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현직 국정원 직원이자 교수로서 해외정보 분야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전에는 오랜 동안 해외정보요원으로 활동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북한 보위부 요원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북한 사람들과 ‘친분’을 나눈 경험이 있습니다. 덕분에 ‘책으로 공부한 것’과는 다른 북한의 현실을 직시할 기회를 가졌고, 그 결과 이미 10여년전부터 북한체제가 심각한 붕괴위기에 직면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제가 만났던 대부분의 북한사람들은 북한의 붕괴를 시간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정도로 심각한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 당시부터 북한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과 그에 따른 한반도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특히 그때는 우리나라도 IMF 위기를 겪던 터라 자칫하면 안보의 IMF도 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우리 정부가 ‘햇볕정책의 성과로 조만간 북한이 개혁개방을 할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도, 저는 북한의 군사동향과 특히 김정일 개인의 움직임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끊임없이 추적해 왔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안보상황은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기에는 너무도 위급하게 전개되고 있기에 감히 우리 국민들에게 국가안보보고서를 직접 올리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바람은 이 보고서를 통해 우리 국민들께서 오늘의 안보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함과 동시에 힘을 모아 대책강구에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국가안보가 튼튼해지는 것은 물론 평화통일도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보고서는 제가 지난 10여년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관계로 다소 분량이 많기는 하지만, 우리의 안보현실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차원에서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가능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분들이 읽으실 수 있도록 이 보고서를 적극적으로 전파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본문 내용 중 일부를 임의로 왜곡 및 수정해서 전파하거나 또는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2009년 1월 김영환
《필자의 주요 학․경력》
● 고대 졸
● 런던대 연수(러시아어 및 소비에트 학)
●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어학연수
● 駐모스크바 대사관근무
● 駐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근무
● 현 國家情報大學院 교수 겸 첩보학팀장
목 차
Ⅰ. 북핵,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
Ⅱ.「평화적 해결론」의 한계
1.「북-미 수교」對「조-미수교」
2.「체제유지」對 「정권유지」
3. 6.15 남북정상회담의 실상
4. 서해도발(제2연평해전)의 실체
Ⅲ.「남침 임박론」의 근거
1. 이라크 戰과 맞물린 핵도박
2. 또 다시 반복되는 「김정일의 오판」
Ⅳ. 북한의 남침능력
1. 남침의 필요조건-장거리 지하터널
2. 남침의 충분조건-무비유환(無備有患)
Ⅴ. 여전히 남는 의문점들
1. 전쟁 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
2. 남침 가능성에 대한 평가
3. 남침 가능성이 모호한 이유
Ⅵ. 국가위기관리의 장애물
1.「합리적 논리」의 함정(Mirror-Imaging)
2. 정보관(Intelligence Officer)의 불리함
3. 정치적 이해관계
4. 모호성 관리
Ⅶ. 새로운 햇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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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북핵, 새로운 접근법 필요
최근 북경 개최 6자회담이 끝내 합의도출에 실패(2008.12.11)했다.
참가국 대표들이 회의 일정을 하루 연장하면서까지 절충을 시도했으나 북한이 핵 검증체계 구축에 강력히 반발함에 따라 회담이 결렬되었고 그 결과 지난 5년 동안 지속되어온 6자회담은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되었다.
이와 관련 현 정부의 대북강경책에 일단의 책임이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이는 북핵 문제의 본질을 간과한 주장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와 같은 6자회담 방식으로는 우리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하든지에 상관없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선의 경우를 상정해서 ‘북-미 수교’ 등을 포함해서 북한의 모든 요구 사항이 100% 충족된다고 해도, 북핵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북한이 과연 핵물질 및 핵무기 폐기 등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인지가 지극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둘째, 설령 북한이 그러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이를 미국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인지 역시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북한이 일부 핵무기 등을 은닉했을 것으로 의심하면서 검증작업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경우 북한이 선선히 수용할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만에 하나 북한이 진정으로 핵을 포기할 의지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김정일 입장에서 볼 때, 설령 핵을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한 이후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 및 러시아 등이 미국의 약속 이행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겠으나, 이와 관련해서는 북한의 핵개발 배경에는 혈맹국인 중국 및 러시아에 대한 불신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즉, 혈맹국도 믿지 못해서 개발한 핵을 ‘철천지원수’인 미국을 믿고 포기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북핵 문제에 대해 우리의 시각이 아닌, 김정일의 시각에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에 집착한다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요원할 뿐만 아니라, 자칫 돌이킬 수 없는 민족적 재앙마저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Ⅱ.「평화적 해결론」의 한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가능하다는, 소위 ‘평화적 해결론’은 주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째, ‘북한은 미국과의 수교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북-미 수교’와 함께 체제보장을 해준다면 북한도 기꺼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둘째, ‘북한의 개혁개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개혁개방 이외에 달리 대안이 없는 만큼, 비록 다소간의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결국은 김정일도 개혁개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논리들이 실상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假說)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그 동안 우리 정부 등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바탕으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진해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선 ‘북한이 북-미 수교를 간절히 원한다’는 가설의 정확성 여부부터 검토해보기로 하자.
1.「북-미 수교」對「조-미 수교」
이와 관련 우선 북한은 단 한번도 ‘북-미 수교’를 요구한 적이 없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북-미 수교’가 아닌 ‘조-미 수교’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동안 우리 정부와 언론 등은 마치 북한이 ‘북-미 수교’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임의로 왜곡해 왔다는 것이다.
혹자는 ‘북-미 수교’와 ‘조-미 수교’가 같은 말 아니냐며 반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시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이 주장하는 ‘조-미 수교’란 남․북조선이 적화통일 되거나 또는 사실상의 적화통일이 보장된 상태에서 미국과 수교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한 노동신문의 논설내용이다.
『지금은 21세기이다. 20세기 미제의 대조선침략정책의 산물인 미군의 남조선 강점(주한미군)은 새 세기에 들어와서 마땅히 끝장났어야 할 것이었다... 남조선 강점 미군 철수는 미국이 우리와의 불가침조약 체결과 대조선 적대시 압살 정책 철회 의사가 없는가를 판단 검증하는 시금석으로 된다... 미국이 진실로... 조-미 관계를 개선할 입장이라면 하루 빨리 미군 철수 용단을 내려야 한다...』
이상과 같은 노동신문의 논조를 보면, 북한만이 ‘조선반도 내 유일합법정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반도 내 유일합법 정부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사전 동의 없이, 미군이 조선반도 남쪽에 ‘무단으로’ 주둔하고 있는 것 자체가, 곧 미국의 조선에 대한 침략행위이자 대조선 적대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핵포기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조-미 수교’ 또는 ‘조-미 불가침조약 체결’ 등은 결국 ‘주한미군철수’로 귀결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남북 분단 상황에서 미국과의 수교, 즉 ‘북-미 수교’에 대해 김정일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음은 이와 관련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증언 내용이다.
“김정일은 미국 대사관이 평양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북을 떠나 올 때까지 김정일은 미국의 연락사무소가 평양에 절대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에 이르도록 미국대사관이 오는 것에 반대해서, 건물이 어떻다, 부지가 어떻다 하며 질질 끌고 있지 않습니까. 김정일은... 가당치도 않은 독재가 천하에 드러나서, 외부로 알려지는 것에 끊임없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황 전 비서에 따르면 김정일은 ‘북-미 수교’에 대해 ‘절대 반대’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황 전 비서는 김정일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진 인물이기에 그의 주장 모두를 절대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한 것까지 부인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전 미 국무부 북한 담당관이었던 케네스 박사도 같은 취지의 증언을 하고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지난 1994년의 제1차 핵위기 당시에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핵합의’를 이루게 되면서 한때 양국간 연락사무소 개설을 포함한 수교문제를 협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북한은 ‘북-미 수교’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케네스 박사의 회고록 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당시 미국 정부의 보상조치 목록은 북한의 1차적 목표가 미-북 관계정상화에 있다고 보는 한국 정부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강석주(북한측 수석대표)는 갈루치(미측 수석대표)의 북-미 외교관계 정상화 제안이 극히 훌륭한 것이라고 평했지만 북한으로서는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석주는 연락사무소와 관련한 갈루치의 반복적인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 제안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먼저 제시했다...
