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개경과 서경 등 주요 지명의 고찰 (6)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강역을 아래와 같이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를 비롯하여 5도(道)와 북계(北界), 동계(東界)로 구분하여 소속하는 각 지명들의 연혁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
동계(東界),
북계(北界)
그런데 상기 지역 중에서 전라도(全羅道)는 어디인가?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전라도에 관한 연혁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全羅道)는 본래 백제(百濟)의 땅으로서 의자왕(義慈王) 19년(659년)에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王]이 당(唐)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땅을 병합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 나누어 전주(全州)와 무주(武州)의 두 도독부(都督府)가 되었으며, 진성왕(眞聖王) 5년(891년)에 서면도통(西面都統) 견훤(甄萱)이 옛 땅을 모두 장악하고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칭하였다.
태조(太祖) 19년(936년)에 (왕이) 친히 정벌에 나서 승리하였다. 성종(成宗) 14년(995년)에 전주(全州)·영주(瀛州)·순주(淳州)·마주(馬州) 등의 주·현(州·縣)을 강남도(江南道)로, 나주(羅州)·광주(光州)·정주(靜州)·승주(昇州)·패주(貝州)·담주(潭州)·낭주(朗州) 등의 주·현(州·縣)을 해양도(海陽道)로 삼았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두 도를) 합하여 전라도(全羅道)가 되었다. 관할하는 목[領牧]이 2개, 부(府)가 2개, 군(郡)이 18개, 현(縣)이 82개이다."
상기 기록 중에서 신라 경덕왕 때 설치했다는 전주(全州)와 무주(武州)는 신라 9주에 해당하는 주들인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전주(全州)와 무주(武州)가 마치 붙어있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즉, 신라 9주 중에 옛 백제 땅에 3개 주를 두었는데, 백제의 옛 궁성 북쪽 웅진구(熊津口)를 웅주(熊州)라 하고 그 다음 서남쪽을 전주(全州), 그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근거하여 신라가 553년에 백제의 동북지역을 차지한 이후 설치한 주(州)들의 명칭과 각 주(州)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현(郡·縣)들의 명칭을 비교해 보면, 백제 땅에 설치한 3개 주를 비롯하여 신라 9주의 위치는 [그림 1]과 같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 신라 9주의 추정지역
즉,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한 3개 주 중에서 웅주(熊州)를 중심으로 동북쪽에 전주(全州), 서남쪽에 무주(武州)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쪽에서부터 무주(武州)·웅주(熊州)·전주(全州)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상기한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전주(全州) 등이 속해 있었던 강남도(江南道)와 나주(羅州) 등이 속해 있었던 해양도(海陽道)를 합하여 전라도(全羅道)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강남도(江南道)는 어디이고, 해양도(海陽道)는 어디인가?
여기서 나주(羅州)라는 지역은 『고려사』 지리지에 그 연혁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주목(羅州牧)은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으로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신라 말[羅季]에 견훤(甄萱)이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칭하며 그 땅을 모두 차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을의 사람들이 후고려왕(後高麗王)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하였다.
궁예는 태조(太祖)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임명하여 수군[舟師]을 이끌고 공격하여 차지하도록 한 뒤, 나주(羅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995년)에 처음 10도(道)를 정하면서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라 부르고, 해양도(海陽道)에 소속하였다. 현종(顯宗) 원년(1010년)에 왕이 거란군[丹兵]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나주(羅州)에 이르러서 열흘 동안 머물다가, 거란군이 패하여 물러가자 (왕이)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현종) 9년(1018년)에 승격시켜 목(牧)이 되었다.(중략)"
즉, 나주(羅州)라는 지역은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으로서 910년에 왕건이 지원하러 간 곳인데, 현재의 산동성 하택시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고려 주요 지명의 추정지역
다시 말해서 궁예가 철원(鐵圓)에 도읍지를 정하고 있을 때, 910년에 왕건(고려 태조)으로 하여금 나주성(羅州城)을 지원하게 하였는데, 그 당시 철원(鐵圓)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 시대 남경(南京) 양주(楊州)였으며, 현재는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나주(羅州)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산동성 하택시 주변 지역이 해양도(海陽道)가 되었으며, 그 남쪽 지역에 전주(全州) 등을 중심으로 하는 강남도(江南道)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전주(全州)라는 지역은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그 연혁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주목(全州牧)은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하고,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으로서 위덕왕(威德王) 원년(554년)에 완산주(完山州)가 되었고, (위덕왕) 11년(564년)에 주(州)를 폐지하였다.
의자왕(義慈王) 19년(659년)에 신라(新羅)가 당(唐)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땅을 차지하였다.
진흥왕(眞興王) 16년(555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진흥왕) 26년(565년)에 주를 폐지하였다. 신문왕(神文王) 4년(684년)에 다시 완산주(完山州)를 두고, 경덕왕(景德王) 15년(756년)에는 다시 전주(全州)라고 불렀다.
뒤에 견훤(甄萱)이 전주(全州)에 도읍(都邑)을 세웠으나, 태조(太祖)가 멸망시키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 (태조) 23년(940년)에 도로 전주(全州)가 되었다.
