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들풀에서 줍는 과학 : 식물의 선구자 , 지의류 김준민 | 지성사 2006년 8월p25~p37
식물의 선구자, 지의류
*지구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강한 식물 생물의 세계는 무궁무진한데 특히 식물의 세계는 굉장히 다양하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식물종으로 지의류가 있다. ‘지의(地衣)’라는 한자어는 바로 땅의 옷이라는 뜻이니 땅바닥에서 자라는 식물체인 것은 미루어서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면 지의류 식물체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혹시 등산하다가 길옆에 있는 넓적한 바위가 이상한 회색빛 반점으로 얼룩덜룩해져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오래된 나무껍질에서, 소나무 숲의 땅바닥에서도 마치 말라죽은 이끼 같은 도저히 생물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너덜너덜한 조각을 종종 볼 수 있다. 지의류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번성할 때부터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어떤 지의류종은 성장이 대단히 느리다. 그 종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사원을 지을 때 엄지손톱만 했다가 예수 시대에는 100원짜리 동전 크기로 자랐고,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어린아이 손바닥 크기가 되었을 정도다. 인간의 세대로 따지면 무려 200세대가 지나는 동안 겨우 4배 커진 것이다. 물론 모든 지의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지의류는 불과 몇 년 만에 직경 10센티미터 크기로 자라기도 한다. 식물체 같기도 한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보잘것없는 지의류가 고대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을 정도로 적응력이 강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지의류는 사막의 찌는 듯한 더위와 툰드라의 가혹한 추위에서도 잘 견딜 수 있다. 지의류의 존재와 분포가 잘 알려진 것은 사실상 그것의 용도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지의류는 자연의 가장 극단적인 환경조건 속에서는 성장이 가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빚어낸 환경오염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 20세기 후반에 지의류가 다시 생물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이런 특성 때문이었다.
*조류와 균류의 공생 지의류가 식물계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1867년 스위스 식물학자 슈벤데너(Simon Schwendener)가 밝혔다. 물론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지의류의 존재를 알고 또 이용했지만 그것이 어떤 식물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슈벤데너는 바위나 고목의 줄기, 숲 속의 빈터 등에 붙어있는 희끄므레한 조각이 사실은 두 종유릐 식물, 조류(藻類)와 균류(菌類)가 공생하는 생물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발표했을 때 동료 학자들조차 그의 발견을 비웃었다. 어떤 연구자는 그 학설이 “붙잡아온 조류라는 색시와 폭군인 균류라는 신랑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이며 “터무니없는 요사스런 거짓말”이라고 조롱을 퍼붓기도 하였다. 지의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구성원인 조류와 균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조류라고 했을 때 흔히 하늘을 나는 새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조류는 해조류(海藻類)니 담수조류(淡水藻類)니 하는 식물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조류를 순수한 우리말로는 ‘말무리’라고 한다. 말무리는 광합성을 하지만 보통의 나무나 풀과 달리 잎이나 줄기, 뿌리 등으로 구별되지 않는 식물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어 자연히 물에 떠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데 식물성 플랑크톤이란 이처럼 물 위에 떠서 생활하는 단세포성 말무리들이다. 미역이나 다시마 등의 해조류도 말무리에 속하는데 이것들은 식물성 플랑크톤과 달리 다세포이고 엉성하게나마 뿌리나 줄기, 잎 등 조직 분화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무나 풀처럼 조직 분화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조류에 포함시킨다. 조류는 대체로 단세포성으로 바닷물이나 민물에 떠서 생활하지만 일부 조류는 단단한 표면에 붙어살기도 한다. 지의류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조류가 바로 이처럼 물 밖에 사는 고착성 조류들이다. 이제 균류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균류는 곰팡이다. 곰팡이를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는가? 균류는 스스로 광합성을 못하기 때문에 마치 동물처럼 다른 생물의 몸체나 그것이 생산한 유기물에 의존해서 생활한다. 이것이 바로 빵이나 떡에 곰팡이가 잘 피는 이유이다. 곰팡이는 균사(菌絲)라는 가는 실처럼 생긴 세포를 뻗어서 이동한다. 슈벤데너는 지의류가 조류와 균류의 공생체라는 이론을 처음으로 주장했지만 이 두 생물체 사이의 공생관계를 완벽하게 밝히지 못했다. 공생관계를 규명한 사람은 열렬한 아마추어 식물학자 포터(Beatrix Potter)였다. 그는 지의류에서 균류 협조자는 조류에게 물과 서식처를 제공하며, 그 대신 조류는 광합성으로 유기물질을 생산해 균류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확대경이나 현미경으로 지의류를 관찰하면 균류는 아주 촘촘하게 균사를 뻗어서 단단한 그물망을 형성하는데 그로 인해 공기 중에서 흡수한 수분을 오랫동안 가두어둘 수 있다. 