연락사무소와 관련한 협상에서 북한의 관심사는 입국과 국경 안에서 미국 외교관들의 통제 여부였다. 설사 그것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지연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국무부 협상팀이 제안한 연락사무소 같은 유인책들은 실제로 평양의 결정과정과 아무 상관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케네스 박사 역시 북한이 ‘북-미 수교’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면, ‘김정일은 북-미 수교에 절대 반대’라는 황 전 비서의 주장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북한이 주장하는 ‘조-미 수교’란, ‘북-미 수교’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실상 ‘주한미군 철수’와 동의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주한미군 철수’ 대신 ‘조-미 수교’ 또는 ‘불가침 조약’ 등과 같은 모호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이는 북한이 우리 정부 당국자 등을 속일 목적으로 교묘한 이중화법(double speaking)을 구사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중화법이란 전쟁, 독재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개념에 대해 평화, 민주 등과 같이 긍정적인 용어로 바꿔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도를 숨기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 기만수법 중 하나이다. 이의 대표적 예로는 과거 구소련이 헌법상에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규정해 놓고 이를 근거로 종교를 탄압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소련이 보장했던 ‘양심의 자유’란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자유, 즉 ‘종교(마약)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기에 소련 당국은 전도(傳道)행위에 대해 타인의 ‘믿지 않을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처벌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 공조’ 역시 이중화법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은 우리 민족에 대해 ‘김일성 민족’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공조란, 단순한 혈통공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상공조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남북한의 ‘김일성 민족끼리’ 단결하여 외세와 반통일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적화통일을 달성하자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내 ‘김일성 민족’은 그 규모가 얼마나 될까.
이와 관련 북한 당국이 지난 2004년 4월에 작성, 배포한 ‘전시(戰時)사업세칙’(북한판 충무계획)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북한의 ‘전시사업세칙’에 따르면 남한내 김일성 민족은 전쟁발발시 북한군의 병력 손실에 대한 인원 보충을 지원토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북한 당국이 보기에 남한내 ‘김일성 민족’은 남침에 따른 북한군의 병력보충을 지원(인원추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세력 규모가 확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이 요구하는 것은, 북조선과 미국간 수교가 아닌 ‘조-미 수교’라는 점에서 ‘북-미 수교 대(對) 핵포기’ 실현을 추진해온 6자회담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이 원치도 않는 조건으로 핵포기를 유도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최소한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조-미 수교’(적화통일)를 묵인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2. 「체제유지」對「정권유지」
평화적 해결론의 또 다른 결함은 ‘북한의 개혁개방이 가능하다’는 비현실적인 가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설은 김정일에게 있어 최우선 관심사항은 체제유지가 아닌, 정권유지일 수밖에 없음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권유지가 보장되지 않는 체제보장은 정치인 김정일에게 있어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북한의 개혁개방이 가능한지 여부는, 곧 개혁개방을 했을 때 북한의 체제유지는 물론 정권유지도 가능한지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지난 1998년 1월 공개한 김일성 면담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관련 면담록에 등장하는 ‘호네커’는 구동독의 서기장으로서, 통일직후 독일정부의 수배(베를린 장벽 탈주자에 대한 사살 명령을 내린 혐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소련 붕괴로 인해 독일로 강제 이송, 재판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한 호네커가 김일성 면담록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그가 독일로 강제 이송되기 직전에 북한에 망명 신청을 했으며, 이에 북한은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비행기를 모스크바로 보냈지만 러시아 정부의 거부로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생전의 김일성이 외국인을 접견하면서 호네커의 운명을 걱정했던 말이라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병(간암 말기) 치료를 받고 있는 호네커를 가지고 러시아 사람들(옐친 행정부)이 돈벌이를 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몇 푼의 달러에 현혹되어 동지를 팔아먹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호네커는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병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제기해 왔습니다... 김정일 동지가 새벽 4시경에 나에게 급히 알릴 문제가 있어서 전화를 한다고 하면서 호네커가 우리나라에 와서 병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편지로 전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를 데려오기 위해 모스크바에 우리 비행기까지 보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이 호네커를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기 때문에 그를 데려 올 방법이 없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호네커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와 동갑이며 나와 그와의 관계는 좋습니다. 호네커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는지 걱정됩니다. 나라가 망하니 사람들도 기구한 운명을 면할 수 없습니다...”
상기와 같은 김일성 면담록이 뒤늦게 김정일 시대에 공개됐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는 김정일도 개혁개방을 할 경우 ‘지도자가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동서독 통일직후 구동독 공산당 간부 등이 처벌받은 사례 등을 수집하여 당 간부 및 주민 사상 교육용으로 활용해 온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독일은 통일 직후「동독 불법행위조사위원회」를 구성, 총 6만5000건을 조사한 결과 650건을 기소하였으며, 그 중 325명을 처벌하였는데, 처벌자 중에는 장기 징역형 등을 받은 구동독 권력층과 관료 4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생전의 김일성이 개혁개방을 절대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일 역시 개혁개방의 폐해를 당간부 등에게 교육시켜왔다면, 김정일로서는 개혁개방을 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이는 김일성과 그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됨으로써 정권기반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체제유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정권붕괴 우려 때문에 개혁개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김정일이 북-미 수교도 원치 않으며 또한 개혁개방도 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우리는 6.15 정상회담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애당초 개혁개방은 물론 핵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김정일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응했다면, 그 목적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것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3. 6.15 남북정상회담의 실상
지난 6.15 남북정상회담의 최대 성과와 관련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대해 김정일이 동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해왔다. 하지만 북한은 오늘날까지도 주한미군 철수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한미군 철수(불가침조약)를 핵포기와도 연결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 다음은 이와 관련한 연합뉴스 내용이다.
『(도쿄=연합통신)=통일된 후에도 평화유지를 위해 미군은 남는 것이 좋다=일본 아사히 신문은 9일 ‘코리아, 공존시대’라는 주제로 1면 머리의 특집을 통해 지난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이같이 명언(名言)했다고 소개했다.
특집에 의하면 6월14일 오후 백화원 영빈관의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주한 미군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지역의 안정과 완충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군이 없다면 지역의 세력균형은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문을 열었다.
북한측에서는 김용순 비서가 먼저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때 김 위원장이 끼어들어 김용순 비서를 향해 “주둔하면 어떠한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하고 미군은 반드시 철수해야 된다는 김용순 비서의 거듭된 주장에 대해 “용순 비서, 그만 두세요”라고 힐책했다.
김 위원장은 다시 김대통령을 향해 “내가 무엇을 하려 해도 밑에 있는 사람들이 이같이 반대한다. 군(軍)도 미군에 대해서는 용순 비서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설명에는 동감하는 면도 있다. 지금 철수는 필요하지 않다. 통일된 후에도 평화유지를 위해 미군은 남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김 위원장은, 북측이 보도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한사코 주장하고 있다는 김대통령의 지적에 대해 “내부용이다. 우리의 군도 긴장으로 유지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 석상에서 김정일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정일의 주한미군 주둔용인’을 6.15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로 꼽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장은 분명한 근거가 있다고 할 것이며, 따라서 오늘날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내부용’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당시 김정일의 약속이 진실한 것일 때에만 성립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관련 기사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당시의 김정일과 김용순의 언행이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용순 자신이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해서 일체의 타협을 거부할 정도의 강경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김용순은 그보다 8년 전인 1992년 미국에서 개최된 제1차 북-미 고위급 회담시에는 오히려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 하겠다’는 입장을 미측에 전달한 당사자였던 것이다.
둘째, 김정일과 그의 최측근인 김용순이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이슈인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김정일과 견해를 달리하는 김용순이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일과 김용순이 주한미군문제에 대해 사전 의견조율조차 하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야말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셋째, 일개 비서에 불과한 김용순이 우리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먼저 답변한 것도 비정상적이지만, 그보다는 ‘지도자 동지의 방침’에 대해, 그것도 남한의 대통령 일행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것이야말로, 북한 체제의 특성에 비춰볼 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의문점에 비춰본다면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용순이 김정일에게 반발하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광’ 김정일 감독의 사전 연출에 따라 강경파 연기를 했기에 가능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장은 김정일의 기만에 속은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왜 그러한 기만극을 연출했을까.
