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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利益衆生廻向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此善根으로 爲欲利益一切衆生故로 廻向하며 爲欲安樂一切衆生故로 廻向하며 爲令一切衆生으로 得大義利故로 廻向하며 爲令一切衆生으로 悉得淸淨故로 廻向하며 爲令一切衆生으로 悉求菩提故로 廻向하며 爲令一切衆生으로 悉得平等故로 廻向하며 爲令一切衆生으로 悉得賢善心故로 廻向하며 爲令一切衆生으로 悉入摩訶衍故로 廻向하며 爲令一切衆生으로 悉得賢善智慧故로 廻向하며 爲令一切衆生으로 悉具普賢菩薩行願하야 滿十力乘하야 現成正覺故로 廻向하나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선근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려고 회향하며, 일체 중생을 안락케하려고 회향하느니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큰 이치와 이익을 얻게 하려고 회향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청정을 얻게 하려고 회향하느니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보리를 구하게 하려고 회향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평등을 얻게 하려고 회향하느니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어질고 선한 마음을 얻게 하려고 회향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대승(大乘)에 들게 하려고 회향하느니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어질고 선한 지혜를 얻게 하려고 회향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보현보살의 행(行)과 원(願)을 갖추고 십력(十力)의 법[乘]을 만족하여 지금 있는 그대로가 바른 깨달음[現成正覺]인 까닭에 회향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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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중생회향(利益衆生廻向) : 모든 선근은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회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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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이차선근(以此善根)으로 : 이 선근으로써
위욕이익일체중생고(爲欲利益一切衆生故)로: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으로
회향(廻向)하며
위욕안락일체중생고(爲欲安樂一切衆生故)로 : 일체중생을 안락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으로
회향(廻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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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득대의리고(得大義利故)로 : 대의리를 얻게 하고자 하는 까닭으로
회향(廻向)하며 : 회향한다. 의리는 옳은 이익이라는 말이다. 유교에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있다.이익을 볼 때 그것이 의로운 것이냐 정당한 것이냐 아닌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세속의 부정한 돈을 독약을 삼키듯이 삼켜서 나중에 다 들통 나고 그것을 게워내고 그 독약이 몸에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몇 년이 지나도 그런 것이 다 드러난다.
그런데 옛날 유교에서는 선비들에게 견리사의를 가르쳤다.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의로운 것인가 아닌가를 분명히 생각하라고 교육했다. 그런 선비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자기가 10원어치 일을 했는데 20원을 받았다면 10원은 돌려줘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견리사의다. 의리 의로운 이익을 얻게 하는 고로 회향하며
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실득청정고(悉得淸淨故)로 :다 청정함을 훌륭함을 얻게 하고자 하는 고로
회향(廻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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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실구보리고(悉求菩提故)로 : 보리를 구하게 하는 까닭으로
회향(廻向)하며
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실득평등고(悉得平等故)로 : 평등을 다 얻게 하고자 하는 까닭으로
회향(廻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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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실득현선심고(悉得賢善心故)로 : 모두다 어질고 착한 마음을 얻게 하고자 하는 까닭으로
회향(廻向)하며
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실입마하연고(悉入摩訶衍故)로 : 모두다 마하연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는 까닭으로
회향(廻向)하며: 회향한다.
범어로 대승(大乘)을 마하야나라고 하고 소승(小乘)을 히나야나라고 한다. 마하연은 마하야나다. 그런데 히나야나의 본 뜻은 ‘버려야 할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히나야나를 소승이라고 번역한 것은 상당히 봐준 번역이다. 버려야할 가르침이라는 본래 뜻대로 하자면 히나야나는 중국에서 번역한 소승, 자기 혼자만 생각하는 가르침보다 더 몹쓸 가르침이다.
우리가 화엄경 공부를 해 보니까 소승의 가르침과 대승의 가르침은 천양지차다.
소승불교 근본불교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대승불교 화엄경 가르침은 아예 처음부터 말을 섞을 내용이 아니다. 한자리에 앉아서 소승이 옳으냐 대승이 옳으냐 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히나야나는 버려야 할 가르침이다.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유마경 같은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수를 그대로 다 드러낸 경전들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정각 속에는 대승의 가르침이 다 있었는데 계발이 덜 되어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20개 부파가 난립을 해서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다가 불멸후 한 500년쯤 지난 뒤에 비로소 부처님 깨달음의 진실한 뜻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크게 깨달은 보살들인 마명, 용수, 세친 이런 이들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부처님의 진짜 깨달음의 진수가 이것이다’ 라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런 화엄경이 탄생한 것이다. 법화경도 탄생하고 열반경도 탄생을 하고 유마경 같은 것도 탄생을 한 것이다.
