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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문화연구회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
김중청(金中淸:1566.12.20.-1629.6.13)선생은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는 이화(李和)이며 호는 구전(苟全)으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후손으로 부친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몽호(金夢虎)이다.
모친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형님인박 승인(朴承仁)의 딸이다.
공은 봉화현 만퇴리(晩退里)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 조부 되시는 진사공 김정헌 (金廷憲)께서 기특하게 여기시며
“우리 문호를 부지(扶持)할 자는 틀림없이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8 살이 되자 부친이 소고선생의 문하에 보내어 글을 배우게 하면서 회초리로 엄히 다스렸다.
이는 본인이 젊어서 학문을 게을리 하다가 장성한 뒤에 뉘우치게 된 것에 연유한다.
엄격함에는 모친도 뒤지지 않았다. 한번은 월천선생이 글을 짓도록 하고 문방 여러 기구를 상으로 내렸는데,
선생이 그것을 받고 돌아와 대문에 들어서면서 기뻐하는 빛을 보이자 모부인이 정색을 하며 회초리로 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네가 큰상을 받을 만 하다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이것을 가지고 좋아하니 어찌 그릇이 그리도 작은가?” 하였다고 한다.
공은 어렸지만 그러한 어버이의 마음을 잘 체득하여 독실하게 공부하였으므로 학문이 날로 진취하자
소고선생이 기특히 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재주가 있으면서 기국(器局:재능과 도량)이 잡혔으니 큰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12살 때 월천조목선생이 봉화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부친의 주선으로 월천선생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 대학을 가르쳐 주므로 글의 뜻을 강독하기를 마치고 “군자의 크고 작은 사업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니
월천선생(月川先生)이 칭찬하면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실지에 소용되는 학문으로 다른 책과 다르니 다시 더 여러 번 읽도록 하라.“ 하니 그 뜻을 알아차렸다.
월천선생(月川先生)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책상자를 짊어지고 따라가서 유학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틈틈이 소고 문하를 왕래하며 경전과 제자諸子와 사기史記를 통하여 공부하며 정미한 뜻을 탐색하였다.
그러면서도 주역(周易)을 깊이 공부하였다.
27세 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종개(柳宗介)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삼척을 통하여 침입한 일본군을
대항할 계책을 세웠다.
어느 날 공이 말미를 얻어 어버이를 뵈러간 사이에 류종개 대장이 느닷없이 왜적의 침입을 받아 싸우다가 전사하자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므로 공이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설득하여 불러 모으고,
다시 임흘(任屹)을 주장으로 삼아 군무를 다스려 나갔다.
비록 힘이 적어 큰 공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근면함에 감복하는 이가 많았다.
1610년(광해2 년,45 세)에 식년문과 갑과 제 2인자로 합격하여
한성부 참군(參軍)에 임명되고 사헌부 감찰,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예조정랑 겸 지제교(知製敎)로 승진하였다.
광해 6 년(1614년)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출국 시 주위의 선비들로부터 받은 68명의 시장(詩章)인 부경별장(赴京別章)이 오늘날까지
국학진흥원(國學振興院)기탁 보관 되어 전해지고 있으며,환국(還國)시에는 공자영정을 받아와 영정각을 지어 보존하였다.
1615년 사간원정언, 신안(성주)현감으로 나갔다.
1619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정삼품)에 승진하고 어버이를 뵈옵고 장수를 비는 주연을 베풀었다.
2년 뒤 봄에 계장동(桂場洞)에 구미당(九未堂)이란 초당(草堂)을 세웠는데,
이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에 차운한 것으로 (九未)란 자미차(慈未且) 자애로움을 갖추지 못하고,
배미전(配未全) 배우자도 온전하게 못했으며(사별후 재혼), 교미박(交未博) 교유도 넓지 못하고,
서미독(書未讀) 책도 읽지 못했으며, 학미취(學未就) 학문도 성취하지 못하고, 도미수(道未修) 도도 수양하지 못했으며,
거미정(居未定) 거처도 안정되지 못하고,사미신(仕未信) 벼슬도 신임을 받지 못했으며,방미지(謗未止)비난도 그치지 않았다.
는 뜻이다.