단지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냥 말로 해도 충분했을 것을, 왜 굳이 그런 연극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김정일이 “밑에 사람들이 반대 한다”, “군도 용순 비서와 같은 생각”이라고 설명한 대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급 내용 중에는 ‘김용순 뿐만 아니라 군부도 도전한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려는 의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당시에 김정일이 그와 같은 기만극을 연출했던 목적은 우리 대통령 일행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착각을 하도록 유도하려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온건한 지도자이지만 주변의 강경파들로 인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대남군사도발을 허용할 수밖에 없겠구나. 민간인 김용순이 저 정도라면, 군부는 얼마나 노골적으로 도전할까.....’)
실제로 우리 대통령 일행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김정일의 기만극과 서해도발(제2연평해전)을 연결시켜보면 당시에 왜 우리 정부가 “우발적 충돌”이라고 평가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4. 서해도발(제2연평해전)의 실체
서해도발이란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29일 북방 한계선을 월선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우리 장병 6명이 전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던 무력 도발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당시 우리 정부는 ‘우발적 충돌’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되었을까.
이와 관련 당시 정부의 핵심관계자에 따르면 김정일이 도발직전(2002.4)에 ‘앞으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걱정 끼칠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는데다, 도발직후에도 우리 정부에 메시지를 발송, “순전히 아랫사람들끼리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사고였음”을 확인해준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6개월 뒤에 북한이 핵시인(핵보유 선언)을 한 사실에 비춰보면, 그 당시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는 등의 김정일의 언급 내용이 거짓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서해도발이 기획도발이었을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결론부터 말한다면, 당시 북한 주민들 사이에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에 따른 응원 열기가 극에 달했기에, 김정일로서는 체제유지 차원에서 북한판 ‘총풍공작’을 일으킨 것이 서해도발의 실체였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월드컵 경기와 관련하여 ‘평양의 시청자들이 남조선 팀의 승리를 알리는 방송원의 맺음말에 환성을 올렸다’고 보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북한 내부의 월드컵 열기 역시, 남한 못지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심지어 월드컵 열기가 전방에 배치된 북한군인들 사이에도 확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당시 휴전선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우리 국군초병들에 따르면 월드컵 기간 중 휴전선 북쪽에서도 “와-”하는 함성이 수시로 들렸다고 한다. 즉, 전방의 북한 군인들마저 한국팀을 응원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월드컵 대회 기간 중 아리랑 축전을 개최하면서, 다수의 중국동포들을 초청했었다. 그런데 당시 방북한 중국 동포들의 주된 관심은 아리랑 축전보다는 북한 내 친척 방문과 월드컵 대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동포들의 입을 통해 월드컵 대회에 관한 소식이 북한 내부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북한 당국으로서도 더 이상 숨길 수 없기에 월드컵 경기를 전국적으로 TV 방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했다면 김정일로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고 할 것이다. 즉, ‘아무리 우리(북한)가 동포애로 남한팀을 응원해도 남한의 「군부 강경파」들은 얼마든지 우리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에 서둘러 총풍공작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해도발 직후에 북한당국이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한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철저히 남조선 군부의 계획적인 군사적 도발행위이다. 최근에만도 남조선군은 거의 매일 같이 전투 함선들과 어선들을 우리측 영해 깊이 침투시켰으며 우리 해군 경비함들이 출동하면 일단 물러나는 척하면서 이 수역의 정세를 긴장시켜 왔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서해도발은 우리의 햇볕정책 성과와 그에 따른 북한의 대응책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것이다. 즉, 북한 주민들은 물론 북한군인들 사이에서도 대남적개심이 녹아내리면 내릴수록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내 핵심계층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됨에 따라, 북한의 대남군사도발은 그만큼 더 격화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햇볕정책이 한창 추진되던 지난 1999년 4월, 김정일이 조총련 간부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동무들에게 ‘우경 투항 노선’을 취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사업 방법에 있어서 이런저런 길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공산주의자의 전술이다...개량주의 외피를 쓰되 내적으로는 우리들의 기본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내실을 충실하게 하면 된다. 총련이 우경화하고 있다. 김정일 장군이 개량주의가 됐다는 식의 말이 적들 사이에 나돌아도 상관없다. 지금 정세에선 적기(赤旗)를 마음속에 숨겨두고 앞에 내세워선 안 된다. 적기는 언제든지 꺼내들 수 있다.”
그리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면 지금쯤 김정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Ⅲ.「남침 임박론」의 근거
그렇다면 남침이 임박했다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남침이 임박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한 가지, 김정일이 이미 남침을 결심한 상태라는 데에 있다. 북한이 남침할 것이냐 여부는 사실상 김정일 단 한사람의 남침 결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한반도의 특수 상황을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안보 상황을 판단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남북한 군사력과 경제력의 비교․분석 등과 같은 복잡한 통계나 이론이 아니라, 김정일이 남침을 결심했느냐 여부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김정일이 지난 2000년 8월 방북 중인 우리 언론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통일 시기는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며 이런 표현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남북합의를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행하면 되지 이런 저런 복잡한 이야기나 늘어놓으면 통일이 안 되기 때문에 범민련이나 한총련과 같은 단체들의 행사는 하지 말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남침을 결심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제2차 핵위기가 시작되었던 지난 2002년 10월의 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조-미 불가침조약)를 요구하면서 핵보유를 선언(핵시인)했던 때는,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위해 군사력을 한창 중동지역에 집결시키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 이라크 戰과 맞물린 핵도박
북한이 핵 시인(2002.10)을 하기 직전인 2002년 8월, 북한군 지휘부가 다음과 같은 ‘軍官 강연 자료’(장교용 정훈교육 자료)를 배포한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부시 놈은 백악관에서 〈위협국가(악의 축)〉들에 대해서는 선제타격을 가할 것이며 주동적인 선제타격은 미국의 새로운 군사교리로 될 것이라고 제쳤다... 미제는 〈9.11 사건〉에서 반미적인 나라들을 없애치울 수 있는 구실을 찾았다. 미제는 선제타격에서 첫 시험 대상으로 이라크를 지목했다... 외신은 빠르면 올가을에, 늦으면 래년(2003년) 1, 2월에 이라크에 대한 공격작전이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현 이라크 사태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라크 다음 타격 목표는 우리나라로 될 수 있다...』
관련 자료는 미국이 빠르면 2002년 가을에, 늦으면 2003년 1, 2월에 이라크를 공격할 것이라는 점과, 이라크 다음은 북한 차례가 될 것임을 북한군 장교들에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어차피 미국의 다음 목표가 될 운명이라면 공격당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선제 남침하는 것이 낫다는 점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이 핵도박의 D-Day로 2002년 10월 4일을 선택한 것도 미국의 이라크 공격 준비와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공격과 관련하여 상하원 지도자들로부터 지지를 획득(10.2)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직후에 북한이 핵보유 선언과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북한의 핵시인은 남침에 앞선 사전 포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주한미군철수’를 이행해주면 더 없이 좋겠지만, 설령 거부하더라도 일단 핵보유를 선언한 상태에서 남침을 한다면 미국도 섣불리 군사개입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에 따른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이라크 공격 직전에 북한이 사실상의 총동원 체제를 가동했다가 바그다드 함락(2003.4.9) 직후부터 단계적으로 해제한 사실에 비춰보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은 것이다.