성종(成宗) 12년(993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고 불렀으며, (성종) 14년(995년)에 12주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순의군(順義軍)이라고 부르고, 강남도(江南道)에 소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시켰으며, (현종) 13년(1022년)에 다시 전주(全州)로 명명하였다. 공민왕(恭愍王) 4년(1355년)에 원(元)의 사신 예스부카[埜思不花]를 구금하였다는 이유로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공민왕) 5년(1356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가 되었다.(중략)"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553년에 백제의 동북 지역을 빼았고 처음에 신주(新州, 신흥주)를 두었으며, 이어서 555년에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상기한 『고려사』 지리지의 연혁에 따르면, 전주(全州)에 관하여 앞부분은 신라가 555년에 설치한 완산주(完山州)로서 신라 9주 중의 하나인 전주(全州)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으나, 뒷부분은 견훤(甄萱)이 도읍(都邑)을 두었다가 고려 태조에게 소탕된 전주(全州)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앞부분이나 뒷부분이나 모두 '전주(全州)'를 설명하고 있으나, '전주(全州)'의 실질적인 위치가 서로 다름을 알아챌 수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앞부분의 '전주(全州)'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가 555년에 설치한 전주[全州, 완산주(完山州)]이지마는, 뒷부분의 '전주(全州)'는 견훤의 아들 신검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곳으로서 후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이기 때문이다.
즉, 후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전주(全州)'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안휘성 육안시 수현(壽縣)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는 수현(壽縣) 바로 북쪽에 왕건과 견훤이 전투를 벌였던 '팔공산(八公山)'이란 지명이 현대 지도에도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기한 『고려사』 지리지의 연혁에서 전주(全州)를 비롯하여 영주(瀛州)·순주(淳州)·마주(馬州) 등이 강남도(江南道)에 속했다고 하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연혁이 남아있는 지명들로서 금마군(金馬郡)·남원부(南原府)·임실군(任實郡)·순창군(淳昌郡)·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고부군[古阜郡, 영주(瀛州)]·대산군(大山郡) 등이 소개되어 있다.
즉,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고부군(古阜郡)을 태조(太祖) 19년(936년)에 영주관찰사(瀛州觀察使)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순창군(淳昌郡)이 나중에 순주(淳州)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전주(全州)·영주(瀛州)·순주(淳州) 등이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 강남도(江南道)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나주(羅州)를 비롯하여 광주(光州)·정주(靜州)·승주(昇州)·패주(貝州)·담주(潭州)·낭주(朗州) 등이 해양도(海陽道)에 속했다고 한다.
즉, 『고려사』 지리지에 연혁이 남아있는 지명들로서 무안군(務安郡)·담양군[潭陽郡, 추성군(秋成郡)]·곡성군(谷城郡)·낙안군(樂安郡)·남평군(南平郡)·장흥부[長興府, 회주목(懷州牧)]·영광군[靈光郡, 무령군(武靈郡)]·압해군(壓海郡)·장성군(長城郡)·영암군(靈岩郡)·황원군(黃原郡)·보성군[寶城郡, 패주자사(貝州刺史)]·도강군[道康郡, 양무군(陽武郡)]·보성군(寶城郡)·승평군[昇平郡, 순천부(順天府)]·해양현[海陽縣, 광주(光州), 화평부(化平府), 무진부(茂珍府)]·능성현(陵城縣, 능성군(陵城郡)]·탐라현[耽羅縣, 제주(濟州)]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성종(成宗) 14년(995년)에 담양군(潭陽郡)은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가 되었다고 하며, 승평군(昇平郡)은 승주곤해군절도사(昇州袞海軍節度使)가 되었다고 하므로 담양군(潭陽郡)과 승평군(昇平郡)이 나중에 각각 담주(潭州)와 승주(昇州)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보성군(寶城郡)이 패주자사(貝州刺史)가 되었으며, 해양현(海陽縣)이 광주(光州)가 되었으니, 나주(羅州)를 비롯하여 담주(潭州)·승주(昇州)·패주(貝州)·광주(光州) 등이 모두 인접해 있으면서 해양도(海陽道)였음을 알 수 있다.
즉, 해양도(海陽道)와 강남도(江南道)를 합친 전라도(全羅道)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해양도(海陽道)에 속한 탐라(耽羅)는 나중에 제주(濟州)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방이 강으로 둘러쌓인 지역으로서 현재의 하남성 상구시로 추정할 수 있다.
즉, 탐라(耽羅) 지역은 오랫동안 독립성을 유지하여 왔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탐라(耽羅)에 관한 연혁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략)『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서 열거한 구한(九韓) 중에 탁라(乇羅)가 네 번째로 나온다.
백제(百濟) 문주왕(文周王) 2년(476년)에 탐라국(耽羅國)의 사자에게 은솔(恩率) 벼슬을 주었다. 동성왕(東城王) 20년(498년)에 탐라가 공물을 바치지 않으므로 친히 정벌에 나섰는데, (정벌군이)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탐라가 그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정벌을 중지하였다. 그 주(註)에 이르기를,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원년(661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인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太祖) 21년(938년)에 탐라국의 태자(太子) 말로(末老)가 찾아와 조회[來朝]하므로, 성주(星主)·왕자(王子)의 작위(爵位)를 내려주었다. 숙종(肅宗) 10년(1104년)에 탁라(乇羅)를 탐라군(耽羅郡)으로 고쳤다. 의종(毅宗) 때 현령관(縣令官)이 되었다. 희종(熙宗) 7년(1211년)에 고을의 석천촌(石淺村)을 귀덕현(歸德縣)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1270년)에 역적(逆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섬에) 들어가 웅거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그로부터 4년 후 왕이 김방경(金方慶)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에 원(元)이 이 지역에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하였다. (충렬왕) 20년(1294년)에 왕이 원(元)에 조회하였을 때, 탐라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원(元) 승상(丞相) 완택(完澤, 울제이) 등이 상소하여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서 탐라를 다시 우리에게 예속시켰다.
이듬해 을미년[乙未, 1295년]에 이름을 제주(濟州)로 고치고, 처음으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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