유마경에서 유마라고 하는 뛰어난 거사가 부처님의 십대 제자를 완전히 형편없이 취급해 버린다. 십대제자에게 ‘너희는 버려야 할 가르침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다. 당장 버려라. 너희 소견 당장 버려라’라고 몰아붙인다. 유마경 속의 십대 제자들은 ‘나는 유마거사를 만나서 이야기 들었는데 그 양반 하고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음이라. 그래서 병위문을 못간다. 유마거사라 하면 치가 떨린다’ 라고 다같이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거절한다. 아주 잘된 표현이다.
그것을 보면 초기 불교와 대승불교가 어떤 격차가 있는지를 확연히 알 수가 있다.
그런 유마경이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사스님들도 모두 ‘유마경 훌륭하다 훌륭하다’고 했다.
단 최근에 틱낫한 스님 글을 죽 읽다보면 ‘유마경 나는 싫다’라고 하였다.
출가한 비구는 또 그 자존심이 있어서, 유마거사의 견해는 뛰어나지만 부처님의 기라성 같은 10대제자를 완전히 그야말로 똥태망태 형편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리불존자, 목건련 훌륭한 사람들 우리가 같이 있었다면 그 당시 같으면 나는 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탁발 다니고 같이 법을 토론했을 형제들이다’라고 틱낫한 스님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유마거사하고는 다른 차원으로 나오니까 ‘유마경 싫다 나는’하고 틱낫한 스님이 말했다.
그 틱낫한 스님이 법화경을 해설한 것을 보면 기가 막히게 잘했다. 베트남은 소승불교도 일부 있지만 전통적으로는 대승불교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 이상으로 한문을 많이 공부하고 전부 한문 말이다. 지금은 한문 글자는 어디 가버리고 그냥 말만 남아있다. 베트남 글이 꿰어맞추면 전부 한문으로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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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실득현선지혜고(悉得賢善智慧故)로 : 어질고 좋은 착한 지혜를 얻게 하는 고로
회향(廻向)하며
위령일체중생(爲令一切衆生)으로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실구보현보살행원(悉具普賢菩薩行願)하야 : 보현보살의 행원을 갖추어서
만십력승(滿十力乘)하야 : 십력승을 만족케 해서, 십력승은 불승이다. 십력이란 부처라는 뜻이니까 열 가지 힘 불승을 만족케 해서
현성정각고(現成正覺故)로: 정각을 현성하게 하는 까닭으로
회향(廻向)하나니라: 회향하느니라. 번듯이 이루게 한다. 환하게 밝게 이룬다. 정각을 밝게 이루는 까닭으로 회향하느니라. 이러한 이유로 내가 선행을 하고 그 선행을 다시 회향한다. 그러니까 한가지 선행을 하고 그것으로 딱 입다물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마음속에서 회향하고 중생이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발원하는 것이다. 그 회향으로써 만원어치 선행해놓고 십만원 백만원으로 불어난다. 그것이 회향의 의미다.
우리가 기도하고 회향하면 끝낼 일이 아니라 보다 더 나은 정진으로 나아가자는 뜻이다.
그런데 대개 그만 회향을 안하고 기도하고 끝내버리고 방생 갔다 오는 것으로 끝내버린다. 물론 방생은 참 좋은 일이다. 절마다 방생을 해야 된다.
(70) 善根廻向의 利益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諸善根으로 如是廻向時에 身口意業이 皆悉解脫하야 無着無繫하며 無衆生想하며 無命者想하며 無補特伽羅想하며 無人想하며 無童子想하며 無生者想하며 無作者想하며 無受者想하며 無有想하며 無無想하며 無今世後世想하며 無死此生彼想하며 無常想하며 無無常想하며 無三有想하며 無無三有想하며 非想이며 非非想이니 如是非縛廻向이며 非縛解廻向이며 非業廻向이며 非業報廻向이며 非分別廻向이며 非無分別廻向이며 非思廻向이며 非思已廻向이며 非心廻向이며 非無心廻向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모든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할 때에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이 모두 해탈하여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느니라.
