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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첨붇된 파일은 서론과 통일신라, 고려에 대한 번역입니다.
왕건에 의한 Korea로 통일
왕건의 군대는 이후 십 여 년 간 후백제와 끊임없이 싸웠고 신라는 물러서 있었다. 930년 오늘날 안동 근처에서 백제군을 괴멸시킨 후에야 고려는 신라는 신라로부터 공식적인 항복을 받았고 935년 – 놀랍게도 아들에 의하여 쫓겨난 이전 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이 이끈 군대로 – 후백제를 정복하였다. 이후 왕건은 통일을 이룩한 사람이 아닌 관대한 인물이 되었다. 자신을 고구려의 적법한 계승자라고 생각한 왕건은 쓰러져 가는 발해로부터 탈출한 고구려 유민들을 포용하였고, 이후 발해는 거란에 의하여 926년 정복당하였다. (이때가 한반도의 국가가 만주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마지막 시기이지만 이러한 경험은 다수의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지금의 중국 북동부 지역에 대하여 영유권 주장을 하게 하고 있다.) 왕건은 신라의 공주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신라의 귀족들을 관대하게 대하였다. 그는 후삼국의 유민들을 포괄하는 국가를 건국하였고 한반도에서 진정한 통일을 성취하였다. 고려왕조는 약 500년간 통지하였고 융성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문명을 성취하였다.
서울 북쪽에 북위 38도선이 지나는 개성에 도읍을 정한 고려 왕조의 귀족은 근대에 까지 계속된 귀족제도의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이 귀족들은 귀족의 특권과 정치권력을 결혼동맹과 토지와 중앙 관료직의 통제를 통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계급적 지위를 세습제도를 통하여 절대 무너지지 않도록 강화하였다. 고려는 땅을 가진 귀족이 자신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유교 또는 불교 교육을 받고 수도인 개경에 거주하는 학자-관료계층과 하나로 만든 사회적 형식을 만들었다. 학자와 지주는 한 사람이자 동일인이었으며 모든 경우 토지로 이루어진 부와 관료적 지위는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 중심에서 유교의 통치술에 영향을 받은 관료제가 등장하였다. 이는 지방의 호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여 강력한 군사적 계층에 의하여 지탱되는 일본과 유럽의 봉건적인 성읍도시 형태, 토지지배, 주권의 분할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어떤 면에서 한국은 강력한 성읍의 호족이나 군사 지도자들이 중앙의 권력에 대항하였던 9세기와 10세기에 봉건주의적 양식에 근접하기는 했다).
13세기에 이르러 고려 정부에는 문반과 무반이라는 두 집단이 존재하였다. 이 시기에 무신들이 보다 강력하였지만 이후 둘 모두는 양반(두 계급)으로 알려졌다. 귀족의 아래에는 농민, 상인, 서기와 같은 양민이 있었으며 그 아래는 계급제도의 밖에 존재하는 백정, 갖바치, 광대와 같이 천민이라 불리 우며 마을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가며 자신의 신분이 그 자손에게도 이어지는 이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예신분 역시 세습되었으며(모계세습), 노예가 고려 사회의 3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정치적인 양태를 “농경적 관료주의”라고 하여 봉건주의와 별하고 이러한 체제가 최고로 발달한 형식을 갖춘 이후 조선시대에 다시 짚어보기로 한다. 이러한 사회적 체제가 수 세기에 걸쳐 발달하였지만 기본적인 특징은 중앙관료권력과 지방의 호족 사기의 강력하고 지속된 긴장관계이다. 국가 통치와 철학에 있어서는 중국의 체제와 유사하지만 중국보다는 깊은 뿌리를 가진 지방의 권력으로서 토지 소유와 지방에서 귀족의 지위를 혼합한 일본의 봉건적 제도와 유사하며 약간의 예외를 빼면 중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에타와 부락민 같은 천민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체제를 광저우 삼각주와 같이 벼농사에 의한 부의 축적이 지배적이었던 중국의 해당 지역의 체제와 비교할 수는 있지만 중국이 송대이후 세습적 신분제를 대부분 포기하였기 때문에 중국보다는 사회적 변동이 적었다.
