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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장군, #부산진성, #임진왜란 발발, #동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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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여행] 임진왜란 시초의 영웅 鄭撥[정발] 장군을 만나고..........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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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여행] 임진왜란 시초의 영웅 鄭撥[정발]장군을 만나고..........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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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이웃이자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닐본! 뻔뻔하고 靈惡[영악]스럽기 짝이 없는 すみません[스미마셍]의 나라 닐본
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에 참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 중 하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위안부와 강제 징용된
우리 국민들에게 죄송하고, 미안하고, 부탁하고, 고맙고, 감사하다고 ‘스미마셍’ 이라고 말할 줄 모르는 철면피 하고도 파
렴치한 쪽바리 새기들, 아리가또 고자이마시타[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감사했다, 고마웠다] 의 진정한 뜻도 모르면서
자국어라고 개나, 원숭이처럼, 왈왈 떠들어 대면 그게 다인지 아는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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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 국민은 일본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왜놈들이라고 자주 표현한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의식 때문일까? 그것은
절대 아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누구에게나 지면 안 된다는, 한민족!, 게르만 민족보다도 더 우수한 韓民族[한민족]의 DNA
같은 것이 고대 때부터 傳統[전통] 적으로 내려온 우리만의 氣質[기질]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민족이다. 특히 전쟁이든 스
포츠이든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과 붙으면 무조건 된 벼락 내려 이겨야 하는 일종의 使命感[사명감] 같은 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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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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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鄭撥, 1553~1592)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백운(白雲)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부산 첨사를 지내다가 임진왜란 때에 부산진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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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유랑자는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고 또 그런 심리적 潛在意識[잠재의식] 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에선 일본인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일본의 옛 이름인 倭[왜국 왜]에 고유어 者[놈]를 붙여 왜놈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물론
이거는 욕설이다. 어쩌면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한국어 욕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예로, 어느 일본인이 한국에서 생활한
그것을 기록한 수필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에, 한국에 남아있던 일본인 할머니가 가장 싫어했던 욕이 다름 아닌 왜년이라고
했다는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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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왜년은 일본 여자를 비속하게 부르는 용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과거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던 역사로 인해 오늘
날까지도 그 친일파 놈들이 득실거리고 한마디로 기생충처럼 나라를 좀먹고 또한 억지를 부리며 개판을 치고 있는 현실 속
에 살고 있다. 유랑자의 유년기 시절 어른들의 입을 통해서 귀에 따갑도록 들어 박힌 말이 있다. "왜놈 순사 온다"라는 말로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데 사용되었던 기억들이 있다. 1990년대 후반까지는 초등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에서 왜놈
과 쪽바리와 함께 일본을 욕할 때 널리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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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백운, 본관은 경주이다. 1579년(선조 12) 무
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해남 현감, 거제 현령, 위원 군수, 훈련원 부정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부
산진 첨절제사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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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현재는 왜놈과 쪽바리나 원숭이 같은 말을 그리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대 이
상이면 역시 일본을 가리킬 때 무의식적으로 쪽바리, 원숭이 같은 새끼들이라는 말이 무심코 입에서 튀어나온다. 이는 평
소에 알게 모르게 조상들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몸에 배어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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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일본 놈들은 야비한 잔머리 굴리는데는 1등이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닛본도를 가진 영원한 숙적,
왜놈! 우리의 역사 속 선조들은 오랫동안 그 닛본도에 많은 희생을 당했고 굴욕의 시간을 보냈으며 또한 국모까지 잃었다.