바로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지난 2002년 10월 북한의 핵시인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기화로 남침하려던 북한의 ‘기획도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핵 시인을 전후하여 김정일이 다음과 같은 동향을 보인 적이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경의선 및 동해선 연결
우선 당시에 김정일이 방북한 남한 인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동해선 연결을 제의한 적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동해선도 연결하자, 서쪽(경의선)과 동쪽(동해선) 두 축선의 철도와 도로를 연결함으로써 김대중 대통령이 항상 주장하는 한반도를 물류 중심지로 만들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정착에도 기여할 것이다”(우리 대통령 특사에게 한 말)
“(이산가족 상설 면회소 설치 제의에 대해) 맞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동해선 철도 연결에 남쪽에서 합의해 줘야 한다.”(남한의 유력 정치인에게 한 말)
이중 김정일이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조건으로 동해선 연결을 제의한 대목은, 그가 얼마나 동해선 연결에 집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문제는 북한이 지난 1990년대 초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을 관철시키려 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카드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북한은 지난 1992년, 동구권 붕괴에 따른 주민들의 사상적 동요를 막기 위한 홍보자료로 활용할 목적으로 이인모씨(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요구할 때에도 이산가족면회소 설치 문제를 약속한 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례에 비추어 보면, 김정일이 동해선 연결, 보다 구체적으로는 동부 전선의 지뢰를 제거하는데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경의선 철도 연결을 명분으로 서부전선의 지뢰 문제를 매듭지었기에 남아 있는 동부전선의 지뢰마저 제거하기 위해 또 다시 면회소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 서해도발-우리의 방어태세 점검
서해도발 역시 1차적인 목적은 체제단속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의 방어태세를 점검하려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김정일로서는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우리 대통령 일행을 기만했지만, 이러한 기만 효과가 실전에서 어떻게 나타날지를 사전에 점검할 필요가 있었기에 도발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정부가 실제로 ‘우발적인 충돌’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김정일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남침 준비에 매진할 수 있었는데, 다음은 당시 김정일의 남침 준비를 보여주는 기사내용이다.
『(2002년 7월) 7일 정부 당국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 들어 지금까지 모두 10여 차례 군사 훈련에 참관했다. 이는 2000년에 2회, 2001년 9회를 앞지른 것으로... 정부의 한 관계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부대 현지지도 방식이 과거에는 부대 소요 물자 지원 등 군심(軍心) 다지기 측면이 강했으나, 최근에는 부대의 전투준비 태세 점검 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 전력 증산 박차
또한 북한은 전력 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2002년 8월 현재 동평양 화력 발전소(50만 kw) 등이 “조업이래” 최고의 생산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전기에 의해 작동될 뿐만 아니라, 특히 북한의 주요 수송 수단인 기차가 전기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2002년에 북한의 전기 생산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83%나 더 생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같은 기간 중에 특별히 민간경제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 화려한 개혁개방 쇼
뿐만 아니라 핵시인(2002.10) 직전인 2002년 9월 들어 북한이 갑자기 소나기식의 개혁개방(?) 조치 등을 취한 것도 비정상적이다. 기간 중에 북한은 신의주 특구 발표(9.12), 북-일 정상회담(9.17) 등과 같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조치들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 결과 2002년 9월의 경우 거의 매일같이 남북한간 교류행사(총 13건)가 벌어질 정도였다. 불과 석달 전만 해도 서해도발을 자행하는 등 남북 관계에 소극적이던 북한이 갑자기 9월 들어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당시 일부 국내외 전문가들은 북한이 일본의 식민 통치 배상금 50-100억 달러를 받아서 조만간 본격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 사실상의 총동원 체제 가동
그리고 북한은 곧바로 핵보유를 선언(핵시인)한 데 이어 사실상의 총동원 체제에 돌입하였다. 우선 북한의 공식 매체들이 2003년 1월, 신년사설을 통해 ‘올해는... 대담한 공격전의 해, 거창한 변혁의 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북한은 매년 비슷한 투의 주장을 해오기는 했으나, ‘대담한 공격전의 해’, 또는 ‘거창한 변혁의 해’와 같은 주장은 그 이전에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던 표현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며, 과거 6.25 전에도 김일성이 신년사를 통해 “1950년 새해를 맞이하여... 국토 완정, 조국 통일을 위한 새 승리를 향해 매진하자”고 선포한 전례가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2003년 2월 김영춘 총참모장이 직접 전체 장병들에게 미국과의 결전에 대비, 사생결단의 각오로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훈시한 것을 계기로 정규군 물론 노농적위대까지 동원되어 매일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고 한다. 다음은 당시 북한 내부 상황(2003.2)을 보여주는 BBC 보도 내용이다.
『〈전쟁공포로 가득차 있는 평양〉〈BBC〉
북한은 불안의 도시이다. 아침과 저녁마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지붕 위의 확성기에서는 행동요령을 지시하는 고성이 울려 퍼진다. 밤이 되면 등화관제 훈련이 실시된다. 평양은 현재 전시는 아니며 폭탄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전쟁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분위기이다.
거대한 포스터들이 시내의 공공 게시판을 뒤덮고 있다. 게시판 속의 북한 병사들은 눈을 부릅뜨면서 “적을 섬멸하는 신성한 전투”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리병갑 외무성 부국장은 “선제공격은 미국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문제다”라고 답변했다...』
이처럼 북한은 당시에 남침 준비에 광분하다시피 했지만 끝내 남침 기회를 잡지는 못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공격 개시후 불과 약 3주 만에, 그것도 별다른 피해 없이 바그다드 점령에 성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이 이라크 공격 직전인 2002년 12월, ‘이라크와 북한 등 2개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며 북한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낸데 이어 항공모함 칼빈슨 호 및 F-117A 스텔스 전폭기를 한반도에 파견한 것 등도 일조를 했다고 할 것이다.
2. 또 다시 반복되는「김정일의 오판」
결과적으로 당시의 핵시인은 김정일의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러한 오판의 대가로서 북한은, 그 동안 ‘제네바 핵합의’에 따라 제공받던 중유공급이 중단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참고로 중유 50만 톤의 경제적 가치는 2억불로서 이는 북한 예산(30억불)의 7%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이 바그다드 함락(2003.4.9) 직후인 2003년 4월 23일 개최된 베이징 3자 회담(북-중-미)에 참석, ‘중유공급 재개’를 핵문제 해결을 위한 최우선 과제라고 요구한 사실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핵문제와 관련한 북한 입장이, 핵시인 당시의「중유공급 중단 불사(오직 불가침조약체결)」에서 「先 중유공급 재개, 後 불가침조약체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북한의 입장은 이후의 6자회담(3자회담에 한-러-일 등 3국 참여) 기간 중에도 일관되었는데, 이는 결국 차기 남침 기회가 올 때까지 전략물자인 중유를 계속 공급받으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이 강경했던 것이다. 더 이상 과거 ‘제네바 핵합의’와 같이 ‘핵동결’ 조건으로는 중유공급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유공급을 받으려면 ‘즉각적인 핵 폐기’를 약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후의 6자회담은 「핵동결 對 중유공급」을 주장했던 북한의 입장과 「핵 폐기 對 중유공급」을 주장했던 미국 입장이 정면충돌함으로써 공전(空轉)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북-미간의 대립양상은 지난 2007년 2월에 개최된 6자회담에서 ‘2.13합의’를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2.13합의’란 북한과 미국의 입장을 절충한 것으로서, 핵동결보다는 핵폐기 쪽으로 더 진전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폐기를 하는 것은 아닌 중간 조치, 즉 북한이 핵불능화와 핵신고를 이행하는 조건으로, 미국 등 5개국이 중유 100만톤에 상당하는 에너지 및 설비 등을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핵불능화’란 단순히 핵시설 가동을 중단(핵동결)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에 북한이 재가동을 하려면 최소한 1년 정도의 수리기간이 소요될 정도로 ‘크게 고장내는’ 조치를 말하며, ‘핵신고’란 핵불능화 완료 이후에 곧바로 다음 단계인 핵폐기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조치로서 플루토늄 등 폐기 대상 핵목록을 사전에 신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2.13합의’를 계기로 그 동안 북한은 냉각탑 폭파 등 불능화 작업을 진행시키는 가운데 자신들이 보유한 핵물질 등에 대한 신고서도 제출(2008.6)했다. 이에 부응해서 미국 등 관련국들도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와 함께 일정량의 중유 제공을 하는 등 비교적 원만한 진행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미국은 지난 베이징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이 제조한 핵물질에 대한 시료채취를 요구했던 것이다. 채취한 시료에 대해 과학적 분석을 할 경우 지난 1990년대 초반의 제1차 핵위기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핵 문제와 관련한 의혹을 거의 대부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북한은 시료채취를 강력히 반대했으며 그 결과 6자회담이 결렬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그 동안 30kg의 플루토늄만을 추출했다고 신고(2008.6)한 데 반해, 미국은 북한이 50kg 정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으로 보고, 이러한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시료채취를 요구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상황은 지난 1990년대초의 제1차 핵위기 때와 매우 흡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당시에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90g의 플루토늄만을 추출했다고 신고했으며, 이에 대해 미국과 IAEA는 최소한 10kg 정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으로 의심하면서 북한의 신고내용에 대한 검증작업(특별사찰)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자 북한은 ‘일전불사’ 운운하면서 IAEA 탈퇴를 강행했고, 이에 미국은 북폭(北暴)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는데, 다음은 당시 상황에 대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 내용이다.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1994년) 6월16일 오전 안보수석으로부터 내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레이니 주한 대사가 내일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 내용인즉 ‘회견직후 주한 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군 가족이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시키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다... 더욱이 레이니 대사도 딸과 손자 손녀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지시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유사시 영변을 폭격 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항공모함과 순양함이 북폭에 대비해 동해안에 접근해 있었다. 영변과 평양은 대대적인 미군 폭격기의 공습과 함포 사격의 사정권 안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이 이뤄질 경우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 가까이 전진 배치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화력을 남한을 향해 쏟아 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 날 새벽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거세게 몰아붙였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 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 나는 지금도 1994년 북핵 위기 해소의 커다란 공이 카터 대통령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당시 미국의 북폭 의지는 확고했다고 한다. 즉, 빌 클린턴 대통령은 “전쟁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제재 의사(北爆)를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단호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미국정부는 주한미군을 증강시키는 한편 한국내 미국인들의 소개(疏開) 계획을 수립한 데 이어 서울의 외국인 학교도 조기방학토록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북한의 전쟁 의지는 얼마나 강력했을까.