1622년 승정원 승지로서 선유사(宣諭使)로 차출되어 영남지방을 안찰하였고,
인조반정 후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가 가을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듬해 2월(1624년)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반역을 하자 임금이 공주로 피난을 하였는데,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본 고장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행재소를 향하여 달려갔는데,
미처 이르지 못하고 이괄이 잡혀 목이 베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후 산직(散職)에 머물러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625년(인조3 년)4. 28 에 부친상을 당하여 공의 연세가 60이 되었지만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곡을 하며 상복이며
장례와 제사를 한결 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 대로 하였다.
1629년(인조7년).6.13 선생이 64세 되던 해에 내성리 우사(寓舍:임시 기거하는 집)에서 졸하였다.
봉성 반천서원(盤泉書院:멸실)에 배향되었으며, 구전문집(苟全文集)이 전한다.
구미당(九未堂)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여포마을에 소재하는 정자이며,
이정자는 구전(句全)김중청(金中淸)선생이 56세때인
1621년(광해군13)구미당을 건립 후학들의 강학지소로 하였던 건물로서, 비지정 문화재이다.
구미당(九未堂)의 당호가 된 구미(九未)의 뜻은 아홉가지를 못했다는 것으로
①자미구(慈未具) : 자애로움을 갖추지 못하고
②배미전(配未全) : 배우자도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으며
③교미박(交未博) : 교우의 사귐도 넓지 못하고
④서미독(書未讀) : 책도 많이 읽지 못했으며
⑤학미취(學未就) : 학문도 성취하지 못하고
⑥도미수(道未修) : 도(道)도 수양하지 못했으며
⑦거미정(居未定) : 거처도 안정되지 못하고
⑧사미신(使未信) : 벼슬도 신임 받지 못했으며
⑨방미지(謗未止) : 비난도 그치지 않았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김중청(金中淸)의 본관은 안동,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구전(苟全)이다.
1566년(명종21년) 12월 20일 봉화현(奉化縣)만퇴리(晩退里)에서 태어났는데,
안동김씨 태사공 김선평(金宣平)의 후예이며, 보백당 김계행의 현손으로 조부는 김정헌(金廷憲)이고,
부(父)는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김몽호(金夢虎)이며,
모(母)는 반남박씨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형인 박승인(朴承仁)의 딸인데, 장남으로 출생했다.
1577년(선조10)12세때에 월천조목(月川趙穆)선생이 봉화현감으로 부임하자
현아에 나아가 글배우기를 청하고 당일 대학(大學)한부를 모두 외웠다.
선생은 두차례 장가를 들었는데
17세때 장가든 전부인(前夫人)은 장수황씨 사과(司果) 황하(黃賀)의 딸이며 ,
26세때 전부인이 졸(卒)한후 28세때 장가든 후부인( 後夫人)은 영천이씨로 봉사(奉事)이영승(李永承)의 딸이다.
1592년(선조25) 선생나이 27세때 의병장 유종개(柳宗介, 1558~1592)와 같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태백산을 근거로 하여 600여 의병의 참모장을 지냈으며,
의병장 유종개가 소천면 화장산 노루재에서 함경도에서 태백산맥을 따라 피난하던 왜장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군대를 만나
전투를 벌이다 유종개,김인상,윤흠신,윤흠도 등 600여명이 전멸 하였으나,
선생은 말미를 얻어 어버이를 뵈러가서 화를 면하였다.
월천 선생을 모시고 1597년에는 영지산을,1601년에는 청량사를 유람하였다.
1606년인 41세때 반은상동(槃隱上洞) 에 나아가 서재(書齋)를 지었고,
1607년에는 안동부사로 와 있던 한강 정구(鄭逑)를 찾아가심경(心經)을 배웠다.
1608년 봉화현감 임혁(任奕)의 사람됨이 못마땅하다며 이를 피하여
예안현 남양리로 옮겨 살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를 초려(草廬)라고 하였다가 구전거사(苟全居士)로 고쳤다.
1609년(광해군1)에 동당시(東堂試)에 장원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명경과)에 2명(名)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 정7품) 에 임명되었다.
