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및 아시아 대륙 최초의 자유 혁명의 진정한 정치인, 이승만 평전
(그의 독립정신이란 책자를 기본으로)
이재원(2022.8.28.일,옅은구름,18~28℃)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자유대한민국을 세운 분이며, 국민 개개인 모두의 근본적 자유를 안팎으로 보장한 분이다. 한국의 수많은 정치인 중 실질적 정치철학을 논할 수 있는 자는 이승만이 유일하다. 현재로서도 최초이자 유일한 일인이다. 그 누구도 이 더 이상은 없다. 이분의 행동과 사상과 철학은 후학이 학문적으로 얼마든지 논하고, 연구자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분에 대한 책으로 ‘독립정신’을 구입하였다. 비봉출판사로, 2018년 5월5일이 초판으로, 22년 4월20일자로 초판8쇄이다. 많이들 사 보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늦은 감이다. 귀하고 소중한 책이다. 2000년도 이전에 미리 나왔으면 하는 책이다. 퇴직을 하고 난 후에야 볼 수 있으니 너무나 아쉽다. 나만의 홀로 알기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의 연보를 보니 교정을 한 이가 너무나 큰 실수를 하나 했다. 다 잘하셨는데 그만 하나가 크게 빠졌다. 바로 본처(박승선,1875~1950, 호적 전 이름: 박소저)에 대한 이야기가 홀랑 빠져 있다. 자유의 고귀한 정치를 베푼 분의 큰 인연인 본처가 소실된 것이다.
이승만 이분은 유라시아 최고의 정치적 거목이다.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무(無)에서 유(有)로 자국의 백성들을 시민으로 화(化)하게 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정치체제로 심어 놓고 또 대대로 번영케 한 유일한 분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아직까지 이분의 업적에 도달한 분, 자체가 없다. 정치를 고귀하게 더 이상 달성하신 분이다.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운명지운다는 것을 확연히 몸소 자행(自行)하여 보여주신 분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였다. 그리고 오해(誤解)의 역사에 대한 민중의 원망과 다가 온 책임도 피하지 않고, 일일이 기록해 놓고, 오로지 다 가지고 갔다.
이분은 조선의 백성들을 해방과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의 시민으로 통째로 격상시켜 주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으로서 건국의 일성이 ‘민권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정체의 기본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라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파하였다. 이분은 자유를 정치목적으로 삼은 아시아의 유일한 정치거목이다.
그런데 본처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영부인으로 프란체스카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하나마 한줄 나오는데 본처와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해 놓았다. 무릇 자유라는 것은 단 한 사람의 필부(匹夫)나 필부(匹婦)라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이승만 이분의 본처에 해당하는 분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삭제를 한 것이다.
간략하게나마 본 카페지기가 전달하면 ‘이승만(1875~1965)은 귀국 후 미국에서 1934년부터 동거한 25년 연하의 오스트리아인 이혼녀 프란체스카 도노(1900~1992)와 정식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박승선을 1949년 8월 27일 친족관계 부존재소송을 통해 동의도 없이, 그의 비서 이기붕(1896~1960)시켜 임의로 이혼 처리한다. 박승선에게는 불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승만은 정치에서의 안티고네인 비극을 선택한 것이다.
난데 없이 이혼 처리된 박승선은 그 후 6·25사변 때 북괴 남침의 서울 두 번째 점령 시 집 담의 벽에 붙인 북한 노동당의 선전유인물을 손으로 뜯어 제거하다가 인민군에 끌려가 총살되었다.’ 어쩌면 이 사건은 박승선으로 봐서는 잘 된 일이다. 본명인 박소저로 미련 없이 돌아가 그 역시 개인 이승만과의 현세인연을 끊고 스스로 홀로의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박소선도 자유인의 하나로 대한민국 국민 전체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저 사진에서 보는 당시 내 남편 이승만의 수의도 내가 홀로 삯바느질하여 번 돈으로 마련한 옷이다. 내 아니면 누가 했겠는가? 5년 7개월 간의 한성감옥에 국사범으로 갇혀 있을 때 영치금도 다 내가 삯바느질로 벌어서 내었다. 내 아니면 영양실조로 죽었다. 그리고 내가 불행하다고 떠들지 마라. 나라를 팔아 망국 조선인이 된 주제에 남의 흠을 들춰내어 떠드는 너희들이 통째로 불행한 것이다. 너희 꼬라지부터 먼저 알아라.'