중생이란 생각도 없고, 오래 산다는 생각도 없고, 보특가라(補特伽羅)라는 생각도 없고,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고, 동자라는 생각도 없고, 생겨난 이란 생각도 없고, 짓는 이란 생각도 없고, 받는 이란 생각도 없느니라.
있다는 생각도 없고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란 생각도 없으며, 여기서 죽어 저기 난다는 생각도 없으며, 항상하다는 생각도 없고 무상(無常)하다는 생각도 없으며, 삼유(三有)라는 생각도 없고 삼유가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속박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며, 속박을 푼 것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며, 업(業)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며, 업의 과보(果報)가 아닌 것으로 회향하며, 분별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느니라.
분별없음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며, 생각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며, 생각하여 마침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며, 마음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며, 마음 없음이 아닌 것으로 회향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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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근회향(善根廻向)의 이익(利益) : 이상회향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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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이제선근(以諸善根)으로 : 모든 선근으로써
여시회향시(如是廻向時)에 : 이와 같이 회향할 때에
신구의업(身口意業)이: 신구의 삼업이
개실해탈(皆悉解脫)하야 : 다 모두 다 해탈해서
무착무계(無着無繫)하며: 집착도 없고 얽힘도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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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생상(無衆生想)하며 :중생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무명자상(無命者想)하며: 명자상도 없어서, 수명을 가졌다고 하는 생각도 없다.
금강경에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나온다. 여기에는 중생상 수자상이 나왔다. 수자상에 대해서는 내가 분명하게는 모르지만 나는 늘 ‘나이를 먹었다는, 나이에 대한 의식’이라고 수자상을 해석한다. 명자상과 같다. 나이에 대한 관념을 떼어 버리기가 어렵다. 그것을 떼내 버릴 수 있다면 대단한 수행이다. ‘내가 이 나이에’ 하는 태도가 제일 못 쓰는 것이다. 마음에 무슨 나이가 있는가. 흔히 불교는 전부 마음이 하는 거라고 가르친다. 마음에 무슨 나이가 있는가? 그렇게 배우면서도 우리는 항상 ‘이 나이에’를 달고 산다.
‘이 나이에 컴퓨터 배워서 뭐하게?’‘이 나이에 영어 배워서 뭐하게?’‘이 나이에 일어 배워서 뭐하게?’하는 쪼그라든 생각은 그야말로 버려야할 가르침이다. 히나야나, 소승적인 생각이다.
그것이 명자상이다. 나이에 대한 인식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자기를 어떤 한계로 몰아넣는 것은 제일 못 쓰는 것이다. 불교를 아예 모르는 이야기다. 불교는 전부 마음이 하는 것이고 마음은 나이가 없다고 하면서 ‘이 나이에 그거 해서 뭐하느냐’하는 생각을 왜 하는가?
우리는 영원히 산다고 하고, 금생에 단어 하나라도 익혀 놓으면 내생까지 연결이 된다고 배우면서 왜 안하는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금생에 단어 하나라도 알뜰히 익혀놓으면 다음생에는 한 번 척 보고서 ‘전생에 봤던 거다’ 하면서 그냥 알게 된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된다. 수자상이라는 것이 그런 뜻이다.
중생상은 열등의식이다. 중생상 수자상도 없으며
무보특가라상(無補特伽羅想)하며 : 보특가라상도 없다. 이것을 삭취취(數取趣)라고 한다. 보특가라상 생사윤회를 거듭한다는 생각도 없다. 무위진인 차별없는 참사람의 경지에서 그게 있을 수가 없다. 생사윤회를 거듭하기는 누가 거듭하는가? 삭취취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차별없는 참사람, 참마음, 한마음, 참생명, 진여자성, 진여불성 등등 별별 표현을 다 하는데 ‘우리의 참생명’ ‘나의 생명 영원한 부처님의 생명’‘무량공덕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 등등 표현하는 그것이 불교의 생명이고 나의 참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보특가라상이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무인상(無人想)하며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도 없으며
무동자상(無童子想)하며: 동자라고 하는 생각도 없으며
무생자상(無生者想)하며 : 태어나는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도 없으며
무작자상(無作者想)하며 : 무엇을 짓는다 하는 생각도 없으며
무수자상(無受者想)하며: 지었으니까 받는다 라고 하는 생각도 없다.
