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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자리:인
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인>은 예와 같은 단일 개념과 적어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예와는 달리 인은 <논어> 안에서 역설과 신비로 둘러싸여 있다. 인은 개별적인 것, 주관적인 것, 개성이나 감정, 태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인은 심리적인 개념인 것처럼 보인다. 나와 같이 <논어> 안에 피력되어 있는 사상이 (개별적 인간들의) 심리적인 개념들에 정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논어>의 본질적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을 이와 같이 (개인적, 심리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특히 예민한 문제가 된다. 서양학자들이 자연스럽게 심리학적인 맥락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본적인 주제들을 공자가 어떻게 비심리적인 방법으로 다룰 수 있었는가를 밝혀 내는 것은, 실로 인에 대한 최근 분석이 내놓은 주요한 성과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중국 문헌에서 심리적, 주관적인 의미로 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후대에 와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그런 의미로의 인이라는 개념 사용의 중요성은 첫째 불교적 입장에 서 있는 주석가들의 심각한 심리적 편견과 둘째 그리스적, 기독교적 입장에 선 서양 번역가들에 의해 확대 포장되었다. 인에 대한 공자 학설의 정말로 새로운 면모들은 바로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우리는 그 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주 새로운 것이요, 우리 (서양인)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서양식의) 심리 구조에 치우친-언어로는 파악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은 선, 인간애, 사랑, 자비, 덕, 인간다움, 최상의 인간성 등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다양한 주석가들에게 인은 미덕, 포괄적인 덕, 정신 상태, 마음 자세와 감정의 복합체, 신묘한 존재로 여겨졌다. 예 및 그 밖의 중요한 개념들과 인의 관계는 애매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이제 우리는 <논어>의 중요한 개념들을 사용하여 명백하고 확실하게 나타낼 수 있는 의미의 제시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 대한 우리들의 설명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감추는 것은 없다> 하신 공자의 말씀을 실체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인의 해석을 참신하게 발전시키는 일을 해야만 한다.
웨일리는 인을 <신묘한 존재>라고 했다. 이렇게 <논어> 원문은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역설적 모순이 있음에 틀림없다. 인은 그 자체 무거운 짐이라고 한다.
진정한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야만 한다. 그의 짐은 무겁고 길은 멀다. 인을 자기 짐으로 삼으니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그의 갈길은 끝나니 멀지 아니한가.
그런데 또 인은 <어려운 일을 제대로 하고 난 후에>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이런 어려운 일을 완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인이 그렇게 먼가? 내가 그것을 바라면 그것은 여기에 있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인이란 이상적인 삶에 핵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말로 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보다 먼저 고려할 아무것도 없다. (다르지만 비슷하게 강조된 번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정말로 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누구도 능가할 수 없다)
인한 사람의 눈에 띄는 독특한 특징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단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공자는 <이익과 운명과 인에 대해 드물게 얘기했다>고 할 뿐 아니라 인한 사람은 말하기를 신중히 한다고 여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언명들이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에서는) 누구도 공자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인하거나 인했던 실제 사람을 규정하는 공식은 발견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리가 최초의 <저술>, 가장 권위있는 공자의 어록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논어>의 각 편들을 보면 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이들 언명들은 몇 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뉜다.
2장에서 9장까지, 좀더 넓게는 2장에서 15장까지 나온 (인에 관한) 많은 언명들은 부정문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언명들은 여러 가지 칭찬할 만한 행동들을 반드시 인의 표지로 보아야 하지 않느냐는 제의들을 다 부정하고 있다.
인을 추구하려는 노력에 관한 일반적인 언명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일련의 구절들이 있다. 우리가 앞서 인용했듯이, 인은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서 고려해야 할 것이며, 군자는 잠시라도 인을 떠나서는 안 되며, 인은 사람이 어려운 일을 한 뒤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약한 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힘을 다 쓰려는 의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
인에 관한 또 다른 많은 언급들은 또한 상당히 일반적이긴 하지만 인을 실천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효과나 위대한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인하지 않은 사람은 곤경도 영달도 오래 버틸 수 없다. 인자는 인을 편안히 여긴다. 인의 힘은-약간은 모호하지만-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 표현되어 있다. 누가 자신을 극복하여 예를 따르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인에 호응하리라. 진정한 임금이 일어나면 한 세대 뒤에 인은 널리 퍼질 것이다. 이 두 문장의 경우 인의 힘은 다른 조건, 즉 임금다움 또는 예를 향한 순종과 명백하게 연관되어 있다.
