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양반여성의 온양온천 유람기 - ‘온양온수노졍긔라’
김일환(호서대)
온양온천은 삼국시대 이래 국내 최고의 온천지로 유명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온천으로 이용되어 온천 행궁인 온궁이 세워지고 역대 국왕과 가족들이 질병치료를 목적으로 빈번히 찾아왔다. 세종대 지어진 온궁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불타 파괴되었고 온행도 일시 정지되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현종대 다시 지어졌고, 조선말기 대원군에 의해 함락당, 혜파정이 새로 지어져 온궁의 모습은 조선시대 내내 잘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들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 침탈하면서 그들은 일찍부터 온양온천의 상업성에 주목하고 온천장의 탈취를 기도하였다. 1904년부터 수차례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온궁을 탈취하고 푯말을 박아 조선인들을 몰아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폭력과 협잡으로 온궁을 접수한 일본인들은 온천장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의 온양온천에 관한 기록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약간의 관청문서와 황성신문 등 신문자료가 일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당시 온양온천의 실상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는 새로운 여행기가 발견되었다. ‘온양온수노졍긔라’라는 국문체로 된 온양온천 유람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자료는 대전에 있는 동춘당 송준길 선생댁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현재 대전대학교 강현경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 ‘온양온수노졍긔라’는 개화기 시대에 온양 온천의 여러 가지 풍물을 말하고 있고, 여성이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온천자료로서는 보기 드문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시기는 일본의 강요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으로 조선의 국권이 강탈되어 민심이 흉흉한 해인 1905년 동짓달이었다. 대전 회덕의 송촌에 사는 양반 신분의 광산 김씨 노부인이 유교적 가정 안에서 60평생을 동동거리며 살다가 때 마침 경부선이 개통되어 기차가 운행된다는 소문을 듣고 64세의 나이에 난생처음 기차를 타는 설레임을 안고 온양온천을 찾았다. 그녀는 양쪽 팔에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풍기가 있는 비슷한 처지의 양반 부인들과 온양온천을 찾아 목욕할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당시는 일본인들이 온궁을 탈취하고 설비를 완료한 후 온천영업을 시작한 1905년 6월부터 불과 5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는 동짓달 초8일에 다른 3명의 부인들과 온천나들이를 결정하고 초10일에 노비 3명을 동행하여 ‘한밧졍거졍(대전역)’에 나가 기차를 타고 4박5일간의 여정을 잡고 온양 땅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기차가 빨리 달리는 놀라움 체험 끝에 목적지 역인 천안에 도착하였다. 당시 천안은 온양온천 나드리객들이 모여드는 중간 기착지여서 숙박업이 번성하던 때였다. 김씨부인 일행도 천안역근처의 신축한 여관에서 숙박하였는데 다음날이 비가 온 탓에 하루를 더 묵었다. 이 동안에 그녀는 개화기의 신문물을 만나는데 이틀동안 여관에 숙박을 하면서 그 곳의 거창한 건축규모와 호사스런 방안의 장판, 벽지, 요강, 대야, 이부자리 등을 보았다. 당시 이 여관은 바깥채가 25칸이었다. 또 기둥에 매달아 놓은 100냥이나 되는 시계를 발견하고 값을 물어보고 시간을 알리는 소리에 신기해하기도 하였다. 밤에는 마당한가운데 광명등이 환하게 켜 있는 것을 보고 황홀하다고 하였다.
김씨 일행은 12일 아침에야 가마를 타고 온양으로 출발하였다. 일행은 가마를 타고 가면서 천안-온양간 거리의 풍물을 살펴보는데 조선인이 끄는 인력거에 일본인 남녀가 희희락락하며 가는 모습에 분개하고,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이곳저곳 땅을 파헤친 자국을 보며 한탄한다. 당시 천안에서 온양까지는 40여리로 도보로 가면 하루 종일 걸어야 했다. 10리마다 주막이 있어 김씨 일행도 중간의 주막에서 점심을 사먹었다. 오후 나절에 현재 구온양에 도착한 일행은 여기서 다시 온천장까지 7, 8장을 더 가야함을 새로 알았다. 김씨 부인은 현재의 ‘구온양’을 ‘溫陽’이라하고 온궁이 있는 온천장은 ‘溫水’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마침내 도착한 온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온천으로 명성이 있어 솟을 대문이 있는 高樓巨閣들이 즐비하게 지어져 있었고, 이미 일본인들이 온양온천에 찾아 들어와 북쪽지역에다 온천시설을 해놓았음을 보았다. 또한 일본인들은 남녀 구별없이 그곳을 자주 왕래하며 온천을 하는 것을 보고 광산김씨는 커다란 문화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일본인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며 조선인들이 다행히 그들과 구분하여 남쪽의 온천탕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갖는다.
