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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4:14-22)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누가복음 강해 (31)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을,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4:16-21)
갈릴리로 돌아왔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세 번의 시험을 걸었으나 전부 실패하자 얼마 동안 떠났습니다. (13절) 그 대결에서 겨우 졌다거나, 주님에게서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였다면 절대 쉽게 물러날 사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풍요하고 안락한 에덴동산에서도 이브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의 씨앗을 살짝 뿌린 후에 아주 교묘한 거짓말로 속여서 원죄에 빠트린 사탄입니다.
주님은 먹고 마실 것이 없는 너무나 열악한 상황에서, 그것도 사십 일이나 금식하여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사탄은 나름대로 자신을 갖고서 덤볐으나 주님은 이브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서 그분의 뜻만 따를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세 번의 시험 다 주님에겐 아예 씨가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 떠났다는 것은 작전상 후퇴일 뿐이므로, 앞으로 더 집요하게 주님의 사역을 훼방할 것입니다. 우선 주님과 일대일로 직접 대면해선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어리석고 완악한 백성들을 동원해서 간접적으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올무를 걸 것입니다.
누가는 주님의 첫 번째 공사역으로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성경 말씀을 가르쳤으나 배척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특별히 누가만 기록하고 있기에, 바로 앞의 기록과 연결하면 사탄이 숨을 고른 후에 주님과 벌인 간접적인 대결의 전형적인 예인 셈입니다. 그 전후 사정을 잘 살펴서 사탄이 어떻게 백성들을 음흉하게 이용하는지 추정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둘 사항이 있는데, 네 복음서를 종종 사건의 발생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강조하려는 주제에 따라서, 또는 논리의 흐름에 맞추어서 재배치했습니다. 사탄과의 시험은 예수님 혼자 겪은 일로서 나중에 사도들에게만 가르쳐 주었기에, 지금 백성들로선 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사방에 퍼졌다고 말한 소문은 (14절), 당연히 광야 시험이 아니고 다른 일에 관한 것입니다.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기에 간단히 말씀드리면, 주님은 제자들을 택한 후에 먼저 유대 지역에서 일 년 정도 이미 사역한 것으로 봅니다. (요2:13-4:2) 요한은 주님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는 도중에 수가 성에 들러 우물가에서 불쌍한 여인을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요4:3-4) 유대 지역에서 사역하시던 중에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갈릴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4:12, 막1:14, 눅3:19-20, 요4:1-4) 따라서 주님이 유대에서 사역한 일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역까지 퍼진 것입니다. (14절) 그리고 나사렛에 이르기 전에도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면서 뭇사람에게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15절)
은혜의 해가 왔다.
주님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교육받았고 열세 살 이후로는 안식일마다 나사렛의 회당에서 예배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 고향에 돌아왔고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본 것입니다. (16절)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 설교하며 가르칠 때는 칭송을 받았는데,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누가는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이라고 합니다. (16,17절) 당시에 회당장이 허락하면 누구나 모세 율법이나 선지서 말씀을 택해 낭독하고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낭독하고 강론한 말씀은 이사야서 61:1,2 말씀입니다. 이사야서는 길어서 두 개의 두루마리로 이뤄졌다고 하는데 후반부의 61장이라, 순서를 맡은 자가 둘째 두루마리를 펼쳐서 주님께 건넨 것입니다. 주님이 낭독한 말씀이 그 안식일에 읽어야 할 차례였는지, 아니면 주님이 이사야서의 둘째 두루마리를 달라고 요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라고 했으므로, 누가가 기록한 말씀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고른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서 원문의 뜻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가 해방될 것이라는 예언이나 이미 역사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이 먼 미래의 일까지 함께 계시하므로 그 말씀은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래서 메시아에 예언의 뜻을 더 분명히 드러나도록 원문을 조금 수정해서 인용했습니다. 인간 랍비도 원문의 뜻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수정해서 인용 설교할 수 있는데, 모든 성경 말씀의 원저자인 주님이 그렇게 하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그 수정한 맥락을 더 세밀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마음이 상한 자’라는 문구는 빼고 ‘눈 먼 자를 다시 보게’라는 문구를 추가했는데, 마음이 상한 까닭도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재해석한 것입니다. 또 ‘갇힌 자’라는 표현을 ‘눌린 자’라고 바꿨는데, 단순히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만을 대변하지 않고 인간 사회에서 어떤 이유로든 소외 배척 핍박 받는 자 모두를 망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원문의 2절에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는 남기되 이어지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생략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복하는 날은 주님이 재림하여 행할 마지막 심판을 계시한 것이라서, 아직은 사역 초기이므로 가르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대신에 결론으로 제시된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일’이 강조되었습니다.