무위진인의 그 자리에는 이런 작자니 수자니 하는 것이 없다. 생자니 멸자니 이런 것이 도대체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늘 외우는 것이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그것은 공성이면서 활발발한 작용이 있는 것이다. 진공에서 묘유가 있는 것이고 탕무섬진(湯無纖塵)이지만 부유만덕(富有萬德)이다. 텅 비어서 미세먼지 하나 없는 그 자리인가 하면 부하기로 하면 온갖 만행 만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 그 자리다. 참 신기하다.
우리가 지금 수용하고 있는 이 세상은 전부 그 능력이 만들어 낸 것이다. 비행기라든지 인공위성이라든지 컴퓨터라든지 자전거라든지 자동차라든지 기차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그 미세먼지 조차 하나 없는 자리에서 만덕 만행을 자아내는 그 능력이 만들어 낸 것이다. 불교적으로 우리가 해석을 안한다 하더라도 전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저 날아다니는 비행기 뭐가 만들었는가? 우리 마음이 만든 것이다.
우리 마음이 한 생각 그런 방향으로 일으켰기 때문에 만들었다.
지금 현대문명의 총아는 핸드폰이다. 그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음악이면 음악 예술이면 예술 통화면 통화 자기 지식이 짧고 생각이 안나서 그렇지 생각이 나는 것은 그 속에 다 있다.
무비스님의 강의도 그 안에 수천꼭지가 들어있다. 다 올려 놓았다. 지금 이 강의도 금방 또 올리면 그 속에서 또 들을 수가 있다. 참 신기하다.
죄송스럽지만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면 핸드폰을 어찌 알았겠는가.
말세에 태어나기를 너무너무 잘한 것이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
어떤 상황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떻게 풀어내느냐,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산중에 와서 일반 관광객들은 ‘이런 데서 하룻밤만 잤으면 천상락을 누리는 것 같겠다’고 한다. 요즘처럼 단풍이 꿈같이 아름다운 계절에는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그 사람을 붙들어서 산중 절에 일주일만 앉혀놓으면 그만 지옥같이 여기는 것이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싶었던 자리가 왜 그렇게 지옥처럼 여겨지는가? 전부 우리 한마음의 작용이고 한마음의 조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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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유상(無有想)하며 : 유상도 없으며
무무상(無無想)하며 : 무상도 없으며
무금세후세상(無今世後世想)하며: 금세 후세라는 생각도 없으며
무사차생피상(無死此生彼想)하며 : 여기에서 죽어서 저곳에 가서 태어난다 하는 생각도 없다. 영원히 이 우주 공간에 꽉 차 있는 한물건이다. 꽉 차 있으니 어디 오고 가고 할 것도 없는 바로 그 자리인데 무슨 여기서 죽어서 저쪽 어디 서쪽에 가서 태어나느니 동쪽에 가서 태어나느니 그런 것은 알량한 유치원생들에게 하는 가르침이다.
무상상(無常想)하며 : 상상도 없으며 항상하다는 생각도 없고
무무상상(無無常想)하며 : 무상하다는 생각도 없으며
무삼유상(無三有想)하며: 삼유상도 없다. 욕계 색계 무색계가 삼유다. 삼유에 대한 생각도 없으며
무무삼유상(無無三有想)하며 :삼유가 없다고 하는 생각도 없으며
비상(非想)이며 : 상도 아니며
비비상(非非想)이니 : 상 아님도 아닌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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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비박회향(如是非縛廻向)이며 : 이와 같이 이것 속박 아닌 것으로써 회향하며
비박해회향(非縛解廻向)이며 : 속박된 것을 푸는 것이 아닌 것으로 회향한다. 잘 생각해야 된다. 여시비박으로써 회향하며 비박해로써 회향하며
비업회향(非業廻向)이며 : 업이 아닌 것으로 회향함이며
비업보회향(非業報廻向)이며: 업보가 아닌 것으로써 회향함이니라.