설사 이승만이 국부로 추앙을 받더라도 박소선은 자기 몰래 이혼 처리한 이승만을 공개적으로 얼마든지 망신 줄 수 있다. 그리고 이승만도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 싫어서 등등으로 책임은 안 져도 망신은 끝날 때 까지 감내해야 한다.
그래도 박승선은 시어버님은 존경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박승선이 혼인을 하게 된 것은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1835~1912)의 사주풀이 때문이었다. 무당에게 6대 독자 혼사를 위한 점을 봐달라 했더니 ‘맹인’(시각장애인)에게 장가를 보내야 출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봉사’(시각장애인을 칭하는 옛 말)와 혼인시킬 수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던 이경선은 맞춤한 며느리감을 찾아냈다. 같은 동네(지금의 서울역 건너편)에 사는 가난한 집 규수 박소저였다. 박소저는 오른쪽 눈에 장애가 있는 처자였다. 그렇게 이경선은 정신승리하면서, 독자 이승만의 출세를 위하여 가부장의 권위로 장애가 있는 박소저를 며느리로 맞이한 것이다.
연보에서 한줄로만 달랑 처리하기엔 프란체스카 여사님은 영부인으로 한 일이 너무나 많았다. 대미(對美) 등 국제외교에 있어서 비서(秘書) 이상의 일을 한 것이다. 이승만 본인을 위해서도 프란체스카와 재혼을 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사실은 사실대로 전달을 해야 한다. 아시아 대륙에서 자유를 최초로 크게 강조하고 체제로 심은 성공한 거목 정치인의 본처로서의 대우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존중, 아니면 최소한의 인정인 것이다. 교정자는 너무나 큰 실수를 하였다. 실로 아쉽다.
이승만 이분에 대한 정치역정과 정치사상과 정치철학은 온전히 후학들의 몫이다. 조선백성들에게 자유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심어준 사람이다. 또 공산독재세력으로부터도 나라의 자유를 온전하게 지킨 것이다. 실로 신(神)이 보낸 너무나 큰 정치적 거목이며, 아시아 대륙에서 ‘자유를 실현한 미답(未踏) 최고의 정치인’이다.
필부필부(匹夫匹婦)인 일반백성들을 모두 다 시민자치의 자유인으로 격상시킨 실질적 성인(聖人)이다. 현재도 아시아 대륙은 여전히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독재(獨裁)와 속박(束縛)이 그 나라의 정치제도이다. 여전히 ‘시민의 의미’와 ‘정치적 자유’를 모르고 살고 있다.
이승만은 정치가 정확하게 뭔지 아는 유일한 정치인이고, 목적이 분명한 자유의 정치철학자다. 그리고 왕정이 아니라도 좌파든 우파든 독재자는 정치인이 아니다. 마치 왕을 정치인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왕이 통치하면 왕족과 귀족, 관료와 일반백성만이 모여서 있을 뿐이다. 독재자는 아예 정치의 싹을 잘라 버린다. 그냥 영도자와 영도자 가족과 일반 백성의 피(被)영도자뿐이다.
정치가 행동이나 사상을 넘어 철학이 되려면 반드시 자유가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행동이나 사상, 철학이 인간다운 목적을 가지려면 반드시 자유가 충분히 있어야만 한다. 비(非)자유는 비(非)인간적이다. 이에 걸 맞는 유일한 분이 바로 이승만 인 것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연보(年譜)에 조강지처로 수고한 본처에 대한 이야기를 고의로 뺀 것이다. 이는 자유에 대한 모독(冒瀆) 이상의 원초적 죄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