다음은 이와 관련한 황장엽 전 비서의 회고록 내용이다.
『핵사찰을 받지 않는다는 문제로 미국과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북한은 준전시사태를 선포했다가 해제했다. 김정일은 핵문제 협상에서 자신의 강경한 ‘벼랑 끝 전술’이 승리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국이 전쟁을 피한 것은 현명한 조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때 북한은 전쟁을 하면 했지 미국의 압력에는 굴복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이 ‘전쟁불사’를 주장했던 것도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 실제로 전쟁을 각오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에 카터 전 대통령의 극적인 중재가 없었더라면 ‘제2의 한국 전쟁’이 불가피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례에 비춰본다면 북한이 이제 와서, 그것도 핵무기까지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핵사찰 압박에 굴복할 이유는 더욱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북한이 시료채취 등 검증체계를 거부한 것도 일전불사를 각오했기 때문이라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작금의 국제정세가, 북한이 핵시인을 했던 지난 2002년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에는 이라크 대신 이란의 핵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란의 핵개발 문제가 지속되고 있는 한 미국으로서는 중동지역의 미군을 한반도로 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지난 6년간 이라크 치안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 피해와 함께 엄청난 재정적 손실을 입은 데다, 최근에는 아프간의 치안상태마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기에 미국으로서는 섣불리 또 다른 전쟁을 벌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또한 미국이 정권교체(2009.1.20)를 앞두고 있는 점도 김정일로서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라고 할 것이다. 즉, 임기 말의 부시 대통령이나 아직 취임하지 않은 버락 오바마 당선자 모두 또 다른 전쟁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북한으로서는 이미 얻을 수 있는 중유를 거의 다 얻은 상황이기에 남침 시기를 더 이상 늦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검증체계를 거부한 시점은, 이미 50-60만 톤 가까운 중유를 공급받은 직후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핵 검증체계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북한이라면, 더 이상 중유공급을 요구하기가 곤란한 때였다는 것이다. 추가적인 에너지 지원을 요청할 경우, 본격적인 핵사찰 압력이 본격화될 것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김정일 와병설’이 유포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남침에 앞서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숨기기 위한 것(미국의 미사일 공격을 피할 목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지난 2003년 초 김정일이 남침을 결심했을 때에도, 미국의 이라크 공격(2002.3.20)이 임박했던 2003년 2월12일부터 바그다드 함락(2003.4.9)을 전후한 기간 동안 잠적했던 전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와병설’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발견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첫째, 입수되는 첩보의 내용이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다는 것이다. “일부 마비 증세는 있지만 언어 장애는 없다”, “양치질을 할 수 있는 정도” 등과 같이 입수되는 정보가 너무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국이 제공한 것이라 할지라도 관련 첩보는 북한이 고의로 흘려준 기만정보(disinformation)일 가능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9.11 테러에 이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와 관련해서도 연속적인 정보실패를 겪었던 미 CIA 등이, 이라크 보다 더 폐쇄적인 북한에 대해서만 그토록 정확한 정보출처를 구축했다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일을 ‘직접’ 치료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뇌신경 전문의가 “다른 프랑스와 독일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방북했지만 지도자를 본 적은 없다”고 주장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둘째, 김정일의 건강과 관련된 민감한 정보가 정체불명의 ‘북경 소식통’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포되고 있는 것도 비정상적이지만 그보다는 김정남까지 나서서 “세월은 속일 수 없는 것 같다”며 와병설을 간접 시인한 것은 북한 체제상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남일 뿐만 아니라 유력한 권력계승자 중의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와병중인 아버지의 곁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충성심을 보여주어야 마땅함에도 한가롭게 북경의 호텔을 전전하면서 아버지의 건강 이상설이나 확인시켜줌으로써 북한의 공식입장을 부정하는 행위는, 북한과 같은 왕조체제 하에서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와병설 자체가 전혀 근거 없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와병설이 그토록 확산될 때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와병설이 사실일 경우에도, 발병 사실보다는 발병 원인이라는 것이다. 즉, 평생 안일한 생활을 해온 김정일이 자신의 목숨이 걸린 전쟁을 결심하는 과정에서 지나칠 정도로 고심한 나머지 일시적인 경련 현상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 김일성이 지난 19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쓴 나머지 과로사한 전례에 비춰보면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들어 북한이 다음과 같이 위기지수를 점차 높여왔음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 2008년 10월 9일 북한 인민군 해군사령부는 우리 해군이 ‘북한 영해’(NLL)를 잇따라 침범하고 있다면서 “서해상에서는 언제 제3의 서해교전, 제2의 6.25 전쟁의 불씨가 튈지 모를 일촉즉발의 위험천만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고 경고
● 2008년 10월 28일 북한 군부는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의 이행을 촉구하면서 남측이 조금이라도 선제타격하려 할 경우 “핵무기보다 더 위력적인 타격수단에 의거한 상상 밖의 선제타격으로 불바다 정도가 아니라 반민족 반통일적인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고 그 위에 통일조국을 세우는 타격전이 될 것”이라고 경고
● 2008년 12월 1일 북한은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교류전면 차단 조치
● 2009 1월 북한의 공식매체들이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북남대결에 미쳐 날뛰는 남조선 집권세력의 무분별한 책동”에 대해 맹비난하는 가운데 김정일은 신년 첫 공개 활동으로 6.25 당시 서울에 최초 입성했던 부대인 ‘근위서울 류경수 제105 탱크 사단’을 방문, “군대를 필승불패의 혁명 무력으로 더욱 강화발전시킬” 과업을 제시
Ⅳ. 북한의 남침 능력 여부
그렇다면 과연 북한은 남침 능력이 있다는 것인가.
