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올문학 2022 여름호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이어령(1934. 1. 15 ~ 2022. 2. 26)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이어령 유고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열림원. 2022년 3월 발행
교육자이며 문학평론가로 시, 소설, 수필 희곡까지 저술하며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만인의 스승이셨던 어어령 선생님께서 지난 2월, 88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슬픈 일은 무엇보다도 자식의 죽음을 보는 일일 것이다.
최고의 석학이신 이어령 박사님도 자식의 불행과 죽음 앞에서는 힘없이 눈물짓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으리라.
선생님의 딸 이민아 목사는 10년 전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 목사는 죽음에 앞서 이혼과 아들의 죽음을 겪는 등 평탄치 못한 삶으로 아버지의 세월을 그지없이 아프게 했다. 딸의 고난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아마도 이어령 선생님의 생애는 10년 이상 단축되지 않았을까.
결국 자신도 암 선고를 받고 죽어가면서 생전에 딸에게 못 다한 절절한 사랑의 사연을 하늘나라의 딸에게 띄우신 것이다.
헌팅턴비치는 딸 이민아 목사가 살던 곳이다. 딸의 외로움과 병마에 허덕이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던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이나 애통하셨겠는가?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이 시집의 원고를 넘기신 며칠 후 선생님께서는 위와 같은 서문을 유선으로 출판사에 전하셨다고 한다. 그 며칠 후 선생님은 영면하셨고 다시 며칠 후 유고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누구나 죽는다는 공평함이 때로는 공평치 않아 보일 때가 있다. 이런 귀한 분에게는 사회와 이웃에게 빛이 되어줄 수 있도록 이승의 시간을 더 드려야 되는 것이 아닐까.
딸의 권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살아오셨건만 신도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영역을 보면서 “하나님은 과연 공평하신가?” 묻고 싶어진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1937~2007)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다시올文學 51
2022 봄호 권두시
아~~아, 권정생 -이름만으로도 진한 아픔과 함께 또한 미소가 번져온다.
예수 그리스도에 비견되는 너무도 고귀한 성자!
평생을 병마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이웃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신 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원고지를 채워
아동문학가로서 우뚝 서신 분,
더욱이 이분이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하고도 그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
를 창작하셨다는 것은 깊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신춘문예에도 두 번이나 당선 되셨고 너무도 유명한 『몽실 언니』는 읽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16년을 종지기로 일하셨던 교회의 목사님께서도 “권정생 선생님은 우리 목사들보다도 한
차원 높은 삶을 사신 분”이라고 말한다.
가난에 맺힌 한도 많으시련만 10억이 넘는 인세를 모두 어린이를 위해 내 놓으셨고 사후
의 인세도 모두 북한 어린이를 위해 써주기를 유언하셨으니 어찌 보통 사람의 머리로 감히 상
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라니? 너무도 역설적이지만 선생님께서는이 말을 결코 시적 아이러니
로 차용하신 것이 아닌 자신의 진심을 그대로 표출하신 것이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만 한다면 무기가 왜 필요하고 군대가 왜 필요하겠는가?
국방의 의무가 없어도 군대 훈련소가 없어도 세상은 하루하루가 더 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두 번이나 겪으신 선생님이 꿈꾸는 세상은 다툼이 없는 세상, 전쟁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는.....온통 사랑으
로만 채워진 세상이다.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사람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돕는 길이다”
이웃이 인간답게 살도록 돕는 일 - 그 일을 위해서 선생님은 가난한 자, 낮은 자를 찾아 아낌없이 자신을 바치셨다.
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숭고한 정신은 그의 귀한 작품과 함께 우리 문학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사진 / 문효치
지나가는 바람이 고와 찍으려 했는데
허리 굽은 노파가 찍혔다
대숲 아래
동그랗게 놓여 있는 집
막, 문을 열고 어정쩡 서 있는....,
다시올文學 51
2022 봄호
모든 예술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작가의 내면을 보여주게 된다.
사진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니....
시인은 지나가는 바람이 고와 찍으려? 했는데
왜 허리 굽은 노파가 찍혔을까?
허리 굽은 노파는 누구일까?
나는 당연히, 시인의 어머니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기쁠 때나 슬플 때, 고난에 처했을 때 수호천사처럼 나타나 손을 잡아주는 분.
시인은 아마도 어느 날
‘바람이나 쐬고 오자.....’ 며 집을 나섰을 것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고향을 향했고
‘대숲 아래 / 동그랗게 놓여있는 집‘에 이른 것이다.
어머니의 집? 대숲 아래 동그랗게 놓여있는 집은 아마도 어머니의 무덤이 아닐까?
굽은 허리로 어정쩡 서계시던 노년의 어머니,
금방이라도 “너 왔니?” 하실 듯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어른만 보면 어머니가 눈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요즘 긴 시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나는 거기에 반발이라도 하듯 짧은 시를 좋아한다.
감히 말하기는 송구하지만, 긴 시를 읽다보면 대개 중복된 이미지, 늘어진 수사로 시적인 담백함이 없이 지루함을 느껴 중간에서 읽기를 멈추게 된다.
시의 본령이 압축과 생략임을 생각할 때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할까?
시- 참 어렵다.
독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면 시가 싱거워지고 너무 많이 감추다보면 독자로서 접근하기가 어려워진다.