조류는 원래 물속에서 자라던 식물이기 때문에 물 없이는 생존이 곤란한데 조류로부터 수분을 공급받기 때문에 균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균류도 바위 표면과 같이 척박한 장소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스스로 영양물질을 생산하는 조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류와 균류는 서로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상리공생의 전형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긴밀한 공생관계뿐 아니라 강인한 생명력도 지의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점이다. 기후가 건조해지면 두 공생자는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10년, 심지어는 1세기 동안 휴면한다. 오랜 세월을 견디는 동안 지의류는 바싹 말라서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되는데 설령 그런 단계에 이르더라도 비만 몇 방울 내리며 이내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지의류의 균류는 물을 접하는 순간 흡수한다. 지의류는 1,2분 짧은 시간에 자신의 원래 무게보다 20~30배나 되는 많은 물을 흡수해서 보유할 수 있다. 지의류가 물을 흡수하는 장면을 지켜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18세기 캐나다 항해자들은 지의류를 “굶주린 탐험가의 비참한 음식”이라고 불렀다. 보통의 지의류는 어른 손바닥 크기인데 말라있을 때는 껌처럼 두께가 얇고, 색깔이 거무스름하며 표면도 쭈글쭈글하다. 이런 지의류가 비에 젖으면 표면이 이내 반반해지고 심지어는 번쩍거리기까지 한다. 균류가 수분을 흡수해서 탄력을 가지게 된 결과이다. 바위에 붙어있는 지의류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뿌리개나 스포이트로 지의류 표면에 수분을 약간 뿌렸을 때 지의류 표면이 선명한 연두색으로 바뀌면 비록 죽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살아있는 것이다. 죽은 지의류는 그런 빛을 띠지 못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 이처럼 생명력이 강한 지의류는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극단적인 환경에서도 번성한다. 10여 년 동안 비가 오기는커녕 수분이라고는 잠시 지나가는 안개 정도가 고작인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서도 지의류는 생존한다. 낮에는 모든 걸 태울 듯이 뜨겁고 밤에는 얼음이 어는 고비 사막의 바위 위에서도 자란다. 지의류는 혹독한 추위가 사시사철 계속되는 북극에서도 발견된다. 고작해야 90종 정도의 풀들만 발견되는 극지방에서 2500 종류나 되는 지의류가 사는 것이다. 남극에도 400종 이상의 지의류가 사는데 바위 위가 아니라 바위틈에서 자란다. 여름에 눈 녹은 물이 구멍을 통하여 스며들고 또 햇볕이 바위를 따스하게 비출 때 왕성하게 자라다가 겨울이 되면 다음해 여름이 오기까지 완벽하게 휴면에 들어간다. 자연계에서 지의류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지상에 출현한 첫 식물체라는 점 때문이다. 빙하기가 지난 뒤 드러난 맨땅과 바위 위에서 지의류가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정착한다. 스웨덴의 저명한 식물학자이자 분류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린네(Carl von Linné)는 지의류를 “식생의 초라한 쓰레기”라고 부르면서도 그것의 선구적인 역할을 알아차렸다. 그는 껍질 모양의 지의류가 육상에 처음 출현한 식생이며 그들이 비와 대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알갱이를 양분으로 섭취한다고 기술하였다. 일찍부터 지의류는 용도가 다양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시체를 미라로 만드는 데 지의류를 이용했다. 지의류에서 추출한 염료는 품질이 희귀한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에 견줄 만하다. 스웨덴 사람들은 채취한 지의류를 발효시켜서 소주를 만들었고, 화학자들은 지의류 추출물로 만든 리트머스 시험지를 이용해 산성도를 측정하였다. 19세기 식물학자 맥밀런(Hugh MacMillian)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여러 가지 지의류로 병을 고칠 수 있고(···) 의복에 물을 들이고(···) 또 독 성분이 들어있는 지의류는 동물을 괴롭힌다.” 실제로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늑대를 죽일 때 지의류의 한 종인 레타리아(Letharia)에서 추출한 독을 유리가루에 섞은 후 먹이에 발라서 먹였다. 갤리포니아의 아코마위(Achomawi) 인디언은 지의류에서 추출한 독으로 독화살을 만들었다. 지의류는 약재로도 쓰인다. 볼리비아에서는 우스니아(Usnea)라는 지의류가 염증과 곪은 상처를 치료하는 고약의 성분으로 쓰인다. 1945년 미국 예일대학교의 버트홀더(Paul R. Burkholder) 박사는 지의류에서 우스닉산(usnic acid)을 추출했는데 이것은 염증과 피부병을 고치는 항생물질로 사용되었다. 이후 과학자들은 지의류에서 다양한 물질을 추출해 제초제와의약품 원료로 사용하였다. 어떤 지의류는 여러 목적으로 쓰인다. 잎이 푸르스름한 허파지의[Lobaria pulmonaria]는 폐질환, 특히 폐결핵을 고치는 데 사용되는 한편 시베리아에서는 승려들이 맥주의 쓴맛을 내는 데 쓴다. 전통적으로 지의류는 기근이 들었을 때 유용한 구황식품이다. 탄수화물이 풍부한 만나지의[Aspicilia esculenta]는 중동 지방의 협곡이나 바위틈에서 다량으로 수집이 가능하다. 가끔은 사막 바람에 공중에서 날리다가 부서져 비처럼 땅 위에 떨어지는데 그것이 몇 센티미터씩 쌓이기도 한다. 쿠르드족은 이것을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manna)’라고 여겼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갈아서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맛을 신선한 기름 맛과 같았다고 한다.