1613년(광해군 5)성균관전적·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천추사 겸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조선시대 부경사행(赴京使行)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던 임시 벼슬,
정사, 부사와 더불어 삼사신중의 한명)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광해군 7)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으며,
사간원정언으로 폐모론에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고 물러났다가,
1616년(광해군 8) 신안현감에 이어 1621년(광해군 13) 승정원승지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후 산직(散職:권력이나 직무의 중요성과 거리가 있는 관직)에 머물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9년(인조7) 6월13일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역학(易學)에 밝았다.
저서로는 『구전집(苟全集)』 8권 4책이 있으며,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갈 때 김상헌(金尙憲)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지은 시문을 모아 놓은 『부경별장(赴京別章)』을
2004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영인,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묘소는 봉화현 남면리 태자산(太子山: 현 안동 도산면 태자리)오향(午向)의 언덕에 있다.
※명나라에 갈 때 문신들의 환송편지의 모음인 부경별장과 환국할 때받아온 공자의 영정(先聖影幀)을 받아 모심으로
구미당(九未堂)을 일명 영정각이라 고도 함.
<苟全集>은 김중청의 시문집 목자활자본(8권4책)으로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되어있는데
내용은 이광정(李光庭)이 서문을 쓰고 김정균이 발문을 썼다
1권은 사(辭), 부(賦) 시(詩)가있고 2권과 3권은 시(詩)가 있다 .
4권은 교서(敎書) 소(疏), 계사, 서장, 책(策),서(書)가있다.
임진의병시의상소(壬辰義兵時疑上疏)는 김중청이 27세의 나이로 유종개의 의병에 참모장으로 종사하면서 치른 전쟁의
상황과 민고에 대해 진언하고 있다
진임거만록사전말소(陳林居만록사전말소)는 허균이 사적으로 중국에 바쳤다는 임거만록의 일에 대해 진술한 글이다.
괄변시경상도변무소(括變時慶尙道卞誣訴)는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의병을 일으켜 호종하지 못한
경상도 사람의 입장을 변명한 글이다. 김중청은 이때 향리 인 예안현(禮安縣)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봉화진폐소(奉化陳弊疎)는 현감 유진(柳袗)을 대신해서 지은 글이다.
임진왜란 이후 봉화현민들이 70%나 유망하고,
전결수도 40%밖에 남아있지 않으므로 조세감면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서(書)에는 스승인 조목(趙穆)되어 정구(鄭逑) 및 교우인 정경세(鄭經世) 등에게 보낸 글이 포함되어 있다.
5권은 잡저, 서, 기, 발, 잠명이 있다 제 임진년창의병총록(題壬辰年倡義兵總錄)은 의병의 활약상을 모은 책에 대한 제문이다.
6권은 전(箋), 제문, 축문, 묘갈명, 행장이 있다.
행장은 그의 초학때 스승 박승임(朴承任)의 것이다.
7권과 8권은 부록으로 연보, 행장, 묘갈명, 만사, 제문,연행증유(燕行贈遺)가있다
8권은 조천록(朝天錄)으로 1614년 4월 21일부터 1615년 정월11까지
명나라 천추겸사은사(千秋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다녀와 적은 일록(日錄)이다.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중청(金中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현종10) 반천동에 묘우(廟宇)인 존덕사(尊德祠), 강당인 구래당(九來堂), 신문(神門), 주소(廚所)가 있는
정사(精舍)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에 제사를 모시다가 1831년(순조31)에 반천서원(盤泉書院)으로 승격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가,
2007년9월20일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솔안 마을에 송천서원(松川書院),백록리사(栢麓里社)등 3개 서원을 한곳에 통합 복원한
송록서원(松麓書院)이 창건되어 구전 김중청 선생을 포함한 10현(賢)을 봉향<奉享:공이 있거나 덕이 있는 사람을 받들어
배향(配享:학덕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문묘(文廟)나 서원(書院) 등에 모심>하였다.
송록서원(松麓書院)에 봉향(奉享) 된 10현(賢)은
1>문목공 진일재 류숭조(文穆公 眞一齋 柳崇祖)
2>용재 이종준(慵齋 李宗準)
3>눌재 이홍준(訥齋 李弘準)
4>문봉 정유일(文峯 鄭惟一)
5>구전 김중청(苟全 金中淸)
6>매헌 홍준형(梅軒 洪俊亨)
7>팔오헌 김성구(八吾軒 金聲久)
8>하당 권두인(荷塘 權斗寅)
9>창설재 권두경(蒼雪齋 權斗經)
10>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이다.