오직 인한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줄도, 미워할 줄도 안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또 그 반대로 진실로 인에 뜻을 둔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구절도 있다. 후자의 경우(즉 인한 사람은 미워함의 감정을 지니고 있는가의 여부)에 대하여 원문이 모호해서 웨일리는 그 문장을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뜻으로 번역했다. 그렇게 핵심적인 문제에 관련된 구절에 반대되는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 개념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인에 대한 이들 모든 주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자의 <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검토했던 언명들은 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거의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숨긴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얘들아,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에게 슴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나는 하지 않는다>. (공자의) 이런 말씀들을 우리는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공자는 여기에서 다만 자기의 실제 행위둘에 대해서만 얘기할 뿐 비의적인 교의를 말하는 것은 반드시 아니라고 웨일리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곳(제3장)과 이 책의 다른 장들에서 제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듯이, 공자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비의적인 교리나 주관적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바로 공적인 제반 상황에서의 실제 행위이기 때문에, 그는 실제 행위의 맥락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적어도 일단 이런 복잡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군자는 <자기가 말한 것을 우선 실행한 뒤에 그 다음을 이어가는 것이다>
인 자체, 즉 그것이 적극적인 특성, 그 용어의 정의, 아니면 적어도 인한 사람의 몇몇 결정적인 특징에 관해서 우리가 공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몇몇 단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 단서 중 가장 명확한 것들은 십중팔구 공자 자신의 언급 중에서 후기에 속하는 것이요, 어느 경우에는 정말 공자의 말씀으로 보기에는 불확실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논어> 중에 후대에 작성된 부분에서 인한 사람의 특성으로 묘사된 좀 상투적인 몇몇 덕목들에 대해서는 가볍게 넘어가려고 한다. <공손한>, <부지런한>, <충성스러운>, <용감한>, <너그러운>, <친절한> 등등의 표현들은 우리에게 어떤 통찰이나 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전통적인 덕목들이다. 더우기 이들 후대의 언명들, 특히의 경우에 대한 진위 문제를 접어 둔다 해도, 앞에서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것처럼, 공자가 여러 번 그러한 덕을 소유하는 것이 인한 사람이 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위에서 열거된) 그런 덕목들은 결정적인 것이 못된다.
일련의 언명들 중에는 인의 특성을 매우 뚜렷하게 드러내 주지ㅁ, 매우 의심스러운 언명이 있는데, 그런 부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옹야>의 언명이라고 하겠다. 웨일리가 지적했듯이, <논어> 원문의 후반부는 도가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으며 아마도 혼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인한 사람은 인함에 만족하는 반면, 앎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인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또한 인한 사람은 조용하며 장수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인 자체의 특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규정해 주고 또한 (그것의 이해에) 가장 많은 도움이 되는 언명들에 주목해 보기로 보자.
자신이 입신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입신시키도록 하라. 나아가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나아가게 하라. 자기에게 가까운 것으로부터 유비를 얻는 것 (즉 이웃을 자신처럼 여기는 것) 여기에 인의 길이 있다.
자신을 극복하여 예에 귀의하는 사람은 인하다.
앞의 두 언명에서 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밀접히 연결된다. 첫번째 예문에서는 사람 사이의 일반적인 상호 신뢰에 구체적인 내용이 부여된다. 그것은 예에 의해 상세히 규정되는 구체적 사회 관계의 틀이다. 요컨대 예 속에 정의되어 있는 특정한 형식들을 통해서 상호간의 신뢰와 존중이 표현되는 곳에 인의 길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와 인은 같은 것의 양면인 것이다. 각각은 인간을 뚜렷하게 인간답게 만드는 역할에 이바지하는 인간 행위의 (각각) 한 측면을 지시하고 있다. 예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행위나 관계들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적 패턴에 주의를 돌리게 한는 것이며, 인은 그런 행위의 패턴을 추구함으로써 그러한 관계들을 유지하고 있는 그런 사람에게 주목을 하게 한다. 예는 불변하는 규범을 예증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신분에 맞는 특정한 행위를 지시하며, 인은 인간됨의 방향성을 분명히 나타내는, 즉 예의 규정대로 행위하겠다는 그 사람의 심지를 명백하게
표현하는 행위와 연관된다. 예는 한 행위자의 단일하고 개별적인 몸짓, 즉 그런 몸짓을 하는 오직 그 한 개인과 그런 특수 행위가 늘어나는 오직 그 하나의 앞뒤 맥락과 연관하여 그 사람 자신이 특정적, 개별적으로 하고 있는 몸짓과 연관되는 것이다.
