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미읍성 ** 충남 서산시 해미읍 읍내리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성종 22년 (1491년)에 축조된 면적 19만 8천㎡의 석성(石城)이다. 둘레 약 2㎞, 높이 4m에 동문쪾서문쪾남문 등의 세 문루(門婁)가 있는 해미읍성은 보기 드문 평지의 석성으로서 조선 초기 성채의특징을 보여준다. 1973년 복원쪾정화 사업을 거쳐 지금은 사적공원으로 단장 되었다. 사적 제116호. 해미읍성은 천주교 박해 80여년간 1천여 신도들이 순교한 성지이기도 하다.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충청도 각지에서 잡혀온 천주교도들을 이곳에 가두었다가 서문 앞 돌다리에서 자리개질을 쳐서 처형했다. 그러나 많은 신도를 일일이 처형하는 것이 힘에 겹자 읍성 밖 해미천변에 큰 그덩이를 파고 생매장하기까지 했다. 이 생매장 순교지 옆에는 해미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또한 해미읍성 안 감옥터 앞에 있는 수령 600년의 호야나무에 신도들의 목을 매달거나 활을 쏘아 처형했다고도 한다. 이처럼 해미읍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는데도 신도들은 기쁨으로 성문을 들어섰다니, 신앙의 힘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 파사성 ** 해발 250m 정상(頂上)을 중심으로 하여 5각형 둘레로 경사가 가파른 곳을 이용하여 석재(石材)로 축성하였다. 주위는 약 943m 동문(東門)은 송촌리(松村里)를 향(向)하고 남문(南門)은 당남리(塘南里)와 남한강변(南漢江邊)의 흥천면(興川面) 계신리를 향(向)하였다. 축성년대(築城年代)가 삼한시대(三國時代)라는데는 의심이 없는것 같으나 신라(新羅)가 파사왕(婆娑王) 2년에 쌓았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파사왕 2년 당시에는 이곳이 신라의 영역에 속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임진왜란에 경기 방어사 변응성(邊應星)이 파사성을 수리하여 도성(都城)의 상류(上流)를 견고히 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역사가 방대하여 속히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가 황해도 승군총섭(僧軍總攝) 의암(義巖)으로 하여금 유승(遊僧)을 모아 수축하게 하여 1595년에 수리를 마치고여기에 금강루(襟江樓)를 짓고 배, 군기(軍器)를 모두 갖추고 엄연한 관방(關防)을 이루었다고 기록하였다.(西崖集)
파사성의 보수정비를 위해 기전매장연구원의 발굴조사결과 파사성은 내외협축으로 축성된 돌로 만든 성으로, 암반층을 기반층으로 하여 다듬은 직사각형의 돌을 이용한 초축성벽과 부정형의 쪼개진 돌을 이용한 추축성벽이 있는데, 이는 여러시기에 걸쳐 수축되어 오늘날의 구조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 구조물로는 치 3개소, 문지 2개소, 우물지 1개소, 수구지 1개소 등이 있다. 이번 조사 결과 파사성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성벽조사중 출토된 삼국시대 유물은 대부분 신라로 추정되는 토기류였으며, 축성기법 또한 신라의 산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사성의 위치가 강언덕에 자리잡은 교통의 요지임을 감안할 때 백제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굴조사자는 보고 있다.
** 조령산성 ** 조령은 계립령에서 뻗어 오다 달항(達項)에서 둘로 나누어진다. 한 맥은 주흘산의 여러 깎아 세운 바위 봉우리를 이루고, 또 한 맥이 조령을 돌아 공정산을 이룬다. 산이 높고 험한 기세가 하나로 어우러져 높이 솟은 모양이 하늘을 찌른다. 주흘산 서쪽 기슭의 맞닿은 곳에서부터 자연성곽을 이루었다. 조령의 등성마루 북쪽에서부터 충주의 달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이 나선다. 남쪽 길은 본 현의 견탄에 이르러야 비로소 평원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사이 1백여리는 산이 거듭되고 첩첩이 산봉우리가 싸여 개의 이빨같이 서로 제압하는 데다 돌 벼랑길 사다리 길로 여행자는 통행에 조심해야 한다. 이 남쪽과 북쪽의 요충은 무릇 하늘이 만든 험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은 이곳을 지나며 한탄하기를 “이렇게 험한 곳을 지키지 않은 신총병(申摠兵:砬)은 무모하다”고 했다.