흔히들 북한은 경제난과 군사 장비 노후화 등으로 이미 남침능력을 상실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역사상 국력이 열세인 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사례가 없지 않기에 단지 객관적인 전력만을 바탕으로 침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속단이라고 할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진주만 기습인데, 그 당시에도 일본의 객관적인 전력은 결코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일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달리 돌파구가 없었기에 전쟁을 선택했던 것이며, 일단 전쟁을 결심하게 되자 ‘국력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기습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선제기습을 통해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해야만 승산이 있다고 보았기에 미 해군의 심장부인 진주만을 공격목표로 설정했던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후진국 일본이 감히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보았으며 설령 전쟁을 일으킨다하더라도 진주만은 절대 공격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미국식 ‘합리주의’에 따르면 일본의 낙후된 해군력으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과 같은 원양(遠洋) 작전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주의 국가 일본은, 비록 기술 후진국이었다 할지라도, 국가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기술과 자원을 집중시킴으로써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의 김정일도 승산이 확실해서가 아니라 적화통일 이외에는 달리 돌파구가 없기에 남침을 결심하게 된 것이며, 일단 남침을 감행할 때에는 낙후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극단적인 공격방법을 모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김정일이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심장부를 공격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1. 남침의 필요조건-장거리 지하터널
북한의 남침 전략은 소위 ‘3일 전쟁’ 또는 ‘3단계 7일 작전’ 등과 같이 ‘단기속전속결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북한은 개전과 동시에 전후방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는 한편 기계화 부대를 신속히 부산까지 남진시킴으로써 美 증원군의 도착 이전에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북한이, 그것도 한-미 연합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화력과 낙후된 기동력을 가진 군대로, 남한 전체를 3-7일 만에 점령하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오늘날은 한-미 연합군이 24시간 공중감시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관계로 6.25 때와 같은 기습남침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 관련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1996.9)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군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 잠수함은 어뢰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병력을 승선시킬 수 있도록 구조를 개조했다고 한다. 즉, 북한제 잠수함은 수중전투용이 아니라 특수부대원들을 우리의 동-서-남해안에 기습 상륙시키기 위한 병력수송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약 100여척 이상의 잠수함 및 잠수정을 동원, 약 2-3천명의 특수부대원들을 우리의 해안지대에 상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강릉 무장공비 사건(잠수함 좌초 당시 탑승해 있던 북한특수부대원들이 상륙함으로써 발생) 당시 15명의 공비를 잡느라고 무려 4만 여명의 우리 군이 동원되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북한 특수부대원 2-3천명이 야음을 틈타 일거에 우리의 해안으로 상륙할 경우, 최소한 항구 등을 포함한 주요 해안 지역을 기습, 단기간에 점령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릉 잠수함 사건은, 북한이 한-미 연합군의 공중감시체계를 우회하기 위해 물속을 통한 기습방안을 적극 모색해 왔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잠수함 등을 이용한 기습 방법은, 해안 지대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잠수함을 이용해서 상륙시킬 수 있는 병력은 기본적으로 소규모의 경보병일 수밖에 없기에 그들의 작전 반경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내륙지역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습대책을 수립해놓았을까. 즉, 지상 작전의 경우에도 한-미 연합군의 공중감시체계를 우회하여 기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인가.
이와 관련 우리 국민들은 제일 먼저 남침용 땅굴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발견된 땅굴은 모두 길이 4km 정도의 단거리 땅굴로서 휴전선 돌파용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땅굴 경우, 비록 우리 군이 모두 찾아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개략적인 땅굴의 출구 위치를 짐작하고 있기에 기습수단으로서의 효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북한으로서는 우리 군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획기적인 땅굴을 ‘통 크게’ 굴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우리의 후방 깊숙한 지역에까지 들어와 있을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김포 및 연천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들이 ‘땅 속에서 돌 깨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는 신고를 했으며, 이를 계기로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북한의 장거리 땅굴 탐사에 매진해 온 사실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 중 보안사 부사관 출신인 故 정지용씨(2002.12사망, 이하 亡者에 대한 존칭 생략)가 대표적 인물인데, 그는 현역 재직 중이던 1980년대 말 우연히 땅굴 관련 제보를 받게 된 것을 계기로 숨질 때까지 북한의 장거리 땅굴 찾기에 매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생전의 정씨는 땅 속에서 들리는 ‘TBM 소리’는 물론 심지어 ‘북한 말투의 사람 목소리’까지 녹음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정씨가 땅속의 소리를 녹음한 방법은 지극히 간단한데, 이는 통상적으로 지상에서 가수(歌手)의 목소리 등을 녹음할 때 사용하는 방법을 그대로 지하 세계에 적용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가수의 목소리 등을 생생하게 녹음하려면 마이크를 최대한 가수의 입 근처에 위치시켜야 하듯이, 정지용씨도 녹음기 마이크(청음기라고도 함)를 최대한 지하갱도 가까이에 위치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즉, 이상 징후가 발견된 지역의 땅속으로 지하수 개발용 시추기로 구멍(시추공)을 뚫은 다음, 해당 시추공 속에 마이크(지상의 녹음기와 연결된 것)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씨 녹음테이프 음질은 정씨가 ‘소리의 발원지’(지하 땅굴)에 얼마나 가까이 마이크를 위치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런데 지하 100m 이하 지역에 위치한 ‘소리의 발원지’(땅굴)를 지상의 시추작업으로 정확히 관통(시추봉이 갱도를 뚫는 현상)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개의 경우 정씨의 시추공은 지하 갱도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씨 녹음테이프의 소리는 그냥 들어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음질이 나빴다고 한다. 왜냐하면 해당 소리는 음원(땅굴)에서 출발하여 상당한 두께의 지하 암반을 통과한 다음에, 시추공 속에 위치한 마이크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일부 테이프에는 매우 선명한 기계소리와 사람목소리 등이 녹음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즉, 마이크(청음기)를 지하갱도 바로 근처에 위치시키는데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국방부가 ‘조작된 것’이라며 그 가능성을 일축함에 따라 정씨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렇다할지라도 정씨는 장거리 땅굴의 진실을 규명함에 있어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했는데, 이는 그가 지난 1992년 월간조선 취재팀에게 그간의 탐사결과와 물증 등을 제공함으로써 관련 사실을 공론화 시킨 것을 말한다. 즉, 그동안 국방부와 정지용씨간 상반된 주장에 대해 제3자인 월간조선 취재팀을 개입시킴으로써, 땅굴 문제와 관련 객관적인 입장에서 취재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에 정씨의 제보를 받은 월간조선측은 현장 답사를 통해 경기도 김포 및 연천 지역의 땅 속에서 착암기 소리가 들리는 등의 이상 징후가 실재했음을 확인하였고 그 결과를 기사화했는데, 다음은 당시 월간조선 5, 6, 7월호에 보도된 내용 중에서 우선 김포 지역과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이다.
『서울 근교에서 들려오는 地下기계음의 정체〔5월호〕
3초마다 덜거덕거리는 갱차음
취재팀이 김포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김OO씨(35․김포군 하성면 후평리)였다. 김씨는 88년 8월부터 자신의 집 앞 텃밭에서 정지용씨가 시추작업하는 것을 계속 지켜봤으며 전자기술자인 그는 89년 3월 정씨에게 청음기〔防水用 마이크〕를 제작해주며 시추작업에 깊숙이 빠지게 된 인물이다.
다음은 김OO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정지용씨와는 언제부터 알게 됐나.
“88년 8월경이다. 정씨는 그 당시 우리 집에서 3백-4백m 떨어진 야산에서 시추작업을 하고 있었다.”
- 언제부터 시추작업에 관심을 갖게 됐는가.
“내가 전자기술자인 것을 알게 된 정씨가 89년 3월쯤 청음을 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여러 가지를 궁리하다가 물〔지하수〕속에서도 녹음이 가능한 동 파이프로 싼 청음기〔마이크〕를 만들어주게 됐다.”
- 이상소음을 처음 들은 것은 언제인가.
“89년 4월초였다. 당시 나는 시추공에다 청음기〔마이크〕를 넣은 후 밖에다 스피커를 연결해놓고 있었다. 4월초에 다른 곳에 다녀왔더니 옆집 슈퍼의 할머니 등 여러분이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말해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청음활동을 하게 됐다. 이후 갱차 지나가는 소리 등 여러 가지를 녹음하게 되면서 이 지역 지하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 어떤 소리가 녹음됐는가.
“착암기가 돌을 깨는 듯한 ‘타타타타’하는 소리, 당시는 뭔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 TBM 장비가 돌 깨는 것으로 추정됐던 소리 등이 있는데 그중 탄광에서 쓰는 갱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듯한 소리가 가장 선명하다.”
- 이곳에서 시멘트로 추정되는 물질이 나왔다는데 사실인가.