고려 건국 이후, 측근들은 왕조의 통일을 지원한 대가로 토지(또는 봉록)을 받았고 이들에겐 세금 징수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동시에 대토지 소유 가문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영구히 소유하였고 후손에게 물려줄 수가 있었으며, 토지의 산물은 세금을 제한 후에 주인이 처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국의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라는 규정의 효력에도 불구하고, 토지는 사유재산을 구성하게 되었다. 토지 대부분이 지대를 지불하는 소작민에 의하여 경작되는 이러한 체제는 수많은 소작민과 노예들이 경작하는 엄청난 부를 산출해내었으며 그 본질적인 틀은 이후의 조선왕조와 일본 식민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가문의 관료는 상당히 보험적인 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토지소유는 귀족적인 지배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관직에 오르는 것보다 중요하였다. 개성이나 서울과 같은 수도에 거주하는 부유한 귀족 지주는 초기 고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관점에 따라서) 득이 되기도 해악이 되기도 하였으며 공평한 토지 재분배는 유교적 개혁주의자나 근대 자본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토지에서 일하는 농민에게 있어 탈출구는 산으로 도망하는 것이었다. 어떤 고려창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Let us live, let us live,
Let us live in a green mountain,
Eating wild grapes and vine berries
Let us live in a green mountain.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랏다.
또 다른 농민들은 왕조를 뒤흔들었던 12세기 말의 반란과 같은 반란을 일으켰다. 1198년 만적은 개성의 노예들을 다음과 같은 감동적 언변으로 개성의 노예들을 선동하려 하였다. 개성 북산에 모인 노예들에게 한 연설은 다음과 같다.
황후장상의 씨가 있는가? 없다. 때가 왔고 누구든 그 자리에 이를 수가 있다. 왜 우리만 뼈빠지게 일하고 상전의 매질들 당해야 하는가? 각자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노비문서를 불 태워 이 땅에서 노비제도를 끝장내면 우리 각자가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
고려의 귀족은 결코 아무 쓸모 없는 계급은 아니었다. 이들은 동시대의 송왕조(960-1279)대에 등장한 화려한 중국의 문명에 감탄하고 이와 교류하였다. 공식 외교관들과 일반 상인들은 고려의 금과 은 그리고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 송의 비단과 도자기와 서적과 교환하였다. 섬세한 송나라의 도자기는 고려의 장인을 자극하여 보다 섬세한 상감청자를 만들도록 하였으며 청자의 청녹색 광채가 지닌 투명함과 정교한(주로 꽃이나 동물)상감 문양은 그 이전 이후에도 비교할 것이 없는 12세기 고려 청자는 귀족들의 취향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후 일본의 도공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꾸미지 않고 투박한 도기도 있었다. William B. Honey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최고의 고려의 도기는 독특할 뿐만 아니라 가장 우하하고 투박한 도자기이다. 여기에는 도기가 지녀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마치 조용히 행복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듯해 보이며, 너무도 가난한 시절 이것이 지닌 우아함은 또 다른 면에서 감탄스러운 거친 고난을 드러내 보인다. 이 고려의 도자기는 중국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중국처럼 한국도 무역선을 보냈으며, 수도 근처 예성강 하구에는 국제적인 항구가 있었으며 여기서 아랍의 배들은 향신료와 약품을 고려의 가죽과 모피와 교환하였다. 일본과의 교류는 더 많았으며, 이러한 사실은 당시 동아시아의 대단히 유동적인 국제체재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며 이후 “은둔 왕국”과는 대비되는 자신감에 넘치고 국제적인 고려를 상상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상상할 수밖에 업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록할 수 있도록 하는 자료가 우리에게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송대의 급격한 상업적 산업적 발전과 이성계와 세종 시기 즉 1405~1433년 사이에 이루어진 7차에 걸쳐 페르시아만과 아프리카 해안에 이르는 정화의 원정에서 정점에 달한 광대한 무역망에 대하여 연구해 왔다. 무슨 이유로 이렇듯 풍성한 시기가 끝이 났을까? 동일한 질문은 고려에 대하여도 할 수가 있다. 송나라와 고려의 발명품들이 서구에서 재 발명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무슨 이유로 과학과 자본주의 근대화로의 지속적인 발전이 없었는가? 최고의 역사가들 조차도 이러한 진보라는(따라서 시대착오적) 논리에 빠져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Fernand Braudel 조차 자신의 화려한 경력의 말미에 극동지역의 부동성과 자신들의 방식에 대한 비정상적인 신뢰에 대하여 당혹해 하고 이 지역이 퇴보하였는지 또는 “현상을 유지”하였는지에 대하여 고민하였으며 무슨 이유로 서구에 오랜 동안 앞서다 “추월당”하였는지에 대하여 궁금해 하였다. 