비분별회상(非分別廻向)이며 : 분별이 아닌 것으로 회향함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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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분별회향(非無分別廻向)이며 : 분별이 없음이 아닌 것으로써 회향함이며
비사회향(非思廻向)이며 : 생각이 아닌 것으로 회향함이며
비사이회향(非思已廻向)이며 : 생각 해버린 것, 생각해서 마친 것이 아닌 것으로써 회향함이다. 사이(思已)의 이는 마칠 이(已)자다. 비사이로써 회향함이며
비심회향(非心廻向)이며 : 비심으로 회향함이며
비무심회향(非無心廻向)이니라 : 비무심으로 회향함이니라. 무심도 아닌 것으로 회향함이니라.우리가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만 한구절 한구절에 무궁무진한 뜻이 담겨있고 그야말로 주옥같은 가르침이다.
(71) 遠離執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如是廻向時에 不着內하고 不着外하며 不着能緣하고 不着所緣하며 不着因하고 不着果하며 不着法하고 不着非法하며 不着思하고 不着非思하며 不着色하고 不着色生하고 不着色滅하며 不着受想行識하고 不着受想行識生하고 不着受想行識滅이니라
“불자들이여,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회향할 때에 안에도 집착하지 않고, 밖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반연함에도 집착하지 않고, 반연할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인(因)에도 집착하지 않고, 과(果)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법에도 집착하지 않고, 법 아닌 데도 집착하지 않으며,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고, 생각 아닌 데도 집착하지 않으며, 색(色)에도 집착하지 않고, 색이 나는 데도 집착하지 않고, 색이 멸하는 데도 집착하지 않으며, 수(受) 상(想) 행(行) 식(識)에도 집착하지 않고, 수 상 행 식이 나는 데도 집착하지 않고, 수 상 행 식이 멸하는 데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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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집착(遠離執着): 선근을 회향하여 일체 집착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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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여시회향시(如是廻向時)에 : 이와 같이 회향할 때에
불착내(不着內)하고 : 안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외(不着外)하며 : 밖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능연(不着能緣)하고 : 능히 반연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나 자신이다.
불착소연(不着所緣)하며 : 소연, 반연할 바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불착인(不着因)하고 : 원인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과(不着果)하며 : 과보에도 결과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
불착법(不着法)하고 : 법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비법(不着非法)하며 : 비법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사(不着思)하고 : 생각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비사(不着非思)하며 : 생각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불착색(不着色)하고 : 색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색생(不着色生)하고 : 색이 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색멸(不着色滅)하며: 색이 멸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수상행식(不着受想行識)하고 :수상행식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수상행식생(不着受想行識生)하고 : 수상행식이 생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착수상행식멸(不着受想行識滅)이니라 : 수상행식이 소멸하는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나니라.
모든 것을 다 초월한 경지다. 그 한마음 자리는 모든 것을 다 초월한 경지다. 그것이 대승불교에서나 선불교에서의 핵심이고 생명이다.
무위진인, 차별없는 참사람 자리가 선불교나 대승불교의 핵심이다.
또 소승불교라 하더라도 법구경 처음에 바로 마음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도 벌써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간다. 마치 수레가 소 발자국을 따르듯이’ 라고 일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찍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것이 부족하니까 후대의 보살들, 용수, 마명 같은 이들이 마음껏 풀어낸 것이다. 그들의 깨달음은 석가모니 못지않은 깨달음이니까 그렇게 마음 놓고 풀어내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대승경전이다.
(72) 遠離束縛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若能於此諸法에 不着則不縛色하고 不縛色生하고 不縛色滅하며 不縛受想行識하고 不縛受想行識生하고 不縛受想行識滅하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만일 능히 이러한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색(色)에도 속박되지 않고, 색이 나는 데도 속박되지 않고, 색이 멸하는 데도 속박되지 않고, 수 상 행 식에도 속박되지 않고, 수 상 행 식이 나는 데도 속박되지 않고, 수 상 행 식이 멸하는 데도 속박되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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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속박(遠離束縛): 집착하지 않으므로 속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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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약능어차제법(若能於此諸法)에 :만약 능히 모든 법에서
불착즉불박색(不着則不縛色)하고 : 집착하지 아니한즉 사물에도 속박하지 아니하고
불박색생(不縛色生)하고 : 사물이 생기는 것에도 속박하지 아니하고
불박색멸(不縛色滅)하며 : 색멸에도 속박하지 아니하고
불박수상행식(不縛受想行識)하고 : 수상행식에도 속박하지 아니하고
불박수상행식생(不縛受想行識生)하고 : 수상행식이 생기는 데도 속박하지 아니하고
불박수상행식멸(不縛受想行識滅)하니라 : 수상행식이 소멸하는 데도 속박하지 아니하느니라.
