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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규 전 신아일보 논설위원이 17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충남 논산 출신인 고인은 동국대 법대와 대학원을 나온 뒤, 동국대와 서강대에서 법학 강의를 했다. 신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1975년엔 자비로 영문 월간지인 '외교(Diplomacy)'를 창간, 전세계 국가 지도자를 인터뷰해 표지의 인물로 소개하는등 민간외교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했다. 그가 인티뷰한 국가지도자중엔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 수백 명에 이른다. 1986~1988년엔 세계국제법협회(ILA) 세계 회장을 지냈다. 1980년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이듬해 제11대 총선에서 충남 논산·공주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1992년엔 충남 명사 모임인 백소회(百笑會)를, 2004년엔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을 후원하기 위해 '반사모(BANSAMO)'를 각각 만들어 이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반기문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이 되기까지 막후에서 그를 도운 일화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2017년 반기문 총장 귀국 후엔 '충청대망론'에 불을 지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인은 이렇듯 한평생 민간외교관으로 살다간 애국자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순씨, 아들 종국·종덕·종명씨와 딸 진경씨, 그리고 사위 이내성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9일 오전 8시. 장지는 파주 동화경모공원이다. * 삼가 명복을 빌며 고인이 과거를 회고하며 남긴 글 두편을 소개한다. 세계 정상들은 대한민국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경제뿐 아니라 민주주의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75년에 영문 월간 외교지(Diplomacy)를 창간해 지난 38년간 약 400명의 각 나라 왕, 수상과 대통령들을 직접 만나 보았다. 필자의 직접 체험담 일부를 소개할까 한다. 필자는 2001년 11월 알제리아 정부 초청 방문 중 부테풀리카 대통령과 20분간 약속하고 만났다. 대통령은 “나는 오랫동안 북한을 많이 도왔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나를 싫어할 것입니다. 내가 북한을 도운 이유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로부터 독립전쟁을 할 때 전 세계에서 전부 프랑스 편인데 유일하게 북한만 우리 독립군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북한을 도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대통령 본인은 약간 미안해하는 분위기였다. 필자가 “참 잘 되었습니다”라고 답하자 깜짝 놀라 “왜 잘 되었다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필자는 “한국은 지금 북한과 친한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는 북한과 한국이 평화정착 할 수 있도록 앞장서 주세요. 저는 한국기업과 정부가 알제리아 경제발전을 돕는 역할을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대통령은 반가워하면서 인터뷰 도중 갑자기 필자를 얼싸안으면서 “너무 고맙습니다. 참 기가 막힌 생각입니다. 그렇게 합시다.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양국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해 봅시다”라고 하면서 갑자기 수십 년간 친한 형제처럼 정담을 2시간동안이나 나누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필자는 비행기를 놓쳐 하룻밤을 더 있다 온 일이 있다. 필자는 그 뒤 2003년 12월에 부테풀리카 대통령을 국빈방문으로 방한시킨바 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아주 가까운 나라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박동진 전 외무장관은 “알제리아는 외교적으로 한국과 제일 먼 나라다. 이렇듯 제일 먼 나라가 이제는 제일 가까운 나라로 되었다. 이것은 외교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외교의 기적을 만든 사람은 ‘임 덕규’ 11대 의원이다”라는 글을 외교협회지에 투고한 바 있다. 요컨대 알제리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모든 경제협력 문제는 한국에 최우선권을 줘야 한다”는 말을 자주했다는 소식을 그 나라 장관들에게 자주 들었다. 그뿐 아니라 그 후 모든 주택건설공사, 정유공장을 비롯한 많은 사업을 한국 기업에 많이 주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우리나라 대통령들도 알제리아에 가서 가장 환대를 받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실로 오늘날 세계정상들은 대한민국을 ‘경제발전의 기적의 나라’라고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대한민국은 ‘희망의 나라’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세네갈 대통령은 “한국은 아프리카의 희망의 나라다. 왜냐하면 1960년대 초 우리 세네갈국보다 못 살던 한국이 불과 50년 만에 세계 선진국이 되었다. 이 사실은 우리 세네갈도 한국의 경제발전방법을 배워서 열심히 노력하면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세계정상들은 대한민국 국민을 “위대한 국민이다”이라고 공감한다. 불과 반세기만에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켰고 더구나 민주주의까지 동시에 발전시킨 사실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독일의 바이제카 대통령은 필자에게 “솔직히 서양 개념으로 볼 때 동양은 철저한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평등한 사회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 국민들은 투쟁해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었으니 진실로 위대한 국민이다”라고 극찬했다. 요컨대 세계정상들은 대한민국과 국민을 대단히 우수하고 위대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은 세계적인 명예를 얻고 있는 것 못지 않게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임덕규) |
민간외교 40년의 보람
임덕규(월간 디플로머시 발행인)
내가 언론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8년 어느 날 신아일보 장기봉 사주를 만나면서 였다. 4년 동안 동국대와 서강대에서 국제법과 행정법을 강의할 때 장기봉 신아일보 사장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논설위원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언론계 경험이 없다”고 사양하자 “국제법을 전공했으니 국제 동향과 해외언론 관계를 다뤄주면 된다"기에 전공분야라 수락했다.