공자(孔子)를 모시는 마을, 대성동천(大成洞天)
명호면 풍호리 여깨 마을 바위에 석각(石刻)되어 있는 「大成洞天(대성동천)」 글씨 @ 배 용 호 - 前 봉화고 교장
「大成洞天(대성동천)」은
흔히 여포(餘浦)라고 쓰기도 하는 명호면 풍호리 여깨 마을 수구에 해당하는 바위에 석각(石刻)되어 있는 글씨이다.
여깨로 들어가는 조그마한 다리[橋] 남쪽에서 힘겹게 밭둑을 떠받치는 바위이다.
이 바위 상단에 가로글씨 행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大成洞天」 각자는 두 자씩 짝을 지어 글자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大成」이 조금 더 크고, 「洞天」은 조금 작은 글씨 모양새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사는 마을을 이른다.
글자의 뜻으로 비견한다면 신선의 마을이라는
「洞天」이라는 글씨가 오히려 더 크게 보여야 할 터이지만, 실재로는 「大成」이라는 글자가 더 크게 쓰여 있다.
「大成」은 공자(孔子)를 이르는 말이다. 공자의 다른 호칭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약칭인 것이다.
이 마을이「大成」이라는 글자를 더 크게 새겼다는 것은 공자를 신선보다 더 위대하게 섬긴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풍락산 꼬두메 오지마을에 생뚱맞게 웬 공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구미당(九未堂)의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1567~1629)이
1614(광해군6)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면서 환국(還國)할 때 받아온 선물이
‘선성영정(先聖影幀)’이었다.
성인(聖人)의 영정이란 뜻인데, 여기서 성인은 ‘대성지성문선왕’ 즉 공자를 지칭한다.
공자가 좌정하고 설교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영정이다.
김중청은 이 마을에 구미당을 짓고 자신이 모셔온 소중한 선성영정을 이곳에 공손히 안치시켰다.
그래서 여깨마을은 공자의 상(像)을 모시는 우뚝한 마을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자를 모시는 마을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를 담아 마을 입구에 ‘대성동천(大成洞天)’이라는 각자를 새겨 스스로를 동천마을 반열에 올렸으며,
특히 공자를 신선, 그 이상으로 추대하는 마을이 된 것이다.
구미당(九未堂)이라는 고택은 마을 중심부에 있는데, 김중청이 1621(광해군 13)년 건립하여 후학들을 강학하였다.
경내에는 공자의 영정을 모시는 영정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편액 역시 「선성영정각(先聖影幀閣)」이라고 걸려 있어 이곳 사람들은‘구미당’전체를 아예‘영정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미(九未)는 아홉 가지 행위가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으로,
자미구(慈未具)- 자애로움을 갖추지 못하고,
배미전(配未全)- 배우자에게도 온전치 못했으며,
교미박(交未博)- 교우도 넓지 못하고,
서미독(書未讀)- 책도 많이 읽지 못했으며,
학미취(學未就)- 학문도 성취하지 못하고,
도미수(道未修)- 도(道)도 수양하지 못했으며,
거미정(居未定)- 거처도 안정되지 못하고,
사미신(仕未信)- 벼슬도 신임을 받지 못했고,
방미지(謗未止)- 비난도 그치지 않았다는 그것이며,
이는 자신의 끝없는 겸손을 나타낸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고장 명문가를 찾아서=안동김씨(安東金氏)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고려말(高麗末)에서 이조중엽(李朝中葉)까지 이조중엽(李朝中葉)부터 끝까지
상신(上臣) 19명
대제학(大提學) 6명
왕비(王妃) 3명을 본군(本郡)에 시거(時居)하면서는
문과급제(文科及第) 6명
무과급제(武科及第) 5명
사마(司馬) 18명
수직(守直) 20명
음사일천(蔭仕逸薦) 85명
유행(儒行)은 김도항(金至恒)외 다수분이고
효순(孝順)에는 김영택의 딸, 김병여 딸, 김하균의딸, 김석규의 딸이 있으며
충의열사(忠義烈士)로는 김인상(金麟祥), 김중청(金中淸),김경호(金景虎)등을 배출(輩出)한 세도(勢道)가의 거성(巨星)이다.
