부독재 타도만을 외쳤지 경제문제 등 민생전반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도청 앞 광장에 몰려든 많은 시민들은 내게 학생운동의 한계를 깨닫게 했다. 그때 우리는 객관적 입장에서 정세를 분석해 보았다기보다 그저 시류를 따라가는 수동적 태도밖에 안 되었던 것 같다.
역사의 한 과정으로서 광주민중항쟁은 앞으로의 제반운동에 디딤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교훈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군부독재의 집권과 미군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조직 속에서 만나야 한다.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되어 자주, 민주, 통일의 그날을 위해 모든 사회단체들이 함께 손을 잡고 하나씩 모순을 깨뜨려 나가야 할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때와 같은 결집된 몸으로 말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진상규명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현 정권하에 서는 완전한 진상규명이 어렵고 역사 속에서 차차 밝혀지리라 본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새 힘을 가진 정치권력, 다시 말해 밑으로부터 힘이 결집된 정당이 생겨서 정치, 경제,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부터 있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임금옥)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휴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