신아일보 논설위원시절, 서울 정동에 자리 잡은 신아일보 본사 목조건물은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2층 목조건물 1층에 편집국이 있었고 2층엔 사장실과 조사부 문화부가 자리했다. 논설위원실은 좀 떨어진 벽돌건물(윤전기 가 설치된 공장 건물) 6층에 있었고 사설을 쓰고 나면 승강기도 없는 공장 건물을 오르내리며 문선부로 넘겨야 했다. 논설위원이라야 김경룡, 홍진태, 정운종, 나 넷이서 돌아가며 사설을 썼지만 분위기 하나는 그만이었다.
1970년 동화통신사로 자리를 옮겨서는 출판국장대행으로 월간동화그라프와 동화연감을 발행하면서 동화통신사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 토인비 교수, 눈물 흘리며 '효(孝)' 캠페인 제안
이 무렵 나는 서양 최고의 석학 토인비 교수를 만난기쁨으로 벅차 있었다.
1973년 9월 영국정부 초청으로 런던에 가서 아주 어렵게 20세기 서양의 최고 석학 86세된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교수를 만나 한국의 효사상과 3대가 같이 살아가는 가족제도를 설명했다. 토인비 교수는 내가 이 같은 한국의 효사상을 설명하자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며 “임 선생! 효 사상을 듣고 보니 한국의 효 사상이 인류를 위해서 가장 훌륭한 사상입니다. 영원히 보존할 뿐 아니라 서양
에 와서 캠페인을 하시오.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 드리겠어요" 하시며 간곡히 당부 하셨다.
* 영문 월간지 Diplomacy 를 창간하다
영문 월간지 'Diplomacy' 창간, 내 생애에 가장 보람 있는 족적이다.
'Diplomacy' 창간은 임병직 박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임병직 박사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2대 외무장관과 유엔대사를 지낸 분이다. 윤하정 외무차관은 임병직 박사 탄신 100주년 기념세미나에서 "을지문덕 장군은 무인으로 나라를 지켰고, 임병직 박사는 1947년 11월 14일 새벽 2시 30분 한국 문제는 한국 국민에게 맡긴다는 UN총회 결의를 이끌어 내어 외교로써 나라를 세운 분이니 을지문덕 장군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로 올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60년 동국대 법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1963년, 집안 아저씨뻘인 임 박사가 귀국하자 10년 동안 개인적으로 보좌를 하게 됐다.. 임병직 박사를 뵈올 무렵 철기 이범석 장군, 윤치영 박사, 이갑성 옹, 안호상 박사 등을 만나 독립운동 정신과 그분들의 나라사랑을 안 것도 내 인생의 진로와 무관할 수 없다.
임 박사가 인도 대사로 있는 동안 '한. 인도 친선협회'를 만들어 간사로 활동하면서 외교를 경험했다. 1972년 임 박사가 뮌헨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을 알리기 위해 예술단을 이끌고 유럽 순방에 나서기 직전 "앞으로 먹고 살 생각만 하지 말고 영어로 잡지를 만들어 외국지도자들을 설득하면 국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고 당부하신 것이 영문 잡지 창간을 결심하게 된 동기다.
그때 영문 잡지 창간할 때 나는 이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목숨 걸고 하는 독립운동 보다 쉽지 않겠느냐는 각오와 배짱으로 시작했다. 주위에선 미친 짓이라며 극구 말렸다. 창간 준비에 2~3년 걸렸다. 유신 때라 출판 등록도 까다로웠다. 가장 큰 걸림돌은 창간 자금이다. 집과 백색전화를 저당 잡히고 사무실을 얻은 다음 1975년 8월5일 창간호를 냈다. 100사람을 만나 광고 한 건 얻어내면 다행이라고 여기며 세일즈맨으로 열심히 뛰며 40년을 달려왔다.
40년 동안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행하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IMF 위기 때다. 멕시코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경제위기는 가까운 시일 내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답변을 이끌어 냈다. AP 통신은 디플로머시 기사를 인용 보도하여 국제 신인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게 기억에 남는다.