김중청(金中淸)1565년~1629년 자(字)는 이화(而和)이며 호(號)는 구전(苟全)으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후손(後孫)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 김극례(金克禮)의 현손(玄孫)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과 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소천(小川) 노루골에서 큰 공을 세웠다.
1610년 광해(光海) 2년에 식년문과급제(式年文科及第)하여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에 임명(任命)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정랑겸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로 승진(昇進)하였다.
1614년에는 천추겸사은사(千秋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 광해(光海) 7년에는 시강원(侍講院)이 문학(文學),
통훈대부겸필선(通勳大夫兼弼善)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이원익(李元翼)을 논죄(論罪)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付託)을 단호(斷乎)히 거절(拒絶)하고
물러났다가 고령현감(高靈縣監), 신안현감(新案縣監)으로 나왔다.
1619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昇進)하고
2 년뒤 계장동(桂場洞)에 구미당(九未堂)을 세웠는데
1622년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지방(嶺南地方)을 안찰(按擦)하였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後) 기제교(知製敎)에 임명(任命)되었다가 이괄의 난(李适의 亂) 때
영남의병(嶺南義兵)을 일으켰는데 본향(本鄕)의 대장(大將)으로 추대(推戴)되었다.
그 후에 산직(散職)에 머물러 조정(朝廷)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봉성 반천서원(鳳城 盤泉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공(公)의 저서(著書)로는 구전문집(苟全文集)과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올 때
조정(朝廷)에 함께있던 여러 명현(名賢)들이 친필(親筆)로 쓴 부경별장(赴京別章)이 있으며
환국(還國)시에 공자영정(孔子影幀)을 받아와 영정각을 설치(設置)하였는데 현재(現在)명호풍호(明湖豊湖) 종택(宗宅)에 있다.
김인상(金麟祥) 자(字)는 시백(時白)이고 젊어서부터 특별(特別)한 기질(氣質)이 있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글앍기를 좋아하고
노부(老父)를 정성(精誠)으로 봉양(奉養)했다.
왜란(倭亂)이 일어나 나라가 유린(蹂躪)당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유종개(柳宗介)와 의논(議論)한 뒤 유공(遺功)과
소천(小川) 노루골에서 적을 막고 공은 춘양(春陽)으로 들어가 적의 길을 차단(遮斷)하여 싸워서는 반드시 이기더니 마침내
적의(敵意) 대부대(大部隊)가 몰려오자 의병(義兵)들이 지탱(支撑)할 길이 없었다.
공은 죽기를 각오(覺寤)하고 달려가 수십급을 배었으나 결국(結局) 잡히었다.
적은 불로 몸을 지지고 낯가죽을 벗겼으나 큰 소리로 꾸짖다가 순국(巡國)하였다.
조정(朝政)에서 이 사실(査實)을 알고 정려(精勵)하였다. 삼강행실록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김주우(金柱宇)1598년~1644년 자(字)는 만고(萬古)이며 호(號)는 역면재(易眠齋)로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셋째아들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여 15세에 진사(進士)하고
1624년 인조(仁祖) 2년에 정시문과급제(廷試文科及第:장원(壯元)하여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서
경성판관(鏡城判官) 장기현감(長鬐縣監)과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지낸 곳에 거사비가 있다.
울진현감(蔚珍縣監)으로 재직중(在職中) 별세(別世)하였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문장(文章)과 글씨가 뛰어났다.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의 현판(懸板)이 공(公)의 글씨다.
김주영(金柱英) 1599년 ~ 1661년 자(字)는 여즙(汝楫)이며,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 후손(後孫)으로 증(贈)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하였다.
현대인물(現代人物)로는 국영기업체에 김재진(金在鎭),
법조계(法曹界)김순한(金淳漢),김준한(金准漢),김호영(金鎬榮),
행정고시(行政考試)김두현(金斗顯),김명훈(金明薰)
교육계(敎育界)김광동(金光東)
학계(學界) 김경현(金景顯)),김무현(金茂顯),김승현(金承顯),김인동(金仁東),김주한(金主漢),김준동(金峻東),김형동(金衡東)
의약계(醫藥界) 김장현(金章顯),김주현(金周顯),김준동(金峻東),김진동(金振東),김철한(金澈漢),등이있다.
출처 : 봉화일보(http://www.bonghw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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