마지막에 강조하신 은혜의 해는 율법에서 규정한 ‘희년’(禧年, Jubilee)을 의미합니다. (레25:8-55)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난 만 50년째에는 이스라엘 안의 모든 채무는 해소됩니다. 상거래로 진 부채를 모두 탕감해 주고, 빚 때문에 남의 집에 종이 된 자는 자유민이 되고, 전당 잡은 토지도 남은 채무가 얼마가 되었던 빚진 자인 원주인에게 무상으로 돌려주어야만 합니다. 탕감을 받는 데에 필요한 자격 조건은 전혀 없으며, 또 어떤 유보 조항도 부가되지 않습니다. 모든 빚진 자에게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완벽한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얼마나 정확히 지켜졌는지는 모르지만, 이 규정을 제정한 하나님의 뜻은 확실합니다. 우선 안식년과 희년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려는 뜻이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공동체에는 절대로 굶어 죽는 자가 나오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생업은 전부 토지에 연관되므로 그 토지를 처음 가나안 정복 후에 제비 뽑아 나눴던 상태로 50년마다 되돌립니다. 당시 수명을 따지면 50년은 사람의 일생입니다. 따라서 희년은 부가 대대로 세습되어 특별한 가문에 편중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로서 이스라엘에는 태생적 금수저가 생길 수 없게 한 것입니다. 대신에 아무리 실패했던 인생이라도 매 50년마다 공평한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희년이야말로 인간의 노력 실력 자격 신분과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조금이라도 빚진 자는 그 은혜의 해가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희년이 되어서 모든 부채를 탕감받고 토지를 반환받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큰 기쁨과 감사로 경배드릴 것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를 권력으로 착취 수탈한 탐관오리나, 율법 규정을 어기며 불법으로 축재한 악덕 부자는 싫어할 것입니다. 희년은 그래서 하나님도 도무지 용서해 줄 수 없는 그런 악인들을 빼고는 모든 백성이 한바탕 큰 축제를 벌이는 해입니다.
너희에게 지금 응했다.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할 때는 일어서서 해야 하나, 설교는 자리에 앉아서 행했습니다. 주님이 낭독을 마치고 책을 덮어서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자, 즉 설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주님을 주목했습니다. (20절) 주님이 인용한 말씀은 당연히 회당에 참석한 나사렛 고향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증거했다’라는 말의 뜻은 ‘칭찬한다’로 영어 성경은 “speak well of”라고 번역했습니다. 또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이라고 표현했는데(22절a), 주님이 말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들이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정반대로 바뀝니다. 주님의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절b)라고 서로 웅성거렸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주님을 멸시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 본인을 따로 떼어서 각각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너무 은혜로워서 놀랐지만, 그런 설교를 한 사람이 같은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쭉 지켜봐 온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서 더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평소 잘 알고 있는 회당장이나 다른 사람이 설교할 때는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설교 내용은 좋았어도 그런 설교를 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결정적 이유는 주님이 설교의 결론으로 선포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는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원문의 시제가 현재 완료 수동태라, 우리말로 ‘응하였느니라’라는 아주 부드러운 번역입니다. 원문의 뜻은 그보다 훨씬 더 단호하고 결정적인데, “이 예언이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고 그 효력이 지금 너희에게 작동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 애매한 표현이 전혀 아니며 아주 확정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 동네 사람들의 눈앞에 서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 바로 성령을 받아서 구원을 베푸는 자라고 스스로 선포한 것입니다. 나아가 희년 같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의 해가 지금 이 자리에 당신에 의해서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먼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이 아니라, 이미 성취되었고 지금 너희가 듣는 이 순간에도 그 은총과 권능을 너희들이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 약속을 성취하고 있는 주체가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자기 선언이며, 그와 동시에 회당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즉각적인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신적인 권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회당장, 율법사, 바리새인 랍비들은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을 막연해 보이는 장래의 소망으로만 설교했지, 지금 여기서 이뤄졌다고 선언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이 기록하는 모든 선지자도 여호와가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우리는 그에 맞춰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지금 당신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후로도 공사역 내내 내가 너희를 구원할 메시아이므로 나를 믿고 따르라고 직설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대표적으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선언했는데, 당신을 믿지 않으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대로 천국이 이미 이 땅에 도래했으니, 적극적으로 쟁취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고 따르면 지금 이 회당이 바로 희년의 축제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진주
그러니까 나사렛 사람들로선 곧바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동네 살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이 결혼하고서 호적 하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아들을 낳았으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애굽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아들 예수가 소년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비 요셉을 도우며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에 대해 어른보다 더 깊이 깨닫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열두 살 때 성전에 올라갔다가 랍비들과 율법에 관해 질의 토론하느라 부모와 사흘간 헤어졌던 에피소드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주님의 설교를 듣고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그의 어미 마리아가 동정녀일 때 성령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출생은 예수의 부모와 마리아의 사촌 엘리사벳과 그 남편 사가랴만 알고 있는 신비로운 비밀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이 완성된 후에야 밝혀질 스토리입니다.