그 닛본도의 서슬 퍼런 칼날은 2025년 지금에도 虎視眈眈[호시탐탐] 우리나라 국민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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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은 백석리 안쪽의 야산 중턱에 있는데, 봉분은 단분(單墳)이며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의
규모는 높이 180㎝, 둘레 13m이고 주위는 높이 45㎝의 호석(護石)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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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회만 닿으면 과거 우리나라를 통으로 삼켰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젠 어림 반 푼어치도 없
는 소리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는 매번 쪽바리 왜놈들의 닛본도가 승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세계 해전
사에 빛나는 해군 제독 聖雄[성웅]이 순신 장군이 중심에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투에서 패배 없이 빛나는 승
리를 거두고,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았던 해군 제독은 이순신 장군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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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육상까지 포함해 세계 역사를 고루 둘러본다고 해도 이처럼 한산대첩에 견줄만한 전설적인 신화를 이룩해낸 명장은
프랑스 민중의 딸인 영웅 잔 다르크 정도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의 한민족도 그렇다, 風前燈火[풍전등화]
같은 무수한 외세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영웅들과 민초들은 크고 작은 전쟁터에서 굳건하게 영토를 지켜냈고 또한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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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전투가 끝나고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유품(옷과 갓)만 수습하여 의관장을 치렀으며 후에 무공이 알려져 좌
찬성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충장으로 부산의 충열사(안락서원)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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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을 따라 죽은 애첩 愛香[애향]비인, 烈妾愛香旌閭事蹟碑[열첩애향정려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 뒤로
▶양경공묘소사적비(良景公墓所事蹟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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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 장군의 투구와 의관을 수습해 왔던 말의 무덤인 義馬塚碑[의마총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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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奴龍月事蹟碑[충노용월사적비] :~사내 종 용월(龍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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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사적인 사건 속에 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忠壯公[충장공] 鄭撥[정발] 장군도 포함된다. 수많은 임진왜란이란 전쟁의
시초가 되었던 부산 진성 그 화마 속에서 홀연히 몸을 던진 영웅 鄭撥[정발] 장군!, 오늘 유랑자는 깊은 산속에서 애첩 애향
과 쓸쓸하게 잠들어 있는 장군의 묘를 찾았다. 김성한의 소설 [7년 전쟁]에서는 어째서인지 송상현보다 18세 연상으로 나
온다.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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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발발 2달 전 왜장 다이라 시게마스[平調益]가 마지막 교섭을 위해 부산으로 오는데 이때 鄭撥[정발] 장군이 다이
라 와 동래부사 송상현을 찾아간다. 그리고 대치 상황, “戰卽戰矣 不戰則假我道[전즉전의 불전즉가아도: 싸우지 않으려
면 길을 빌려달라]” 동래부사 송상현은 답한다,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싸워 죽긴 쉬워도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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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앞으로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놓여 있고, 상석 아래에 석축이 좌우로 길게 늘여져 있다. 그 앞에 장명등
(長明燈)이 있고, 이 장명등을 중심으로 무인석과 망주석(望柱石)이 각각 1쌍씩 좌우로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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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부산 진성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鄭撥[정발]1553년[명종 8]~1592년[선조 25]은 마지막까지
싸우다 40세의 젊은 나이로 함흥 기생 출신 애첩 愛香[애향?~1592.자살]과 함께 전사하고 만다. 2004년 KBS 드라마 [불
멸의 이순신], 본격적으로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리는 57화 도입부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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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4년 13일, 鄭撥[정발] 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판국에 왼 사냥?
하겠지만 그래서 간혹 전쟁의 낌새를 모르고 놀러 나갔다는 오해도 있지만, 이 시기에 사냥은 그 자체가 요즘 같으면 기동
훈련이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사냥을 통해 군사훈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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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折衝將軍行釜山鎭僉使[절충장군행부산진첨사],贈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兼[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判義禁府
事五衛都摠府都摠管諡忠壯鄭公撥之墓[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시충장정공발지묘], 配 譄貞敬夫人豐川任氏 祔
左[배 증정경부인 풍천임씨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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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비가 있었다고 전하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1982년에 오석(烏石)으로 다시 묘
비를 건립하여 봉분 우측에 배치하였는데, 규모는 총 높이 320㎝, 비 높이 200㎝, 너비 65㎝, 두께 3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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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산이 많은 나라인 한반도 특성상 군대가 사냥을 하려면 무기를 들고 동료들과 함께 산에서 뛰어야 했고 훈련 이후엔
잡은 동물의 고기라는 보상도 주어지는 효과적인 훈련법이었으며 사실 정발도 일본의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군사훈
련의 일환으로 사냥을 시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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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상황에서 왜선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적의 수를 확인하는데, 적의 수가 아군의 수십 배에 이르자 전선을
모두 自沈[자침] 시키고 부산진성 농성에 들어간다. 당시 부산 진성을 수비하는 조선군은 정규군 800명과 피난민 2,200명
총 합이 3,000여명 이었으나 공격해 온 일본군은18,7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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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 장군 묘는 부인 풍천 임씨와의 합장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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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새벽부터 관민이 합세하여 결사 항전을 하지만 전투 발발 4시간 만에 왜놈,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에 성은 함락당하고 정발 장군도 전사한다. 임진왜란 사극 본작에선 '흑의 장군' 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푸른색 갑옷을 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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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부산진성에 이어 동래성도 함락당했다는 장계를 받은 선조는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은 조무래기 같은
왜구를 맞아 어찌 하루도 못 버티고 성을 내주는 거냐며 불같이 화를 낸다. 이는 선조실록 1592년 8월 7일, 11월 25일 기
사에서 정발이 정말 죽은 게 맞는지 선조가 확인하는 대목이 있다. 전쟁 초기의 혼란으로 파천 직후 조정이 파악한 초기 전
투는 김해, 밀양,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 정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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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첩 애향(愛香)은 자결하였고, 노(奴) 용월(龍月)도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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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채가 우람하고 단정하여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글을 읽었다. 그 순절(殉節)
한 일이 다만 하루아침에 강개한 심정이 북받치어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함양해 온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
이라고 전한다.[정발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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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왜군에 희생된 동래부 관민은 5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학살의 흔적은 현재 부산지하철 4호선 수안역에 있는 동
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죽은 자만 서러운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름지기 사내고 장군이라면
국가와 민족과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정발 장군은 그 의무를 다하고 전사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
을 걸고 초계와 같이 목숨을 버렸던 정발 장군을 두고 누가 애첩 운운하며 반문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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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 장군에 관한 이야기는 또 있다.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김홍표가 연기했다. '흑의 장군'이라 불리는
모습에 걸맞게 검은 철릭과 두정갑을 입고 나온다. 부하들과 사냥하다가 절영도로 들어오는 수백 척의 왜선을 보고 전투준
비를 하는데 20배 이상이나 많은 왜군을 상대로 결사 항전하나! 결국 전사한다. 그런데 대체 역사 소설에서도 鄭撥[정발]
장군은 대부분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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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부산진첨절제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산진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기 직전 화살이 바닥났다. 이에
어느 비장(裨將) 한 사람이 그를 잡아당기면서 달아나도록 청하자, 그가 웃으며 “남아(男兒)는 오직 한번 죽을 따름이다.