1708년(숙종34년, 무자)에 남북 18리, 둘레 18,509보(步)의 성을 쌓았다.
성이 세 곳 있는데 한 곳은 영의 마루인 영호(嶺湖:영남과 호서)의 경계에 있고, 한곳은 응암의 북쪽1리를 돌아들면 신충원(申忠元)이 쌓은 구성(舊城)을 개축한 소위 중성(中城)이고, 한 곳은 초곡에 있는데 현으로부터 12리로 군향(軍餉)창고가 있다. 3성 모두 홍예문이 있어 큰 길이 통하는데, 영성(嶺城)은 조령관(鳥嶺關), 중성(中城)은 조동문(鳥東門), 초곡성(草谷城)은 주흘관(主屹關)이라 하고, 수구(水口)에도 홍예 3칸을 설치하여 성안의 여러 개울물을 모두 이곳으로 흘러 나간다.
** 조령산성2 ** 나는 새도 넘어가기가 힘들다는 문경세재로 잘 알려진 조령은 삼국시대 초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는 길목으로서 남북의 문화가 항상 교류하던 곳이다.
산성입구부터 길 박물관이라 부를 만큼 선인들의 삶의 흔적이 도처에 널려 있다. 옛날 청운의 꿈을 간직한 영남의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려면 반드시 이 길을 지나야 했으며, 임지로 부임하는 지방 관리로부터 보부상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넘나들던 그 당시의 국도였다.
그래서 문경새재 길은 보물급 유적보다는 원터나 주막거리 등 옛 민초들의 자취가 더 많이 남아 있다. 산성이 있는 새재길은 제1관문에서 2 - 3 관문까지 약 10km의 오솔길은 평일에는 사람들이 발길이 뜸해 새소리와 계곡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한적하다.
조령산성의 정문인 주흘관(1관문)은 3개의 성문 중 옛 정취를 간직한 곳으로, 병자호란 후 조령관(3관문)과 더불어 숙종34년(1708년)에 쌓았다. 오른쪽 성벽에는 축조시 책임자 성명과 동원된 지역을 명시하였다. 1관문을 지나면 원터가 나온다. 이곳은 조선시대 관리들과 나그네들이 쉬어가거나 잠을 자던 곳이다. 1977년 발굴 때 신라토기가 출토되어 삼국시대부터 이미 길이 뚫려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좀더 올라가면 경상감사가 교체될 때 직인을 인수 인계하던 교구정터, 자연석에 새겨놓은 산불됴심이라고 쓴 최초의 한글 비석도 있다.
그 앞에는 최근 새로 지은 주막집도 있고 왼쪽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의 계곡도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한양을 향해 가장 빠른 길로 새재길을 택하여 쳐들어 왔을 때 신립장군이 천험의 요새인 이곳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대패하였다. 뒤에 이곳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선조27년(1594)에 중성(내성) 조곡관(2관문)을 산성의 시설물 중에 가장먼저 쌓았다.
2관문 주위는 소나무 숲 속에 쌓여 있으며, 여기서부터 3관문까지는 옛 오솔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조령산성은 나라의 관문과 같아서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적을 막아야 돼고 충주가 함락되면 남한강을 따라 길이 열려 한양을 잃게된다. 적을 막기 위해서는 필히 이곳에 성을 쌓아야 한다고 임금에게 건의해 쌓았다.
문경새재는 울창한 수목과 더불어 웅장면서도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1966년에 국가사적 제147호로 지정됐고 1981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돼어 사적 및 국민관광지로 크게 각광을 받고있는 곳이다.
** 조령관문 ** 사적 147호인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이곳을 지날 때 성주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조령이라고도 부르는 새재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옛부터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렸다. 육로보다 수로가 교통의 중심을 이루었던 조선시대, 영남 선비들이나 장사치들은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새재를 넘어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갔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한양까지 뱃길로 편하게 갈 수 있으니 그만큼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새도 넘기 어려운 높은 고개라 하여 조령(鳥嶺)이라 하기도 하고, 새(억새의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자란다 하여 새로 생긴 길이라 하여 새재라 불린 이 고개는 통칭 문경새재라 불린다. 이 길을 따라 영남의 무수한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꿈꾸며 서울로 갔고, 또 문경(聞慶)이란 지명도 경사(과거에 급제했다는)를 제일 먼저 듣는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문경새재는 오늘날에도 의미 깊은 고개로 남아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추풍령을 관통하고 문경새재 곁에서 이화령 신작로가 난 뒤에 영남대로의 관문이었던 새재는 한때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문경새재는 포장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다시 예전의 지위를 찾았다. 주막터가 복원되고, 원님이나 관리들이 묵어 가던 동화원터가 복원되고, 조령 1,2,3관문이 복원되면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더욱이 차량의 통행을 막고 걸어서만 넘게 되었으니 옛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가게 된 것이다.