*환경오염의 지표식물 20세기 초엽에 식물생태학자들은 특정한 지역에서 지의류가 한꺼번에 죽는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였다. 그 원인을 조사하던 연구자들은 이내 대기오염을 원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는 지의류의 성장 특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식물들과 달리 지의류는 토양에서 양분을 섭취하지 않는다. 그 대신 비, 눈, 공기 등에 들어있는 영양분과 무기물질 등을 흡수해 성장하는데 만약 지의류가 집단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었다면 주원인은 필경 공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의류는 먼저 도시 인근에서 죽기 시작하였다. 1860년에 지의학자 나일랜더(William Nylander)는 파리에 있는 룩셈부르크 정원에서 지의류 32종을 채집하였다. 그런데 1896년에는 한 종도 살아남지 않았다. 나일랜더는 “대부분의 지의류는 도시에서 살기를 단념한 것 같다. 그리고 아직 그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상태가 매우 불량해 대부분 생존이 어려울 듯하다.”라고 기술하였다. 1912년에서 1921년 사이에 영국 런던 근교에서는 지의류 129종이 관찰되었는데 1973년 재조사에서는 오직 69종만이 남아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사했던 프랑스에서는 50년 후에 2종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런 사실은 대부분 유럽 대도시들에서 관찰되었다. 대기오염이 증가하면 지의류는 다른 어떤 생물종들보다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다. 지의류는 흡수한 빗물과 먼지들에 포함된 중금속과 오염물질을 체내에 축적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어떤 지방에서는 1942년에 한 화학공장이 세워지면서 지의류가 대부분 소멸되었는데 1966년에 공장이 문을 닫은 후 지의류가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도시나 공장에서 배출되는 대기오염물질의 농도와 지의류의 생존율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1971년에 약 1만 5000명의 영국 초·중등학생들의 도시 주변의 지의류 조사에 참가하였다. 이 연구는 영국 도시들의 대기오염도 조사에 지의류를 지표종으로 사용하는 효시가 되었다. 대기오염 정도를 어떤 한 가지 대기오염물질의 농도만을 측정해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수십, 수백 종류에 이르는 오염물질을 일일이 분석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법이 바로 지표종에 대한 조사인데, 여기에서 지표종은 대기오염에 예민한 생물종을 말한다. 그런 생물종의 존재 여부를 조사하면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비교적 쉽게 대기오염도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의류는 바로 대기오염 지표종으로 안성맞춤이다. 지의류는 특히 모든 대기오염물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아황산가스(SO₂) 농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30년 동안 이런 지의류 조사를 여러 차례 실시했는데, 나는 1975년 조사에서 서울의 가장 중심부에 해당되는 종로의 종각을 중심점으로 직경 10길로미터의 동심원의 내부가 어떠한 지의류도 찾아볼 수 없는 소위 지의류사막(地衣沙漠)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1991년 조사에서는 직경 15킬로미터 동심원 내부가 모두 지의사막에 속하여 심지어 북한산의 인수동, 도봉산의 만장봉 큰 바위들이 지의류의 사체로 하얗게 변한 것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아황산가스 오염은 대부분 황 성분이 많이 포함된 무연탄과 휘발유, 경유, 벙커C유 등 난방연료와 자동차연료 사용에서 기인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나의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1980년대 중엽부터는 무연탄 사용이 대폭 줄어들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석유류 제품의 유황 함량도 크게 낮아졌다. 그 결과 대도시의 아황산가스 농도도 급속도로 낮아졌는데 서울, 부산, 대구 등 6대 도시의 아황산가스 평균 농도는 2000년에 이르자 1990년의 농도에 비해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렇게 아황산가스 오염도가 낮아지면서 최근 서울과 대도시 주변에서 지의류가 다시 소생하고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요즈음에는 관악산, 청계산, 북한산 등은 물론 시내 공원과 남산에서도 많은 지의류들이 살고 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지의류 지의류가 비단 먼지나 중금속과 같은 일상적인 대기오염물질만을 축적하는 것은 아니다. 