(이런 공자 철학의 중요한 개념들이) 우리 (서양인)들에게 좀더 친근한 성양의 용어로 표현될 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 (서양인)들은, 내가 앞서 설명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은 바로 마음의 태도, 감정, 소망, 의지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식의 (번역) 용어들은 오해를 야기시킬 수 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용어를 (개개인의) 심리적 차원의 문제로 보는 일이다. (공자의 이런 핵심적 개념을 전혀 개인의 심리상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새로운 시각에서) 이런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첫번째 단계는 인 및 그와 관련된 다른 <덕목>들, 그리고 예라는 것 등은, <논어> 원문에서 <의지>, <감정>, <내심의 상태>라는 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일이다. 어느 한 사람과 연관된다는 <그런 이유 때문에> 인을 바로 그 사람의 내적 심리 또는 정신적 상태 또는 그 진행 과정을 지시하는 인으로 치환하는 것에 대비될 만한 것을 <논어>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확실히 그러한 연관 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나 또는 비체계적으로나 전혀 공들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위의 논지에 대해 유일하게 명백한 예외는 <자한>, 9:28과 그것이 반복된 <헌문>, 14:30에서 볼 수 있다. 두 구절에서 인한 사람은 우(불행한, 근심스러운, 걱정스러운)하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그 문장의 앞뒤 맥락은 이것이 (인에) 우연하게 부수되는 속성이 아니고 오히려 (인의) 특성을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명백히 내적이고 주관적인 언급때문에, 그리고 여기에서 인에 대한 핵심적인 어떤 의미가 다루어지고 있다고 시사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중요한 문장들과 우라는 용어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두 문장의 내부 구조는 평범한 음운상의 대구를 이루고 있다. 세가지 중심 미덕(지, 인, 용)이 언급되고 있고, 똑같은 문법적 구조 형식으로 가가의 덕목이 부정적인 단일 어구로 규정되어 있다. 지자는 당혹해 하지 않고, 용자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인자는 우하지 않는다, 거의 동어 반복적인 성격의 앞의 두 구절은 거의 같은 방법으로 <인한 사람은 우하지 않는다>를 받아들여야 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는 인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추정해 보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의 의미를 더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일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그것은 이 논의의 주제에 대한 더 깊은 이해-그리고 확증-을 제시해 줄 것이다.
우가 쓰여 있는 <논어>의 다른 문장을 보면 어떤 문장은 번역하는 사람마다 번역이 다르고 또 같은 번역자라도 문장마다 다르게 번역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레그는 <슬픔>으로 번역했는가 하면, 웨일리는 <걱정>으로, 레슬리는 불어의 <희한하다>와 <당혹함>으로 번역했다. 또 <술이>, 7:18에서는 <슬픔>으로, <비통>으로, <근심>으로, <고뇌>로 되었다. 그러한 유형은 게속 반복된다. 분명히 번역자들은 완전히 일치를 볼 수 없는 한문 용어에 대해 적절하고 특정한 유럽의 용어를 무엇으로 정할까 고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용레들 중에 공통 분모가 있는지를 보면, 모든 용례에서 우는 골치 아픈 상태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골치 아픔>이라는 말은 마음이 <불안정하고>, <평정하지 않으며>, <혼란스러운> 의미를 내포허며 따라서 <우선 먼저 불길하고 불쾌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함축된다. <슬픔>, <근심>, <비통>과 같은 번역들에는 사람 개개인의 주관적 심리 상태, 격정과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에 강조를 두는 것이다. 서양인에게는 이런 식으로 볼 때 의미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따라서 인한 사람이 대체로 우하지 않은 사람에 상응한다면 인은 우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이란 하나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심리적인 용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우가 사용되는 문맥을 따라, <논어>의 원문을 검토해 보면 우리는 다른 그림을 얻게 된다. <위정>,2:6에는 부모가 자식의 병에 대해서 우한다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불길한 걱정거리, 즉 일정 상황에서의 객관적인 불안감과 연관되어 특정지어진 부모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부모들의 (객괸적인) 걱정거리에 대한 대응은 걱정스러운 (객관적 사실적인) 대응인 것이다. 서양인들은 이런 대응의 <걱정거리>를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게 <내적인> 심리 상태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이 억지로라도 이 <논어>의 원문을 직접 보고 나서, 적어도 이 구절에는 심리적으로 내적인 도는 주관적인
어떠한 뜻을 풍기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이의 병은 (객관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요, 부모의 걱정이 담긴 대응 또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라고, 우리는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 텍스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무언으로 전제하고 있는 상념이 바로 부모의 걱정된 모습이야말로 걱정스런 '내심의' 상태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다.