“6, 7차 및 12차 시추공에서 시멘트 성분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검출됐다. 그것을 아시아시멘트 시험실에 성분조사를 의뢰했고 나는 별도로 한국화학시험연구소에 맡겼는데 지하 100m 지점에서는 이런 성분이 자연적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게 연구소측의 답변이었다.”
- 만일 그 같은 물질이 시멘트라고 확인되면 그것은 지하에서 만들어진 인위적 구조물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인데 왜 그 시추공에 대해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지 않았는가.
“시멘트로 추정되는 물질에 대해 군 당국은 처음부터 믿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것의 증명가치가 원천봉쇄된 것이 〔정지용씨가〕다른 곳〔연천지역〕을 찾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집이 흔들렸다.
김OO씨는 우연한 기회에 정씨의 시추작업에 관련을 맺다가 그 후 이 작업에 전념하게 됐다. 김씨는 갱차음 등은 91년 상반기까지 들렸으나 그 후는 고압전기 유도음으로 추정되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이라고 말한다〔장거리 땅굴의 막장이 이미 김포지역을 통과해서 남하한 상태라는 의미〕.
그 역시 정지용씨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인물이라 보다 객관적인 증언을 듣기 위해 김씨 집 앞에 설치해 놓은 스피커를 통해 처음으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박OO씨(여․57)를 만났다. 박씨가 운영하는 새마을 슈퍼는 김OO씨 집으로부터 30m 정도 떨어져 있다. 다음은 박씨의 증언이다.
“날짜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여하튼 소리가 난 날 오전 9시쯤 가게 앞의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디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경운기도 지나가지 않는데 소리가 들리는 게 이상해 김OO씨 집 쪽으로 가보니 김씨 집 앞 텃 밭에 설치해 놓은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침 김씨가 없어 그의 아내와 마을 사람 몇 명과 함께 그 소리를 들었다. 2-3분간 계속된 그 소리는 뭔지 잘 모르겠으나 경운기가 멀리서 지나가는 듯한 감으로 느껴졌다”
후평리는 북한측의 대남방송이 크게 들리는 접적지역이다. 이런 지형적 여건 때문인지 이 지역에선 예전부터 이상징후에 대한 신고가 많았고 주민들도 ‘땅이 울렸다’는 등의 표현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지용씨의 녹음테이프와는 관계가 없지만 참고삼아 이상 징후를 체험했던 홍OO씨(여․37․김포군 하성면 시암리) 집을 찾았다. 홍씨 집은 김OO씨의 집으로부터 북쪽으로 1.5km 더 가야한다.
다음은 홍씨와의 일문일답이다.
-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게 언제인가.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으나 지난해 이맘때〔1991년 3월초〕였다”
- 당시 그 소리는 어떤 식으로 들렸는가.
“저녁 8시쯤인데 안방 옆에 있는 부엌바닥에서 갑자기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울리며 집까지 흔들렸다. 집안 식구가 모두 놀랐는데 3-4차례에 걸쳐 요란한 소리가 난 후 10여분 후에 조용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 같았나.
“쇠로 돌을 뚫는 듯한 소리였다. 집까지 흔들릴 정도로 강했다.”
-식구들이 모두 들었는가.
“그렇다. 시어머니와 남편도 같이 들었다.”
- 그 외의 이상징후는 없었나.
“주변 사람들이 혹시 우물에 이상이 있는지 살펴보라기에 마당의 우물을 들여다보니 평상시보다 물이 엄청나게 줄어 있었다.”
- 우물물이 그 이전부터 줄었던 것은 아닌가.
“식구들이 매일 그 물을 쓰기 때문에 바로 그 소리가 나던 날 물이 줄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 물이 원래의 수준까지 다시 차올랐다...”
테이프는 조작되지 않았다
취재팀은 검증을 두 가지 방법으로 실시했다. 즉 테이프 내용이 신디사이저 등 전자기기로 합성될 가능성이 없는가 하는 검증과 테이프 녹음을 수록할 당시 의도적인 조작이 가능했는가 하는 상황에 대한 검증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녹음테이프는 전자기기로 합성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 또 정지용씨가 녹음할 당시 주변에 있었던 현지 주민이나 관련자들은 정씨가 조작할 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고 일치된 증언을 하고 있다.
갱차음 규명을 요구한다
취재팀의 뇌리에 강하여 새겨져 있고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갱차음이다. 철로 위를 달리는 궤도차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면서 서서히 커지다가 청음장치 바로 앞을 ‘웽’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간 뒤 점차 약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장감 넘치는 이런 소리는 기계분석도 할 필요 없이 육청(肉聽)으로도 충분히 궤도차라는 결론을 내리게끔 해주고 있으며 그런 소리가 4-5회에 걸쳐 녹취되었다. 반경 수십km 안에는 지하철이나 철도가 안 다니는 후평리 지하에서 들려온 생생한 이 ‘소리’를 만약 방송국에서 틀어놓는다면 많은 한국인들은 잠을 설쳐야 할 것이다. 월간조선 취재팀은 이 갱차음의 철저한 규명을 정부당국에 요구하는 바이다...』
이상은 월간조선 5월호 기사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와 같은 월간조선의 기사보도를 계기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경험했거나 알고 있던 내용을 월간조선측에 기고 및 제보하게 되었는데, 다음은 관련 내용을 보도한 월간조선 6월호 및 7월호 기사 내용이다.
『추적 : 한국의 심장부로 꽂히는 비수〔6월호〕
김포 북쪽 인민군 6사단 소대장 출신 귀순자의 기고문
나는 애초 귀순 당시 군 기관에 김포 일대 서울 근교에 북한 화곡리에서 출발한 남침용 장거리 땅굴이 있다는 것을 진술한 바 있다. 진술한 내용이 정부에 반영되어 구체적인 토의 대책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월간조선 기사를 읽고 나서 허탈감 비슷한 것이 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지난 번 월간조선에 났던 그 기사 내용과 내가 알고 있던 서울 근교 땅굴설이 너무도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근사한 면이 많아서 월간조선부를 찾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며칠간 귀순한 동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금이라도 의문되는 점들은 모조리 적어두었다가 이 글을 쓰는데 삽입하기로 했다.
가장 유력한 제공자는 1980년 6월에 월남 귀순한 이OO씨였다. 이씨는... 개성시 판문군 일대에서 당 세포비서, 직맹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아 수행하면서 지도사업차 화곡광산 갱에까지 들어가 본 유일한 증언자인바, 그가 말하는 징후를 소개한다.
「첫째 본인(이OO)은... 화곡광산이 민간인 소속이었을 당시에 목격한 내용을 말한다. 76-77년경부터는 광산이 폐쇄되고 군부대가 광산본부를 인수하면서 민간인 출입이 일체 금지되었던 바 그것이 제일 의구심 나는 점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알고 있기에 북한에서도 내로라하는 광석(금, 아연, 연)이 채취되고 그 규모 또한 한 두 손가락에 꼽힐 만큼 1급 기업소였고(노동자 4천여명) 광산작업시 수입이 꽤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폐갱시켜서 군인들을 배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광산 당위원장 사무실에 들어갔던 일이 있는바 그때 벽에 걸린 지도에서 본 기본 진도현황은 한강중심, 즉 군사분계선까지 남하한 것이었다. 기본갱이 화곡광산에서 남쪽으로 직선으로 뻗어 있는바 높이, 너비가 2.5t 화물트럭 2대가 어길 수 있고〔폭 2차선 규모〕 기본 갱에서 좌우로 수십개의 곁가지 광석채취굴이 있다. 그 굴의 너비, 높이는 일반 갱차가 서로 어길 수 있는 정도이다.
제1땅굴 목격자인 인민군 민경대 준위 출신 안OO씨의 증언
국군복장으로 굴진 작업
안OO씨는 북한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근무하는 인민군 제3사단 민경대 준위로 있다가 지난 79년에 남한으로 귀순해왔다... 안씨는 중요한 증언을 하나 했다.