** 웅천왜성 ** 진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군항도시로 임진왜란 때의 명장인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많다. 반면 왜군이 만든
유적도 있으니 그것이 웅천왜성이다.
웅천왜성은 남문동의 남산(해발 184m) 산봉우리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으로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소서행장이 구축하여
수비하던 곳으로 정유재란에 재침하여 다시 구축하였다고 한다.
성내의 넓이는 약 5,000여평 정도이고 성벽의 둘레는 1,250m, 높이는
3~8m에 이른다. 웅천왜성은 남산 산봉우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차에서
내려 약 20분간 도보로 산을 오르면 탁트인 바다정경과 함께 작은 섬
들을 볼 수 있다.
** 용두돗대 **
** 수원화성 **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삼년산성 ** 서기 470년(신라 자비왕 13년)에 축성하기 시작하여 3년만에 준공하였다고 하여 일명 삼년산성이라고도 한다.
그후 486년(소지왕 8년) 이찬실죽이 선산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개축하였다 한다.
553년(진흥왕 14년) 옥천고리 산상에서 신라군이 백제 성왕과 그의 군사 3만명을 전몰시킬 때 이 성내에서 대거 출병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의 최전방기지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에 따라 웅대하고 견고한 석축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13m 폭은 5~8m이며 전체길이는 1680m로서 삼국시대 산성으로서는 그 규모가 매우 큰 것이며 산성의 기초, 벽쌓기, 돌 치성, 수문등에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 우리나라 최고의 성이다.
** 보문산성 ** 성벽은 자연 지형에 따라 간단하게 가공한 4각의 석재(石材)를 사용하여 적심방법 (積心方法:돌채움방법)으로 축조하였다. 그러나 동북부의 암반으로 형성된 급경사면은 성벽을 쌓지 않았고, 성벽의 바깥면은 조금씩 안쪽으로 돌려쌓아 쉽게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남문터[南門址]가 확인되었으며, 현재 사람들이 드나드는 북문은 고려 시대에 폭이 좁혀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사 당시 가장 잘 남아 있던 서남쪽 성벽은 16단으로, 3.42m에 달하였다. 현재는 산성 정상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 세워져 있다.
발굴 당시 산성의 동쪽 성벽 아래에서 청동기시대의 문화층이 발견되었으며, 민무늬토기 파편과 덧띠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청동기 시대 유물이 해발 400m가 넘는 산 정상에서 나온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이 곳이 청동기 후기의 산상 주거지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이곳이 청동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으며, 고대로 들어오면서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산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독용산성 **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독용산 정상에 위치한 독용산성은 소백산맥의 주봉인 수도산의 줄기에 쌓은 해발 955m의 독용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7.7km(높이 2.5m, 폭넓이 1.5m)에 이르며, 산성내 수원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 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으로 영남지방에 구축한 산성중 가장 큰 규모이다. 그리고 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천5백년전 성산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ㅁ조선 숙종 원년(1675년) 순찰사 정중휘가 개축하여 동서남북 7개 포루, 아치형의 동문, 수구문, 남소문 등이 있었으며, 동서군량고가 있어 성주, 합천, 거창의 군량미도 보관하였던 곳이다.
군기고(軍器庫 :일제시 유물발굴)에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되었으며, 별장1, 승장1, 호병 44호로서 산성을 방어하였다 한다. 지금은 웅장하였던 성곽일부와 아취형의 동문만 남아 있으며, 시대를 알수 없는 각종 선정비가 산재하고 있다.
ㅁ근년에는 낙엽등이 썩어 토질이 비옥하여 개간민 들이 감자 묘목 등을 재배 하였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않아 빈성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에도 전쟁의 화를 입지않은 유일한 성이기도 하다.