그의 잠정적인 해답은 동아시아 문명은 “매우 이른 시기에 성숙하였지만 자신의 본질적 구조가 거의 변화하게 하지 않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저명한 역사학자의 장기 지속(longue duree)라는 개념에 대한 현대적 관점에서의 질문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만일 동아시아의 문명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만일 “자신들의 방식에 대한 신뢰”가 핵심적이라면 오늘날 동아시아의 자본주의가 위협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변화에 둔감하다면 인류역사상 유래없이 짧은 시간 동안 극적으로 변화한 이유는 무엇인가? 동아시아에서 역사는 상당히 변화가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만큼의 지식을 갖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Brudel은 이 시대 최고의 역사학자일지도 모른다. 그저 당신은 모든 것을 바르게 설명하려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내용에서 무엇을 배워야만 하는가 – 우리의 훌륭한 역사가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인간은 한번에 한쪽씩 바지를 입을 수 있다는 오랜 야구의 금언에서 배워야만 한다. 고려의 한국인들은 우리처럼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었으며 부모를 공경하고 아내를 사랑하였으며 자식들에 대하여 걱정하였고 삶의 기회들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죽음을 맞이 하였고 온전한 창조적 능력을 소유하였다. 또한 고려의 방식은 어느 날인가 수 세기가 지나 심지어 Braudel 같은 역사학자 조차도 버리지 못했던 – 발할라(이상향)를 향한 역사의 상승 – 변화와 진보와 동요의 방식보다 더 좋은 것이라 여겨지게 될 것이다. 언젠가 프랑스 혁명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은 마오쩌뚱은 “대답하기에 너무 이르다”라고 말하였다. 프랑스의 진보에 대한 동양의 지혜…
불교는 고려시대에 유교와 공존하였으며 일상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종교적 신념에 대한 절충주의적 특징은 현대 한국에 까지 이어졌다. 한국인들은 유교적이고 불교적이며 동시에 기독교 신자인 경우가 많다. 고려의 승려들은 팔만대장경으로 알려진 거대한 목판 불교 경전을 만들어 냄으로써 종교적 행위를 조직화하였다. 첫번째 대장경은 일생에 걸친 노력 끝에 1087년에 완성되었으나 사라졌으며 또 다른 대장경은 1251년에 완성되어 아직까지도 해인사에서 볼 수가 있다. 그 정확성과 정교한 한자의 조각은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20여개의 대장경중에서 가장 훌륭한 대장경이 되도록 해주었다. 1234년에 고려는 이동식 금속활자를 발명하였는데 이는 유럽보다 200년 정도 빠르다.
한편, 최충과 같은 유학자들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기 위한 서당을 설립하였으며 이 두 철학적 사조는 별다른 문제 없이 이전처럼 공존하였다. 고려의 불교 또한 다른 세상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승려들은 장사, 농경, 가축, 양조, 고리대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국교로서 자신의 철학을 정치적 권력과 결합시켰다. 결국 고려와 이후에 승병이 나타나게 되었다. 승병들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친 것처럼 악의 군대를 정복하는 고려는 여진의 침입을 막았다.
고려 문화의 전성기는 내적 무질서와 몽고의 성장과 함께 나타났으며 몽고는 13세기경 전 세계를 휩쓸었다. 고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1231년 몽고군이 침입은 고려 정부가 강화도(현대 인천 북쪽)로 후퇴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몽고 기병들이 물을 무서워하는 것을 이용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이 죽고 200,000명이 포로로 잡혀간 1254년의 보다 파괴적인 침략이 있은 후 고려 정부는 몽고의 지배에 굴복하였고 왕은 몽고의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몽고는 고려인을 징집하여 고려의 조선소에서 만든 배를 이용한 1274년과 1281년의 실패한 일본의 공격에 동원하였다. 카마쿠라 막부는 전설에 따르면 “신풍” 도는 kamikaze라고 알려진 적절한 태풍 덕에 두 번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몽고의 영향력이 미치던 마지막 시기에 강력한 관료집단(사대부)이 등장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수도 외곽에서 살았으며 유교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사용하여 몽고의 지원을 받고 있는 지배가문들의 과도한 통치를 비난하였다.
명(1316~1644)에 의한 몽고의 몰락은 왜구와의 많은 전투를 통하여 강력해진 무반 집단들이 권력 다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명이 고려에 남은 몽고의 영토에 대한 영주권을 주장하자 고려 조정은 친몽고파와 친명파로 갈렸다. 두 장수가 요동반도의 명나라 군대를 공격하려 자신 군대를 출병시켰으나, 그 중 한명인 이성계가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꾸었다. 이성계는 압록강에 도달하자 방향을 바꾸어 개경으로 진격하여 순식간에 개경을 순식간에 함락하였다. 그리고 이성계는 한국의 가장 긴 왕조이며 금세기까지 지속된 조선(1392-1910)을 건국하였다. 새로운 국가의 명칭은 조선으로 15세기 전의 고조선의 시절을 떠올리게 하며 그 수도는 서울에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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