(73) 一切法의 正觀察
若能於此諸法에 不縛則亦於諸法에 不解하리니 何以故오 無有少法도 若現生若已生若當生이라 無法可取며 無法可着이니 一切諸法이 自相如是하야 無有自性하야 自性相離라 非一非二며 非多非無量이며 非小非大며 非狹非廣이며 非深非淺이며 非寂靜非戲論이며 非處非非處며 非法非非法이며 非體非非體며 非有非非有니라 菩薩이 如是觀察諸法이 則爲非法이나 於言語中에 隨世建立非法爲法하야 不斷諸業道하고 不捨菩薩行하야 求一切智하야 終無退轉하며 了知一切業緣如夢과 音聲如響과 衆生如影과 諸法如幻호대 而亦不壞因緣業力하야 了知諸業이 其用廣大하며 解一切法이 皆無所作이나 行無作道하야 未曾暫廢니라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住一切智일새 若處非處에 普皆廻向一切智性하며 於一切處에 皆悉廻向하야 無有退轉하나니라
“만약 이 모든 법에 능히 속박되지 않으면 곧 또한 모든 법에 해탈하지도 않을 것이니라. 그 까닭을 말하면, 조그만 법도 지금 나거나 이미 났거나 장차 날 것이 없으므로 법을 취할 수도 없고 법에 집착할 수도 없나니, 일체 모든 법에 제 모양이 이와 같으며, 제 성품이 없나니 스스로의 성품과 모양을 여의었느니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고 무량한 것도 아니며,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며, 좁은 것도 아니고 넓은 것도 아니며, 깊은 것도 아니고 얕은 것도 아니며, 고요한 것도 아니고 희론(戲論)거리도 아니며, 옳은 곳도 아니고 그른 곳도 아니며, 옳은 법도 아니고 그른 법도 아니며, 자체도 아니고 자체가 아닌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하면 곧 법이 아닌 것이 되거니와, 말로써 세상을 따라 건립(建立)하면 법이 아닌 것이 곧 법이 되나니, 모든 업(業)의 도(道)를 끊지 아니하고 보살의 행을 버리지 않으면서 온갖 지혜를 구하여 마침내 퇴전함이 없으리라.
일체 업의 인연은 꿈과 같고, 음성은 메아리와 같고, 중생은 그림자와 같고, 모든 법은 요술과 같음을 알지마는, 그러나 또한 인연과 업의 힘을 무너뜨리지 않느니라. 모든 업은 그 작용이 광대한 줄을 알며, 일체 법이 하나도 짓는 일이 없음을 이해하나 지음이 없는 도(道)를 행하여 잠깐도 폐하지 않느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온갖 지혜에 머무르고는 옳은 곳이나 그른 곳이나 간에 모두 온갖 지혜의 성품으로 회향하는 것이며, 모든 곳에 두루 회향하여 퇴전함이 없느니라.
무슨 뜻으로 회향(廻向)이라 이름 하는가. 영원히 세간(世間)을 제도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여러 가지 쌓인[諸蘊]데서 영원히 뛰어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언어의 길을 지나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느니라.
갖가지 생각을 떠나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길이 몸이라는 소견을 끊어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의지한 곳을 아주 여의어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느니라.
짓는 일을 영원히 끊고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모든 유(有)에서 영원히 뛰어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모든 취(取)를 영원히 버리고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세상 법을 영원히 떠나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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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一切法)의 정관찰(正觀察) : 일체 법을 바르게 관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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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능어차법(若能於此諸法)에 : 만약 능히 이 모든 법에
불박즉역어제법(不縛則亦於諸法)에: 속박되지 아니한다면 다 뛰어난다면, 사실 우리는 모두 뛰어나 있는 존재다. 업이나 또는 다른 인연에 의해서 습관적으로 속박되어 와서 그렇지 그 한물건은 본래로 속박되어 있지 않은 존재다. 그러므로 속박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속박되지 아니한 즉 또한 모든 법에서
불해(不解)하리니 : 풀 것도 없다. 속박이 되어야 풀지 속박되지 않는 데 풀 것도 없다. 풀지도 아니함이니
하이고(何以故)오 : 하이고오
무유소법(無有少法)도: 작은 법도
약현생약이생약당생(若現生若已生若當生)이라: 현재 생긴 것이거나 이미 생긴 것 과거에 생긴 것이거나 앞으로 생길 것도 없음이라. 작은 법도 그런 것이 없다. 본래 여여한 그 자리다.
