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곽(29)/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지정 번호; 사적 212호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상당산
•지정일; 1970년 10월 1일
•시대; 통일신라 초기, 조선 숙종 42년(1716) 개축
•분류; 성지[성곽]
•내용; 청주 상당산성은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의 해발 491m의 상당산(上黨山)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거대한 포곡식(包谷式; 계곡과 주변의 산세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는 방식) 석축 산성으로 백제 때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성의 북동쪽으로 인경산(仁景山; 해발 582m)・구녀산(九女山; 해발 484m)・좌구산(座龜山; 해발 675m) 등이 있고, 남쪽으로는 이에 이어진 산맥이 형성했다가 다시 융기하여 거질대산(居叱大山) 봉수・선도산(仙到山; 해발 546m)・선두산(先頭山; 해발 526m) 등이 연결되어 있다. 서쪽에 해당되는 청주시 명암동・율량동 및 청원군 북일면 국동리・주성리 등과는 250~310m의 표고차를 보여 험하고 가파르다. 하지만 산맥의 동쪽인 청원군 낭성면 갈산리・현암리・산성리 1구 등과는 거의 비슷한 표고인 낮은 언덕과 평지로 연결되어 있다. 상당산의 8부 능선에서 시작하여 성 안의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서쪽과 동쪽 등성이를 타고 사행하다가 남동의 수구(水口; 물이 흘러 나가는 구멍)를 향하여 꺾여서 합쳐져 있다. 이곳에 중요 시설인 운주헌(運籌軒)・관아사(官衙舍)・군기고(軍器庫)・동창(東倉)・서창(西倉)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민가 45호가 있다. 지정 면적은 18만 830㎡[약 5만 4,797평]에 이른다.
상당산성의 둘레는 4.2㎞, 높이는 3~4m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金庾信)의 셋째 아들 김삼광(金三光; ?~?)을 따라 구근(仇近; ?~?)이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淸州牧)을 상당현(上黨縣)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일부 고쳤으며, 《읍지(邑誌)》에 의하면 이 산성은 1716년(숙종 42) 옛 터를 근거로 개축에 착수하여 4년 만에 완공했으며, 남문 등의 성문・성벽에 당시의 공사 관계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 석축성으로 동서남북 4개문과 장대 및 연못이 있다. 남문 내에 구룡사 사적비(九龍寺 事蹟碑) 1기가 있으며, 1971년도에 남문의 홍예문과 성곽을 보수하였다. 남문의 문루는 1977년 복원되었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남아있지 않다. 성 밖의 산세가 가장 험하고 가파른 북벽은 자연 지세만으로도 바깥쪽이 험하여 방비에 큰 문제가 없는 곳이어서 문을 만들지 않았다. 북벽은 서・남・동벽보다 축성에 힘을 덜 기울였던 듯 성의 높이가 낮으며, 4개의 봉우리에 포루(鋪樓; 치성 위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 4개소를 두었다. 서쪽의 산세도 북쪽만큼 험하고 가파른데 성 높이가 네 벽 중 가장 높고 잘 다듬어져 있으며, 서문 바깥쪽에 외곡성(外曲城)과 용도(甬道)가 있고 서장대와 포루 3곳이 배치되어 있다. 동벽은 이 벽과 평행하는 산 능선이 800m 앞에 있어 그 방어에 문제가 되는데도 1개소의 암문과 동문 및 포루 3곳만이 있어 평범하다. 남벽은 가장 낮은 곳인 수구가 이곳에 있고, 정문인 공남문(控南門)에 옹성과 적대(敵臺;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가 없으며, 남문 부근의 성벽에 곡성이 없는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수문・장대・치성(雉城; 성벽으로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 3곳・포루 4곳, 남문 안에 용도 등을 마련하여 정문으로 육박해 오는 적의 예봉을 분쇄할 대비를 갖추었다. 동・서・남방 3개소에 성문을 두었는데 남문은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문루를 세웠다. 지금은 돌로 쌓은 부분만 남아 있으며, 성문의 높이는 3.5m, 너비는 4.2m이다. 동문과 서문도 역시 문루가 있었고, 성문은 무사석으로 네모지게 축조하였는데 높이 2.7m, 너비 2.8m이다. 동문과 남문 부근에 1개소씩의 암문(暗門)이 있으며, 동남방에 수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여기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다. 성 내에는 동장대와 서장대의 터가 남아 있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 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凸(철)’자형으로 된 치성이 남아있다. 성 둘레는 4,400m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그 안쪽은 흙과 모래로 쌓아올리는 내탁 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4.7m이다.
•감상 포인트; 성 안의 서문이나 산꼭대기 또는 서장대나 남서치(南西雉)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우암산(牛巖山; 해발 338m)으로 가려진 중심부를 제외한 청주시와 남・북부 및 미호천・증평 평야까지 바라보인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성 주변의 300~1,000m가 보이므로 동쪽에 있는 신라에 대비한 축성이 아니라 오히려 서쪽에 있는 백제에 대비한 축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야기; 상당산성에는 두 곳에 비밀 문이 있는데 이를 암문이라 한다. 동북 암문은 동북에서 북상하는 능선이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만나는 지점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 암문은 1720년(숙종 46)에 축조된 것으로 상당산성 1차 개축(1716~1719년)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다.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암문 내벽에 ‘康熙庚子五月(강희경자오월)’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명문에는 공사 책임자의 이름도 나타나는데 ‘梁德溥牌將閑良(양덕부 패장 한량)’이라는 명문이 바로 그것이다. 즉 패장으로 있던 양덕부(梁德溥)가 암문을 축조하는데 공사 책임자였던 것이다. 양덕부는 1728년(영조 4) 무신난(戊申亂; 이인좌의 난) 당시 청주읍성의 성문을 열어준 장본인이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 보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종2품) 이봉상(李鳳詳)이 관기인 월례(月禮)와 함께 있는데 믿는 신하 비장(裨將) 양덕부가 문을 열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주읍성을 지키던 이봉상은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이고, 남연(南聯)과 홍림(洪霖)은 그 휘하의 장수인데 무신의 난 때 싸우다 전사하였다. 양덕부는 상당산성의 암문을 쌓는 공이 있으면서 후에 청주읍성의 문을 반란군에게 열어주었으니 공보다 허물이 더 큰 것이다. 동북 암문 벽에 새겨진 양덕부의 이름은 누군가에 의해 반쯤 지워져 있는데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동북 암문은 서너 명이 허리를 숙이고 드나들 정도인데 안쪽으로 빗장 구멍을 내어 견고히 하는 한편 유사시에는 곧바로 폐쇄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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