<술이>, 7:3에서 공자는 사람으로서 미덕, 배움, 도의의 추구를 못하는 것, 그 점이 사람을 우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다시 우리는 인간의 대응 행위는 바로 객관적으로 무질서하고 혼돈된 상태에서 일어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무질서와 혼돈은 공자가 지적한 자기의 도와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틀린 행위(비행)인 것이다. <술이>, 7:18에서 공자는 자신은 배움을 추구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바라기 때문에 우를 잊고 노년이 오고 있는 것도 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노년이라는 좋지 않은, 그러나 아주 객관적인 불안이 우와 나란히 있는 것이다.
공자는 그의 여러 언명들에서 내적 심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했다는 식의 주장이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요 논지는 결코 아니다. 만약 공자가 (내적 심리와 관련된) 그러한 기본적인 비유를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만 반성을 통하여 그것을 거부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내심에 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 자리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장의 요점은 전혀 그러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서양인)들에게는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까지 매우 친근한, 그런 내면적, 심리적인 삶의 비유가 <논어>에는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내적, 심리적 삶이 부정당하다는 가는성마저도 <논어>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가 언급된 위의 구절들에는 (내심의 주관적인 상태와 연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그 구절들이 내면의 심리적인 문제)를 잘 다듬는 일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배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의미하려는 것은 그 구절들이 전혀 그런 뜻을 잘 다듬지도 않았으며 또 이해나 타당성을 돕는 면에서도 그럴 필요응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연>, 12:4에서 우리는 <논어>가운데 가장 <심리적>으로 쓰인 우의 용레를 보게 된다. 군자는 우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그가 <내심을 들여다 볼> 때, 그는 어떠한 <병>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심>을 본다는 이미지는-우리(서양인)들에게-<내적인 삶>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보려는 것이 결코 <주관적 (심리)상태>로가 아니라, <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우리는 반드시 주목해야만 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공자는 이것은 <도덕적인 병> 또는 <정신적인 병>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공자의 주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공자가 중국에서 자기 이전의 누구도 했던 적이 없는 방법으로, 인간 존재의 정신적, 도덕적 영역이 존재함을 알았고 그것을 가르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요점은 그가 이 정신적 영역을 조직적으로 개개인의 <내심>에 위치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서구인들은 (서양의 사유 구조에 본질적인) <내심>이라는 말과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거의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공자가 이 주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를 배우는 첫번째 중요한 행보는, 비록 그 말이 쓰이는 경우가 <논어>안에 혹 있다 하더라도, (서양적 의미의) 내심이란 부재하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에 주목하는 일이다. 논의의 전개를 앞질러 말하자면, 나는 여기에서 단지 정신적인 것이란 공자에게는 공적인 것, 즉 <외면적인 것>-그러나 그 정신적인 것이 신이나 혹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나 비인간적인 괴력들에서 구현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이라는 점을 언급해 두려고 한다.
<논어>원문을 보면 공자가 적어도 세 경우에 <내적인 것>에 대해서 모호하게 언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잘 다듬어진 용어들로 행위나 처신 그리고 행위의 규칙들에 대해 줄기차게 애기하고 있다. 좀더 말하자면, <내적인>, <사적인> 것에 대한 그의 언급들은 언제나 그곳을 병통의 근원, 즉 도덕 발전의 결여의 장소로 지적하는 경우이다. 도덕 발전을 적극적으로 규정짓는 성공이란 객괸적으로 처신하는, 말하자면 상호 신뢰와 존중을 예 안에서 특수하고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우를 나타낸 일련의 구절들에서, 형제(즉 가족)없는 사람은 우하고, 앞 일을 헤아리는 사람은 우하다고 한다. 객곤적인 불안감(형제 없음)과 잠재적 위험(미래의 일)이라는 주요한 두 가지 조건이 다 이 구절들에 있기 때문에 자연히 우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또 군자는 도에 대해서는 우하지만 가난 때문에 우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객관적 불안감과 불확실성의 관념이 이 구절들에 다시 적절하게 나타나 있다. 군자는 부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부에 대한 불확실성은 그의 처신에 있어서 아무런 곤란한 불안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거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에 도의 길은 쉽지 않다. 오직 성인만이 온전히 안정되고 자연스럽게 그 도를 걸어 갈 수 있다.
명백히 훨씬 뒤에 편집된 문장인 <계씨>,16:1에서는 우라는 말이 명백히 객관적으로 문제 많은 나라, 즉 군사적, 정치적인 면에서 골치 아픈 나라와 연관되는 문맥으로 쓰여졌다.
