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부인하여 자신을 죽였다면 이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많은 분이 속 썩이는 자녀 문제, 믿지 않는 부모님을 자기 십자가로 받아들이는데, 그 정도가 십자가면 견딜 만한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로마 당시 십자가를 지라는 것으로 말 그대로 죽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순교자는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해 죽는 자라고 생각하는데 순교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산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나중에 교수형으로 순교하기 이전부터 바울은 이미 순교자로 살았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며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았습니다. 결국, 바울처럼 죽은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는 자들도 있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산 순교자로서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안이숙 사모님은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옥고를 치렀지만,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고 산 순교자로 사셨습니다. 성경의 다니엘,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산 순교자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지고 진짜 죽는 ‘죽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산 순교자, 십자가를 지고 진짜 죽는 죽은 순교자, 이렇게 두 부류가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를 치르는 사람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고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죽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순교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순교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A.D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325년에는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그때 각처에서 모인 목회자들이 약 30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눈이 뽑히거나 손이 잘리거나 두 다리가 잘려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동안 극심한 핍박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들에게 성찬을 집례하던 감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다가 온몸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의 흔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했던 사랑의 흔적입니다. 주님 앞에서 칭찬받을 영광스러운 흔적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을 사랑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산 순교자와 죽은 순교자가 될 뿐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을 포기하는 자가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말쟁이가 아니라 순교자가 가는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주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야망을 채우고 자신의 안위를 채우려고 하는 자는 마지막에 우수수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