지의류는 공기 중에 떠도는 방사성물질들에도 민감하게 반을하는데 특히 스트론튬(strontium) 90과 세슘(cesium) 137을 체내에 축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물질들은 원자폭탄 푹발시나 원자력 발전소 사고 시 대량으로 공중으로 발산된다. 클라도니아속[Cladonia]의 큰사슴이끼와 순록이끼(이름은 이끼지만 사실은 지의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의류이다. 한 민족이 이 지의류에 의존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지의류들은 북반구 툰드라지대에 널리 분포하는데 북아메리카산 큰사슴과 유라시아에 분포하는 그들의 사촌쯤 되는 반(半)가축인 순록이 그것에 의존해 번성한다. 큰사슴이끼와 순록이끼는 사람들도 먹을 순 있지만 맛이 쓰고 영양가도 없어서 실제로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큰사슴과 순록은 매일 5~6킬로그램의 지의류를 먹어치우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동물들은 여름에는 지의류 대신 사초과(莎草科) 풀을 뜯어먹지만 겨울에는 거의 전적으로 지의류에 의지하는 듯하다. 러시아의 한 과학자는 지의류가 겨울철 순록 먹이의 95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순록이나 큰사슴은 넓고 끝이 뾰족한 발굽으로 눈 속에서 자라는 지의류를 쉬게 낼 수 있다. 북아메리카의 큰사슴 100만 마리와 유라시아의 순록 50만~20만 마리는 북극권 사람들의 사냥감이다. 큰사슴은 이누이트족(Inuit)의 중요한 먹이가 되며, 또 스웨덴 북부에 거주하는 라프족(Lapp)의 일족인 사미족(Saami) 사람들은 1인당 연평균 8~10마리의 순록을 잡아먹는다. 시베리아에 사는 200만 마리의 순록 역시 전통적인 순록 몰이꾼들의 생존을 위한 경제 기반이 되고 있다. 미소간의 냉전으로 군비경쟁이 극심하였던 1950년대와 1960년에는 원자폭탄 폭발 실험이 세계 도처에서 행해졌다. 그 결과 공기 중에 다량의 방사성 낙진들이 방출되어 스트론튬 90과 세슘 137의 농도도 높아졌다. 1960년대 중반에 시행한 조사에서 순록의 고기를 먹고 사는 라프족들이 그들보다 남쪽에 사는 핀란드인들에 비해서 무려 30배나 더 많은 스트론튬 90과 세슘 137을 섭취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캐나다에서는 이누이트족 여성들 모유에 이 물질이 심각하게 함유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 핵실험이 지하에서 신행되면서 대기 중의 방사성물질 농도는 점차 낮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의류는 1986년에 다시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86년 4월 28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가 폭발하면서 엄청난 양의 방사성물질들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방출된 방사성물질의 주 오염원이 세슘 137이었다. 원자로가 폭발할 때 남서풍이 불어 방사성물질들은 스칸디나비아의 중 · 북부지역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 지역에 서식하던 지의류들이 방사성물질을 축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핀라드와 유럽연합(EU)은 이내 순록이 방사성 물질에 오염될 것을 크게 우려하였는데 사고 발생 후 8개월 만에 실시한 현지조사에서 그런 우려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노르웨이에서 시장에 팔 수 있는 순록고기는 법적으로 1킬로그램당 방사정물질이 6000베크렐(Bq, 1베크렐은 방사능 측정 단위로 1초에 한 개의 핵이 붕괴되는 것을 말한다.) 이하여야 한다. 스웨덴에서는 그 한계가 1500베크렐이다. 당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르웨이와 스웨덴 일부 지역에서 순록고기의 방사성물질 농도가 무려 7만 베크렐이었고 심각한 지역에서는 13만 7000베크렐까지 나타나기도 하였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정부는 방사능에 오염된 순록고기를 사람들이 먹지 못하도록 순록을 강제로 죽여 버렸고, 그 고기에 물을 들여서 밍크와 여우를 사육하는 농장에 팔아버렸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의외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순록 사육이 금지됨으로 해서 졸지에 생계가 막막해진 라프족의 생활이 극도로 황폐되어 라프족 공동체 전체가 붕괴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체르노빌 사태가 사고 지점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역의 생활기반까지 송두리째 붕괴시켰고 그 원인은 한 부분을 지의류가 차지하였다는 사실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