요약하면 우한 상태가 없는 것이 인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우의 상태란 객관적으로 미해결된 골치 아픈 상황, 즉 그로부터 나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고 명백하게 예견되는 그런 상황에 연루되어 그 속에서 대처하고 있는 그 사람의 (객관적인) 상황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가 없는 것은 객관적으로 해결을 보아 체게화된 상황과 잘 융합되는 그런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는 사람의 상태이다. 무엇이 이런 상태인가? 공자의 경우, 그것은 <예에 귀의한>(복례) 사람의 상태라고 우리는 분명히 기술해 왔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란 마땅히 예에 의해 순수하게 정말로 다스려지는 사회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예란 모든 사람의 행동을 조화시키고 그들의 복지를 인간답게 확립시키는 그러한 인간적인 행위의 구조물이기 때문에, 예 속에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은 완벽하게 짜여져서 인간 존재의 잠재성을 꽃피우는 데 전적으로 기여하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음은 자명한 것이다.
만약에 인이, 한 특정인이 행위자로서 걸어가야 할 방향성에 주목하도록 하는 그런 행위의 측면이라면, 예를 따르지 못하는 방향성이나 준비 태세가 그 행위자의 자세에 결여되어서 객관적으로 불안을 야기시키는 요소로 느껴 질 것은 자명한 일이며 이로 인해서 분열과 불안과 걱정이 있게 될 것이다. 요컨대 우는 참으로 인의 부재이고 인은 우의 부재이다.
우리는 이제 인이란 어렵지만 이 자리에서 소망되는 것이라는 역설을 논의해야 할 위치에 와 있으며, 그 역설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앞으로 인이 어ㄷ게 <내심의>자아와 연관된 심리적인 개념이 아닌지를 보여 줄 것이다.
사람은 인성의 다듬어지지 않은 원재료만을 가지고 태어남으로 인은 <먼저 어려운 일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아직 깎이고 닦이지 않은 원재료, 즉 성숙한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으나 아직은 조야한 충동들이나 잠재력에 불과한 것이다. 짜임새 있는 인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은 예가 계발되는 한에서만 계발된다. 인은 예 안에서 자기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사회 정치적인 관계와 문제들에 대해서 알게 되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들 문제에 대해 상당히 폭넓은 경험을 가질 때까지는, 요컨대 실제 정치에 참여해서 행정적인 일의 특정한 성격을 배울 때까지는, 그는 그의 군주에 대해서 심오하고 지적인 충성심을 가질 수 없다. 어린 아이의 단순 소박하고 미숙한 집착이나 의뢰심과 위대한 (경륜을 가진) 정치가의 깊고도 세련된 군주에 대한 충성심 사이의 간극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인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전자의 미숙한 단계로부터 후자의 성숙한 단계까지의) 틈새를 건너오는 동작이란 예를 배워서 달통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아무리 처음에 그것이 강렬했다 하더라도, 여러 번의 위기나 좋은 운수 그리고 틀에 박힌 일상 생활을 통한 수년간의 결혼 생활 뒤에 나타날 수 있는 상태와 비교해 보면, 내용면에서 상대적으로 무정형적이며 빈약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타인에 대한 각각의 개인적인 자세는 새로운 행위의 규범, 새로운 의무, 새로운 양보와 취득을 요구하는 일련의 상황을 겪지 않고서는 계발되고 심화되고 풍부해질 수 없다. 고통(고전적 의미에서)과 행위는 인간(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배울 때까지는 인은 실현될 수 없다. 인과 예는 동일한 존재의 다른 국면일 뿐이므로 그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성숙해질 수 없다.