외국 대통령, 수상, 국왕 등 500여명 인터뷰
외국 대통령 등 원수 급을 만나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한 외교사절들을 활용하거나 회장을 맡았던 세계국제법협회, AP 등 해외 언론계 지인 등 인적 네크워크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국가원수 측에 인터뷰 요청을 하면 실무진이나 비서진들은 “바쁘니까 시간을 내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면 “바쁘니까 뉴스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한가하면 인터뷰하자고 안 한다"고 말하곤 했다. 끈질기게 설득하면 기회가 열렸다.
내가 구축한 어드바이서(adviser) 네트워크는 500여명. 각국의 정상과 장관, 유엔을 비롯한 APEC·EU·아세안 등 국제기구 관계자,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석학, 대기업 총수 등 쟁쟁한 인사들로.‘글로벌 마당발’이라 할 수 있다. 디플로머시 컨텐츠 옆 페이지에는 Diplomacy Family' 명단을 빠짐없이 싣는다. 그들은 자문에 응하거나 기고로 제작에 참여한다.
70년대는 한국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90년대부터는 외국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면 한국처럼 될 수 있느냐 조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 일이 많았다. 방한하는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만나 인터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현지를 방문 해 인터뷰 한 맥주나 유럽, 중동 등 잘 알려진 나라도 많지만 피지, 지부티 부르키나파소, 베냉 등 이름조차 낯선 나라까지 100여 개국이 넘는다. 초청 형식으로 부부가 함께 가기도한다. 이럴 땐 영문학을 전공한 내의 내조덕을 톡톡히 보기도 한다. 정부 지원은 1원도 받은 적이 없다. 인터뷰 방향도 경협 등 국익우선에 바탕을 두고 국왕이나 총리. 대통령들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그 나라 소개에 역점을 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는가. 단점만 들추면 싸움이 나고 장점을 부각시키면 평화가 오게 마련이다. '장점 따라 삼만리'가 사훈 격이다.
2001년 12월 국제사회에서 줄곧 북한 편만 들어오던 알제리 부테플리카 대통령을 인터뷰하면서 "한국은 김정일과 친한 사람이 필요하니 대통령께서 남북한 간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알제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한국 기업들이 돕도록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외교는 윈윈이자 기브 앤 테이크"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2003년 아프리카 대통령의 방한도 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디플로머시’ 는 매호마다 각국의 대통령, 수상, 국왕, UN사무총장 등 세계 지도자와 저명인사가 표지 인물로 등장한다. 창간호 표지는 포드 대통령 가족사진. 커버스토리는 한천사, 역대 미국 대통령의 친필 서명, 역대 주는 미국 대사 특집으로 꾸몄다.
토니 블레어, 고르바초프, 장쩌민, 후진타오, 일본의 나카소네, 아키노, 인디라 간디, 바웬사, 만델라, 라빈, 마하티르, 아키노, 토인비, 발트하임, 2013년 12월 방한한 촘말리 사야손 라오스 대통령 등 500여명을 단독 인터뷰하며 찍은 사진들을 보며 오늘도 사는 보람을 느낀다.
*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정치인의 꿈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중학교부터는 고학을 해서라도 서울에서 다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을 굳힌 후 나는 시골의 고봉밥 대신 서울의 공기 밥 먹는 연습으로 식사량을 줄이기 시작해 소식주의자가 됐다. 목표대로 서울 철도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안 맞아 인천중학교로 전학했다. 6.25전쟁 통에 대건중학교로 옮겨 대건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휴전 후 서울 동성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한학자인 아버지가 열 두마지기 농사로 겨우 밥만 먹던 시절이라 동성고 2학년 때의 동아일보 신문배달과 고3 때부터 8년 동안 가정교사를 한 기억도 잊을 수 없다.
나는 3대 독자라 법적으로 병역면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정치인은 법만 지켜서는 안된다. 보통 국민보다 더높은 차원의 도덕성과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하겠다는 정신이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1956년 11월 육군에 자진 입대 하여 병역을 필했다.
정치인의 꿈을 키운 건 중학교 때. 대학 입학 후 각 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독서클럽'을 만들면서 부터였다. 軍을 무시하고는 큰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육사생도를 참여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대건중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15년 동안 맡아 한·미재단 장학금 등 많은 장학금을 유치하여 모교에 지원하도록 주선했다. 따지고 보면 긴 안목의 선거 전략이었다.