나이 삼십이 넘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는 제자들을 모아 일 년 정도 유대 땅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또 이런저런 이적을 일으켜서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명성과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지만, 자기들 눈으로 주님이 일으키는 기적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예수가 성경을 은혜롭게 가르쳐도 그들에겐 평범한 이웃집 청년일 뿐입니다.
주님이 선언한 그 한마디는 너무 파격적이다 못해 감히 인간으로서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하나님과 동격의 위치에 두신 셈이고, 최대한 양보해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메시아는 시온의 성전에 임한다고 알고 있는데, 갈릴리 시골의 자기 동네에서 태어난 예수가 메시아일 리 없다는 것입니다. 자칭 그리스도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이비 이단 교주처럼 여긴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하나님은 물론이고 메시아라고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으므로, 조금 전에 은혜롭게 들었던 주님이 가르친 내용도 믿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24절) 그럼에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주님으로선 절대적 진리이므로 가르쳐서 구원으로 시급하게 초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행했다는 것은 안식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는 뜻이지만, 확대 해석하면 설교한 천국 복음의 내용도 항상 동일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와 갈릴리 다른 지역과 지금 고향 회당에 참석한 사람들의 사회적인 위치, 신분, 재산, 가문, 혈연 등이 각기 다 다를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하든 선포되는 메시지의 주제와 의미는 매번 똑같았던 것입니다.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땅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 산악 지대입니다. 당시에 학식 있고 경건하며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은 주로 유대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반면에 갈릴리는 비천하고 무식하고 가난한 자들이 많이 살았는 데다, 이방 족속들과 가까워서 종교적으로 불경건하다고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았습니다. (요7:52, 눅13:2) 그래서 주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사랑을 베풀긴 했지만, 유대 지역에서 먼저 사역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단순히 가난하고 핍박받는다는 이유만으로 편애 우대하지 않는다는 뜻도 됩니다.
바꿔 말해서 주님이 베풀 구원은 어떤 세상적인 기준으로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하시며 어느 누구에게도 제한과 장벽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를 나누며 가로막고 있는 모든 담을 허물어 줍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입관과 기준에 따라 주님을 너무 쉽게 판단함으로써,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구원의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생각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불행한 일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 인간에 대해서 편애나 차별은 전혀 없었으나, 완전한 인간이신지라 우리와 성정이 같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서 빨리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어도 고향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마음에서 더 정확하고도 자세하게 풀어서 구원으로 초대했을 것입니다. 누가도 이 사건의 중요성을 알고서 주님의 공사역에서 맨 처음으로 기록했습니다. 나사렛 사람은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돼지처럼 하늘에서 선물로 주신 가장 귀한 보배를 발로 차버렸습니다.