인은 <어려운 일을 한 뒤에> 온다. 물론 예를 배우는 데는 시간과 노력,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인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안하지 않는 사람은 예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자신을 예에 귀의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인하다. 이렇게 인과 예는 상호적으로 작용한다. 인은 당장이라도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예 대한 대답은 좀더 복잡하며 또한 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는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몸짓, 즉 시간과 공간을 통한 일련의 동작들을 강조한다. 이러한 몸동작은 여러 단락들, 즉 일련의-각각의 단계가 그 다음 단계에 필수적인-그런 단계들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수행하는 방법(즉 일련의 단계들)이 있지만, 인은 그렇지 않다. 행위자의 관점에서 자기 몸짓을 보자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로 따로따로 분석될 수 있는 복잡한 행위 패턴이 아니라 <단순한> 몸짓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행위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자기 행위를 본다는 것은, 외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서 그 대신 오로지 내심의 신비스런 영역을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행위를
공개적으로 노출된 행위로만 규정하려는 범주들의 백락으로 규정지으려는 것이다. 이 경우 이것이 당장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사할 것을 결정하고 그렇게 한다.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예이다. 어떤 특정 맥락에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드러난 연속된 몸동작-즉 복잡한 일련의 손과 팔로 움직임, 규정된 인사말과 교환, 요컨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행위적 요소와 언어적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일련의 잘 조화된 행위들과 수행-을 보는 것이다. 그런나 누구에게 인사하기로 결정하는 일은, 또한 몇 단계의 정신적 행위로 반드시 나눠질 수 있는 <정신적>행위, 즉 또 다른 <내심의> 행위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내재적, 본질적인 길 또는 방법은 없다. 사람은 간단히 결정한다. 물론 결정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는 있다. 즉 우리의 숙고는 시간을 끌 수도 있다. 때에 따라 우리의 결정에 도움울 주기 위해 한두 가지 손쉬운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이런 것은 어떤 것도 결정을 내리는 데 본질적이지 못하다. 즉 이런 (마음 속의) 결정은 결코, 남의 손을 잡고 흔드는 행위가 그 인사행위에서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는 그런 식으로 결정을 내리는 데 구성적인 요소가 되지 못한다. 숙고가 이전과는 다른 (심리사의) 경로를 취했다고 해도 우리는 (인사라는) 똑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논지의 요점이다. 그러나 바로 똑같은 (일련의 행위의) 단계를 밟지 않고서는 똑같은 인사를 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일련의 행위의) 단계들이 실제의 인사 행위를 구성한다. 그러나 (인사하려는 마음의) 결정을 구성해 주는 (일련의 심적인) 단계들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시공적으로 어떤 단계도 없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결정 행위의 기적적이고 마술적인 성격의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공자가 의도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아니면 <결정하는 일>(<인하기로 결정하는 일>)을 어떤 심비한 내심의, 개인적인 <정신적>영역에서-아마도 그곳에는, 우리 서구인들이 특히 데카르트 이래로 자주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기계>, <구조틀> 또는 <대행자>가 있으리라고 상정되는 영역에서-발생하는 어떤 과정이나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마음의) 결정>과 <(실제의) 인사>라는 그런 행동들 사이의 이런 유형의 대조를 그 개념들이 수행하는 <논리적> 역할에서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이득을 보았다>라는 말이 그 사람이 실제 사고 파는 눈에 보이는 행동과 명백하게 구별되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행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존에게 인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말 또한 내적인 심리 영역의 신비적인 행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익을 본다>는 문장과 <결정을 한다>는 문장이 일련의 공간적이고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의 국면들을 지적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정하거나 이익을 만드는 그런 행위를 구성해 주는 일련의 <단계적>행위를 우리가 (이들 어구만으로는) 묘사하거나 결코 보여줄 수는 없다는 사실은 그 어떤 형이상학적 신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들 어휘는) <문법적>인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시에든 아니면 위에서 말한 일종의 언어 분석에 호소함에 의해서든, 우리가 서구의 전퉁적인 정신적 편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과 그와 관련된 개념들에 대한 공자의 의도를 보다 더 자유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현대의 철학적 분석을 그가 가르치거나 사용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처신에 대한 정신적 해석 또한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그가 배제했다거나 반대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가 정식화한 것은-정신적인 개념이나 모형에 대해서는 무언의 언급 또는 암시조차도 없는-공자 그에게만 특유한, 그 자신의
것이었다.
