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하나도 겨우 다닐 정도의 울퉁불퉁한 흙길에는 어디 하나 표지판도 없었다. 냇물로 끊긴 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더니
웬 강아지 한마리가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힐끔힐끔 돌아보며 앞장 서서 걷는 거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러다 나중에는 확신을 가지고 그 강아지를 따라가 보니 작은 초소가 있고 큰 그림 간판이 거기가 암각화가 있는 곳임을 알게 했다. 하도 신통해서 초소의 아저씨에게 물으니 그 강아지는 음식점 개인데 그렇게 길안내를 곧잘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일행 중에 반드시 여자가 껴 있어야 하고 남자끼리 오면 안해준단다.
정작 암각화는 물 속에 잠겨 있어 그 후 몇차례 갔지만 육안으로 본 적은 없었다.
온종일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는 그 외진 곳에서 매일 자리를 지키며 열정적으로 암각화에 대해 자신의 지식을 피력하던 해설사 아저씨가 있어 직접 암각화를 볼 수 없는 섭섭함을 떨치고 돌아오곤 했다. 난 그 아저씨가 울주군 관광과에서 나왔고 아저씨의 흰트럭은 부산 식당 앞에 늘 세워 놓는 다는 것, 아저씨의 아내가 아프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어떤 때는 아저씨를 위해 간식거리를 챙기기도 했다. 그리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제, 답답한데 반구대로 바람이나 쐬러가자는 남편의 말에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오르며 가슴이 뛰었다.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먼저 갔을 때 길을 닦는다더니, 이제 차량이 왕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져 앞에서 다른 차가 올까봐 가슴조릴 일은 없어졌다. 주차장도 생겼고 개울가 음식점 자리에는 고래 모양의 멋진 전시관이 들어 서 있다. 어린이 예절을 가르치는 서원이며 팜스테이 장소도 생겼고 부산 식당자리는 화장실로 바뀌었다. 그런데 하얀 트럭이 눈에 띄지 않는거다. 암각화로 가는 길엔 친절하게 표지판도 세워져 있고 근사한 나무 다리도 놓여져 있다. 어쩌면 제 역할이 끝났다싶어 그 강아지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나보다. 길은 포장이 되고 조경도 새로 해서 먼지도 날리지 않고 걷기도 아주 편해졌다. 울창한 대나무 숲과 밤꽃향이 어우러져 길가 벤치에 좀 쉬었다 가라고 유혹한다. 그렇게 500미터쯤 걸어가니 암각화가 있는 개울가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가물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물이 말라 붙을 줄이야. 놀랍게도 암각화가 그대로 드러나 망원경에 눈을 대니 표범이며 멧돼지 형상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계실 줄 알았던 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낯선 이가 데면데면 우리를 맞았다. 각도를 맞춰놨으니 망원경을 한번 보라는 말 한마디 던지더니 그냥 초소로 들어가 버린다. 우리가 이것 저것 동네 안부를 물으니 그제서야 이제 반구대는 울산시에서 관리를 하고 식당들은 보상을 많이 받고 동네를 떠났다는 거며 문화 해설사는 10개월 계약직인데 먼저 아저씨 소식은 알 수 없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돌아나오다 전시관에 들렀다. 먼저 김천에서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가 보고 실망한 터라 별 기대도 안했는데 반구대며 천전리 각석 그리고 세계의 암각화며 암채화 등 볼거리가 많아 기뻤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었다. 뭔가 기념될만한 걸 사고 싶어 기웃거리다 암각화에 알록달록 색을 입힌 귀여운 그림 한장을 샀다. 액자에 넣어 머리맡에 두고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왜 반구대를 좋아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난 아직도 그곳 토박이들의 사연들을 어제 들은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어부였던 여자는 둘째딸이었는데 부잣집으로 시집가 지금은 아버지가 배를 대던 그곳에 큰 음식점을 차리고 있다. 예전엔 산이 깊어 범죄자들이 숨어들곤 했다던데, 지금도 애들 학교까지 데려다주기가 힘들다 푸념하기도 한다. 그 집 언니는 정말 음식 솜씨가 형편없어 수제비가 어찌나 두껍던지 속까지 익지도 않았었다. 그곳의 붕어즙은 인근에서 잡은 걸 짠거라 진짜 약된다고 해서 사먹기도 했었다. 해가 저무는 골짜기를 정신놓고 바라보다 발을 헛딛어 발목 인대가 끊어지기도 했던 그 모든 일들이 하나도 잊혀지지 않고 고스란히 내게 남아 있다. 정말이지 그곳의 어떤 기운이 나와 교감을 이루었던 걸까.
어쨌거나 살다 힘빠질 때 삶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는 나만의 은밀한 장소를 갖고 있다는 게 좋다.
고래를 잡으러 떠나던 선사 시대 사람들의 펄떡이는 힘을 여전히 느낄 수 있는 그곳을 난 사랑한다.
첫댓글 음..그랬구나요..저도 언제 함 찾아가봐야겠어요. 암각화,선사시대,강아지..아저씨..오랜것들은 항상 정겹지요. 그리움이기도 하구요..^^
암각화, 강아지.. 잘 감상했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펄떡이는 힘을 느낄 수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