감히 다시 도망하라는 말을 꺼내는 자가 있으면 즉시 목을 베겠다고 명령을 하달하라. 나는 마땅히 이 성의 귀신이 되겠으
니,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에 사졸들이 모두 울었으며, 이후 그 자리를 떠난 자가 한 사람도 없
었다고 전해진다.[정발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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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장수 申恪[신각]이나 김시민 같은 인물들은 생존하는 소설이 많은데 정발은 생존하는 경우가 드물다. 재미있는 것
은 일본에 연재했던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에 26화 등장. 백성들을 부산진 안으로 들이며 병사들과 함께 싸우지만 결국 얼
마 가지 않아 함락당하고 전사한다.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에서는 종팔이라고 언급되는데, 아내가 놀랍게도 논개다.
원래 근본적으로 뻥구[뻥긋]하면 잔머리 잘 굴리고 구라[거짓말]치는데는 1등인 왜놈들이니까, 그리려니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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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撥[정발] 장군에 대한 史傳[사전]적 기록부을 복기 차원에서 옮겨 보면.....,
1553년(명종 8)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너븐골)에서 간성 군수를 지낸 아버지 정명선(鄭明善,15
17~1566)과 관찰사 남궁숙(南宮淑,1491~1553)의 딸인 어머니 함열 남궁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7년(선조10)
별시 무과에 병과 7위로 급제한 후 해남 현감, 거제 현령 등의 지방 외관직과 비변사 낭관 등 중앙직을 두루 거쳤다. 관련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1589년 1월 비변사에서 무장을 不次[불차] 채용할 때 들어갔고 이순신, 이복남, 박진, 등과 함께 이
름이 거론되고 동년 7월 30일 국경을 넘어 염탐하던 여진족을 활로 쏘아죽였다는 실록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북방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유능한 장수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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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궁마(弓馬)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정발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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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묘는 1979년 경기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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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은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몇 달 전에 그는 부산진 첨절제사로 부임하여 부산진성 수비를 맡았다. 1592년 3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이 담긴 투서를 건네고 왜관에 있는 일본인들이 급히 피신하는 것을 보고 수상한 낌새
를 느끼고는 부산 앞 바다에 있는 절영도에 주둔하며 군사훈련과 사냥을 시행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날에도 절영도
로 사냥을 나갔다가 일본 선단이 접근한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처음에는 교역선으로 오해하여 경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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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군이 육지에 근접해 조총을 쏘아대니 외침임을 알아차리고 배를 탈취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전선 3척을 자
침시키고 왜관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잡아 가두는 한편, 백성들을 성안으로 들이고 농성에 돌입했다. 1592년 4월 14일
새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이 부산진성으로 밀려들면서 정발이 지휘하는 부산진성 수비군과 격돌함에
따라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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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 장군은 슬하에 1남을 낳았는데, 아들 정흔(鄭昕)은 전라수사(全羅水使)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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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과 그가 지휘하는 수비군과 인근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은 그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전했고 사실상 최
전선에서 요구되는 모든 조치를 성공시켰으나 6배나 차이 나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 때문에 4시간여 만에 전투는 패배로 끝
나고 정발 장군도 40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는 검은 옷을 입었다고 흑의 장군이라고 부르며 이는 18세기 화공 변박의 부
산진 순절도에도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전사 당시 관직은 절충장군(정3품 상계 당상관) 행 경상좌도 부산진 수군첨절제사였다. 전면 패주하는 혼란한 상황에서 초
기 전황에 대한 파악이 늦어 한동안 전사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으나 아내 임 씨가 진정을 넣고 임진년 말에 전사가 확인되
어 공로를 인정받았다. 적진이었던 일본 측에서의 평가는 매우 후했는데 전후에 조선 통신사 황신에게 부산 성 전투에 참
여했던 일본 장수 마츠라 시게노부는 "우리는 부산진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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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기록인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
사들"이라고 서술했다. 정발과 부산진의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측
했던 일본군의 처지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백성들이 낫 들고 달려들고 지붕 기왓장을 들어내서 성벽에서 던져