5공 시절 민정당 창당과 함께 논산 출마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내 딴엔 혁명정부가 만든 정당에 출마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때 한국국민당으로 논산 · 공주 지역구에 출마했다. 선거구가 77곳에서 92곳으로 늘고, 1개 지역구에서 2명을 뽑았다. 민정당 정석모 의원과 함께 당선됐다..
* 남북국회회담을 성사시키다
국회의원이 된 뒤로 나는 외무위서 남북양자회담을 촉구해 남북총리회담으로 결실을 맺었다. 1984년 제네바에서 세계국회의원연맹(IPU)총회에 참석 했을 때다. 나는 북한 대표들을 커피숍으로 초청해 환담하면서 북한 대표들에게 남북한국회회담을 제의했다.1985년 3월 25일 아프리카 토고국 수도 로메에서 북한 대표들을 다시 만날 때도 장기를 두면서 같은 제의를 했다. 이런 나의 설득이 주효했던지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국회회담이 열렸다.
* '반사모' (반기문 장관을 사랑하는 모임)를 주도하며
반기문 UN사무총장 탄생의 막후 역할을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일생 일대의 보람이었다. 한국에서 UN사무총장을 배출하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오랫동안 지켜 본 반기문은 애국심, 탁월한 외교력과 전문성, 예의와 겸손함을 지닌 인간미가 넘치는 등 적임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반 총장과의 인연은 사실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 · 인도친선협회 간사를, 반 총장은 인도대사관 사무관으로 있으며 업무관계로 만나 친숙
해졌다.
나는 2004년 초 반기문씨가 외무장관이 되자마자 UN사무총장에 출마할 것을 권유 했었다. 한마디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만들기'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런데 미국은 나토 사령부를 폴란드로 옮기기 위해 폴란드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유엔 사무총장이 아시아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반기문 총장을 은근히 견제했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해 이번은 아세아 차례인데 아시아에서 UN사무총장이 안 나오면 거부권 행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반 장관 방미 땐 라이스 국무장관과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당부했다.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폴란드 대통령으로 하여금 출마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각 나라 정상들과 주한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반사모(반기문 장관을 사랑하는 모임)'를 만들어 선거운동을 펼쳤다. 모임 때마다 '반사모'가 인사로 통했다. 언론사기고를 통해 '유엔사무총장은 꿈이 아니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장관직을 사퇴하고 출마하라는 여론이 일 때는 주요 언론사 주필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2005년 4월 인도정부 초청으로 인도를 방문했을 때는 만모한 씽수상을 만나 "반기문 장관이 인도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면 인도사위를 볼 정도다. 반기문장관이 유엔사무총장이 되면 인도 사람이 되는 것과 같으니 반사모 (반기문 사랑 모임) 멤버가 되어 반 장관을 UN사무총장이 되도록 적극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너무 좋아하면서 “반 장관을 적극 돕겠다!”고 확답했다 그 후 그는 UN에서사무차장으로 성장한 인도후보가 수상에게 도움을 수차 요청했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반기문 총장을 만장일치로 당선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나는 반장관이 세 차례의 예비투표에서 1등 한 것을 지켜 본 뒤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선거운동을 했다. 결과는 '반기문 만세!' 민간외교 40년의 큰 보람이었다.
*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영문월간지 "Diplomacy 창간 40주년 축하 메시지"
Diplomacy 는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 지도자들의 견해를 설명하고 전달하는 매체로서, Diplomacy 는 대화, 정책결정 그리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제가 40여년 전 임덕규 박사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한국 외무부 공무원으로 출발하였고 임박사는 Diplomacy를 창간했습니다. 냉전과 분열이라는 국제적 상황에서 임박사는 세계적 화합에 기여하고저 하였고, 그러한 숭고한 바램에서 Diplomacy 는 출간되었습니다.
그의 유능한 리더십으로 Diplomacy 는 외교관 뿐 아니라 광범위한 관계자들과 세계 활동가들의 연계망을 제공해 왔습니다. Diplomacy의 호소는 한국을 넘어 세계 모든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정책 수립가들의 가교역할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국제 공동체의 시련의 시기입니다. 무력충돌, 극단주의 확산, 불평등확대, 기후변화의 충격과 심화, 난민과 이민자들의 숫자들은 2차대전이래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또한 최대의 기회를 만든 때입니다. 즉 건강한 지구에서 평화와 번영으로 우리를 인도하는「지속 가능한 개발 2030 어젠더」를 UN에서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Diplomacy 가 월간지 발행과 활동을 통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역할을 계속 수행하리라고 확신합니다.
<대한언론인회 2015년 발행 ,실록언론인의 길ㅡ그때 그시절 못다한 이야기, 에서 )
<기사 정리 정운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