무법가취(無法可取)며 : 법 가이 취할 것이 없으며
무법가착(無法可着)이니 : 가히 집착할 것도 없음이니
일체제법(一切諸法)이 : 일체제법이
자상여시(自相如是)하야 :자기의 모습이 본래의 자신의 모습이 이와 같아서
무유자성(無有自性)하야 : 자성이 없어서
자성상리(自性相離)라 : 자성상을 떠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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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일비이(非一非二)며 :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비다비무량(非多非無量)이며 : 많은 것도 아니고 한량없는 것도 아니며
비소비대(非小非大)며 :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며
비협비광(非狹非廣)이며 : 좁은 것도 아니고 넓은 것도 아니며
비심비천(非深非淺)이며: 깊은 것도 아니고 얕은 것도 아니고
비적정비희론(非寂靜非戲論)이며 : 적정한 것도 아니고 희론도 아니며
비처비비처(非處非非處)며 : 처도 아니고 비처도 아니며
비법비비법(非法非非法)이며: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며
비체비비체(非體非非體)며: 체도 아니고 체가 아님도 아니며
비유비비유(非有非非有)니라: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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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여시관찰제법(如是觀察諸法)이 :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한 즉은
즉위비법(則爲非法)이나 : 곧 법이 아님이 되나 비법이 되나
어언어중(於言語中)에 : 언어 중에는
수세건립비법위법(隨世建立非法爲法)하야 : 세상을 따라 건립해서, 이치는 앞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라고 했지만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을 따라서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법아닌 것으로써 법을 삼아서
부단제업도(不斷諸業道)하고 : 모든 업의 도를 끊지 아니하고
불사보살행(不捨菩薩行)하야 : 보살행을 버리지 아니한다. 이것이 또 중도 이야기다. 부단제업도다. 모든 업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업력난사의(業力難思議)라고 했다. 우리에게 업이 중요하다. 그 업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살행을 버리지 않는다.
중생업이 다 끝나고 번뇌가 다 사라진 뒤에 보살행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 업을 가지고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재욕행선지견력(在欲行禪知見力)이라고 했다. 욕심 속에 있으면서 높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견의 힘이고 안목이다.
중생업이 다 끝난 뒤에 보살행을 언제 하겠는가?
석가모니 부처님도 육근(六根)과 오온(五蘊)을 가진 인간이다. 그러면서 그대로 부처 생활을 했다. 그분도 남들처럼 죽을 때 죽고 아플 때 아팠다. 그러면서도 부처행하고 보살행하고 할 것 다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대개 보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업이 다 사라진 뒤에 그때사 보살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구일체지(求一切智)하야 : 일체지를 구해서
종무퇴전(終無退轉)하며 : 마침내 퇴전하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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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일체업연여몽(了知一切業緣如夢)과 : 일체업연이 여몽과
음성여향(音聲如響)과 : 음성이 메아리와 같음과
중생여영(衆生如影)과 : 중생이 그림자와 같음과
제법여환(諸法如幻)호대 : 제법이 환영과 같음을 요지하되 일체 업연이 꿈과 같고 음성은 메아리와 같고 중생은 그림자와 같고 모든 법은 환영과 같은 것을 알지만
이역불괴인연업력(而亦不壞因緣業力)하야: 그러나 또한 불괴인연업력하야, 좋은 말이다. 아까 화엄경 강설 44권에서 중도 이야기를 했었는데 바로 그것이다. 인연의 업력을 무너뜨리지 않고 우리가 살면서 지어놓은 온갖 인연의 업력을 그대로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요지제업(了知諸業)이 : 제업이
기용광대(其用廣大)하며 :기용광대함을 요지하며
해일체법(解一切法)이 : 일체법이
개무소작(皆無所作)이나 : 다 짓는 바가 없음을 이해하나
행무작도(行無作道)하야 :지음이 없는 도를 행해서
미증잠폐(未曾暫廢)니라 :잠깐도 일찍이 폐하지 그만두지를 아니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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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차보살마하살(此菩薩摩訶薩)이 : 이 보살 마하살이
주일체지(住一切智)일새: 일체 지혜에 주할새 머물새
약처비처(若處非處)에 : 약처 비처와 처와 비처
보개회향일체지성(普皆廻向一切智性)하며: 일체 지혜의 성품에 널리 다 회향하며
어일체처(於一切處)에 : 일체처에
개실회향(皆悉廻向)하야 : 다 회향해서
무유퇴전(無有退轉)하나니라 :퇴전함이 없느니라.