공자는 단지 참된 것만을 보았고 말했을 뿐이다. 인이란 예를 따르고자 하는 (일단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노련함을 객관적으로 쌓았다면) 사람의 결정 사항이기 때문에, 어떻게 인하게 되는지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단계적인 분석이 없다. 사람이 정말로 인하고자 한다면 인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오직 결정하는 하나의 길밖에 없으며 그 길이란 결심을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그 밖의 다른 개념들, 예를 들면 <생각함>, <느낌>, <마음 자세를 가짐> 또는 <욕구함>과 같은 (서양에서는 우리들이 심리적인 문제로 보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본다. 그러한 각각의 개념의 경우, 어떤 공개되어 분석될 만한 과정이 없다. 사람은 다만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거나, 생각하거나, 요구하거나 그러지 않거나 할 뿐인 것이다. 이들 모두는 그런 관점에서 인 개념과 논리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다. 자전거는 타는 <방법>이 있다. 즉 어떤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기대고 한다. 그리고 자전거가 구르는 동안 그러한 동작을 게속하는 것이 자전거를 타는 방법이다. 그러나 요구하거나 생각하는 데는 (특정한) <방법>이 없다. 특정 조치의 타당성을 논리에서 찾을 수 있거나 고귀한 동기에서 무엇인가 행위하게 하는 (특정) 방도는 없다. 최종적으로 분석을 한 다음에, 사람은 그렇게 하기도 하고 (또는 하지 않기도 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예를 따라 인답게) 행위하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자기를 계발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들여야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의미로는 결국 인하는 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길 즉 방법은 필요한 것이지만 충분한 수단은 아니다. 인은 <어려운 일을 한 뒤에> 온다. 즉 예에 의해 요구되는 행위의 솜씨를 몸에 익힌 뒤에 오는 것이다. 인간들이 상호 교제하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개명된 솜씨들을 모두 다 익숙하게 배우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비상한 능력보다는 인내를 요구한다. 그렇다고 인내하는 방법도, 인하는 방법도 (특정적 규정적으로)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배움을 계속하는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은 인내하는냐 인내하지 않느냐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예 안에서 자기 존엄성을 찾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똑같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행동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인한가 그렇지 못한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인되기는 쉽다. 단적으로 인하게 행동하라! 적절히 예식을 올리는 제반 솜씨를 터득하고 난 사람은, <마치 중요한 손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중요한 제사를 모시는 것처럼>, 요컨대 타인들도 자신과 근본적으로 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그들을 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는 (특정한) 다른 방법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지만, 인은 원하기만 하면 즉시 가까이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행위의 패턴은 공개되어 있다는 행위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때때로 피할 수 없는 장애가 있어서, 그것이 그 행위 패턴을 훼방함으로써 그 행위를 무산시켜 버릴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행위자의 타인에 대한 지향, 즉 그가 자기 행위에 부여하는 방향의 맥락에서 우리가 행위를 생각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일종의 무오류성, 즉 밖으로 드러난 행위의 최종 결과가 어떠하냐 하는 것과 뚜렷이 구분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피아니스트는 연주를 통해 어떤 화음을 표현하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외적인 장애란 (표현하려는) 의도함이 아니라, 그런 (표현) 행위의 성공만을 막는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위도함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의도하는 것뿐이다. 같은 논리로, 어떤 행위가 (객관적인) 장애 때문에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 어떤 행위에서도 타인에 대한 일종의 관심이나 배려를 볼 수 있다. 인은 관심이나 배려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인이라는 관심, 배려에는, <사람이 인하고자 하면>, 거기에는 어떤 장애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하면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예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인에 대해서는 꼭 들어맞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의 행위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다시금 신묘하고 경이로우며 역설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행위를 참되게 관심을 기울인 (또는 배려를 한) 행동으로 만들어 내는 (고정적으로 확정된) 방도는 없다.
이상의 언명들은 주로 인의 시각, 즉 개인적인 시각이 지닌 직접성과 무오류성의 측면을 끌어 내고, 또한 이런 측면을 탈신비화함으로써, 이런 개인적인 시각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친근한 것인가를 상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몇개의 언급을 통해 바로 개인적인 인의 측면이-개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만-<외적>인 또는 공적인 행위로서 갖는 자연스러움과 고유한 성질을 적절하게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공자가 다양한 공적인 시각에서 바로 공적인 이 속세의 문제를 검토했다는 사실을 재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공자는 행위의 모범 사례인 예식의 사회적인 역사, 즉 전통적으로서의 예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역할, 즉 예에 의해 규정된 역할들을 수행하는 행위-<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 등등-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그는 사람들이 주위의 타인들을 향한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개인적인 행위-인, 상호 존중, 충성, 믿음-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그러면 공자는 개인적인 행위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는가?