“땅굴 공사부대에 근무하는 간부가 친구였는데, 이런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땅굴 속으로 작업반을 들여보낼 때는 한국군 복장을 하도록 하고 말씨도 국군 말투를 교육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작업중 남한측에 붙들리는 일이 생길 때에 대비한 위장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의 땅굴 굴착 능력
김OO씨〔귀순자〕는 “1985년 평양 철도대학 재학중 ‘지금도 땅굴을 뚫고 있다’는 제대 군인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군대에서 제대한 후배들이 학교에 입학해왔습니다. 인민군 5군단지역(철원지역)에서 근무했던 후배들이 ‘탱크가 다닐 정도의 땅굴을 몇 군데씩 지금도 뚫고 있는데 이 공사에 동원돼 총은 별로 쏘지 못하고 일만 하다 제대했다’는 것이었지요. 후배들은 그 공사의 목적이 ‘대부대를 남조선 후방에 침투시켜 제2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으로 봐도 그 땅굴은 방어용 갱도가 아닌 ‘남침용’임이 분명합니다.”
...월간조선 취재반은 지난 한달 동안 수십명의 한국군 고위 관계자들을 만났다. 우리는 이들에게 정지용씨가 지하 시추공 내에서 녹음한 굴착음 소리와 갱차음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정씨에 대해서 부정적인 정보를 갖고 있던 이들도 너무나 생생한 기계음에,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도저히 지하 자연음이라고 볼 수 없는 그 소리에 충격을 받고 우리의 질문에 대체로 진지하게 답변하였다.
땅굴 탐사에 직접 관계한 적이 있는 전․현직 군 인사들은 거의 전부가 북한이 장거리 땅굴을 서울 근교까지 뚫었을 가능성에 동의하고 있었다. 현직 군 고위 인사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강 이런 하소연이 된다.
“땅굴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 근교에 장거리 땅굴이 진출했다고 발표하면... 국민들은 불안해할 것이고 그렇다고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물론 군의 땅굴 탐지부서는 기자들에게 ‘북한이 장거리 굴착을 할 능력이 없으며 1980년대 초반에 땅굴 굴착을 중단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것은 결코 군 전체의 합의된 견해가 아니다. 그렇다고 군이 내부적으로 ‘북한은 현재 장거리 땅굴 굴착중’이라는 판단을 내려놓고 체계적인 탐사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포 관측병의 남하하는 지하굴착음 추적 수기〔7월호〕
저는〔당시 한국화성주식회사 사원〕 지난 88년 봄부터 90년 가을까지 경기도 김포군 OOO 관측소에서 육군 모 부대 소속 관측병으로 근무했었습니다.
처음 이상현상을 발견했을 때가 지난 88년 겨울. 관측소 오른 쪽에 있는 김포 시암리 앞 한강의 북한쪽 갯벌 가운데에 일직선으로 금을 그어놓은 듯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갯벌 한가운데가 일직선으로 약간 움푹 패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이 현상은 남한 쪽 바로 앞에 있는 좀 작은 갯벌에도 나타났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제가 입대하기 이전에 시암리 맞은 편 북한측 지역인 관산포 앞 갯벌이 2백50-3백m 가량 함몰됐던 적이 있었지요. 부대 선임자들 얘기에 따르면 당시 함몰이 일어나자 북한은 병력을 동원해 메우기 바빴는데 함몰된 곳에서 레일과 갱차가 드러나 보였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현지주민 등 관련자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다수의 현지 주민들이 땅굴 굴착징후로 의심이 되는 이상현상에 대해 증언하고 있을 가운데, 각각의 증언 내용이 비록 동네는 다르다할지라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둘째, 전 육군 관측병도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포반도 앞 갯벌에 일직선으로 함몰되는 현상이 나타난 적이 있는데다, 특히 이전에 함몰사고가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갯벌 속에서 레일과 갱차를 건져 올린 적이 있다는 주장은, ‘땅속에서 갱차음이 들린다’는 김포 지역 주민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셋째, 김포반도 북쪽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귀순자들 역시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화곡광산의 갱도가 70년대 중반에 이미 한강 중간 지점까지 남하해 있는 상태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폐갱, 군관할로 이관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넷째, 국방부 관계자들조차 사석에서는 장거리 땅굴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국방부의 공식입장이라는 것이, 사실은 땅굴과 관계된 군관계자들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의 장거리 땅굴은 배수문제로(굴착과정에서 발생하는 지하수를 북쪽으로 흘려보내야 하므로) 휴전선 지역을 통과할 때에는 기존의 단거리 땅굴보다 훨씬 깊은, 최소 지하 300-400m 지점을 통과한 다음 후방지역으로 갈수록 지표면 쪽으로 상승하는 구조(北深南淺:북심남천)로 굴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를 찾으려면 땅굴이 지표면으로부터 깊이 들어가 있는 휴전선 일대보다는 지표면에 근접하게 되는 후방지역에서 탐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군이 ‘북한은 단거리 땅굴(총 길이 4km 이하)만을 팠다’는 스스로의 도그마에 사로잡힌 나머지, 휴전선 일대에 한해 기존의 땅굴 깊이(45-160m) 정도로만 탐사한다면, 아무리 ‘벌집 쑤시듯’ 해도 찾을 수 없는 구조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국방부가 제4땅굴 이후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개의 땅굴조차 추가로 발견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한편 생전의 정지용씨는 김포지역보다는 연천 지역에 북한의 장거리 지하땅굴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았는데, 이는 정씨가 해당 지역 땅속에서 “막아, 막아”, “위에서 다 들려요”, “너는 이제 그만이다”, “알았어” 등과 같이 생생한 사람목소리를 녹음한 데 이어 해당 지역 땅 속에서 정체불명의 지하공간까지 발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천 지역에도 북한의 장거리 지하터널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초 연천지역에서는 어떤 이상 징후가 있었기에 정지용씨가 이 지역을 주목하게 되었을까. 다음은 월간조선 기사 중에서 연천지역 주민들의 증언 내용만을 발췌한 것이다.
『서울 근교에서 들려오는 地下기계음의 정체〔5월호〕
“따따따따” 하는 착암기 소리
다음은 두일2리 박씨 할머니(이름이 없다고 함)의 증언이다.
“89년 겨울 어느 날인가 밤에 안방 아랫목에서 잠을 자는데 쿵하는 소리가 울리며 몸이 털썩 흔들렸다. 그때가 새벽 한시쯤이었는데 그런 쿵하는 소리가 가끔 나타나다가 2시간쯤에야 잠잠해졌다. 나는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 그게 포탄 터지는 소리인 줄은 짐작했지만 집 밖을 둘러봐도 별 일이 없는 것 같아 그날은 그냥 자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똑같은 소리가 새벽녘에 들렸다. 이때는 며느리(이OO․41)도 같이 들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또 찌그럭찌그럭 하며 뭔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그 소리는 안방 아랫목에서만 들렸고 옆방이나 안방의 윗목에서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소리는 처음에는 앞마당 쪽에서 오는 듯한 감이 들다가 며칠쯤 후엔 안방 바로 밑을 지나가는 듯했고, 7-8일쯤 후에는 뒷마당 쪽으로 지나가는 듯하다가 10일쯤 지나니까 소리가 그쳐버렸다.”
시추공에서 나는 경유 냄새
다음은 3월 21일 경기도 부천에서 만난 최OO-이OO씨부부의 증언이다.
이들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면서 구미리에 자주 왕래하고 있는데 구미리 집에는 아들 최OO씨(35)가 혼자 머물고 있다.
- 구미리 집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언제부터인가.
최씨〔남편〕=“90년 5월경이었다. 당시 집안에 우물이 없어 업자에게 우물을 파달라고 했는데 그 업자가 우물을 파다 말고 ‘지하에서 찬바람이 올라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물 시추구멍에다 얼굴을 대보니 시원한 찬바람이 올라오고 라이터불도 꺼지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인근 군부대에 신고했더니 군인들이 나와서 여러 번 시추한 후 ‘별 이상이 없다’면서 철수해 버렸다. 결국 우물은 못 팠다.”
- 정씨는 언제 만났는가.
최씨=“지난해〔1991년〕 8월이다. 하루는 정씨가 찾아와 우리 집 앞의 축사지역에서 시추작업을 해도 되느냐기에 거절해버렸다. 그 전 해에 군인들이 시추작업을 할 때〔우물 파던 중 찬바람이 올라왔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