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18호>
시/ 강기화
부산시
광주시
제주시
…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시를 붙여 주었어요
시인이 되어
시처럼 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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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줄/ 이남순
탑골공원 담벼락을 비빌 언덕 삼아
숨어든 패잔병처럼 구부정히 숙인 행렬
하루를 건너가는 길, 한 끼마저 놓칠세라
한때는 파독 광부로 사막의 노동자로
가난만은 이겨보자 깃발 든 전사였는데
사냥을 끝낸 견공들 맘 부릴 데 없는 지금
흘깃대다 모르쇠로 공무수행 가버리자
바람이 격문 읽듯 투레질 해대는데
현실과 현장의 오늘, 줄이 자꾸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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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연꽃/ 이명희
사유의
얼룩들이
가시 되어 엉겨 붙은
까칠한 마음자리
한 겹 허물을 벗어
꽃빛을 밀어 올렸다
인연이란 울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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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19호>
겨울 저녁/ 정호승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엄마는 큰 가마솥에 깨를 볶으신다
아버지 송아지 판 돈 어디서 잃어버리고
몇 날 며칠 술 드신 이야기 또 하신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도 더 듣는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에
부지깽이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겨울 저녁
*<시의 어조와 화자의 설정>(문광영) 가운데 인용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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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마음으로 살아요/ 서수정
비가 내리면
온몸으로 비를 사랑하고
바람이 불어오면
온몸으로 바람을 사랑하며
찬란한 햇살을 사랑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하고
사랑의 향기만 만들어 내어
벌나비의 사랑을 받는
꽃의 마음으로 살아요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꽃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이 온통 사랑의 향기로만
가득할 것입니다
꽃에게 절망이란 없습니다
다만 꽃도 피어나는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겨울 시린 칼바람도
묵묵히 견디는 인내로
꽃은 다시 피는 겁니다
꽃의 마음으로 살아요
지금은 고난의 겨울이지만
곧 봄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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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속삭임/ 최용수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든 찾아드립니다
기억에 남아 잊을 수 없는 것들은
나의 깊숙한 가슴속에 모두 보관돼 있지요,
옛적의 그 모습을 오롯이 간직한 채로
좁다란 골목 안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비 오는 밤, 우산 없이 혼자 오면 좋지요
희미한 가로등이 서 있던 그곳에
영구 보관 중이니 언제든 다녀가세요
만나보고 같이 떠나가도 괜찮습니다
어제, 할아버지가 첫사랑 그녀를 찾아갔고
한 할머니는 어머니 모셔갔지요,
이승의 마지막 날 함께 불탈 거라며
청춘 말인가요, 온새미로 돌려드리지요
하지만, 몸은 물려줄 수 없어 죄송합니다
젊었던 그때를 맞아 밤새 춤추다가
새벽녘에 돌아가세요, 처용이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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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김창재
저것 봐
저녁
향기 잃은 해가
비틀거리며
분도기처럼 구부러져
내
빈 지갑 속으로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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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강혜지
꽃이 지는 것을
아느냐 물으면
눈멀어
볼 수 없다
무지하여
알 수 없다 하리라
심연에서 피어난
너만이 내게 꽃이라
시침, 초침 멈추고
호흡이 다 하는 날
내가 먼저 지노라
너는 영원히 지지 않는
봄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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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리는 창가에서 1/ 박재근
제법 굵은 비가 성글은 아침이다. 서울에 사는 선배 두 분의 안부다. 벌레
먹은 가랑잎이 바람의 힘으로도 굴러가지 못하는 듯 두 분은 병원에 하릴
없듯 주저앉아 망구(望九)의 무상한 세월은 열락(悅樂)의 제단에 올려놓고
돌아갈 길을 지우는 중이었다. 이제사 건강해야 할 터인데, 염려나 쾌유를
빈다는 말은 사치이며 좀 더 살기를 바라는 소망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
다. 그들이 무덤에 들었다 해도 오늘처럼 안부를 묻기 전 죽음을 알 턱도
없을 것이고 알기까지는 한참 후일 것이다. 자식들이 아비의 후배나 친구
의 주소도 관심 없음 이었으니 알림도 없을 것이고, 설령 알았다 해도 나
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조만간 그러할 것이다. 우리들의 이별만이 아니라
이별은 이렇게 냉정하다. 살아있을 때만이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며 그것은 우정이고 존경일 것이고 말 없음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우리들의 뜰, 그리고 그해 봄,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그 시절은 이제 곧 먼 바깥 세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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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뜰의 봄/ 안승남
새봄이 앉아있는 메마른 늙은 나무
긴 세월 피워올린 봄바람 정성 속에
부풀어 터질 것 같은 하얀 목련 봉오리.
지난 밤 봄비 속에 꽃잎이 어찌 될까
꼭두새벽 어스름에 찾아간 앞뜰에는
여섯 쪽 하얀 꽃잎이 눈부시게 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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