** 남한산성 ** 오늘날 남한산성의 유래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산성 일대는 일찍이 백제의 옛터였으며 신라의 주장성(晝長城, 또는 日長城)에서 비롯되었다. 즉 홍경모(洪敬謨)의 <중정남한지, 重訂南漢志)에는 "신라 문무왕 12년 성을 한주(漢州) 동쪽 봉우리에 쌓고 주장성 또는 일장성이라고 불렀다. 석축으로 둘레는 4,360보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주 동쪽에 석축으로 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주장성으로 불리던 것이 어떻게 남한산성으로 불리워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역시 <중정남한지>에서
"남한산성은 백제의 옛터이며 신라의 주장성이다. 우리 조선에서 그대로 수리하여 광주부치를 성안으로 옮기고 부윤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유수로 승격하여 수어사를 겸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상고해 보면 남한산은 금일의 일장산이다. 백제의 온조왕이 도읍을 한산 아래로 옮겼다 하였으니 광주의 옛 읍치가 바로 그곳인데 산하라고 말하였으니 성을 쌓고 도읍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게 한산은 그 도읍에서 5리쯤에 있는데, 뒤에 신라가 그 땅을 빼앗아 비로소 성을 고쳐 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땅이 한수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남한이라 한 것이요, 그 뒤 한산군 또는 남한산주라고 부른 것은 모두 한수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라고 한데서 그 연혁을 알 수 있다.
그후 이곳은 고구려, 신라에 영토를 빼앗기면서 한산에서 신흥주, 신주정, 남천정, 한사주, 남한산주, 한주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결국 신라 문무왕 때에 주장성을 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한주는 고려 태조23년(940)에 광주로 고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의해 태조 4년(1395)에 경기좌도에 속하게 되었고 세조 때에는 전후좌우보 제도에 의거하여 좌보에 편성되어 경사 즉 수도를 방어하는 진보의 역할을 맡는 광주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남한산성으로 표기 되었으며, 조선시대 중엽에는 한산 및 일장산은 남한산 또는 청량산으로 불리워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 남한산성2 **
** 금성산성 ** 호남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인 담양 금성산성(사적 제 353호)은 사방이 30여m가 넘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석성(石城)이다. 삼국시대에 구축하여 조선태종 9년인 1409년에 개축한 것으로 전해지며,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성문터가 자리잡고 있다. 통로 이외에는 절벽 등으로 막혀 통행이 불가능하며, 주변에 높은 산이 둘러 싸여 성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요새'의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성이라 할 수 있다.
산성이 위치한 금성산(603m)은 전북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며, 담양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에 위치하고 있다. 사방이 암석으로 둘러싸이고 중심부는 분지로 되어 있는 주봉인 철마봉을 비롯,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잇는 가파른 경사가 인상적이다.
금성산성은 둘레가 6,855m이고 성안에는 곡식 1만 6천 섬이 들어가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남원성과 함께 의병의 거점이 되었고, 동학농민전쟁 때는 치열한 싸움터가 돼 성안의 많은 시설이 불에 탔다. 그러나 지금도 동서남북의 성문과 성벽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일단 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곳곳에 우물이나 절구통 같은 유물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산성의 남북 밖은 전북 순창군의 강천사 등의 관광 명소와 바로 연결된다. 또한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앞에는 무등산과 추월산이 솟아있고, 발 아래로는 담양호가 펼쳐져 있어, 관광코스는 물론이거니와 멋진 광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평가받고 있다.
** 금성산성2 **
** 금성산성3 **
** 고성산성 ** 고성리 산성은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방마을 앞산에 있는 석축 산성으로 고방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20여분 정도 오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성이다.
성을 쌓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가 남진을 하면서 전초 기지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요새로 추측된다.
5∼6 세기 경 고구려와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을 펼쳤는데, 고성을 끼고있는 지역은 영서지방의 평창에서 영남 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한강상류를 따라 남하하면서 충북 영춘에 온달산성을 전진기지로 삼고 영월 뱃나들이의 대야리 산성, 정양리의 왕검성, 영월 삼옥리의 완택산성 등을 연결해 한수유역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해발 425m가 되는 산을 중심으로 띠를 두른 듯이 쌓은 테뫼형 산성인 이 성은 북쪽으로 약 80m의 성곽이 남아있고 동쪽과 서쪽은 이에 비해 외벽과 내벽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축조 방식은 장방형의 모가난 돌을 아래에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10∼15도 정도 기울여 쌓는 물림쌓기 방식으로 쌓았는데, 성을 연속해서 이어서 쌓지않고 가파른 곳에는 토축방식으로 다져놓고 중요한 곳은 석축으로 했다.
몇 년 전 까지만해도 성 안에서 밭을 일구다가 여러 개의 돌화살촉 등을 발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