당시 여러 온천탕의 문 앞에서 야단스럽게 손님을 맞기 위한 호객행위가 벌어졌는데 광산김씨 일행은 호객군을 물리치고 湯直이가 운영하는 집을 찾아 온천할 집을 정하게 된다. 이때 집주인은 온탕에 들어가기 전에 성황당과 미륵 앞에 가서 정성을 올리는 의식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溫泉神에 제사지내는 전래의 溫井祭가 민간까지 확산된 결과이다. 광산김씨는 거절하고 주인이 대신할 것을 부탁하자 주인은 두 군데에 나아가 온천욕이 무사히 이뤄지기를 비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 형태는 집주인이 간단한 술상을 차려 성황당과 미륵 앞에 나아가 축원을 하고 욕탕에서 온천객에게 물을 품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고 난후 온탕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탕실이 있는 가옥은 3칸짜리 기와집으로 사람이 들어가면 문을 잠갔다. 구조는 목욕하는 탕실의 바닥에 바둑돌 같은 자갈을 깔아 목욕을 위해 물을 부으면 바로 빠지게 되어 있었다. 온천물은 풍부하게 나왔으며, 욕탕이 2개인데 쌍으로 水石을 쌓아서 깨끗하게 돌마루를 놓아 만들었다. 탕실의 기둥이나 대들보는 원래 아름답게 채색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아 이제 낡아 희미한 자국만 남아 있었다.
목욕하는 방법은 목욕을 沐과 浴으로 구분하여 沐을 할 때는 탕실에서 물을 품어주는 사람이 있어 이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품삯은 3냥 반이나 되었다. 이날은 잠간 목욕을 하고 쉬다가 저녁을 먹었는데 사첩반상이 나왔고 맛도 좋았다. 이튿날 본격적인 목욕을 하였는데 아침 식전에 탕과 약주를 먹고 나서 목욕을 하였다. 마침 쇠고기 장사가 왔기에 고기를 사서 조반을 먹고 본격적으로 목욕을 시작하여 6번이나 물을 품어 삯만 20여냥을 지불하였다. 이제 다시 대문안에 있는 온천탕으로 옮겨가 上湯에 들어가서는 발목도 실컷 지지며 온몸이 취할 듯하게 목욕을 하였다. 김씨는 목욕하면서 둘러본 탕실이 낡았음을 개탄하고 돈을 벌어 수축하면 이름이 날 것인데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또한 그 이유는 욕탕이 주인이 없고 해마다 탕직이 돌아가면서 운영하는데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당시의 온천운영의 관행을 알려주는 좋은 기록이다.
이날 온천욕을 끝내고 김씨 일행은 온천장 일대를 구경하는데 官司와 저자거리를 보고 溫宮도 구경하였다. 김씨는 당시 대궐은 솟을대문이 있고 마당 한 옆에 온천샘이 볼만하여 황홀하다고 하였다. 온궁 주변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서 두레박으로 동네사람들이 물을 퍼내고 물지게로 져내는 것을 보며 대궐을 구경하였지만 일본인들이 온궁을 탈취하여 많이 살고 있어 아녀자의 두려워하는 마음에 더 많이 구경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제 숙소인 탕직이 집에 되돌아와 작별을 하고 길을 떠나오는데 늦을까 염려하여 가마꾼과 하인을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천안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날씨가 청량하여 길걷기가 수월했다. 하루 종일 걸어 천안읍내에 도착하니 저녁나절이 되어 하늘에는 달이 떠올랐고 기차정거장에 불빛이 아스라이 보이는데 전봇대에 가로등이 휘황하였다.
김씨는 다시 천안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아침에 천안역사 주변의 여러 가지 풍경을 구경하면서 그 내용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녀는 천안에서 다시 가차를 타고 대전에 도착하였는데 천안에서 사시(9-11시)에 떠나 미시(1-3시)정도에 대전을 도착함을 신기해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광산김씨가 온천이 끝난 후 귀가하여 지은 여행기에 나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제가 1904년부터 온양 행궁을 침탈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 후 온궁을 강탈한 후 대규모의 온천장을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때 마침 개통한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대전에서 온양으로 온천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시대상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탕치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던 온천행이 근대화의 과정을 타고 고급스런 레저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보듯이 ‘온양온수노졍긔라’는 개화기 때 온양온천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유람기로서 섬세한 양반여인의 필치로 당시 온궁과 온천장의 풍물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역사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