배척의 이유
이것이 고대의 나사렛 사람들만의 특유한 반응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편견과 선입관에 따라서 기독교와 예수님을 폄하해 버립니다. 간혹 성경을 다 읽어 봐서 잘 아는데 그런대로 의미가 있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고 비평 반발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나 신자가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믿지 않겠다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모든 부정적인 반응은 두 가지 맥락으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가 가르친 도덕적 계명들은 아주 우수해서 믿고 따를 만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남들보다 선하긴 해도 완전하지는 않으니까, 주님의 가르침을 더 배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겐 그대로 따를 의지와 능력이 충분히 있으니까 잘 배우면 스스로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데에는 전혀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비춰보면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뜻을, 즉 당신께서 지금 인용한 이사야서 예언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포로되었고, 눈이 멀었고, 눌려 있는데 도무지 헤어날 길이 없어야만 예수님을 믿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불신자들이 이 성경 말씀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된 적이 없고 자신의 도덕적 실력으로 남보다 착한 인생을 살면서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있으니까 굳이 주님의 일방적 용서의 은혜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또 다른 도덕 선생으로, 아무리 최고로 심오하고 경건한 차원이라 쳐도, 이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목적이었다면 굳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이유도 없습니다. 그 전에 유대인들이 주님을 그렇게 미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새로운 지식 얻기를 좋아하는 이방인들로부터도 존경받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도덕적인 종교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 모든 이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신화로 여기고 산상수훈은 배울만하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지 자기 내면이 철저하게 썩었다는 처절한 자각이 없습니다. 무조건적 일방적인 용서는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더 싫어합니다. 당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셔야 한다고 전도하면 왜 내가 사형수 죄인이냐고 크게 반발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인간의 영적 무지를 해결해 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이 저절로 솟아나듯이 자신의 내면에서 추악한 냄새만 난다고 영적으로 처절한 절망을 겪은 자만이 십자가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십자가 구원은 희년처럼 인간의 자격 조건 실력으로나 영적인 분별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택한 자에게 베풀어서 자신의 영적인 죽음을 절감시키게 해주며, 또 그렇게 되는 순간 신자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희년을 실감 나게 비유하면 한국 국민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 아닌 815 광복절과 같습니다. 독립운동하느라 수고 희생한 선열들의 공로를 무시하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객관적 현실로 따지면 당시의 한국은 일본 제국에 맞설 만한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일본 천황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한반도에 울려퍼졌을 때 감격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저절로 굴러들어 온 축복으로서 일본의 모든 눌림에서 풀려나는 은혜의 해였습니다.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너희를 내가 죽기만큼 사랑하니까 제발 그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너희의 모든 죗값은 물론이고 삶의 고통과 슬픔을 다 탕감해 준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앞으로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면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원이 온 천하에 임할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사실은 골고다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주님이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불러내었다는 사실을 나사렛 사람들도 이미 들어서 알 것입니다. 그들이 생업을 버리고 따른 것은 주님에게서 성령의 능력이 번져 나와서 희년의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목수의 아들이라고 주님을 거부한 것은,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도 일본을 잘 아는 데 절대 그럴 리 없으므로 절대 믿지 않겠다는 꼴입니다.
영적 안목이 열렸는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도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속박되었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분명히 포로이자 눌린 사람이었고 그것에서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군대와 무기라곤 없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어부나 일반인 몇몇 제자로는 거대한 로마 제국을 도무지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말로만 자기가 바로 그리스도라 칭하니까, 종교적 과대망상증에 걸린 것쯤으로 여긴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외적 기준만으로 판단하고서 배척했습니다.
바꿔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이 얼마나 썩었는지, 즉 자기들이 겪는 고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열방 위에 올라서서 자신들의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채워서 이생에서 자랑하고 싶다는 욕심에 가득 찬 것입니다. 그런 욕심이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원죄에서 발동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족속으로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기에 구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사탄이 주님을 얼마 동안 떠났으나 이 나사렛 회당에 숨어 들어와서 주님의 고향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시킨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은 에덴에서 사탄에게 속아서 자기만 높이려는 이브의 원죄에 묶여 있기에 그냥 가만 그대로 놓아두기로 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알고서 친하게 지냈을 고향 사람들이라도, 당장 돌을 떡으로 만들어 주지 않고, 풍요한 나라로 바꾸지 않는다면 절대 따르지 않으리라는 점을 영악한 사탄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사렛 사람들의 영적인 완악함을 탓하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나사렛 출신으로 그 시간 그곳에 있었다 쳐도 똑같은 반응을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도덕적인 가르침이 뛰어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너희를 묶고 있는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시니까, 그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거의 모두가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라서 자신의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채우며 이생에서 자랑할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달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가 주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은 일을 가장 먼저 기록한 까닭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그러니까 장차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배척할 것이라고 예시한 것입니다. 주님이 나중에 제자들에게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고 직접 가르쳤듯이, 복음은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로 먼저 흘러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 절대 아니라, 주님이 영적 장님이 된 우리 눈을 뜨게 해준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십자가 진리를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지금 희년의 은혜를 실제로 누리는지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혹시 예수님의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만 따르려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진정으로 사랑합니까? 이생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그분께 삶의 외적 축복만 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형편에 처하든 그분을 따라 걸어가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너무 좋아서 삶의 모든 차원을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원죄에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수시로 내 영혼이 포로된 것, 눈이 먼 것, 눌린 것들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갖고 나가서 빠짐없이 토설하고 있습니까?
(4/19/2026)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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