예를 따르는 행동은 단순한 기계적 작동, 즉 공식에 매인 행동 수행이 아니다. 예에 따르는 행위는 많건 적건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행위 수행에 융합성이 있는 미묘하고 이지적인 행위이다. 여기서 공자가 애호하던 음악을 모델로 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민감하고 지적인 음악의 연주를, 지루하고 바보같은 음악 연주에서 우리는 신뢰와 융합성 또는 아마도 주저, 갈등, <거짓>, <감상적 작풍>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연주라는 그 현장 안에서 이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따로 연주자의 심리 상태나 인물됨을 조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느끼는) 그것은 <거기에> 공개적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연주라는 장 안에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그 연주를 베토벤 3번으로도 (즉 작곡자의 관점으로), <공개 음악회>로도 (예의 관점으로), 또는 <후기 모차르트 작품>으로도 (스타일의 관점에서) 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 연주를 일차적으로 이 특정한 사람의 연주로 (그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이 사람이 어떻게 행위를 하는가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이 주위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을 그와 함께 예에 참여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타인들을 자신과 같은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대해 주었는지가 밝혀진다면, 그 행위는 인으로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행위 패턴이 어쩔 수 없이 엉망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마이 피아니스트가 연주에서 나타내려고 했지만 결국은 나타내지 못한 화음을 들을 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행위가 시도했던 방향, 목표, 즉 그 행위 중에 나타낸 관심이나 배려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행한 그의 행위를 봄으로써 이러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인지, 결코 그 사람의 두뇌나 내심의 정신 영역을 탐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음악 연주에서 거짓을 감지할 수 있듯이, 우리는 겉으로 예처럼 보이는 행동이지만 사실은 보다 복잡하면서도 위선적인 행위의 요소가 있는 경우에 그런 거짓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 거짓은 예에 의해 규제받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을 희생시킴으로써 행위자 자신의 중요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심적인 의도와 태도라는 주관성을 띤 언어와, (그것에 대한) 논리적, 언어적 분석을 모두 배제하고, 인을 이해하는 공자 자신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인을 보는 공자의 방식을 분명하고 진실되게 반영하는 이미지는 행위자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미지는 그 사람의 <내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하는 행위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인한 힘을 외부에 드러낸 행위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인이 지향하는, 즉 인한 힘이 지닌 목표의 성격은 (인하려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실제 도달한 과정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구분점이 (인이라는) 말과 이미지에 의해 강조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일 뿐, 실제로 이 두 분명한 사건들 (인하려는 의도와 실제로 하는 인한 행위)을 분리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행위 또한 어떤 의도의 맥락에서 해석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힘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힘이어야 한다. 즉 (진정한 인간일 때 갖게 되는) 인간 존재의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인간 존재들을 향해 있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공자가 쓴 한문에는 고유성, 성질, 정의, 본질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은 한 개인과 자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요, 그 개인이 소유해야 할 것으로 제시되엇다고 하겠다.
가장 도움이 되는 서양적 이미지는 물리학에서 빌려 온 벡터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인의 경우 우리는 공개된 시간과 공간에서-시초의 원인점에 또 다른 사람이 서 있고, 그 힘이 가해지는 끝지점에 한 사람이 잇다고 가정하고-실제 행위를 일으키고 있는 방향성 있는 힘(즉 벡터 역량)의 작용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 힘들은 물론 인간의 힘이며 기계적인 힘이 아니다.
공자가 강조한 덕목들은 모두 정말로 <역동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이다. 예를 들면서 (인간 관계에서의 상호 존중), 충(충성), 신(타인에 대한 믿음)과 같은 것들은 원래부터 타인들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한편 순수성이나 결백과 같은 <정직이고>, <내적인> 덕목들은 <논어>에서 별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우리는 예를 밖으로 드러난 도라는 이미지의 맥락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인의 이미지는 행위자의 자세, 즉 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나 일정 공간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가 예식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관찰할 때, 그 힘이 우리를 향해 <발산된다>고 음미할 수 있다. <임금이 남쪽을 향해 예식에 맞게끔 앉아 있으면 모든 일이 (적절히)되어 갔다> 예식에 정해진 바로 그 역할을 정말로 참되게 해낸다고 느껴지는 그 사람이 예식을 올릴 때, 예식의 몸짓(혹은 마치 최면술사와 같은 그 몸짓)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마술적 힘을 음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에 대하여 느껴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리고 인은 갈라져 있는 백터들-완전한 충성심과 신의, 인간 존엄에 대한 완전한 존중 등등-의 완전하게 집중된 힘이다. 이들 각각은 그 나체로 볼 때, 내심의 상태가 아니라 본래적 의미의 덕-(각각의 덕을 발산하는) 그 사람으로부터 발산되는 힘, 즉 인간다은 힘을 들여서 마침지 그 일을 해냈을 때, 일찍이 안연이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홀연히 내 앞에 우뚝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마침내 인이 발산하는 힘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이끌어 낼 일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란 예 안에 자기 자리를 잡음으로써 인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할 수 있다. 인하게 될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그렇게 하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결정의 순간에 인간의 힘에 대한 믿음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사람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물리적인 힘과 동물적 힘에 의지하여 살아 왔다. 그러나 인은 바로 인간적인 방식에 대한 완전한 자기 헌신이다. 그리고 그 벼랑 끝까지 걸음을 계속해 가는 것이다.
두려움과 전율 속에서
신중과 걱정 속에서
마치 깊은 연못가에 있듯이
마치 얇은 살얼음을 밟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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