자꾸 읽고 반복해서 하면 그것이 수행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물들어 버리고 진짜 공부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중요하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박수소리)
하강례
절대긍정 법왕자 카드
경허록을 강의하고 오신 대원사 도행스님이 교재로 쓰셨던 경허집을 가져오셨다. 큰스님이 글시 한 폭을 선물하셨다.
“한달에 한 번씩 잔치같지?” 하고 큰스님이 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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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피디가 큰스님 건강을 여쭈면서 선림산책에 출연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선림산책은 내가 방이 없어서 못해. 모두 좋은 방에 앉았던데, 난 병실이야 환자실 그냥 어수선한 창고같은 방이라서.” 하고 큰스님이 사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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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스님이 관음사에 들렀다가 왔다고 하시면서 관음사 대중스님들의 소식을 전했다. 그 중에 율사였던 한 스님이 당뇨 합병으로 눈을 거의 못 보게 되었는데도 시계수리공들이 보는 돋보기로 필요한 것들을 보시며 생활하는 이야기를 전하셨다. 뿐만 아니라 대중스님들이 모두 많은 노력들을 하면서 큰 절 생활을 잘 꾸리고 있다고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라디오에서 내 강의 끝나고 그 스님이 말하자면 방송국 화주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진흙이 되겠습니다’ 연꽃을 피우시라고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어.”
하고 큰스님이 관음사 주지스님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 마음으로 살죠.”
회장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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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여행을 갔던 학인스님들이 오셔서 인사를 올리자 큰스님이 웃으며 반기셨다.
“우리 학인큰스님들 피곤하실텐데 이렇게 내려오셨네. 하하하 오늘 늘 잘 왔다. 영화도 소개받고 카드도 살펴보고 활용 잘하라고. 책상에 다 올려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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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이 ‘살다살다 이런 공양을 다 받네’하고 신기해하신 카드는 <법왕자 카드>인데 여럿이서 게임도 할 수 있고 혼자서 타로카드를 뽑듯이 카드를 뽑아 말씀을 읽을 수가 있다.
두근거리며 첫카드를 뽑아보았다.
무성무괴성(無成無塊性)
당신의 인생은/이룬 것이 많습니까?/실패한 것이 더 많습니까?/우리의 인생은/오직 변화가 있을 뿐/줄어듦도 늘어남도 없습니다./그러니 오늘 하루,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실천해 보세요.
다른 카드를 계속해서 뽑아봤는데 모두 좋은 말씀들만 가득해서 약간 서운함 마저 느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늘 긍정적으로 살겠다고 하면서도 ‘부정적인 것 속에서 나만 긍정적인 카드를 뽑고 싶다’는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 카드를 가지고 놀면 인성이 좋아집니다.” 하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던 젊은 스님의 미소를 알 것 같았다. 대해스님의 영화 <산상수훈>을 홍보하러 오신 스님들이 가져오신 이 카드는 ‘절대긍정의 카드’였다. 이 글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뽑아본 카드에 이런 내용도 있었다.
당신 안에 모든 음표가 있습니다
정성들여 최선을 다한다면 최고의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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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큰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는 곳이 너무 낡아 늘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이번 포항 지진때에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고요. 제가 얼마나 멍청한지.. 몇년 전, 범어사에 새집 짓기를 하기에 큰스님의 새 거처하실 곳을 공사하는 줄 알았습니다... 최근 화엄전 비가 새는 곳을 천막으로 수리한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낡은 기둥에 무거운 기와를 올리면 더 위험할 것 같아서요.
慧明華님, 먼길 다니면서 애쓰십니다. 고맙습니다. _()()()_
- 補特伽羅(사사치) -
-補特伽羅(數取趣(삭취취))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네 무척 감사합니다.^^ 삭취취는 에고 자주 육취를 번갈아 오간다고 해서 삭취취군요.
한마음의 작용...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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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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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