사물과 사건에서 엑기스만을 뽑아내어 짭쪼롬하든 씁쓰레하든 독자의 오감을 자극해야 하니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나비 숲 / 길상호
학교를 마치고 나면 아이는
나비채를 들고 숲으로 간다네
축축한 이파리 너울너울 뛰어넘다가
어제는 없던 무늬가 발등에 피어난다네
노랑나비는 모자로 쓰고
파랑나비는 가방으로 메고
초록나비는 티셔츠로 입고
반티무릉, 슬픔을 없애주는 곳
색색의 날개가 상처를 덮어주는 곳
신은 썩은 나무둥치에 앉아
종일 나비를 그려대느라 팔목이 아프고
그늘과 햇빛의 양날개를 편 채
조금씩 저녁 쪽으로 이동하는 숲
아이는 이곳에서 잠시
등에 꽂힌 핀을 빼낼 수 있다네
다시올文學 51
2022 봄호
학교 끝나고 나비채집을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를 보여준다. 나비채를 들고 훨훨 나르는 나비를 따라 웃고 떠들며 뛰는 아이들, 녹음이 우거진 숲에서 나비를 잡으며 아이들의 몸과 마음도 나비처럼 흥겹게 춤추는 듯 하다.
나비 모자를 쓰고 나비 가방을 메고 나비 셔츠를 입고....
그런데..... 착각이었다.
반티무릉? 슬픔을 없애주는 곳?
여기에 이르러 나는 이 시가 내 생각처럼 그렇게 동화적이 아님을 깨닫고 반티무릉을 검색해 보았다.
인도네시아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그 중에 슬라웨시라는 섬에
반티무릉이라는 국립공원이 있는데 공원 입구 아취에 큰 나비조각상이 세워져 가히 나비의 정원임을 보여준다. 150여종의 세계에서 가장 많은 희귀한 나비가 모여 있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공원 근처에서 나비를 채집하여 나비수집상에 팔고 공원 입구의 상점들도 모두 나비채집표본을 판매한다고 한다.
슬픔을 없애주는 곳이라는 뜻의 지명, 반티무릉.
각색의 나비가 바람을 일으키며 쉴 새 없이 날고 있으니 가져간 슬픔도 나비와 함께 날아가 버리겠지.
아이는 이 나비들을 채취하며 즐겁고 행복한 동화의 세계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비를 팔아 모자도 사고 신발도 사고 옷도 사는 것이다.
신은 이 아이를 위해 끊임없이 나비를 만들어내고....
유언 / 타라스 세브첸코( 1814. 3. 9 ~ 1861. 3. 10)
나 죽거든 부디
그리운 우크라이나
넓은 벌판 위에
나를 묻어주오
그 무덤에 누워
끝없이 펼쳐진 고향의 전원과
드네프르 강 기슭
험한 벼랑을 바라보며
거친 파도 소리 듣고 싶네
적들의 검은 피
우크라이나 들에서
파도에 실려
푸른 바다로 떠나면
나 벌판을 지나
하늘나라로 올라
신께 감사드리겠네
내 비록 신을 알지 못하나,
이 몸을 땅에 묻거든
그대들이여
떨치고 일어나
예속의 사슬을 끊어 버려라
적들의 피로써
그대들의 자유를 굳게 지키라
그리고 위대한 가정
자유의 새 나라에서
날 잊지 말고 기쁘고 다정한 말로
날 가끔 기억해주오,
네이버에서 발췌
“여보, 당신 주려고 내가 화장품을 훔쳤어”
한 러시아 병사가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아내에게 속삭이는 전화내용이다.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까지 무차별 학살과 폭행을 자행하며,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고작 아내의 화장품 따위란 말인가?
전쟁은 모두에게 참혹한 패배가 있을 뿐, 승자란 없다.
아직도 구소련의 지배욕을 버리지 못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은 국제사회는 물론 자국민들로부터도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영토를 탐내지 않는다. 다만 우리 것을 빼앗기지는 않겠다”
옳은 말 아닌가?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단호한 선언과 함께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결사항전에 나섬으로서 쉽게 항복을 받아 욕심을 채우려 했던 푸틴의 전술은 세계인들의 비난의 화살과 함께 난항에 빠지고 있다.
연일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남의 나라 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 이런 위기가 우리에게도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인 까닭이다.
비록 지금 아무 일 없는 듯 하지만 북한은 동족인 우리를 향해 장난질하듯 미사일을 쏘아대며 언제라도 대한민국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고 또한 우리의 인접국들도 혹여나 옛 제국주의의 지배욕을 꺼내들지 않을까 모두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인간에게는 왜 남의 것을 탐내고 약자를 무시하는 좋지 않은 습성이 있을까.
전쟁은 결국 그러한 습성의 발로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자들의 오판으로 귀한 생명을 앗아가고 집과 재물을 불태워 깊은 상처를 남기며 인간 정서를 피폐화 시키는 그야말로 저질스런 힘자랑에 불과한 것이다.
‘적들의 피로써
그대들의 자유를 굳게 지키라‘
얼마나 처절한 절규인가.
타라스 셰브첸코는 우크라이나의 화가이며 민족시인이다.
우크라이나 최고의 명문 대학이 세브첸코의 이름을 딴 <타라스 셰브첸코 키예프 국립대학교>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우크라이나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가를 짐작케 한다. 또한 키예프에서 가장 길고 멋진 거리가 세브첸코 거리이며 우크라이나의 공식행사 때마다 그의 시를 인용하고 써서 붙이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제를 풍자한 시를 발표하여 두 번씩이나 러시아당국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으며 건강을 잃게 되어 그토록 그리던 조국 우크라이나 땅을 밟지 못한 채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전쟁을 꿈꾸는 자들이여, 그대가 일으킨 전쟁으로 그대의 고향, 그대의 어머니, 그대의 자식이 병들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꼭 한 번 새겨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