대니 평소 전투하는 거 구경하러 오던 일본 농민들을 생각하다가 큰코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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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의 전투는 다이묘나 유력 가문들 간의 세력 다툼이었던 데다 한쪽이 패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패전 측의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졌으며 처벌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 또는 측근
들, 가신, 또는 그 일가 위주로 진행될 뿐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의 경제력을 증가시키는 요소라서 굳이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침을 이미 경험해 봤던 조선 주민들에겐 다른 얘기였다. 참전한 고자에게 문의 비망록에 따르면 성이
함락된 이후 주민은 물론 가축은 물론 길고양이마저 죄다 도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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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撥[정발]장군 묘 찾아가기
▶경기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 34-1
▶상 세 문 의: 연천군 문화체육과 031-839-2144
홈: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0510000,31&pageNo=1_1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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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관광 정보는 이곳에서 :
https://www.yeoncheon.go.kr/tour/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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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연천군청 관광과 (031)-839-2061
◼ 문의 대표전화 : (031) 839 - 2114(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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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 연천에서 실속 힐링하는 체험 A코스(동선 최소)
►*첫째 날(09시 시작)
*전곡선사박물관/선사유적지→초성김치마을에서 김치체험→ 점심식사→ 임진강 주상절리→ 당포성→ 숭의전지→백학
자유 리조트(숙소:저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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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아침식사→두지리 황포돛배(농촌체험)→ 호르고루성→고랑포 역사공원→ 경순왕릉→ 점심식사→ 태풍전망대방문
(25/09말까지 보수중)→ 연강 갤러리→ 허브빌리지→ 귀가(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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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 연천에서 실속 힐링하는 체험 코스(동선 최소)
►*세째 날
*댑싸리공원→ 미라클 타운(커피)→ 그리팅맨→ 연천 급수탑(점심식사)→ 연천승마공원에서 승마체험→ 애심목장 치즈
낙농체험(2시간30분소요)→ (숙소)에서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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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째 날
*아침식사→ 5사단 열쇠전망대 방문(화:휴무)→ 신탄리역(구 경원선 철도중단점)방문→ 차탄천 주상절리→ 점심식사→
조선왕가(한옥 호텔/글램핑/카바나)→ 종자와 시인 박물관→ 한탄강 물문화관→ 제인폭포→ 귀가(연천 여행 끝)→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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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안내
‣방문지 사전 예약 안내
*열쇠전망대: 사전예약 필요없씀. 당일입장 가능함(단 매주 화요일 휴무)
*태풍전망대: 25인 이상 단체 방문 시, 출입 7일전 사전 출입 신청을 하셔야 합니다.
*출입 신청서, 서약서, 출입자 명단 신청(연천군청 관광과 [팩스] 031-839-2480)
*출입 시간: 09:00~16:00 [열쇠전망대, 태풍전망대]
*열쇠전망대, 태풍전망대 출입시 모두 신분증을 지참하셔야 합니다. (출입자 명단 지참을 요함, 신분증이 없으신 분은 출
입 불가)
*해설사 상주 상시 해설(경순왕릉, 숭의전,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전곡리 유적)
*허브빌리지는 사전에 별도의 예약이 되어야 해설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체험시설은 별도의 입장료 또는 체험비가 소요됩니다.
*숙소 또는 체험시설 이용 방법은 홈페이지의 체험 안내를 확인 및 사전 예약 후 이용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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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관광지 관리사무소(예약 안내): 031-830-0030
*조선 왕가: 031-834-8383(한옥호텔/글램핑/카바나)
*애심 목장: 031-834-3601(010-3724-9241, 010-8711-3601):치즈 낙농체험(2시간30분소요)
*연천 승마공원: 010-3187-0488(010-8775-1936)
*초성 김치마을: 031-835-0381(농촌체험)김치체험
*허브 빌리지: 031-833-5100.(010-4784-5105)
*나룻배 마을: 031-833-5005(농촌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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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안내
*입장료 안내 - 전곡선사박물관(일반/청소년/단체 및 비고),
*(요금):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전곡리유적=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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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빌리지 입장료(호텔,펜션)
*허브빌리지 예약 : 031-833-5100(010-4784-5105)
*입장료: 일반(중학생 이상):5.000원
*36개월 이상~초등학생:3.000원
*단 체 20~99명: 4.000원(100명 이상 3.000원)
*문 의:~연천군청 관광과 031)839-2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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